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프'의 재미를 훼손하는 직접적인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급적 영화를 보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나홍진 감독은 어떤 의미에서든 관객을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국 스릴러의 새 지평을 연 '추격자'(2008)는 악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충격을 안겼고, '황해'(2010)는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집요함과 미완의 결말로 사유의 재미를 남겼으며, '곡성'(2017)은 공포스러운 에너지와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는 현혹의 스토리텔링으로 감탄과 경이를 선사했다.
네 번째 장편 영화 '호프'(HOPE)는 무려 10년에 걸친 집요한 사유와 공정의 결과물이다. 이 작품을 접한 관객은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나홍진과 SF의 조합도 그렇지만 공백과 여백이 두드러지는 서사라는 점에서 전작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 틈을 채우는 것은 파괴적인 액션, 질주의 미학을 선사하는 스펙터클이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쿠키 영상까지 확인하고 나면 나홍진의 영화는 한 번도 예측가능한 범위에 있었던 적이 없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영화 '곡성'의 칸영화제 일정 이후 공식적으로 10년 만에 마주한 나홍진 감독이었다. 개봉을 앞둔 그는 긴장과 초조함을 드러냈지만 작품을 향한 궁금증을 명쾌한 답변으로 해소해 주고자 했다.
'타협 없는 완벽주의자', '촬영 현장의 악마'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 늘 위트가 넘친다. 이날의 대화도 진담일지 농담일지 모르는 경계를 넘나들어 그의 대답에 의문을 품게 했다.
◆ 왜 '1980년대 비무장지대 호포항'일까?
나홍진 감독은 '호프'를 만들기 전 여러 작품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이디어 역시 예상 범주를 벗어난 것들이었다. 최종적으로 영화화에 착수한 작품이 SF라는 건 다수가 예측하지 못한 행보였다.
지금의 이야기를 구상한 건 과거 미국 여행 때 들렀던 동명의 마을 '호프'에서 받은 인상 때문이었다. 나홍진 감독에 따르면 이 마음은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텅 빈 마을이었다. 노인 한 명과 몇 시간 동안 머물다가 해 질 무렵 주민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경험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감독은 공간에서 받은 영감으로 이야기를 출발시키곤 한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인물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며, 환경이 주는 제약은 사건과 갈등을 유발하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할아버지들이 모이는 호프의 마을 회관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수첩에 정리했고 그림까지 그렸다고 한다.
나홍진 감독은 전라남도 해남에 호포항 마을 구현했다. 도로 장면은 경상남도 합천 일대다. 해남은 바다와 산을 끼고 있다. 잦은 해풍으로 안개가 끼고 걷히는 여건은 촬영에는 큰 변수로 작용했지만 영화적인 그림을 구상하는 데는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을 1980년대로 설정한 건 독재정권, 반공사상 등 사회, 정치적 기운을 가져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DMZ와 인접한 마을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레 반공, 반전 무드를 깔고 갈 수밖에 없고 마을 사람들이 외부의 침입에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는 설정을 더하는 데도 용이했을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불러일으키는 불필요한 제약을 없애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마트폰이 있는 시대로 배경을 잡으면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이건 연출자로서 작가로서,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거다. 일단 총기든 뭐든 이런 저런 (고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옛날 그 시대, 그 지역으로 옮기자라고 생각했다. 촬영할 때도 빈티지 렌즈를 썼는데 이걸 통해 당시의 의상, 미술, 분장 등을 담아낸다면 외계인 디자인과 함께 충돌시킬 때 더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다"
◆ 외지인에서 외계인으로…SF 장르에 도전한 이유
영화를 보고 나면 '호프'를 SF 장르로 규정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것 외에 SF적 요소나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 역시 이에 동의하며 "SF 장르라고 소개한 것은 이 작품의 장르를 뭐라고 분류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칸국제영화제 때 영화를 출품하려고 보니 선택해야 하는 장르 카테고리가 있더라. 우리 영화는 그 카테고리 중에 포함되는 장르가 없었다. 액션이라고 하기엔 또 뭐해서 하나만 고르라면 SF가 맞지 않을까 해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나홍진 감독은 오랜 시간 우리 사회의 범죄와 폭력과 같은 악의 발생과 극원에 탐구해 왔다. 주제의식 차원에서 '호프'는 그가 해온 이야기와 연장선상에 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던 전작과 달리 우주,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곡성'이 아주 토속적인 작은 신들의 연속이었다면 이번에는 더 큰 존재에게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우주라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 "남다른 생존력의 성기, 외계인인가요?"…나홍진의 답은
영화의 포문을 여는 두 인물 중 범석(황정민)은 경찰, 성기(조인성)는 사냥꾼이다. 성기는 동네에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며 사는 인물이고, 같은 일을 하는 무리 중에서 우두머리 행세를 한다. 극 초반에는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중반부터 온몸을 투신하는 활약을 펼친다.
