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이 사운드트랙은 내 뇌를 24시간 내내 먹어 치우고 있어"(This soundtrack be eating my brain 24/7 omg)
'오징어 게임' 시즌1,2의 OST를 담당한 정재일 음악감독의 유튜브 채널에 달린 한 해외 팬의 댓글이다. 해당 댓글이 달린 건 시즌1의 메인 테마곡인 '웨이 백 덴'(Way back then)이었다. 이 클립은 현재까지 1,146만 회 조회됐다. 이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놀라운 건 이 곡은 시즌1에서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종합예술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은 이야기의 감정과 온도를 고조시키며 영상 전체의 색채와 분위기까지 조성한다. 잘 만든 음악 한 곡의 위력은 이미지보다 강렬하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시네마 파라디소'(Cinema Paradiso),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메인테마'(Main Title From Star Wars)는 수십 년 전 나온 OST지만 누구나 단번에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관객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의 흥행 시리즈로 꼽히는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있어 음악의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그 기여도를 수치화하긴 쉽지 않지만 지금의 음악이 없었다면, 이 작품이 보여준 지옥도의 생생함은 덜 생생했을 것이다. 청각의 마력은 그만큼 세다.
'오징어 게임' 시즌1,2의 음악을 담당한 정재일은 음악감독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감독의 비전을 음악의 언어로 표현해 주는 일종의 통역자"라고 소개했다. OST의 영감 역시 오롯이 작품을 통해서만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OST는 그 작품을 위한 음악이지 내 예술을 하는 건 아니"라며 "감독님이 저희 집(작업실)에 오시는 날이 제 영감의 샘솟는 날이에요. 감독님이 오시면 화면이랑 오디오를 같이 보고 수정하는 작업을 수십 회씩 반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정재일 감독은 필연적으로 '오징어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관람하는 첫 번째 시청자기도 하다. 감독의 영상 언어를 청각 언어로 전달하는 정재일 음악감독의 '오징어 게임' OST 제작 비화를 들어봤다.

◆ 시즌1의 중독성을 이어가되 변화를…앞뒤가 다른 'Way forward'
황동혁 감독은 시즌2의 음악 작업을 앞둔 정재일 감독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시즌1의 메인 테마곡인 "'Way Back then'을 한 번 더 써달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리코더 멜로디로 알려진 그 곡이다.
"사실 이 테마곡은 시즌1에서 딱 한 번 나오거든요. 1화 오프닝에서 흑백으로 담긴 성기훈의 어린 시절 오징어 게임 회상신이었죠. 그런데 이게 '오징어 게임'을 상징하는 곡이 됐어요. 그래서 감독님도 한 번 더 쓰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대로 쓰긴 싫더라고요. 그래서 원곡과 흡사하게 가다가 뒷부분에 변형을 줬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시즌2의 메인 테마곡이라 할 수 있는 'Way forward'다. 'Way Back then'은 2분 31초의 곡이지만, 'Way forward'는 4분 4초다. 하나의 멜로디로 시작하는 두 노래가 갈라지는 건 1분 40여 초부터다. 'Way Back then'은 이때 다시 한번 리코더를 사용한 주요 멜로디와 캐스터네츠의 조합으로 끝을 맺지만, 'Way forward'는 성기훈의 새로운 도전과 확장된 서사를 예고하는 듯 2분 31초부터 기존 테마에 변형을 둔 새로운 분위기의 서정적이고 비극적인 멜로디를 내세운다. 'Way Back then'의 피아노 버전인 'No way back'와의 혼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Way forward'은 시즌2 1화 '빵과 복권'편에서 딱지남의 비극적 말로와도 어우러지며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오징어 게임' 시즌1의 OST는 20곡, 시즌2는 29곡이다. 정재일은 OST 제작 과정의 전반을 지휘하며 김성수 작곡가, 박민주 작곡가와 협업했다. 시즌1의 주요 테마곡인 'Way Back then'(정재일 作), 'Pink Soldiers'(김성수 作) 등 몇 곡을 활용했지만, 대부분의 곡을 새롭게 만들었다.
정재일 감독은 "다른 시리즈에 비해서는 전 시리즈의 곡을 많이 재활용 못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일단 인물이 많아졌으니까요. 인물도 많은데 다 주인공 같아서 그들의 스토리를 하나하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음악에도 다양한 텍스쳐가 있어야 하고 다양한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즌2의 작업은 '다양성과 독특함'이 가장 중심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핵심 인물인 성기훈의 성격이 확 바뀌어서 그의 음악도 일부 변화를 줘야 했습니다"고 말했다.

