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2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미키 17', 익숙한 부조리와 풍자…순한 맛 봉준호

김지혜 기자 작성 2025.02.21 16:12 수정 2025.02.21 16:24 조회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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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감독들에겐 저마다 촉수가 반응하는 이야기가 있다. 직접 각본을 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원작을 각색할 때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방식으로 이야기를 완성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깃발을 꽂고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 비판과 계급 양극화에 대한 풍자로 자신의 영화 철학을 정의하는 시선에 대한 반응이었다.

여덟 번째 장편 영화인 '미키 17'은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다. '휴먼 프린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본성을 고찰하고, 식민지 개척의 윤리적 문제를 짚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미키

봉준호 감독은 2022년 발간된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이야기의 배경을 2054년으로 앞당겼고, 주인공의 직업을 역사 교사에서 마카롱 사업에 실패한 자영업자로 바꿨다. 현재와 멀지 않은 근 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한 자영업자를 내세운 데서 더 현실에 닿아있는 SF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워너브러더스가 봉준호 감독에게 이 소설의 영화화를 제안하고 1억 2천만 달러(한화 약 1,72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자한 건 그에게 '뻔하디 뻔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색깔과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재미와 철학까지 겸비한 웰메이드 SF를 기대했을 터. '미키 17'은 봉준호다운 것과 봉준호답지 않은 것이 뒤섞인 결과물처럼 보인다.

미키

◆ 베일 벗은 '미키 17'은 '설국+옥자'?... '죽어야 사는 남자'에 담긴 메시지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친구인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하다가 망해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친 그들은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미키는 티모의 제안에 따라 우주 행성 니플하임 개척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고 그중 경쟁자가 가장 적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할 경우 20시간 안에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가진 채 똑같이 '프린트'되는 숙명을 띤 직분이다.

원작 소설의 제목은 '미키 7'이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미키의 프린팅 횟수라는 걸 감안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보다 10차례 더 죽는 셈이다. 영화에 더 폭력적인 상황을 부여해 미키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식민지 개척에서 경시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하려는 봉준호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미키

미키는 연구진에 의해 각종 실험을 당한다. 열여섯 차례의 죽음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측은하고 짠하다. 봉준호 감독이 말한 '발냄새나는 SF'는 미키의 '짠내' 나는 상황들을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미키는 무차별 사용되고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우주 개척선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미키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이라고 묻는다. 이 폭력적인 질문에 대해 미키는 "죽는 건 끔찍해. 여전히, 매번"이라고 답할 뿐이다.

미키는 탐사 임무 중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순간, 니플하임의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다. 뒤늦게 기지로 돌아온 미키는 또 다른 미키와 마주하게 된다. 연구진이 미키가 죽은 줄 알고 18번째 미키를 프린팅한 것. 니플하임에서는 익스펜더블은 허용하지만 멀티플은 금지한다. 소심한 17번 미키와 다소 과격한 18번 미키는 서로 살겠다고 싸우고 연인인 나샤의 중재를 통해 비밀리에 공존하기로 한다.

미키

한편, 미키를 구해준 크리퍼는 보이는 게 다인 생물체가 아니다. '우주 식민지'는 지구인 관점에서는 개척이지만, 원주민인 크리퍼 관점에선 침략이다. 후반부엔 크리퍼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언급만으로도 기시감이 느껴질 것이다. '미키 17'은 '설국열차'와 '옥자'의 짙은 향기가 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일관된 취향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다.

'기생충'으로 자본주의 모순과 계급 양극화에 대한 매력적인 풍자극을 만들며 '봉준호 월드'의 정점을 찍은 만큼 관객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좋아하고, 잘하는 방식으로 우주 세계에서 또 한 번의 우화를 써 내려갔다.

'설국열차'와 '옥자' 그리고 '괴물'의 기시감까지 느껴지는 '미키 17'은 봉준호의 자가 복제인가 종합판인가. 핵심은 기시감이 아닌 전작의 특징과 매력 요소들이 '미키 17'의 서사 안에서 잘 융합됐는가이다.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나뉠 것으로 보인다.

