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일(월)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파과' 이혜영 "쓸모를 증명하되, 통제 당하진 않을 것"

김지혜 기자 작성 2025.05.16 16:48 수정 2025.05.16 17:04 조회 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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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이혜영에게선 남다른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탈색한 금빛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 꼿꼿한 자세에서 나오는 아우라도 있었지만, 시간과 경험을 통해 쌓아 온 배우로서의 품격과 철학이 이 배우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인터뷰 내내 발산한 자신감과 자존감도 근거 없는 잘난 척이 아니었다. 45년의 연기 활동을 통해 '이혜영'을 증명해 온 결과였다.

60대의 여배우가 상업영화의 주인공, 그것도 액션 장르 영화에서 타이틀롤로 활약했다는 건 변화를 찾기 힘든 최근 한국 영화계에선 파격에 가까운 도전이다. 이혜영은 보란 듯이 그 도전에 임했고, 인상적인 결과물을 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시나리오가 없다고 하던데 마음이 아프네요. 그러나 저도 이런 정도의 작품을 늘 만났던 건 아니에요. 그래서 더 특별하죠."

'파과'(감독 민규동)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에서 40여 년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과 평생 그를 쫓은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의 강렬한 대결을 그린 액션 드라마.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이혜영은 60대 킬러 '조각'으로 분했다.

파과

"민규동 감독이 출연 제안을 주셨고,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 할머니, 나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이 역할에 나를 생각했지? 나 이 정도로 할머니는 아닌데?'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에 담긴 수수께끼가 매력적이더라고요. 저는 그 힘과 능력이 부러웠어요. 시나리오는 소설과는 또 달랐어요. 머릿속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됐어요. 흔한 액션 영화 속 거친 말투도 아니었고요. 배우를 계속 편하게 할 것인가 도전할 것인가 고민했고, 전 도전을 택했습니다."

도전에는 고난이 따라왔다. '파과'는 액션 영화다.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몸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전설적인 킬러'라는 설정상 액션 연기를 직접 수행해야 했다. 노쇠한 할머니 킬러라고 해도 '전설적인'이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붙는 이상 아성을 보여줄 만한 액션신은 필수적이었다. 이혜영은 촬영 첫날부터 '액션 연기'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고,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이태원 클럽에서 구덩이에 처박히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그런데도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강행해야 했어요. 무리해서 촬영하다가 하나가 더 나가고, 또 하나가 나가서 총 3대가 나갔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구르고 뛰었어요. '이러다 나 배우 못하는 거 아닌가'하는 공포가 밀려들 정도였죠. 그런데 그런 상태니까 더 목숨을 걸게 되더라고요."

파과

이혜영이 육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민규동 감독이 배우에게 기대한 것도 빼어난 운동 신경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액션 연기는 아니었을 터.

이혜영은 "몸의 노쇠함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나왔어요. 허리와 등이 저절로 굽고, 어깨도 내려앉았죠. 저희 우리 무술 감독님이 본래 배우 하정우 전문 스턴트였어요. 무술 감독님이 조각은 성별을 뛰어넘는 존재로 서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거기에 감정을 유지하면서 기술을 발휘하길 원했어요"라고 말했다.

영화 초반을 여는 지하철 신은 노쇠한 킬러 조각의 노련함을 보여줬다. 대단한 액션으로 목표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상황에 맞는 설계로 목표물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후반부의 긴 액션 시퀀스는 왕년의 명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한 장면이었다. 영화의 대미였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이혜영은 이 장면을 찍고는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각이 내내 되뇌었던 '쓸모'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대입했다고 고백했다.

"쓸모라는 단어보다 저한테 더 강하게 오는 건 '쓸모없다'예요. 이 영화에서 조각은 버려진 존재지만 다시 쓸모를 얻어 살아남잖아요. 그 감정을 안고 촬영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촬영이 끝이더라고요. 그래서 '왜 끝나는 거야? 이거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끝나지 마. 뭔가를 보상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반대로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면 쓸모 있는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과

민규동 감독과 첫 작업이었던 이혜영은 촬영 초반에는 적잖이 당황했다고 고백했다. 민규동 감독은 조각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혜영의 입장에서는 배우의 해석을 배제하고, 통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민규동 감독이 요구하는 절제와 통제 속에서도 스스로 자유를 찾아야 했다.