"'No way back'은 시즌2를 여는 오프닝 곡이니까 가장 먼저 만들었어요. 시즌1의 오프닝에 나왔던 곡 'Way Back then'을 시즌2 오프닝에서 변주해 보자고 생각했죠. 성기훈이 딸한테 가지 않고 복수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표현해야 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니까요. 그 음악이 좀 결연하기도 한데 모든 여정의 시작점이라 피아노 사운드도 좀 무겁게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여러 개 중첩해서 만들어봤어요. 여기서 중첩은 피아노를 녹음, 또 녹음, 네다섯 대의 피아노가 동시에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내는 것을 말해요. 완전히 다른 곡이라 느끼셨다면, 그건 아마도 멜로디는 같지만 화성이 아예 달라서일 겁니다"
황동혁 감독은 OST 제작 과정을 꼼꼼하게 체크하기는 하지만 정재일 감독의 창의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긴다. 정재일 감독은 "감독님이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지는 않으세요. 다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신에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이 나와야 한다' 이런 건 싫어하세요. 모든 예술가는 창작물을 만들 때 아주 새롭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니까요. 저 역시 유니크한 음악을 만들려고 이런저런 실험도 했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 '오징어 게임'에 맞는 음악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 리코더로 안내한 동심…'Way back then'에 담긴 불협화음
정재일 감독은 시즌1,2를 위해 약 150개의 곡을 작곡했다고 전했다. 그런 과정 끝에 나온 음악이 한 번에 OK 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10번이나 거절당할 때도 있다고.
'오징어 게임'의 상징이 된 'Way Back then'의 리코더 멜로디에 얽힌 비화도 있다. 이 과정과 결과도 그의 '실험정신'이 빚어낸 흥미로운 결과다.
"시즌1 때는 황동혁 감독과 처음 작업하는 거니까 실험을 많이 했어요. 6~7곡 정도 저 혼자서 한 실험의 결과물들을 들려드렸어요. 'Way Back then'을 좋아는 하셨는데 'B급 감성이라 이걸로 극을 열어도 괜찮을까'라고 의문을 표하시더라고요. 결국 감독님은 좀 더 진지한 곡을 메인 테마곡으로 선택하셨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시다가 '아니다. 유니크하게 갑시다'라고 하시더니 'Way Back then'을 최종적으로 선택하셨어요. 기훈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고, 아이들이 나오는 신이다 보니 아이들의 악기를 모아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리코더, 실로폰, 캐스터네츠 등을 쓰기로 했죠. 리코더는 제가 직접 불었어요. 집에서요. 저도 리코더 전문가는 아니다 보니 불협화음이 나더라고요. 일단 불고 컴퓨터로 수정하려고 했죠.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어보니 틀린 게 오히려 자연스럽더라고요. 아이들의 합주를 생각해 보면 연주도 능숙지 않고 불협화음이 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뒀습니다"

'빠빠빠~빠빠빠~빠라바라빠바빠'로 시작되는 리코더 멜로디 구간을 들어보면, 정재일 감독의 말대로 삑사리가 나는 구간이 있다.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는 리코더로 아이들의 능숙지 않은 연주를 재현한 이 멜로디는 자연스레 성기훈의 위기와 고난을 예고하는 전조 같은 의미가 된 셈이다.
시즌1과 2에는 기성곡도 절묘하게 사용됐다. 시즌1의 경우 프랭크 시내트라의 '플라이 투 더 문'(Fly to the moon)이 중요한 장면에서 쓰였고, 시즌2의 경우 1화 러시안룰렛 장면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명곡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가 흘렀다. 기성곡의 경우 정재일이 관여하지 않는다. 5인 6각 경기에 사용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백 퍼센트 황동혁 감독의 취향과 안목이 반영된 선택이다.

"노래 선곡은 전부 감독님이 하세요. 저는 오리지널 스코어만 작곡해요. 시즌1 때는 클래식 음악을 비롯해 몇 곡 제안하기도 했는데 좀 안 맞으셨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음악적 감각도 굉장히 좋으신 편이에요. 시즌2 작업 때 '그대에게'를 말씀하시길래, 사실 전 '괜찮을까' 생각했어요. 그 장면에 응원곡을 넣는 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화면에 음악을 붙여봤더니 다들 무릎을 치며 감탄했죠."
'둥글게 둥글게'의 선곡 역시 황동혁 감독이 했으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섞은 건 정재일의 판단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동요의 멜로디는 해맑지만, 배신과 죽음이 난무하는 현장이잖아요. 심지어 아들도 엄마를 배신하는 끔찍한 상황이죠. 그래서 그 둘을 대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일렉트로닉, 헤비메탈에 가까운 사운드를 가미해 봤어요"라고 설명했다.

