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선감도로 끌려간 아이들 "우리는 부랑아가 아니다"…그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4.04.19 06:29 수정 2024.04.19 10:50 조회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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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아이들은 왜 선감학원으로 갔나.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그 섬에 아이들이 있었다'라는 부제로 선감 학원에 간 아이들의 그날을 추적했다.

2016년 7월, 허일용 씨는 한 야산에서 굴착기까지 동원한 발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뼛조각 일부와 신발을 본 그는 자신의 쌍둥이 형 같다고 했다.

그의 쌍둥이 형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해 50년 만에 유해로 발견된 것. 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일까.

1960년대 초, 미아리에 살던 일용 씨와 그의 형은 할머니와 함께 시장 나들이를 나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할머니 손을 놓쳐버렸다.

그들 앞에 등장한 경찰. 형제는 집을 찾아달라고 했고 금세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미아보호소 등을 거쳐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1969년 여름, 할머니댁에서 지내던 찰떡 형제는 수원역에서 큰 형과 놀다가 형이 일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역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갔다. 미아보호소를 거쳐 어딘가로 이동하는 차. 형제는 할머니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뿐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역시 선감도에 도착했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 엄마가 화장실 간 사이 경찰들은 영수 씨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영수 씨의 이야기에 경찰은 엄마도 조금 있다가 오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영수 씨가 도착한 곳 역시 선감도였다.

그리고 영수 씨는 선감도로 오는 도중 "여기서는 너희 자립시켜 주고 좋은 기술을 가르쳐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선감도의 선감학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일용 씨의 형은 왜 사망했을까. 일용 씨는 형의 이상했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형은 입에 담요 조각을 잔뜩 물고 죽었다는 것. 그의 형은 굶주림에 담요 조각을 먹아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50년이 지난 후에야 찾았다는 것.

시신이 암매장된 곳에는 분묘가 150구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 묻혀있는 이들은 선감학원의 피해자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며 그 인원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선감학원이 밝힌 사망 인원은 20명이지만 분묘는 150구.

선감학원에 온 아이들은 그중 일부만 학교에 보내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역에 동원됐다. 무려 5000평의 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하고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우면 매질과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감학원을 운영한 이는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또한 원생들 안에 서열을 나눠 아이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단무지와 새우젓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반찬이었으며 늘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흙을 파먹고 오물을 먹고 나무 열매, 굴, 메뚜기, 쥐, 개구리 등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부랑아라는 것. 선감학원은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랑아가 아니었다. 정부는 법률적 정의와 단속 기준이 없이 아이들을 수집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은 신원 확인 보호자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허위로 작성된 원아 대장만을 가지고 선감학원에 수용됐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부랑아라는 낙인을 찍고 무려 40년간 운영된 선감학원. 1942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유지된 선감학원.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은 무려 4,689명에 발했다. 그러나 이 숫자조차 정확한 숫자인지도 알 수 없다.

선감학원 아이들은 어둠이 내리면 들리는 곡괭이 자루 끄는 소리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 소리는 폭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선감학원 원생들은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아이들은 힘들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

또한 아이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하는 애들은 극히 소수였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매질을 당하거나 갯벌 상태일 때 뭍으로 가다 밀물이 들어와 그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찰떡 형제 중 형은 동생을 생각하며 견디려고 했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죽으면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그렇게 형은 약을 하나씩 모았고 이를 다 털어 넣던 그때 직원이 이를 막았다.

그리고 그 후 찰떡 형제는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극단적인 상황이 생겨야 선감학원을 나갈 수 있었던 것.

영수 씨는 수차례 탈출시도했고 선감학원에서 3년이 흐른 날 다른 시설로 이동하던 중 달아났다.

당시 선감학원을 취재한 기자는 내부 제보를 받아 선감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인권 유린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날 다시 방문한 선감학원은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몇 차례 문제점이 보도되었지만 개선되는 것은 없었던 것. 이는 이 문제를 알고 있는 이들이 묵인하고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찰떡 형제는 각각 시설에서 도망을 쳤고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진짜 부랑아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족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영수 씨 가족을 찾으려 애썼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4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형을 다시 만났다.

한눈에 형제임을 알아본 두 사람. 영수 씨는 형에게 자신을 찾았는지 물었다. 이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영수 씨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새웠음을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형을 만나기 불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묘를 찾은 영수 씨. 그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용 씨는 가족을 찾지 못했고 찰떡 형제는 다행히도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찰떡 형제의 형은 아직도 가끔 선감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당시 외로움을 함께 견뎌냈던 친구 망치가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 그리고 지난해 그는 친구를 찾았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유해와 유품들 중에서 망치의 유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항상 함께 굴을 까먹을 때 썼던 굴 까던 도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현장으로 찾아간 형은 친구의 유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근 선감학원의 유해 발굴을 직접 추진하기로 한 경기도. 그리고 진화위에서는 선감학원과 관련된 기관에 모두 인권 유린 책임이 있다며 공식적 사과를 권고했다.

현재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 하지만 도의 예산이라 경기도 거주자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국비 지원을 계속 추진 중이지만 현재 그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방송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미래의 아이들의 꿈은 지켜주길 당부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범하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며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한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기본적인 권리하나 누리지 못한 아이들의 삶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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