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비주류의 돌풍…2023 아카데미 시상식, 감동의 순간들

김지혜 기자 작성 2023.03.13 17:44 수정 2023.03.13 23:50 조회 2,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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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핵심 키워드는 '비주류'(非主流)로 집약할 수 있다.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작품상을, 중국계 감독과 배우가 감독상과 배우상을 휩쓸며 올해 시상식의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화이트 오스카'의 오명을 벗기 위해 수년간 노력 중인 아카데미 시상식의 쇄신 노력은 올해도 계속된 셈이다.

오스카 레이스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로 점쳐졌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빅4'로 불리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비롯해 여우주연상, 남우주조연상, 여우조연상까지 석권했다. 10개 부문 11개 후보를 배출했던 이 영화는 총 7개의 트로피를 수집하며 아카데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비주류의 돌풍이 어느 해보다 거셌던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감동적 순간들을 정리해 봤다.

에에올

◆ '다니엘스', 괴짜라 불렀던 콤비…두 번째 영화로 오스카 석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연출한 다니엘 콴(35세), 다니엘 샤이너트(36)는 이름이 똑같아 '다니엘스'로 불린다. 이들은 대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며 인연을 맺은 후 사회에 나와서도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다.

'다니엘스'는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 연출로 경력을 쌓은 뒤 2016년 코미디 영화 '스위스 아미 맨'으로 데뷔했다. B급 코미디 영화로 두 감독의 재기 넘치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제31회 선댄스 영화제 미국 드라마 장르 부문 감독상, 제49회 시체스 영화제 작품상, 남우주연상 수상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 십 편의 뮤직비디오와 두 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두 감독은 B급 감성으로 무장한 코미디 영화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문라이트'(2016)를 제작·배급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며 독립영화의 명가로 떠오른 A24는 이들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스위스 아미 맨'을 배급했고, 두 번째 연출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까지 지원사격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아시아계 미국인 가족이 다중 우주를 넘나들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에 양자경, 키 호이 콴, 제임스 홍 등 출연진 대부분이 아시아계 배우들로 구성돼 있어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의 제작비는 2500만 달러. 할리우드 상업 영화 기준으로는 저예산에 속하지만 데뷔작 '스위스 아미 맨'(약 300만 달러)의 10배 가까운 예산을 손에 쥔 '다니엘스'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자신들만의 상상력과 색깔로 풀어내며 뛰어난 작품성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시각적 구현의 과감함은 물론이고 각본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까지 뛰어난 콤비 감독이다.

작품마다 자신들의 인장을 확실히 새기며 개성파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두 사람은 오스카 트로피를 받은 뒤 "우리 영화가 창의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배우들이 창의성과 천재성을 발휘해 줬기 때문이다. 천재성은 한 개인의 역량이 아닌, 공동의 활동을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고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또한 "여러분들이 모든 기준에 억지로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희가 이러한 상을 받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사람에겐 위대함이 있다.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간에 다 각각의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가능성의 무한함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양자경

◆ 유리 천장 뚫은 양자경&키 호이 콴...전성기는 지금부터

연기상 부문에서도 '황색 돌풍'이 두드러졌다. 양자경의 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여우주연상 수상 여부는 올 아카데미 시상식 최대의 관심사였다.

유색 인종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2002년 '몬스터 볼'의 할리 베리가 유일했던 데다 양자경은 아시아계였다. 흑인 배우들의 연기상 노미네이트는 이제 흔한 일이 됐지만 아시아계 배우의 후보 지명은 여전히 그 자체로 뉴스다. 2년 전 윤여정이 '미나리'로 아시아계 배우로는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여우주연상 수상은 누구도 닿지 못한 영역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양자경은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기세를 올렸고,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은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팽팽하게 맞섰다.

양자경은 지난 7일 자신의 SNS에 '지난 20년 동안 백인이 아닌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했다가 아카데미 규정(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나 작품 언급을 금지하는 조항) 위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미국 평단과 언론은 양자경의 수상을 높게 점쳤지만 본인은 아카데미의 유리 천장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자경은 중화권에서는 수십 년간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여전히 도전자의 위치였다. '007 네버다이'(1997)의 본드걸로 캐스팅 돼 할리우드에 입성했고, 이안 감독의 역작 '와호장룡'(2000)에서도 활약했지만 아시아계 배우로서 늘 기회의 한계에 부딪혔다. 60대의 나이에 접어들면서는 액션 배우로서의 입지도 좁아져 역할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누리지 못했다.

