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고무처럼 다채로운 표정을 통해 감정과 고통을 모두 드러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이끈 배우 이정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배우의 유명세와 이미지가 연기에 대한 평가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는 국내 언론과 달리 외신은 한국 배우에 대한 어떤 이미지나 선입견이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평가할 뿐이다. 가디언은 자유자재, 능수능란하게 감정의 온도를 드러내는 그의 얼굴을 고무에 비유했다. 흥미로운 비평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의 얼굴이었다. 황동혁 감독이 구축한 붕괴 직전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기훈은 우리 시대의 서민을 대변했으며, 미래 시대의 희망의 불씨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시즌 2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급격한 변화는 시청자들의 불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시즌3 결말에 이르러 황동혁 감독이 추구한 주제의식이 드러나며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는 반응을 끌어냈다.
한국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하며 해외에서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는 없었다. 자칭 '월드 스타'를 넘어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월드 스타가 탄생했다. 혹자들은 이정재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하지만, 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 1993년 데뷔한 이래 31년째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능력과 열정, 부지런함의 결과다. '오징어 게임'을, 황동혁 감독을 만난 건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행운이자, 운명이었다.
이정재는 5년여에 이른 대장정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취재진 앞에 섰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을 향한 뜨거운 관심과 사랑 그리고 다양한 평가에 대해서 차분하게 소회를 전했다.

Q. 시즌1,2에 이어 시즌3도 93개국 1위로 출발했다.
A. 감사하다. 마지막 시즌이라 더 관심이 뜨거운 것 같다. 넷플릭스가 계속해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내놓고 있지만 어떤 작품도 '오징어 게임'의 기록을 못 깼다. 우리가 그 기록을 만들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국 콘텐츠에 지속적인 관심 갖고 '다른 건 뭐가 있어?'하고 찾아봐주시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기분이 좋다.
Q. 황동혁 감독과 최근 인터뷰를 하면서 '오징어 게임'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은 어떤가?
A. 감독님 임플란트 10개요? 어차피 할 건데 10년 후에 할 걸 조금 빨리 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웃음) 저로서는 얻은 게 훨씬 많다. 일단 성기훈이라는 캐릭터를 얻었다. 또 무엇보다 '오겜'을 하면서 황동혁 감독, 김지연 대표(제작사 싸이런 픽처스)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팬도 생겼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사람을 얻는 게 가장 크더라. '오겜'이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 '사람'아닌가.

Q. 시즌3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각본을 가장 먼저 받아본 사람으로서 가장 놀랐던 건 무엇이었나?
A. 당연히 성기훈의 선택과 행동이었다. 처음엔 결말이 궁금해서 끝에서부터 볼까 하는 충동도 있었다. 반면 좀 아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다 읽고 나서는 '이게 과연 '오겜' 시즌1을 사랑한 다수의 시청자들이 만족할만한 결말일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시즌2,3의 이야기 속 성기훈의 행동과 감정을 혼자서 쭉 생각해 보니 '황 감독님이 대단하긴 하시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 같으면 성공한 프로젝트니 길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텐데 여기서 확 잘라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는 시즌2,3이 하나의 이야기였고 총 13개의 에피소드였다. '여기서 이렇게 잘라 버린다고? 이렇게 성공한 큰 프로젝트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황동혁은 정말 작가구나' 싶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비니지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메시지를 가지고, 시청자들과 이런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Q. 임산부 준희가 등장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설정도 놀라웠을 것 같다.
A. 그렇다. 난 정말 아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처음엔 그저 아이를 가진 사람이 나오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 지옥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작품을 오래 찍다 보면 인상적인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즌1 때 기억이 난다. 처음 숙소에 들어갔을 때는 456명의 침대가 꽉 차있었고, 다 같이 일어나는 장면을 찍었다. 그러다 한 달 사이에 침대와 인물들이 없어지는 게 묘했다. 맨 마지막에는 새벽, 상우, 기훈 셋의 침대만 남았다. 그때 그 휑한 공간감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즌2 때 그 숙소에 다시 들어가 촬영을 하는데 역시나 꽉 차있었다. 나는 시즌1을 찍어봤으니 '여기가 또 비겠구나', '또 이 깨끗한 바닥이 피로 물들겠구나'를 상상했다. 그 공간에서 주는, 안 좋은 기억들이 생생한데 그 장소에서 아기를 낳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Q. 아이 대신 죽음 선택한 성기훈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A.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동일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을 만든 황동혁이라는 사람이, 즉 대중이 뭘 좋아하고 호응할지 아는 사람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Q. 결과적으로 성기훈의 반란은 실패했다. 그러나 희생을 택하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기훈의 반란을, 성공과 실패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연기했나?
A. 성기훈의 입장에선 민중 봉기를 한 셈인데, '이대론 못살겠다' 같은 그런 느낌이었을 거다. 비록 실패했지만, 기훈은 그 게임장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해본 셈이다. 그다음, 자신의 실수를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인간의 습성을 기훈이 행했다는 게 가슴 아팠다. 연기를 하면서 '아...기훈아, 그러지 말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시즌1에서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기훈이 상우를 죽이려고 할 때 새벽이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과 똑같은 장면이 시즌3에 또 한 번 나온다. 프론트맨이 칼을 주면서 아이를 살리려면 남아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제안한다. 그릇된 행동을 하려는 기훈 앞에 새벽의 환영이 다시 나타나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난 그게 이미지로는 새벽이 나온 거지만 대호를 죽임으로써 한번 실패했던 자신의 양심이 새벽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봤다.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 아이를 구하는 기훈의 선택이 나온 거다. 기훈의 감정 서사가 두텁다고 느꼈다.