액션을 공격과 방어로 구분 짓는다면 성기의 액션은 방어가 팔 할이다. 매우 격렬한 방어라 이 자체가 역동적인 액션으로 다가온다. 액션이 펼쳐지는 공간이 광활한 숲 속이라는 것과 말을 활용해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다채롭게 디자인할 수 있었다. 야생의 무드와 어우러진 조인성은 시종일관 동물적 에너지를 내뿜으며 성기를 불사조로 구현해 냈다. 숲에서 시작해 도로로 이어지는 질주신은 경이로움과 더불어 경악스러운 마음까지 안겨준다.
인터뷰 자리에선 반농담처럼 성기의 외계인설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나홍진 감독은 "우리끼리도 그런 얘기를 (농담으로) 하긴 했다(웃음). 나도 왜 그렇게 센지는 모르겠다. 성기의 엄마가 그렇게 낳아서가 아닐까?(웃음)"라고 응수했다.
이어 "사실 이 캐릭터는 모든 게 과장돼 있다. 성기를 통해 악착같이 살고자 하고,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의 특성을 극대화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지구인으로서의 어떤 '가오'(일본어로 본래 '얼굴'을 뜻하지만, 한국 속어에서는 주로 '체면·자존심' 또는 '폼·허세' 같은 의미로 사용)를 담당한다고 할까? 그런 걸 좀 과장하게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 진격의 외계인 바미기르, "밤이 길어~"에서 떠올린 이름
나홍진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연출할 때 모든 것을 설계하고 계획할 것 같은 이미지만 직관에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영화 속 캐릭터 이름이 그런 경우였다. 영화에서는 네 명의 외계인 캐릭터인 바미기르(카메론 브리튼),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 아이도보르(테일러 러셀)를 만나볼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은 "캐릭터 이름을 지을 때 많은 생각을 안 하는 편"이라면서 "느낌대로 부여하곤 한다"고 말했다.
"처음 등장하는 외계인의 이름이 바미기르인데, 그 친구는 보초를 서는 임무를 한다. 걔가 보초를 서는데 밤하늘을 보면서 '밤이 길어~'하는 거지.(웃음) 그래서 소리 나는 대로 바미기르로 지었다. 외계 행성의 황후 캐릭터인 '조르'는 어느 날 집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는 향수 광고를 보고 난 뒤 '자도르...도르...조르!가 좋겠네' 해서 지은 이름이다"
외계인의 전사(前史)는 영화에는 생략됐지만 나홍진 감독은 네 배우에게 미리 백스토리를 전달해 줬다고 했다. 연기의 몰입과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호포항의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외계인의 침략에 화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안에서도 사달의 인과는 충분히 설명돼 있다. 엔딩에 이르러서는 외계인의 언어가 자막으로 전달돼 감독이 심어놓은 함의와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예고하기도 한다.
지구인과 외계인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달라지는 구간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나홍진 감독은 "두 세력 간의 커다란 충돌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 이야기의 앞과 뒤를 조금 다르게 느끼시길 바랐다"고 말했다.
이어 "중간에 관객이 코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을 집어넣었는데, 만일 그 장면에서 웃음이 터진 관객이 있다면 이후에 '내가 왜 이걸 보고 웃었을까'라는 죄의식의 감정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엔딩 신은 '인간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걸 유도하고 싶었다. 정상적이라면 외계인의 입장에서 봐야 하지만 관객들은 인간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그걸 의도하고 만든 신"이라고 설명했다.
◆ 성경 모티브와 성경의 인용 "그분의 발언을 더 수긍하기에"
'곡성'은 누가복음 24장 37절~39절이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곡성' 만큼의 영향력은 아니겠지만 '호프'에도 성경 구절을 인용한 대사가 나온다. '조르'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히브리서 11장 1절을 인용하며 "지금 내게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절망(외계인의 관점) 속에서 피어날 희망에 대한 언급이다.
나홍진 감독은 성경을 모티브 삼아 이야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제게 실제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주목받고, 신뢰받은 여러 종교의 신들 중에 원탑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발언보다는 그분의 발언에 조금 더 수긍이 간다. 영화를 준비할 때마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고민하면서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지만 결론은 또 그쪽으로 가게 되더라"라고 가감 없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곡성'에서는 초자연적이고 토속적인 신앙에 무게를 뒀다면 '호프'에서는 성경 속 신의 시선을 중심을 뒀다. 나홍진 감독은 "제가 생각한 '믿음'과 '희망'은 부활에 대한 간절한 믿음, 확신이자 증거"라며 "후반부 쿠얼의 전함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라며 상세하게 설명(스포일러성이라 생략)했다.
그의 말대로 나홍진 영화에서 '믿음'은 중요한 키워드다. 그 반대말인 '의심'은 '곡성'의 파국을 유발한 불순한 마음이었다. 다만 '호프'는 절대자의 말을 기반으로 서사를 엮은 인과의 밀도가 전작에 비해 촘촘하지 못하다. 그래서 관객들이 후반부 외계인의 대사가 난데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영화 안에서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서사의 공백은 속편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화의 성패, 감독의 의지가 수반돼야 가능한 미션이다.
'호프'는 금일(15일) 전국 극장에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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