◆ "나는 성덕, 영화음악은 씨네필 감성 깨워"
정재일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는 '천재 뮤지션'이다. 3살에 피아노, 10살에 기타를 연마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 고등학교 형들과 밴드를 결성한 그다. 정재일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이적, 한상원 등과 활동한 밴드 긱스(GIGS)를 통해서다. 17살의 나이에 이 밴드의 베이스트로 활동하며 '천재 소년'의 등장을 알렸다. 긱스의 해체 이후 정재일은 분야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활동을 펼치며 연극, 영화, 뮤지컬 음악 창작에도 나섰다.
본격적으로 영화 음악에 입문한 건 봉준호 감독이 제작에 나선 영화 '해무'(2014)를 통해서다. 이 작품에서 정재일의 남다른 능력을 알아본 봉준호 감독은 '옥자'(2017)와 '기생충'(2019)의 음악감독으로 그를 연이어 발탁했다.
업계에서는 정재일의 음악 작법이 기존과 다른 창의성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생충'의 페이크 클래식, '오징어 게임'의 동심파괴 리코더 등은 극의 분위기와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이야기의 폐부를 음악적으로도 보여주며 관객의 시각과 청각을 화면에 몰두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정재일은 "사실 저는 할리우드 영화의 음악처럼 정색하고, 폭포수처럼 쏟아내리는 음악에는 소질이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내밀하고,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에 좀 더 능한 거 같습니다. 음악에 콘트라스트 효과를 주는 건 영화 속 한 시퀀스라고 해도 한 가지 감정만 있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음악도 그 신의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배제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기도 해요. 그런 어프로치가 유효할 때가 있고 관객도 그럴 때 더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정재일은 영화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로 '영화에 대한 애정'을 꼽았다.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의 가장 친한 친구거든요. 음악이 안 필요한 예술 장르는 없잖아요.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 이런 어드벤티지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이 다른 예술에 어떤 생명력을 가지게 해 주는지를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연극, 오페라 음악을 하다가 영화 음악의 매력에 빠지게 됐어요. 사실 제가 씨네필이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시네마테크에 살았던 그때의 제가 생각나더라고요. 화면과 음악이 어우러질 때의 그 특별함이 있거든요. 팝은 3분인데 영화 음악은 훨씬 긴 호흡을 가지고 있어요. 더 많은 드라마를 영화음악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을 안 만나도 돼 좋았어요."
'사람을 안 만나도 된다'는 건 그가 작곡뿐만 아니라 편곡, 연주까지 직접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재일은 감독이 가지고 온 영상 화면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연주하며 곡을 만든다고 했다. 이건 대부분의 영화 음악가의 방식일 것이라고 유추했다.
"화면을 보고 떠오르는 음을 연주하면서 '좋다 좋다'하면서 곡을 만들어요. 신이 10~20분 정도 될 텐데 그렇게 완성이 돼요. 그렇게 음악을 만드는 건 신의 길이에 음악도 정확하게 맞아야 하거든요."

또한 '씨네필 정재일'을 떠올리자 그를 시네마테크에서 살게 했던 인생 영화들도 궁금해졌다. 그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에밀 쿠스트리차의 '언더그라운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속의 풍경' 등을 언급했다.
또한 영화 음악가가 된 현재 가장 존경하는 영화 음악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정재일은 "류이치 사카모토를 단번에 꼽고 싶네요. 예전에 한 번 직업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아 그리고 줄리앙 시나벨 감독도요. '잠수종과 나비'라는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신데 그분은 OST를 아예 선곡으로만 채우세요. 저는 제가 작곡을 하는 사람이지만 연출가가 각본을 쓰면서 생각한 음악이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줄리앙 시나벨의 선곡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라고 앞선 예술가에 대한 아낌없는 존경을 표했다.
봉준호, 황동혁 감독과 각각 두 작품을 하며 자신의 음악적 창의성을 최대치로 보여주고 있는 그에게 이 두 거장은 어떤 의미일까. 정재일은 자신을 '성덕'이라고 표현했다. '남한산성'의 경우 수십 번을 본 최애 한국 영화 중 하나라고 말했고, 봉준호 감독은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오는 2월 공개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의 OST도 작업했다. 이 기대작에 대해 그는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갔고, 백 퍼센트 영어 대사의 영화라는 것 외에는 다른 게 없어요. 봉준호의 영화죠. 감독님이 생각한 걸 또 한 번 제대로 구현하면서도, '이게 할리우드 스타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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