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먼저 간 동지들이 도울 겁니다"
하얼빈역에서 거사를 앞둔 안중근(현빈)에게 공부인(전여빈)이 말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라는 한강 작가의 말이 오버랩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사건의 결말을 안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 건 아니다. 조선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무려 36년이 지나서야 광복을 맞았다. 이 사건은 독립의 향한 조선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작은 불씨였다. 그렇게 모인 의지는 거대한 물결이 돼 세상을 바꾸었다.
영화 '하얼빈'은 낯설지 않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가 스포일러인 탓도 있지만 2년 전 개봉한 영화 '영웅'(감독 윤제균) 때문이다. '영웅'은 2022년 12월에 개봉해 전국 327만 명을 동원했다. 심지어 투자배급사까지 CJ ENM으로 같다. 한 투배사가 같은 소재의 영화를 2년 간격으로 꺼내놓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미 나온 영화를 없는 취급할 수도 없다. 앞서 영화를 본 300만 명이 적은 수가 아니다. 윤제균과 우민호가 현재 업계에서 거절하기 힘든 흥행 감독이라는 것 외에 큰 이유는 없어 보인다.
결국 '하얼빈'은 '영웅'과는 다른 승부수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 '하얼빈'이 내세우는 것은 시, 청각적 기술을 극대화한 체험형 영화로서의 매력과 다채로운 배우들의 열연이다. 또한 '영웅'이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기는 시도를 했다면, '하얼빈'은 첩보 스릴러적 재미를 가미해 장중한 드라마를 펼쳐냈다.
◆ 독립군의 거룩한 행보…'밀정'으로 첩보물 요소 가미
영화의 제목은 '안중근'이 아닌 '하얼빈'이다. 인물이 아닌 인물이 활동한 주 무대를 내세운 것은 보다 폭넓게 시대와 인물들을 다루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인물의 동선이 중요한 영화라는 매체에서 공간은 곧 이야기의 출발이자, 캐릭터의 토대가 된다.
'하얼빈'은 꽁꽁 언 대동강을 건너는 안중근의 지친 발걸음으로 문을 연다. 영화는 이 장면을 엔딩에 한 번 더 보여준다. 수미쌍관의 배치는 독립군의 지난한 여정, 그리고 이들의 멈추지 않은 결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차가운 이미지로 그들의 뜨거움을 보여준다.
안중근 원톱 영화가 아니다. 안중근, 우덕순과 최재형이라는 실존 인물에 이창섭, 김상현, 공부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더해 있었음 직한 허구를 가미했다. 현빈과 박정민, 유재명, 이동욱, 조우진, 전여빈 등이 독립군의 정신과 룩을 재현했다.
현빈이 연기하는 안중근이 주는 집중도와 몰입감이 상당하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이동욱은 생애 최고의 연기를 했다. 박정민은 극에 숨통을 틔우고, 조우진은 자신이 주인공인 장면을 어김없이 만들어냈다.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한 릴리 프랭키의 출연과 호연도 인상적이다. '어느 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등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소시민 캐릭터로 사랑받았던 릴리는 이른바 '늙은 늑대'로 불렸던 이등박문을 스크린에 소환해 냈다. 많지 않은 장면과 대사지만 정중동(靜中動)의 연기로 명배우의 품격을 보여줬다. 배우의 작품 출연에 '용기'와 '결단'을 요하는 흔치 않은 예다. 릴리 프랭키는 일본인 입장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했고 최고의 연기까지 펼쳤다.
영화에는 예상치 못한 카메오도 등장한다. 이야기의 흐름과 톤 앤 매너 측면에서 다소 튄다는 인상을 주는 연기인 만큼 호불호는 갈릴 것으로 보인다.
◆ 익숙한 재미, 느린 전개 vs 영화적 세공 돋보여
'하얼빈'은 오락적 요소로 점철된 장르 영화는 아니다. 독립군의 '숭고한 정신'과 '거룩한 행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이 영화의 시종일관 느리고 진지하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라는 테마를 연출에 투영한 영화다 보니 화면은 대체로 어둡다. 광명의 불빛은 거사의 성공과 함께 잠시 반짝였을 뿐 그 시대는 실제 시종일관 어두웠을게다.
