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화)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박보영 캐릭터가 민폐라고요?"…'콘유' 엄태화 감독의 변(辨)

김지혜 기자 작성 2023.08.29 18:14 수정 2023.08.29 18:25 조회 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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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화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끝나고 나면 맴도는 한 마디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는 명화(박보영)의 대사다.

영탁(이병헌)은 살아남은 황궁의 주민을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정작 선택받아 살아남은 명화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의 눈에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영탁(이병헌)에 공감하고, 명화(박보영)에 비공감했다. 전형적인 관점에서 선과 악은 그 반대다. 그러나 상황이 보편적이지 않다. 무조건적인 이타가 이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악다구니를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엄태화 감독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언급했다. 이 말을 통해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명화의 대사처럼 이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거든요.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조차도 평범한 것이에요. 누구나 '내가 저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콘유

Q. 원작 웹툰 '유쾌한 왕따'의 어떤 점 때문에 영화화를 결심했나?

A. 개인적으로 디스토피아 장르를 좋아한다. 웹툰을 보면서 재밌었던 건 아파트 부분이었다. 아파트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고,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만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은 없을 것 같았다. 아파트를 조금 더 파고들다가, 박해천 교수의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만났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아파트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게 됐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성이 보였다. 아파트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사람들의 변화 과정을 메인으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박해천 교수의 저서에서 영화 제목을 따오고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집약한 다큐멘터리로 오프닝을 열면서 영화의 방향성이 정립됐다고 볼 수 있다. KBS '모던 코리아' 팀에게 오프닝을 맡긴 건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었나?

A. 그렇다. 아파트라는 키워드를 가져오고 이 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세계관을 만들어야 할까 고민을 했다.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아파트 이야기를 1분 안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내가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정들, 내가 살았고 부모님이 살았던 아파트라는 공간을 통해 한국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 '모던 코리아'팀의 다큐멘터리를 굉장히 좋아한다. 마음에 쏙 드는 오프닝이다.

콘유

Q. '아파트'라는 키워드에 대해 '내가 살았던 곳'이자 '부모님이 살았던 곳'이라고 했는데 아파트라는 공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A. 복도식 아파트에도 살아봤고, 계단식 아파트에도 살아봤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열려 있었던 공간이었다. 늘 문을 열어놓고, 복도에서 놀다가 이 집 저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혜원'(박지후)이 황궁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옆집 아저씨 알지?"라는 질문을 받는데,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요즘에는 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질문을 보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다.

Q. 보통의 재난물은 재난이 주는 공포에 집중하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사람이 재난이 되는 변화에 집중한다. 사람이 유발하는 스펙터클과 긴장감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연출을 했나?

A. 일단 이 시나리오를 쓸 때 재난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재난은 이미 벌어진 배경이고, 결국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재미를 느낀 부분이 그거다 보니 사람들 이야기로 채우려고 했다. 원작 웹툰이 집단과 개인의 이야기라면 영화는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먹고사니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내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선택들이 어쩌면 되게 평범한데 이기적일 수 있는 상황이 된다. 관객들이 각자 이입하는 인물이 다를 것이고 서로 논쟁을 벌였으면 했다.

Q. '세상이 무너지고, 황궁 아파트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설정은 매우 판타지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공간이 주는 리얼리즘 덕분인지 굉장한 사실성을 띤다.

A. 조금이라도 판타지처럼 보이면 현실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같다'는 느낌이 중요했다. 배우의 연기톤은 물론이고 미술, 의상, 분장 등 영화의 여러 요소를 실제처럼 보이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아파트 세트와 CG에 큰 공을 들였다.

이 아파트는 1986년도에 지어진 'ㄱ'자 아파트다. 한쪽은 12층, 한쪽은 15층까지 있다. 한쪽은 32평, 한쪽은 24평이다. '영탁'(이병헌 분)과 '민성'(박서준 분)은 같은 라인인데 내부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아파트 공간마다 캐릭터 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세트를 만들 때도 진짜 아파트에서 활용하는 소품을 막 끌어왔다. 화단에 있는 난간, 철문도 다 긁어왔다. 나무도 뽑아왔다.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조명을 쓸 때도 최대한 다양한 빛의 형태를 쓰려고 했다. 촛불이나 배터리 전기 등을 활용했다.

콘유

Q. 그러나 영화의 설정은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세상 모든 아파트가 다 무너졌는데 황궁아파트만 살아남는 설정이 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A. 황궁아파트는 큰 산에 붙어있는 아파트다. 반대쪽에서 지진파가 몰려왔는데 산에 부딪히면서 그 아파트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쓸려간 설정을 부여했다. 그 맥락이 그림 하나로 설득이 돼야 해서 CG를 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아파트는 3층까지만 실제로 짓고 나머지는 CG로 처리했다.

Q. 순제작비 180억 원이 들어간 대작이다. 텐트폴 시장을 겨냥한 작품인데 비극이다. 현재 한국 영화에서는 잘하지 않는 선택이다. 부담이 컸을 텐데 실패하지 않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신경 쓴 점은?

A. 시나리오를 작업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재미였다. 관객이 어떤 특정 인물에 이입해서 보고 있고, 그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데 그것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재미라고 생각했다. 그 부분에 가장 포커싱을 뒀다. 그게 재밌어야 관객들이 제가 넣은 디테일이나 주제를 생각해 줄 것 같았다. 투자를 받기 위해 '이런 저런 공식으로 써야지' 보다는 제가 재밌을 것 같은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걸 투자사나 제작사, 관객들이 알아봐 주신 것 같다.

엄태화

Q. 영화 연출적인 부분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노을 지는 하늘인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커피 자판기 속 그림이라던가, 초원의 평화로운 집이 그림 속 장면인 신 등이 그렇다.

