2024년 5월 8일(수)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추락의 해부', 진실이라는 메스로 해부한 관계…매혹적인 모호함

김지혜 기자 작성 2024.02.05 11:25 조회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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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프랑스 시골 마을의 한 산장, 이층 계단에서 테니스 공 하나가 떨어진다. 카메라는 무심히 떨어지는 공을 따라간다. 이층에는 산드라(산드라 휠러)의 남편 사무엘(사무엘 타티스)과 안내견인 스눕(메시)이 있다. 이 공은 스눕이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린 것일까. 남편이 일부러 던진 것일까. 잔잔한 호숫가에 파장을 일으키는 돌멩이처럼 의문을 던지며 영화는 시작된다.

일층에서는 집의 안주인이자 유명 작가인 산드라가 자신의 제자와 인터뷰를 나누고 있다. 이층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공도 두 사람의 인터뷰를 멈추진 못한다. 공적인 이유로 이뤄진 인터뷰지만 사적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대화가 이어진다. 위층에서 다락을 수리하고 있던 사무엘은 음악 볼륨을 한껏 올린다.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를 소음 공격에 인터뷰는 다음을 기약하며 중단된다.

그날 오후, 반려견과 함께 외출 후 돌아온 산드라의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이 눈밭에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이층에 있던 산드라는 아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내려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다. 추락에 의한 사망이지만 자살인지, 살인인지 부검으로는 밝히지 못했다.

남편의 사망시각 유일하게 집에 머물렀던 산드라는 의문사의 유력한 용의자가 돼 법정에 선다. 배심원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 목격자는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과 안내견 스눕뿐이다.

추락

◆ 의문의 추락사로 드러난 관계의 추락... 스타 작가의 '부부의 세계'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사고인지 자살인지 살인일지 모를 한 남자의 추락사를 통해 '가족의 해부' 또는 '관계의 추락'을 보여준다.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긴 쉽지 않다. 거대한 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망자와 용의자, 목격자가 모두 한 가족이라는 점이다. 남편이 죽었으며, 아내가 용의자로 지목됐고, 아들과 반려견이 유일한 목격자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로 여겨졌던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도, 곤경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이 영화가 초반부터 유발하는 가장 큰 호기심이자 긴장감이다.

의문사가 등장하는 영화는 '누구'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독이 힘을 실는 것은 '누구'도 '어떻게'도 아닌 '왜'이다. 사고사나 자살로 보였던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사무엘이 살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수면 아래에 있던 부부 관계의 실체가 한 꺼풀씩 벗겨진다.

잘 나가는 작가 아내와 교수직을 관두고 작가를 준비하던 남편, 부부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산드라의 외도와 사무엘의 재정적 위기, 가정 내 역할의 불균형 등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남편의 부주의로 아들이 시각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부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는 것이 재판을 통해 밝혀진다.

추락

'추락의 해부'라는 제목은 탁월하다. 의학용어로 자주 쓰이는 말인 '해부'(解剖)는 생물체의 일부나 전부를 갈라 헤쳐 그 내부 구조와 각 부분 사이의 관련 및 병인(病因), 사인(死因) 따위를 조사하는 일을 일컫는다. 이 영화에서 '해부'는 중첩적이고 중의적으로 쓰인다. 추락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추락의 인과관계를 살펴야 하고, 추락의 해부는 곧 가족 구성원 간 관계의 해부로 이어진다.

용의자로 지목된 산드라는 냉철한 이성의 장소인 법정에서 증거와 증언에 기반해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인다. 산드라가 가진 건 힘없는 정황뿐이다.

검사는 산드라의 살인을 확신하며 그녀가 쓴 소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산드라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스타가 된 작가다. 용의자가 돼 법정에 선 산드라는 자신이 쓴 소설이 픽션이 아니라 개인의 내밀한 고백으로 오해받는 상황에 처한다. 검사는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의 성격을 언급하며 산드라가 남편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었고, 이는 살인의 강력한 동기라고 주장한다.

산드라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가장 사적인 부부의 시간과 추억을 꺼내 보이고, 사랑에서 환멸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던 균열의 과정에 대해 말한다. 단, 그녀가 작가라는 사실은 배심원도, 관객도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허들이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아내이자 엄마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 사회적 편견, 미디어의 고정관념도 보여주며 영화는 담론을 확장하기도 한다.

