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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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한약방 청년' 엄창록, 어떻게 대통령들이 찾는 '선거판의 여우'가 됐나

강선애 기자 작성 2024.04.12 12:54 조회 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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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1일 방송된 '선거판의 나이트(knight)'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맨 정성호, 가수 김종민, 배우 정영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최연소 정치범

때는 1971년 1월. 서울의 한 중학교 수업 시간이야.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그때, 갑자기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더니 학생주임 선생님이 "이 반에 김홍준이라고 있지? 당장 짐 싸서 나와"라고 말해. 홍준인 영문도 모른 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어.

그런데 선생님이 다짜고짜 "너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라며 "경찰이 널 찾는다. 빨리 피해!"라고 말해.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선생님 말 그대로야. 학교 정문에 경찰이 쫙 깔려 있어. 고민할 겨를이 없어.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학교를 빠져나가야 해. 홍준이는 경찰의 눈을 피해 후문으로 도망쳤어.

학교에서 허탕을 친 경찰들은 홍준이의 집으로 찾아갔어. 결국 홍준이는 경찰서로 연행됐어. 홍준이는 "전 아무 짓도 안했다구요!"라고 소리쳤어. 교복 입은 어린 소년의 울부짖음이 쩌렁쩌렁 울려. 중학생 소년 하나를 데려가기 위해 지프차 다섯 대, 그리고 무려 80명의 경찰이 동원됐어. 대체 홍준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소동이 벌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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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에 실린 홍준이의 모습이야. 발부된 구속영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피의자 김홍준(15)은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자로서 인근 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야기케 함은 물론, 일부 국민 등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 같이 인식케하는 등 사회 공안을 문란케한 자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자임."

정치적인 폭력 사태? 당시 홍준이 나이가 만으로 열세 살. 국내 최연소 정치범이 됐어. 그야말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지. 지금부터, 홍준이에게 벌어진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김대중 자택 테러 사건

1971년 1월 27일, 그날은 설을 앞둔 때였어. 할머니의 놀러 오라는 부름에 홍준이가 큰집으로 달려왔어. 평소에도 텔레비전을 보러 자주 할머니 집에 놀러 가곤 했대. 이날도 홍준이는 가족과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켰어. 마침 인기 있는 가요 프로그램이 흘러나와. 흥겹게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때, 밖에서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렸어. 갑작스런 굉음에 집안은 아수라장이 됐어.

누군가 "보일러가 터진 거 같다"라고 말했어. 그 말에 식구들이 보일러실 쪽으로 달려갔어. 그런데 걱정했던 보일러는 멀쩡해. 그렇게 보일러실에서 돌아 나오는데, 반대쪽 뒷마당 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하얀 연기도 자욱해. 그리고 찾아냈어. 뭔가가 폭발하고 남은 검은 흔적을. 당시 현장의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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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보여? 사건 현장이라기엔 말끔해 보이지? 소리가 요란했던 거 치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아. 유리 한 장 안 깨졌어. 바닥에 약간의 흔적만 남았을 뿐이야. 천만다행으로 다친 사람도 없어. 마치 도깨비장난 같았달까. 그런데 말야, 다음 날부터 이 사건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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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떼같은 사람들이 이 집으로 몰려와. 모든 일간지 1면 도배야. 왜 그랬을까? 평화로운 가정집에 폭탄 같은 게 터졌는데, 다친 사람도 없고 피해가 미비해. 물론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일이긴 하지. 근데 그게 다가 아냐. 사실 여기 집주인이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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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엔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유력 대선 후보였어. 그런 분 집에 폭탄이 터진 거야. 그러니 피해가 작든 크든, 그게 문제가 아냐.

그날 폭탄은 어디서 어떻게 터진 걸까. 이제 그 사건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게.

▲ 수상한 폭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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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사건이 발생한 장소, 김대중 의원의 동교동 자택이야.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정문과 후문 두 개. 담벼락 위엔 가시철조망까지 쳐져 있고 높이가 2미터나 돼. 정문 옆엔 경호실까지 있어. 정치 테러가 많던 시절이라 사설 경호원을 직접 고용했대. 그야말로 철통보안이야. 이곳에서 사건이 발생한 건 밤 9시 37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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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선 김대중 의원의 셋째 아들 김홍걸, 조카 김홍준, 김홍민, 비서 김 씨, 가정부 조 양. 이렇게 다섯 명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 김대중 의원의 어머니는 건넛방에서 취침 중이야.