A. 초반부는 매우 추워야 해서 블루톤으로 갔고, 중반부는 물기가 빠져 보이는 퍼석퍼석한 회색을 썼다. 후반부로 갈수록 아수라장이 되는데 그때는 레드톤을 썼고, 모든 것이 끝난 뒤에는 날이 풀린 것 같은 옐로우 톤을 썼다.

​중간중간 아직 뒤에 오지 않은 무언가를 끌어오고 싶었다. 그래서 석양을 멋있게 보여주는 식의 연출을 했다. 그러면 관객들이 '다른 국면이 벌어지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뒤이은 장면에서 바로 깨버린다. 일종의 연출적인 재미를 주려고 했다.

Q. 최고의 명장면이라면 영탁이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이다. 플래쉬백 이후 돌아온 화면에서 주민들의 춤사위를 악마의 몸짓처럼 연출한 장면은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인가?

A. 두 번의 롱테이크가 나온다. 영탁에게 가까이 갔다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그리고 다시 멀어지는 신이다. 카메라 두 대를 썼다. 콘티 상에선 다른 배우들의 리액션을 담기로 했다. B캠을 세팅해 놓고 찍었는데, 배우들의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쫙 밀고 가는데 다른 컷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 뒤로 빠져나오는 컷은 테스트 컷이었다. 배우들도 춤을 설렁설렁 추고, 뒤로 빠지다 뭐에 부딪혔는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좋았다. 마치 지진이랑 연결되는 것 같았다. 테스트 장면이 너무 좋아서 더 안 찍었다.

벽에 비친 사람들의 그림자는 과거에 내가 본 어떤 이미지에서 착안했다. 예전에 성수동 어떤 아파트를 갔는데 주차장에 가로등이 있었다. 매우 밝은 빛이었다. 'ㄱ'자 아파트였는데, 그 그림자가 엄청 아름답기도 하면서 그로데스크 했다. 이 그림자가 춤추는 사람들과 접목되면 더 그로데스크할 것 같았다.

콘유

Q. 초반 등장하는 반상회 신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여러 인물을 좁은 공간에 모아놓고 찍은 장면이라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인상 군상을 잘 집약한 연출이다. 준비 과정이 궁금하다.

A. 연기 디렉션을 할 때 배우 세 명만 모여도 "어떻게 해야 돼요?"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특히 대사가 조금이라도 바뀔 경우가 그렇다. 반상회 신에는 총 36명의 배우가 나온다. 그들이 질문을 퍼부으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사전에 차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우들에게 미리 캐릭터의 직업이나 가족관계, 상황 등의 설정을 부여했다. 정비소, 부동산 사장 등등 캐릭터를 잡아서 전화를 다 돌렸다. 리허설 이후에는 이런저런 피드백을 다시 줬다. 다음날 촬영을 위해 모였는데, 첫 테이크부터 모든 배우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우들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면서 재밌는 앙상블이 만들어졌다. 배우들도 연극 무대처럼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고 하시더라. 영화 내내 그 역할을 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수라장이 될 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분은 '영탁을 지지할 것'이라고 해줬고, 어떤 분은 '배신감이 크다'고 했다. 거기에 맞게 연기를 하라고 했다. 편집하면서 이 영화를 수십 번도 넘게 봤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배우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뛰어난 연기를 해주셨다. 정말 감사드린다.

Q.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음악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종전에 이 노래의 이미지가 희망이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비극적 무드가 풍긴다.

A. 시나리오 쓸 때부터 생각한 노래다. 재난이 안 벌어졌을 때 오후 1시쯤 집에 누워있으면 윗집에서 피아노 소리로 들릴 것 같은 노래랄까. 이걸 한 번만 쓰기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오프닝에 시대의 흐름을 아파트의 변화로 보여준 다음 '우리집'이 나오기 전에 그 노래가 나오고 한 번 더 재난이 쓸고 지나가는 장면에 붙으면 아이러니를 잘 표현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김해원 음악 감독님이 주셨다.

콘유

Q.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명화(박보영)다. 선한 인물로 보이지만 위선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상황상 가장 민폐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A. 예상했다. 다만 위선적으로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런 상황에서 옳은 말만 하는 게 민폐로만 보인다면 캐릭터가 평면적이어서 그렇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배우와 연기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명화 혼자 "같이 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하게 한다. 사실 거기서 이 인물은 규정이 된다. 처음엔 순응하지만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서다. 남편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변한다.

그렇게 시작한 게 개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쪽으로 간다. 집착하게 되고 논선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 광기로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저 여기 살아도 돼요?"라고 묻는다. 거기서 "살았으니까 사는 거죠"라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답을 상대로부터 듣고 정신이 깨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황궁아파트 사람을 변호하는 말을 한다. 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려고 배우와 함께 노력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인물을 대해 관객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했다.

Q. 영화의 엔딩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극이라 볼 수 없는 이 마지막 선택에 대해 제작 단계에서 '바꾸자'는 의견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A. 너무 감사하게도 저를 믿어주셨다. 어쩌면 변승민 대표(제작사 클라이맥스 스튜디오)가 이미 투자사를 설득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납득이 안 돼서 결말을 바꾼 적은 있지만 외부 의견 때문에 바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십 개의 엔딩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간 건 질문을 남기고 싶었다. 명화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이 영화가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졌으면 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라는 질문에 이 영화의 무드 안에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은 '주먹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배고프면 상대도 배고프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무심겨레 주지 않나. 어렵지만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 엔딩을 선택한 거다.

Q. 전작 '가려진 시간'을 통해서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 혹은 감정을 꼽는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A. 연민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조차도 평범한 것이다. 누구나 '내가 저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것 외에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봐도 재밌는 영화이길 바란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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