쥐스틴 트리에는 탁월한 각본과 연출로 법정물과 가족 드라마를 혼합했다. 진실을 공란으로 둔 채 진행되는 영화이기에 법정물로서의 밀도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가족 드라마의 흥미로운 서사가 그 빈틈을 완벽히 메운다. 미묘한 진술과 모호한 진실을 두고 감독은 영화 내내 줄타기를 한다. 극의 온도와 인물의 심리에 따라 하이(High), 로(Low) 앵글로 잡고, 인물의 머리 뒤에서 잡는 사선 구도의 카메라 앵글은 인물이 처한 현실과 내면의 전투를 효과적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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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조각되기도, 만들어지기도 한다

'추락의 해부'는 이야기가 진전되며 부부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 나아가 한 여성에 관한 내밀한 고백으로 이어지며 한 아이의 딜레마적인 상황까지 더해진다. 3D 렌더링까지 등장하며 사무엘의 사인에 관한 여러 가설이 제시되지만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건 관계의 이면과 인물의 이면이 본격적으로 조명될 때다. 사건이 발생한 산드라의 별장과 재판이 벌어지는 재판장만을 오가는 단출한 공간 이동에도 관객이 끝까지 이야기와 인물을 따라가게 하는 높은 몰입력을 자랑한다.

감독은 '추락의 해부'보다는 '관계의 해부'에 집중하며 이 가족 사이에 일어난 균열을 다양한 방식과 관점으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의 플래시백은 추락의 해부가 아닌 관계의 추락을 보여줄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재판 과정에서 산드라의 기억으로 재현된 플래시백 화면이 등장하고, 사무엘이 생전 남긴 녹음 파일은 아내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등장한다. 사람의 편집된 기억과 현장을 녹음한 파일은 배치된 양상을 띠며 배심원과 관객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는 후반부, 관계의 목격자라 할 수 있는 다니엘에게 포커스를 맞추며 딜레마의 층위를 극대화한다. 다니엘은 엄밀히 말해 사건의 목격자가 아닌 시신의 최초 발견자다. 그는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추락에 관한 증언은 진실이나 사실에 근접할 수 있는 근거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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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이른 시간, 법정물로서 가진 이 영화의 한계와 마주한다. 어차피 이 사건의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드러난 사실과 드러나지 않은 사실, 제한된 정보들을 조합해 진실이라 믿는 결론을 도출해내야 한다. 영화 안의 배심원도, 사건의 핵심 증인인 다니엘도 같은 조건이다.

산드라가 남편을 죽였을 수도 있다. 남편이 자살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황당하게도 그저 발을 헛디뎌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재판이라는 것은 유무죄를 밝혀야 하는 과정이며, 배심원은 주어진 증거와 증언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적어도 부부의 관계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인 다니엘의 증언은 재판 말미 배심원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아쇠가 된다.

다니엘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에 관해 말해야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선택하는 고뇌의 시간을 거쳐 다니엘은 "어떻게 그랬는지 판단할 증거가 부족하면 정황을 봐야 해요"라고 말한다. 그의 진술은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재판 과정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다니엘의 선택은 갈등과 고통과 비애의 결과물이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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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적인 모호함... 스토리텔링의 매력

영화는 추락사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전처럼 제시할 수도 있을 사건 전후의 과정을 끝내 생략한다. 법정 스릴러로서의 완결성은 포기한 셈이다. 의도한 선택이다. 감독은 관계의 추락을 그리기 위해 추락사라는 '떡밥'을 던진 것이다. 추락의 해부로서는 미완성지만, 관계의 해부 측면에서는 완성이다.

감독이 제시한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이 질문에 다다랐을 때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산드라의 안도감과 다니엘의 씁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더욱이 반려견 스눕의 존재감과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마지막 시퀀스가 의미하는 바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결말에 이르면 '범인은 누구일까?'라는 범죄물, 법정극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질문은 무의미해진다. 이 영화가 다양한 층위로 다뤄낸 관계의 추락은 매혹적인 모호함이다.

쥐스틴

'추락의 해부'는 지난해 5월 열린 제76회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전작 '시빌'(2019)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입성했던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경쟁 부문 진출 2회 만에 황금종려상 수상을 했으며, 여성 감독 중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역대 세 번째 인물로 기록됐다.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의 영화를 넘어 외국어 영화로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쥐스틴 트리에는 올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동시에 후보를 오른 유일한 여성 감독이 됐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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