미키

◆ 트럼프 풍자? 우리에겐 '그 사람'이 생각날 수도

영화에서 2명의 미키만큼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마샬 부부다. 마샬은 우주 개척선의 대장이다. 그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익스펜더블 복제 기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인간에게는 하나의 영혼만 있고, 익스펜더블과 같은 복제인간은 영혼이 없는 괴물과도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니플하임에서 미키17과 18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에서는 몇 차례의 집회 장면과 연설 장면이 나온다. 마샬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의 야망과 광기가 드러난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와 철학에 갇혀 있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독재자다. 외신들은 우주에 백인 중심의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야욕과 이익 우선주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언어 사용, 특정한 제스추어 등에서 트럼프의 향기가 난다고 반응했다.

마샬 못지않게 탐욕과 집착을 드러내는 아내 일파도 낯설지가 않다. 일파는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다. 마샬은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며 중요한 결정은 아내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에게 이들 부부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전작 '기생충'에서 친절하고 자비로운 부자와 악랄하고 폭력적인 빈자 캐릭터를 제시하며 사회적 고정관념을 깼다면, '미키 17'에서는 역사에서 봐온 여러 독재자 캐릭터를 섞어 다소 과장되게 묘사했다.

봉준호 감독은 '마샬'에 대해 "역사 속 나쁜 정치인들의 모습을 재밌게 섞어보고자 했다. 솔직히 참고한 한국과 미국 정치인도 있었다"면서 "과거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영화 본 분들은 요즘 실제 어떤 정치인을 상상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키

◆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 제2의 '기생충'은 아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외신들은 '기생충'과 완성도를 비교했다.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기생충'만큼은 아니다"라는 실망감 어린 반응도 나왔다. '기생충'이 봉준호 영화 미학과 세계관을 집약한 최고작이었기에 이 같은 잣대가 이상하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제2의 '기생충'을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 영어 영화 중 두 편이 SF 장르였다. '설국열차'와 '미키 17' 모두 원작이 있는 영화였다. 계급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그의 오랜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가미해 '봉준호스러운 영화'로 재탄생시켜왔다.

그가 만든 한국 영화의 매력이 한국적 사회상을 반영한 리얼리즘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폭넓은 은유에 있었다면 미국 배경의 SF에서는 우화적 성격이 더욱 강하며, 은유보다는 직유의 화법을 선택했다. '미키 17'에도 봉준호의 개성과 취향은 살아있지만 '선', '냄새' 같은 무형의 개념을 통해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언어와 관계없이 세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전작을 생각하면 단순하고 직접적인 풍자다.

미키

재미와 볼거리 면에서도 다소 애매하다. 블록버스터가 규모의 영화, 볼거리의 영화라고 봤을 때 '미키 17'의 오락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특유의 어둡고 짓궂은 유머에서는 B급 영화의 감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예술 영화로 분류하기엔 그 개성과 깊이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오락 영화와 예술 영화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봉준호라는 이름을 지우고 본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야박할 수도 있다.

이는 이야기의 배경이 해외로 설정되고, 배우들의 언어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바뀌었을 때 발생하는 한계일 수도 있다. 많은 비영어권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 때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언어는 정서와 사고방식, 문화가 담기는 그릇이다. 한국어라는 그릇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자막 1cm의 장벽을 넘어 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던 봉준호 감독의 6년 전을 생각하면 '미키 17'은 더 좋은 여건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더 큰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다.

영화의 엔딩은 원작 소설과도 다르고 종전 봉준호 영화와도 조금 다르다. 해석의 여지가 있고, 여운이 짙은 모호한 결말 대신 명확한 결말을 선택했다. '옥자' 때도 느끼긴 했지만 착하고 순한 봉준호는 여전히, 좀 낯설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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