이 시각, 경호원들은 화투를 치고 있었대. 당시 쉬는 시간에 가끔 화투를 치곤 했대. 한참 휴식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린 거야. 당시 경호원으로 근무하며 현장을 목격한 분을 어렵게 만나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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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일러가 터졌는 모양이라고 소리치고 나간 거야. 이제 뻥 하는 소리가 났다고요. 아주 굉장히 크게 난 것 같아. 우리 그 뻥튀기 있잖아요. 그 소리보다 좀 약했을까? 뭐 순식간에 이제 뭐 기자들 오고. 집안에 사람이 맨날 찼으니까 어수선해 가지고. 뭐 한전에서도 오고. 내가 나중에 보니까 한전에서 온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수사)기관에서 왔더라고…"
- 박문옥,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원

사건 직후 수사본부가 꾸려졌어. 사건을 중대하게 판단한 거야. 현장에서는 폭탄의 잔해가 발견됐어. 이 폭탄의 정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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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본 적 있어? 당시 어린이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 딱총화약이야. 수사팀은 이 완구용 딱총화약이 폭발물이라는 분석을 내놨어. 딱총화약을 까서 헝겊에 싼 다음에 비닐 테이프로 감아 만든 거래.

이 폭탄, 어디서 날아온 걸까? 폭발물이 떨어진 위치를 보면, 각도상 후문 쪽에서 던진 걸로 추정돼. 누군가 딱총화약에 불을 붙여 후문 쪽 밖에서 던졌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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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상하지 않아? 테러라는 건 어떤 대상에게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행하는 거잖아. 그런데 이 폭탄엔 위력이 없어. 결정적으로 유력한 테러 대상인 이 집 주인도 부재중이야. 당시 김대중 의원 부부는 닉슨 대통령의 초대로 미국 방문 중이었거든.

그렇다면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한 걸까? 현장검증 당시 경호실장은 묘한 얘길 하나 들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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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을 하니까 나는 이제 그 집에 어차피 근무하는 책임자니까.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보는데, 문 쪽을 이렇게 보시더니 '아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이 던졌구만' (담벼락) 2미터 정도 되는 거 돌만 던져도 들어가고 아무라도 던지면 마당에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그런 엉뚱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이 던졌구만.'"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실장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이 던졌다, 이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만 늘어가던 그때, 김대중 의원 자택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어. 사건 발생 6일째 되던 날의 일이야. 과연 여기에 범인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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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알리지 마라. 세상에 알리면 대중이 귀국하는 날 폭사시키겠다. 경비원은 자기가 폭탄을 던진 것처럼 자수하라. 만약에 불응하면 경비원도 죽여버리겠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 두고 보라. 너희들은 이번 선거에 실패한다."
-협박 편지 내용 中

김대중 앞으로 온 이 편지는 초등학생 필체로 쓰여 있었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물론 협박 편지를 보낸 자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 그러나 여기엔 범행목적으로 짐작할 만한 이유가 드러나 있어. 그래, 선거야. 이때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석 달 앞둔 때였거든.

이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가장 뜨거운 라이벌전으로 달아오르고 있었어. 야당인 신민당 후보는 김대중. 상대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대통령이었어.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개정했어. 바로 3선개헌이야. 이미 재선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개헌으로 한 번 더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게 된 거야. 당시 김대중은 이를 날카롭게 비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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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이 무엇이냐,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 독재국가로 이 나라의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요."
-김대중, 1969.7.19. 효창운동장 삼선개헌반대 시국대강연회 中

개헌 반대 여론 속에서 김대중 후보는 돌풍을 일으켰어. 이런 접전 속에, 김대중 측은 '혹시 저쪽에서?'라고 의심했어. 얼마 전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김영삼 의원도 귀가 중 질산 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어. 그러니까 이 사건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거지.

의심받은 쪽은 펄쩍 뛰었어. 중정과 경찰도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대. 그러는 사이,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어.

▲ 용의자가 내부에 있다?

계속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좀처럼 특정되지 않았어. 그러자 수사의 방향이 달라져.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오른 거야. 처음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은 이희호 여사의 운전기사. 그날 운전기사가 집에 들어가고 2분 뒤에 폭발 사건이 발생했거든. 결정적으로 의심스러운 정황도 있었어. 그가 집에 들어간 뒤로 대문이 열려 있었던 거야.

