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영화 스크린 현장

[리뷰]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라는 개연성

김지혜 기자 작성 2017.09.22 13:48 조회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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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캔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현대인에게 영어는 점수를 따기 위한 테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영어는 학문의 요람으로 가는 길이 되고, 사회의 관문은 여는 문이 되며, 나라의 부름을 받기 위한 기본 요건이 되기도 한다. 영어는 인생을 좀 더 윤택하게 살기 위한 충분조건이지만, 누구에겐 인생을 바꾸는 절대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여든을 앞둔 할머니가 영어를 배운다. 노인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민 간 동생과 같이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한평생 가슴에 담아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 할머니의 스피크(Speak)는 세계를 향한 의미있는 스피치(Speech)가 된다. 그 언어가 세계 공용어라 불리는 영어인 것도 그 이유다.

시장에서 의류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는 옥분(나문희)은 동네 골목 대장을 자처하며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동사무소에 넣는다. 어느 날 동사무소에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새롭게 부임한다.

옥분은 뒤늦게 영어 삼매경에 빠져있다.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의기소침하던 찰나, 앙숙인 민재가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편한 사이였던 두 사람은 특별한 거래를 통해 선생님과 제자로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아이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는 2014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야기의 모티브는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21)이 통과되었던 2007년의 이야기를 휴먼 코미디라는 대중적인 틀 안에 녹여내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로 완성했다.

전반부는 코미디, 후반부는 드라마로 구성했다. 영화는 중반까지 이야기의 비밀을 숨긴 채, 옥분의 독특한 캐릭터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반대급부인 민재와의 갈등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이 영화는 능수능란한 코미디로 관객의 마음을 연 뒤, 본격적인 메시지를 꺼내 든다. 작법의 순서가 바꼈다면 편안하게 관람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재가 가진 무게감과 진중함 때문이다.

영화가 취한 전략은 효과적이지만 조심스러웠을 터. 소재의 희화화라던가 신파를 겨냥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이 의도된 전략이 무리수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감독과 배우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 덕분이다.

작위적인 코미디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 직한, 공감가능한 에피소드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후반부의 눈물샘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성실한 구성 때문에 신파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인물의 한(恨)과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억지 신파가 아닌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과 연결된다. 모두가 바라고 기다리던 순간이 하이라이트에 배치돼있다.

아이캔

'아이 캔 스피크'에선 나문희라는 배우가 가진 힘이 감동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영화가 설정한 '도깨비 할매'는 그녀가 시트콤에서 발휘해온 캐릭터에 기대고 있지만, 이것은 일종의 트릭이다.

영화는 관록의 연기자를 통해 관객의 귀를 열게 한다. 나문희는 상처를 품고도 굳세게 살며, 정의를 사수하는 옥분의 삶을 해학과 페이소스를 담은 연기로 표현해냈다. 

과거에도 낡은 설정마저 개연성으로 포개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노희경 작가의 무수한 드라마에서 보여준 서민의 초상, 어머니의 얼굴 등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2006년 출연한 영화 '열혈남아'에서도 조폭 영화의 진부함을 날린 모성애 연기로 호평받은 바 있다. 또 2014년 출연한 '수상한 그녀'에서는 스무 살 오두리를 연기하며 800만 흥행을 견인했다. 

'아이 캔 스피크' 역시 나문희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개연성과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단련된 연기력과 쌓인 내공만으로 편하게 연기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 할머니라는 설정에 맞게 수개월간 자녀들과 영어를 학습하며 후반부 스피치 장면을 대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이 늘어가는 연기조차도 자연스럽다.    

아이캔

나문희와 세대를 넘어선 호흡을 맞춘 이제훈 역시 성실한 연기로 영화를 빛낸다. 조선의 아나키스트를 재조명한 '박열'에 이어 다시 한번 의미의 영화를 선택했다. 그가 연기한 민재는 곧 관객의 시선이다. 이웃에 있는 누군가의 아픔, 그 아픔이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치유해야 할 고통임을 이제훈은 관객의 눈이 돼 조명한다.    

박근혜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는 전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은 여전한 숙제로 남아있다. 

때마침 당도한 '아이 캔 스피크'는 이 오랜 숙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를 보면서 쏟아낸 웃음과 눈물이 휘발되지 않고,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상업적 성공 이상의 성취를 얻은 것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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