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파친코' 정인지, 쌀밥 한 그릇에 담아낸 모성…눈물이 흐른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4.13 17:12 수정 2022.04.14 09:36 조회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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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1915년 일제 강점기 조선, 한 여인은 점쟁이를 찾아가 어머니대에서부터 자신까지 이어진 박복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아들 셋을 낳았으나 모두 돌이 안돼 잃었다는 남모를 아픔을 고백한다. 여인의 부탁을 받고 굿판을 벌인 점쟁이는 신의 응답을 받은 듯 말한다.

"아가 생길 기다. 야는 살려 주실 기다. 꼭 살아가, 대를 잇고 손을 이을기다."(아이가 생길 것이다. 이 아이는 살려주실 것이다. 살아서 대를 잇고 자식도 낳을 것이다.)

선자(윤여정, 김민하)의 탄생과 유년시절을 그린 '파친코' 1회는 설화적 분위기가 풍긴다. 잉태와 탄생부터 순탄치 않았던 여느 영웅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여기에 조선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 벌판과 들판을 담은 영상미와 어우러지며 신비로운 분위기는 고조된다.

양진(정인지)은 대물림된 가난에 언청이(구순구개열) 남편과 결혼한 '박복한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염원은 자신과 남편의 피를 물려받을 아이 뿐이다. 그리고 비로소 건강한 딸을 낳았을 때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미소를 짓는다. 부자든, 빈자든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자식은 금은보화와 같다. 양진은 그렇게 금지옥엽을 얻었다.

파친코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 두 명의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나눠 연출한 애플TV+ 시리즈 '파친코'는 전반적인 완성도는 높지만 후반부의 서사와 연출은 다소 아쉬움을 노출한다. 그러나 양진과 선자의 이별, 선자과 이삭의 오사카 입성기를 다룬 '파친코' 4회는 전체 8회를 통틀어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에피소드다. 특히 양진과 선자 모녀의 에피소드는 일제 강점기 치하 조선인의 서러움과 애환까지 녹아내며 묵직한 감동을 자아냈다.

'파친코'를 아우르는 주인공은 선자지만, 이 회차에서 만큼은 선자의 어머니 양진이 주인공이다. 금지옥엽 키운 딸이 결혼 전에 임신을 하고, 아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양진은 자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선 백이삭(노상현) 전도사에게 딸을 맡기기로 한다.

빛이 겨우 들어오는 지하 교회에서 딸의 혼례를 치른 양진은 시장의 쌀가게에 들른다. 비장한 표정으로 쌀 두 홉을 달라고 말하자, 쌀집 어르신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정인지

그도 그럴 것이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는 돈이 있어도 못 사던 것이 쌀이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 수탈 중 하나가 쌀 수탈이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쌀은 일본으로 수출돼 정작 조선인들은 맛보기 힘들었다.

양진은 곧 일본으로 떠나는 딸에게 '우리 땅 쌀 맛'을 꼭 먹이고 싶다고 애원해 어렵사리 쌀을 구해온다. 그리고 딸네 부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찬을 마련한다. 이른바 한국인의 정서인 '밥심', '밥정'을 구현한 장면이다.

엄마의 숭고한 시간이 펼쳐진다. 하얀 쌀을 정성스레 씻고, 불리고, 걸러, 솥에 안치고 밥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약 2분 여에 걸쳐 신성하게 담아냈다. 이때 푸석푸석한 보리밥을 먹는 하숙생들의 모습도 교차해 등장한다. 쌀밥을 먹는 것이 당대에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선자는 어머니로부터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봉밥을 건네받고 눈시울을 붉힌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지은 밥인지를 알기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분명 생애 최고의 진미였을 것이다. 이 순간은 수십년이 흘려 백발의 할머니가 된 선자에 의해 회상된다.

파친코

'파친코' 최고의 발견은 배우 정인지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고, 닥친 시련과 난관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조선의 여성상을 빼어난 연기로 구현해냈다. 날카롭고도 깊은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선자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그 특별함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선자와의 이별 장면에서 보여준 절제의 감정 연기는 4회의 백미였다.

1984년생인 정인지는 딸로 호흡을 맞춘 김민하와 11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월의 질곡을 담아낸 연기의 비결이 나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998년 EBS 청소년 드라마 '학교 이야기'로 데뷔해 KBS '학교4',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마리퀴리', '데미안'과 연극 '연필을 깎으며 내가 생각한 것', '언체인', '렁스' 등에 출연하며 대학로 무대에서 활약해왔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파친코'의 오디션 과정은 정인지 같은 실력파 배우를 발굴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정인지는 자신의 SNS에서 '파친코'에 대해 "모르면 넘어가는 순간들, 알수록 더 많이 보이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풍부한 상징과 의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장중한 서사에 대해 열린 눈으로 봐달라는 의미였다.

"'파친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간단치 않아요. 하지만 작은 이야기죠. 이건 누군가에겐 작아요. 늘 그렇듯 작으면 잊고 작으면 소외되죠.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간과하는 모든 작은 것에 대해 말해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커요. 어떻게 볼까요? 어떤 걸 볼까요?"

정인지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인 '파친코'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고향을 뒤로하고 타국으로 떠났다. 타지에서 오랜 시간 차별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견뎠다. 그들이 견딘 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파친코'는 4대에 걸쳐 '견뎌낸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개인의 이야기는 때로 역사의 소용돌이와 만나 거대한 강을 이룬다. '파친코'는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쌀 수탈, 강제노역, 위안부, 관동대지진 등의 사건이 서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에 주요 인물들을 중심에 두는 극적 전개를 구사하지 않고도 주제와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한다.

앞선 표현에 대해 부연하자면, '파친코'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 운동가의 이야기도 아니고,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왕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은 '개개인의 영웅'인 '우리네 엄마'의 이야기를 한다.

시대나 역사가 기억하는 영웅은 아닐지라도 개인의 역사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뿌리에 관한 이야기다. 국적과 언어, 역사가 다른 이들조차 이 서사에 공감하고 눈물 흘리는 것은 주인공을 '우리'로 대입해봐도 공감 가능한 보편성의 힘이다. 그 중심에 '엄마'가 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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