이야기에 구심점이 될 만한 주요 사건은 신아산 전투, 단지동맹, 밀정의 등장과 발각, 하얼빈역 거사다. 무난한 전개다. 이 중 기차 안에서 펼쳐지는 밀정 찾기 시퀀스는 밋밋했던 영화 전개에서 유일하게 긴장감을 조성한다. 동료 세 명을 용의자로 두고 좁은 기차를 넘나들며 밀정을 찾는 장면은 미장센 측면에서는 수려하지만 긴장의 밀도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서 개봉한 '밀정'(2016)의 기시감이 상당하다.
자연을 담은 장면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활동사진과 같은 영화의 활력보다는 풍경화와 같은 심미적 요소가 돋보인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재현한 라트비아의 구시가지는 '베를린'과 '영웅' 등에서 본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만주를 재현한 몽골의 광활한 사막은 한국 영화에서 못 봤던 그림이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쓸쓸함과 막막함, 열망과 두려움의 정서는 광활하지만 척박한 이역만리 타국의 풍광으로 시각화했다. 아리 알렉사 65(ARRI ALEXA 65: 65mm 대형 센서를 탑재해 놀라운 해상도와 다이내믹 레인지를 구현하는 카메라)로 촬영하고, 한국 영화 최초로 아이맥스(IMAX) 포맷으로 만든 제작진의 노력이 돋보인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창작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는 해석이 아닌 재현의 영역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얼빈'도 그 한계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게다가 안중근과 독립군이다. 가공의 폭과 해석의 여지가 제한적인 신화적 인물들에 가깝다.
그래서 '하얼빈'은 영화계 각 분야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음에도 그 공(功)을 능가하는 영화적 매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영화를 두고 '잘 찍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연출이 좋다'고는 하기는 어렵다.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통해 근현대사의 악인들을 주로 그려왔던 우민호 감독은 작품을 더해갈수록 노련해지고 있지만, 그의 영화에서는 늘 '우민호만의 아이덴티티'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순간을 정면이 아닌 부감으로 잡았다. 이런 류의 장면에서 으레 선택하는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우 모션, 감정이 한껏 고양된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워킹은 배제했다. 대신 "까레오 우라(Корея! Ура)"라는 안중근의 굳건한 외침만 크게 울려 퍼진다.
이 장면의 연출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먼저 간 동지들이 이 현장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부감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감정 과잉을 배제한 담백한 연출이었지만 그 의도가 설명 없이는 와닿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공한 전략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 '안중근' 현빈 vs '영웅' 정성화, 같은 캐릭터 다른 매력
"정성화 씨가 '영웅'에서 연기한 안중근 장군과 (제가 연기한 안중근은) 다르다"
현빈은 '영웅'에서 활약한 정성화와의 차별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독립투사 안중근 모습도 담겨있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 고통, 슬픔 등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영웅'으로만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하얼빈'의 안중근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성화는 최고이고, 현빈은 최적이다.
현빈은 최선을 다했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선 최고의 연기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결기와 의지가 그의 얼굴, 외형과 잘 맞아떨어진다. 스타의 얼굴이 스크린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과 주목도를 새삼 느낄 수 있다.
특히 '영웅 안중근'이 아닌 '인간 안중근'에 방점을 찍은 캐릭터 해석과 연기를 보여줬다. 그는 독립군의 리더였지만 자신의 고집으로 동료들을 잃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강인한 의지의 독립군이었지만 때론 나약한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일말의 약점이나 두려움 없는 '영웅'이 아닌 실패를 딛고 일어나 정진하는 '인간 안중근'이 이 영화에 있다.
엔딩은 안중근이 남긴 글을 토대로 한 내레이션이 장식한다. 시종일관 담백했던 이야기와 달리 뜨겁고 직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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