"저에게 이렇게까지 지시한 감독님은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하지 마라', '감정을 빼라', '두 발짝만 나와라' 등 디테일한 디렉팅이 있었어요. 임권택 감독님도 안 그랬거든요. 감독님들은 늘 제 의견을 물었어요. 그래서 전 언제나 제 느낌으로 연기를 해왔어요. 아무리 상상하고 가도 현장에 가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상상하지 않고 갔죠. 즉흥적이고 감각적으로 하는 연기랄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걸 만드는 거요. 저도, 함께한 감독님들도 그걸 즐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민 감독은 그게 안 통해요. 이번 영화를 하고 나서 깨달았어요. 남 신경 안 쓰고 저한테만 몰두한다는 게 남들한테는 안 좋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걸요."

이혜영은 민규동 감독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 촬영을 마쳤다. 다만, 처음 겪어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불안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완성된 영화를 처음 확인하고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하며 감탄했다고 전했다.

데뷔 45년 차의 이혜영은 연극과 TV, 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남자 배우보다 나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여자 배우지만, 사회적 제약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왔다.

파과

특히 이혜영의 필모그래피에서 인상적인 건 최근 4편('당신얼굴 앞에서', '소설가의 영화', '탑', '여행자의 필요')의 영화를 함께한 홍상수 감독들의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이혜영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빛났다.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배우로서 받은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물었다.

"저는 제가 감독님에게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홍 감독님의 영화를 데뷔부터 지금까지 쭉 보면 스타일이 몇 차례 바뀌었어요. 지금은 다소 철학자처럼 바뀌었죠. 저는 감독님이 저를 만나고서 4기를 맞았다고 생각해요. 그간 해온 배우들과 달랐을 거예요. 감독님이 저랑 작품을 하면서 카메라를 직접 들기 시작하셨어요. 그때부터 다른 에너지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저는 감독님의 메시지를 누구보다 잘 담을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또 자라온 배경도 비슷한 면이 있죠. 홍 감독님은 전옥순(한국 대중 예술계 첫 여성 영화제작자)여사의 아들이고, 전 이만희('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등을 만든 1960년대 한국 영화 거장)감독의 딸이잖아요. 물론 저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홍 감독님은 어머니 잘 만나서 잘 살았죠. 그래서 어릴 때는 얄밉기도 하고 질투도 좀 했던 것 같아요. 뒤늦게 홍 감독님과 감독과 배우로 호흡을 맞췄지만 그 작업들이 참 좋았어요. 특히 '당신얼굴 앞에서'(2021) 만큼 충만했던 작품은 없었어요"

나이 든 여배우의 역할이 누군가의 엄마이자 할머니로 축소되는 가운데 이혜영은 캐릭터로 기억되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감독인 임권택, 류승완, 홍상수 등과도 작업하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이혜영

이혜영에게 배우로서 감독들의 선택을 받는 이유, 자신이 증명한 '쓸모'에 대해 물었다. '무지함'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다들 아는 걸 저만 몰라요. 저 혼자 상상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욕하고 그래요. 그런 면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가 된 게 아닐까 싶어요. 나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어요. 어려서부터 '난 배우가 될 사람인데 이걸 왜 시켜요' 그랬죠. 배우도, 감독도 신처럼 생각했어요."

"글쎄요. 감독님들이 저를 왜 쓸까요. 무지함? 다들 아는 걸 저만 몰라요. 저 혼자 상상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욕하고 그래요. 그런 면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가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어요. 어려서부터 '난 배우가 될 사람인데 이걸 왜 시켜요' 그랬죠. 배우도, 감독도 신처럼 생각했어요. 지금의 저는 '이혜영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제 쓸모를 찾는 것 같아요. 지금, 그리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 쓸모를 증명하고 싶어요. 물론 (감독들에게) 쉽게 통제당하진 않을 겁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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