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9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하정우 감독의 '말맛'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지혜 기자 작성 2025.04.15 13:05 조회 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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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합니다. 평생 이 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얼마 전에 수술 때문에 입원을 했는데 병원 복도에서 본 사람들도 흥미롭더라고요"

하정우는 사람 구경 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세 번째 연출작 '로비' 시사회를 앞두고 급성 충수돌기염(맹장염) 수술을 받고 병원 신세를 졌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방귀를 기다리며 복도를 걸을 때에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나이, 성별, 직업도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이유로 걷고 있는 그 모습조차 흥미로웠고, 영화적 순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배우란 결국 되어 보지 못한 못한,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연기하는 직업이다. 감독 역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삶을 연출하는 직업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심한 관찰'은 좋은 연기와 연출의 시작점이다.

그는 보고, 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영화적 시선으로 그려낸다. 하정우 감독의 연출 프로세스는 단순하지만 명료하다.

로비

영화계의 '걷기 전도사'였던 하정우는 코로나 19를 즈음해 골프를 배우게 됐다. 골프장에서도 그의 관찰은 계속됐다. "골프 치는 사람들을 보면 단순한 운동을 넘어 각자의 목적과 욕망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고. 우리나라에서 귀족 스포츠로 불리는 골프는 어쩔 수 없이 '접대'와 '로비'가 얽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적과 욕망이 뒤섞인다. 이렇게 10명의 캐릭터를 한데 모아 놓은 소동극 '로비'가 출발했다.

'로비'는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 분)이 4조 원의 국책사업을 따내기 위해 인생 첫 로비 골프를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시작 후 약 30분 만에 골프장으로 진입한다. 라이벌 관계인 창욱과 광우는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해 사업의 실권자인 장관과 장관의 남편을 각각 골프로 로비한다. 4대 4로 팀을 짜 서로가 같은 공간에 있는지도 모른 채 로비에 열을 올리는 창욱팀과 광우팀은 예상치 못한 일로 우여곡절의 반나절을 보낸다.

로비

2014년 선보인 데뷔작 '롤러코스터'와 DNA를 공유하는 작품이다. 하정우 연출작의 특징은 ▲ 캐릭터가 많고, ▲ 대사가 많으며, ▲ 예측불가의 상황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로비'도 마찬가지다.

또한 그만의 특색인 '말맛의 향연'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이 말맛은 대본에서 출발하지만 생동감은 배우들의 액션과 리액션의 합에 의해 부여된다. 물론 이는 약속된 수행에 가깝다. 연습과 연습 속에 말맛은 무르익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말을 빨리 합니다. 물론 생각을 하고 말을 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과 동시에 말을 바로 하기도 해요. 그래서 제 대사들이 템포가 좀 빨라요.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그 템포로 대사를 치려면 연습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 연출작은 유독 리딩이 많습니다. 현장의 리듬감은 리딩 때 다 잡거든요. '롤러코스터'때 처럼 리딩을 열 번씩 한 건 아니지만 5~6회 이상은 했던 것 같아요. 읽는 것과 듣는 건 엄청난 차이거든요. 처음 배우가 리딩했을 때 웃음이 나오면 그걸 믿어야 해요. 이건 성형수술과 같아요. 성형을 계속하다 보면 이상하고 부자연스럽잖아요. 마찬가지로 처음의 느낌을 믿어야 해요"

빠른 템포의 말맛은 초반부인 장례식장 신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이후 골프장에서는 끝없는 말맛의 향연이다. 독특한 캐릭터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 한데 어우러지면서 이면이 드러나고 갈등과 오해가 쌓이고, 말미에 이르러서는 해소로 이어진다.

로비

단순 명쾌하게 말하면 '로비'는 로비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야기다. 로비의 대상은 비호감 캐릭터로 구성돼 있고, 로비를 하는 주체는 수많은 현타의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창욱은 처세와 임기응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하고 헤쳐나간다.

"빌런 역할을 할 캐릭터가 필요했어요. 골프장이 아니라 어느 모임에 가도 불편한 사람 한 명쯤은 꼭 있잖아요. 라운딩을 하는 네 명 안에서 그런 사람이 있고, 그 끝을 가보면 어떤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X저씨 최실장' 캐릭터가 나오게 된 거죠. 진프로의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요. 최실장의 상황이 코미디적으로, 장치적으로 배치가 돼있는 건 아니었는데 리딩에서부터 김의성 배우가 너무 웃긴 거예요. 실제의 그와 너무 다른 캐릭터였기 때문에 제겐 더 웃기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다. 책상머리에 진득하니 앉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인내가 더 좋은 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정우는 엉덩이로 글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반복과 수정의 힘이다.

"저는 일단 되게 빨리 많이 씁니다. 고민은 최대한 덜하고 일단 써보고 판단하고 고치고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시나리오도 버전이 굉장히 많은 편이에요. 그리고 주변의 피드백을 많이 받아봐요. 그런 피드백을 반영해 시나리오를 수정해 나가죠"

하정우

'감독 하정우'의 분주한 발걸음이 우려스럽기도 했다. 대중은 '배우 하정우'를 더 좋아하고, '감독 하정우'는 늘 도전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감독 하정우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분명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뷔작 '롤러코스터'(2014)를 시작으로 '허삼관'(2017), '로비'(2025)로 이어진 결과물을 보면 감독으로서 한층 노련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허삼관'이 스스로의 취향을 벗어난 도전에 가까웠다면 신작 '로비'는 '감독 하정우'의 DNA가 투영된 '하정우다운 영화'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다.

하정우는 빠르면 올 하반기 네 번째 연출작 '윗층 사람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출연 영화가 1년에 2~3편 나오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연출작 두 편을 1년 사이에 내리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소처럼 일했던 배우로서의 행보처럼 '감독 하정우'의 시계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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