Q. "우린 말이 아니야, 사람은..."이라는 기훈의 대사를 통해 '오징어 게임' 시즌3의 주제의식을 보여줬다. 이 중요한 장면의 연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A. 14개월간 찐 야채만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한 것도 그 장면 때문이었다. 촬영 스케줄 상으로도 가장 마지막에 찍었다. 최대한 기훈의 힘든 모습이, 별 연기를 하지 않아도 시각적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찍기 두 달 전부터 단계별로 식사량을 줄여 나갔고, 일주일 전부터는 야채 몇 개를 하루에 세 번씩 나눠 먹으면서 살을 최대한 뺐다. 이틀 전부터는 거의 물만 마셨다. 그 대사는 여러 버전으로 찍었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도 있고, 눈물을 또로록 흘리는 것도 있고, 눈물을 참는 버전도 있었다. 감독님도, 나도 현장에서 '이거야!' 단정 지을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워낙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기 때문에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나 또한 계속해서 '이런 거 한 번 해볼까요?'라고 끊임없이 제안했다. 감정을 더했다 뺏대가, 인상을 더 쓰거나 덜 쓰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것도 변형시켜 가면서 하루 종일 뭔가를 찾으려 했다. 그 수많은 연기 버전 중에서 감독님이 고른 게 지금의 최종본이다. 그 장면을 찍을 때 이 결말에 저희의 의도가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랐다. 분명 논란이 있을 거라 저희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찍어내는 게 중요했다.
Q. 시즌1 때는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시즌2,3 때는 혹평도 나왔다. 감독이 그린 이야기와 캐릭터 변화에 따라 충실히 연기했을 텐데 억울한 면도 있었을 것 같다.
A. 당연히 속상하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일을 좀 오래 하지 않았나. 내가 어렸을 땐 감독과 배우들이 작품을 두고 상업이냐 예술이냐로 나누곤 했다. 그러면서 '걔는 돈벌이 영화하는 사람이잖아. 난 예술영화 찍는 사람이야'와 같은 이야기를 자랑같이 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물론 지금도 상업, 예술의 구분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다. 옛날 기준으로 보자면 이 작품은 완벽한 상업 쇼드라마인데, 엔딩을 예술성 있는 작가주의 엔딩으로 끝낸 듯한 느낌이다. 나는 이 시도가 좋았던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투자배급사였다면 (이 결말을) 미친 듯이 반대했을 거다. 아마 시나리오 때부터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걸 하게 해 준 넷플릭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성 짙은 작품은 갑론을박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Q. 시즌1,2,3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
A. 개인적으로는 시즌1에서 성기훈이 딸 가영이랑 떡볶이를 먹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기훈이 시즌3까지 두 발로 서있게 해 준 이유라고 생각해서다.
Q. 생각해 보면 '오징어 게임' 시즌1을 성공시키고 시즌2,3가 나오기까지의 약 4년의 시간 동안 감독 도전도 하고 할리우드 진출도 하는 등 도전적인 여정을 이어왔다. 이렇게 부지런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또 다음에 시도하게 될 도전도 궁금하다.
A. 배우 선배로서 약간의 책임감이랄까.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좋은 기회와 행운이 겹쳐서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오겜'으로 많은 경험을 했는데 이 경험을 동료 배우들이랑 꼭 나누고 싶다. 다음 성공은 내가 아닌 그들이 했으면 좋겠다. 생각지 못한 기회가 오고, 여러 경험을 하다 보니 '이거 한번 발전시켜서 해볼까'라는 다른 욕구도 생기긴 한다. 그래서 요즘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고 국내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인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들과 얽혀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도 잘 안 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원하고 있다. 이 기회를 등한시할 수 없어 몇 개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논의 단계다. 돼야 되는 거다. 어쨌든 될 때까지 이런저런 노력을 해볼 생각이다. 또한 국내 영화 시장은 너무 어려운데 이 시장도 얼른 회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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