양자경

그러나 올해 시상식에서 이변은 없었다. 양자경은 자신에 앞서 역사를 쓴 '오스카 선배' 할리 베리의 호명을 받은 후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자신이 받은 상의 의미를 떠올린 양자경은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이것이 희망의 불꽃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꿈을 꾸면 꿈은 실현된다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또한 '전성기가 지났다'라는 말을 절대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라는 울림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아카데미가 역사를 만든 것"이라며 자신을 선택한 아카데미와 아카데미 위원들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키 호이 콴의 서사도 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키 호이 콴은 이날 시상식에서 자신이 베트남계 이민자임을 강조하며 "보트 피플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뤘다"고 외쳤다. 그는 "이런 스토리는 영화에만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바로 아메리칸드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에 한 번 있을 만한 이런 영광을 누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전했다.

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픽'으로 12살의 나이에 '인디아나 존스:마궁의 사원'으로 데뷔했고, '구니스'로 인기를 얻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스턴트 코디네이터를 하면서 영화계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배우로서 정체성을 잃은 그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50대의 나이에 찾아온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최고의 연기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더 웨일

◆ 브렌든 프레이저의 영화 같은 삶…성추행·파산 위기 딛고 재기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브렌든 프레이저의 인생 스토리는 그 자체로도 영화였다. 1990년대 '미이라' 시리즈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레이저는 2000년대 이후 잊힌 배우가 됐다. 그 내막에는 영화계 고위 인사의 성추행, 이혼과 위자료 분쟁, 촬영장에서의 부상 등의 연이은 악재가 있었다.

그를 깊은 수렁에서 꺼내준 영화가 '더 웨일'이었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후 고도 비만이 된 '찰리'를 연기했다. 272kg의 거구를 구현하기 위해 매 번 4~5시간이 넘는 특수 분장을 감행해야 했다. 그러나 거대한 분장보다 놀라운 것은 캐릭터 내면의 상처와 고통을 구현해 낸 연기력이었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멀티버스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라면서 자신의 굴곡진 인생사를 되돌아봤다.

더 웨일

이어 "저에게 창의적인 생명줄을 던져주고 '더 웨일'이라는 좋은 배에 태워준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더불어, 각본가인 사무엘 D. 헌터는 저희의 등대였습니다"라고 감독과 각본가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또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홍 차우를 지목하며 "당신이 가진 재능의 깊이 덕분에 이 고래가 심해에서도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프레이저는 "30년 전에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당시에는 감사하지 못 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저를) 인정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함께한 배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기회를 준 업계와 연기 호흡을 맞춘 배우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함을 드러냈다.

영화를 연출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역량도 칭찬할 만하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1980년대 섹스 심벌 미키 루크를 '더 레슬러'(2009)라는 영화로 부활시킨 이력이 있다. 루크 역시 성형 수술 실패와 체중 급증, 알코올 중독으로 어두운 시절을 보내며 사실상 배우 이력이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노로프스키의 선택을 받은 루크는 자신의 굴곡진 삶을 은유한 듯한 '더 레슬러'에서 생애 최고의 연기를 펼쳤고 그해 유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미키 루크에 이어 브렌든 프레이저의 재기까지 이뤄낸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배우를 보는 눈은 물론이고 숨은 역량까지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RRR

◆ '헤어질 결심' 만큼 아쉬웠던 'RRR'…주제가상 품었다

올해 아카데미의 큰 실수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헤어질 결심'의 국제장편상 최종 후보 누락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인도 영화 'RRR-라이즈 로어 리볼트'의 고배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헤어질 결심'의 경우 아카데미 측의 실수였다면 'RRR'은 인도 영화계의 뼈아픈 실수였다.

국제장편상은 출품을 희망하는 나라에서 선정한 한 편의 영화를 아카데미 측에 출품한다. 인도는 자국 출품작으로 'RRR' 대신 '안녕, 시네마 천국'을 선택해 본선에 오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넷플릭스가 전세계 180개국에 배급해 해외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기에 경쟁력이 충분한 영화였다. 특히 'RRR'은 골든글로브 시상식, 크리틱스 초이스에서도 외국어 영화상을 받아 기세도 좋았다.

'RRR'은 인도 영화계의 판단 미스로 국제장편상 부문 후보에는 못 올랐지만 주제가상으로 아쉬움을 만회했다. 주제가 '나투 나투'(Naatu Naatu)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리한나 'Lift Me Up', 영화 '탑건: 매버릭'의 레이디 가가 'Hold My Hand' 등의 쟁쟁한 주제가를 꺾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무대에 오른 작곡가 M.M.키라바니와 작사가 찬드라보스는 노래로 수상 소감을 밝혀 이목을 끌었다. '나투 나투'를 작곡한 키라바니는 "'나투 나투'의 수상을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며 "전 세계, 특히 서방은 인도 음악과 아시아 음악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나투 나투'의 수상으로 인도 영화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 이외의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날 단편 다큐멘터리상 부문에서 인도의 '아기 코끼리와 노부부'가 수상에 성공하며 인도 영화계는 올해 두 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가게 됐다.

ebada@sbs.co.kr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영화 포스터 및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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