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여행과 사랑은 일견 닮았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 낯섦이 주는 설렘과 긴장감, 사서 하는 고생, 성공과 실패가 남기는 성장 등 행위와 감정에 있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만족과 불만족이 있을지언정 질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다음을 또 꿈꾸고 계획하게 된다는 점도 닮았다.
오는 6월 11일 개봉하는 영화 '귤레귤레'(감독 고봉수)는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연애담이라는 측면에서 여행 로맨스의 레전드인 '비포 선라이즈'류의 영화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비포선셋'에 가깝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헤어졌던 첫사랑을 여행지에서 우연 만나 옛 기억을 반추하는, 아련함과 설렘의 정서가 영화 전반에 흐른다.

고봉무역의 대리인 대식(이희준)은 제멋대로인 상사 원찬(정춘)과 튀르키예에 출장을 왔다가 카파도키아에서 투어를 하게 된다. 마지못해 나선 투어에서 대식은 대학교 시절에 만났던 첫사랑 정화(서예화)와 마주치게 된다. 정화는 알코올 중독인 남편 병선(신민재)과 재결합을 위해 여행을 왔다. 대식과 정화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은 채 투어를 하 되고, 정화와 정화의 남편 그리고 대식은 어색하고도 아슬아슬한 동행을 이어나간다.
'델타보이즈'(2017), '튼튼이의 모험'(2018) 등으로 독립영화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던 고봉수 감독의 본격 멜로 영화다. 과거 흑백 영화 '다영씨'(2018)에서도 한 남자의 애틋한 순정을 그린 바 있지만, '귤레귤레'는 보다 현실 연애에 가까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대중성과 보편성까지 획득했다.
카파도키아라는 공간이 주는 광활함과 신비로움은 영화의 개성을 더한다. 기괴한 모양의 버섯바위와 역사의 아픔을 담은 무수한 동굴은 시각적 즐거움과 호기심의 대상이다. 대식과 정화, 병선이 발을 닿고 눈에 담는 공간들은 보는 이에게 대리 여행을 하는 기분도 선사하지만, 마치 카파도키아라는 거대한 자연이 전지적 관찰차처럼 이들의 갈등과 화해를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도 남긴다.


해외 올 로케이션인 데다 영상미도 가미한 탓에 '고봉수 월드'에선 색다른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다. 작가인 아내와 발칸 3국에 장기간 머물렀던 고봉수 감독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갔다가 이번 작품을 기획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유의 날 것 느낌과 거친 웃음은 한층 부드러워졌고, 감정 묘사는 조금 더 섬세해졌다.
물론 각본인지 애드리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동극 같은 에피소드 구성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신민재, 김충길, 백승환이라는 페르소냐가 담당했던 '웃음벨' 역할은 정춘이라는 개성파 배우에 의해 충실하게 구현된다.
고봉수의 새로운 페르소냐라고 할 수 있는 이희준은 감독의 개성과 감성을 입은 어리숙한 캐릭터를 노련하게 연기해 냈다. 관객들은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뚝딱거리는 대식의 모습에 함께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하게 된다. 대식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세 차례의 연이은 키스신은 첫사랑의 풋풋한 설렘이 떠올라 귀엽게 다가온다.

이희준은 잇따라 성공한 영화와 드라마로 인해 다소 거친 이미지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돼 있지만, 과거 '환상속의 그대'(2013)에서도 섬세한 멜로 연기를 펼친 바 있다. 멜로 배우로서의 매력과 개성을 오랜만에 발현했다는 점에서 반갑다.
서예화와 신민재 역시 누군가의 과거를 발췌해 낸 것 마냥 실감 나는 커플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긴장감과 몰입감까지 선사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벌룬 투어 장면이다. 주황빛으로 떠오르는 해 아래 뭉게뭉게 떠오르는 형형색색의 벌룬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그 그림 같은 풍광 아래 대식과 정화는 각자 '나'에 대한 발견과 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왜 이 영화가 제목으로 그 흔한 로맨스물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낯섦을 선택했는지 결말에 이르러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귤레귤레'(Gule-Gule)는 튀르키예 말로 '안녕(Bye)'이라는 의미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았으나 뜻하지 않게 실패한 정화와 핑계를 대며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으로부터 늘 도망쳐온 대식, 이들의 재회는 실패한 연애담의 복기인 동시에 변화할 인생에 대한 응원이다. 과거에 대한 작별(안녕)과 미래에 대한 인사(안녕)라는 중의적 의미를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초청돼 전회차 매진을 기록했고 관객의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식상하고 나태한 한국 영화에 질린 관객에게 여행과 휴식 같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선사한 덕분이다.
'귤레귤레'는 오는 6월 11일 전국 극장에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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