범인이 들어올 수 있게 일부러 대문을 열어둔 거 아니냐고 추궁하자 운전기사는 정말 억울해했어. 하필 집에 오자마자 폭발물이 터진 건 우연일 뿐이래. 그는 경찰서가 아닌 한 호텔로 끌려갔어. 호텔에서 조사를 받는데, 여러 명의 수사관에게 빙 둘러싸여 있어. 그리고 난데없이 물소리가 들려 와. 누군가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야. 엄청난 공포가 느껴지겠지? 그 순간, 구세주 같은 존재가 나타나.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조사받는 호텔까지 쫓아와 문을 열라고 한 거야. 만약 기자들이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운전기사는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간담이 서늘하대.

"호텔 조사를 받는데 지금도 좀 끔찍한 게 목욕탕 물을 딱 받더라고. 뜨거워서 손도 못 댈 정도로 딱 받아가지고, 이제 쑤셔 넣으려고 이제 시작하는데. 신문 기자들이 와서 문을 안 열어주니까 빠루(쇠 지렛대)로 갖고 막 제치더라고. 제치니 이 사람들이 거기로 뒷문으로 해 갖고 싣고 나왔어 나를. 그 후로는 어디를 갔는지 몰라, 내가. 나는 신문기자들이 살려줬어. 그때 물고문 그거 했으면 끝났을 거야 아마. 내가 유서까지 썼거든. 유서까지."
- 당시 이희호 여사의 운전기사

이 공포의 조사, 당시 영장도 없이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가서 무려 130시간이나 조사를 받았어. 수사본부는 이 폭발 사건이 선거를 앞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자작극이 아니냐고 의심했던 거야.

"상황 판단하기 위해서 잡아들이는 거지 뭐."
- 당시 이희호 여사의 운전기사

"세 사람이 따로따로 연행됐는데, 가보니까 같은 자리예요. 말하자면 강력수사를 하는 그런 안가(安家). 거기 이제 잡혀가서 밤새워 조사도 받고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다니까. 주변 사람들 다 받았어요."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실장

그리고 얼마 뒤, 수사본부가 이 사건의 범인을 특정했어. 누구였을까? 그래, 홍준이야. 열다섯 살 소년이 폭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된 거야. 홍준이가 범인으로 몰린 건 가정부 조 양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어.

"테레비를 보다가 어느 순간... 홍준이가 옆에 없었던 것 같아요."
-가정부 조 양의 증언 中

분명 홍준이가 옆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폭발 2분 전 자리를 비운 것 같대. 이상했던 건 그뿐만이 아니래.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쓰레기통에서 빨간색 화약 종이를 발견했다는 거야. 수사본부는 조 양의 진술을, 범인이 집 내부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로 봤어. 폭탄을 누가 밖에서 던진 게 아니라는 거야.

수사본부 측은 사건의 전모를 이렇게 정리했어. "평소 폭죽놀이를 즐겨하던 홍준이가 선거를 앞두고 테러 행위가 일어난 척 폭발물을 터뜨렸다"고. 이 얘기, 어떻게 생각해?

연행되어 간 홍준이. 정신을 차리니 경찰서 조사실이야. 수사관들이 책상 위에 포승줄이랑 물 주전자, 모포,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올려둬. "바른 소리 안 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라며 윽박지르는 경찰, "똑바로 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거야"라며 달래는 경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홍준이가 겁을 잔뜩 먹었어.

고작 열다섯 살이 경찰서에 끌려갔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어. 경찰은 홍준이를 몰아붙이기도, 살살 타이르기도 했어. 결국 그날 홍준이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주고 말아. 그리고 차가운 독방에 수감됐어.

앞서 홍준이가 의심받은 결정적 이유가, 가정부 조 양의 진술이었지? 근데 막상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조 양이 말을 바꿔. 철야 심문에 지친 나머지 거짓 증언을 했다는 거야. 하지만 수사는 멈추지 않았어. 최연소 정치테러범에 대한 구속적부심 심사가 열렸어. 구속하는 게 합당한지 법원이 심사하는 거야. 이날 재판부는 재판사상 처음으로 병원으로 출장을 나갔어. 홍준이가 고열에 시달려 입원을 한 상태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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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조카 홍준이는 강압에 못 이겨 허위 진술을 한 거라고 증언했어. 구속적부심 심사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김 군의 구속적부심사 임상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병실 입구엔 경찰관 30명이 삼엄한 경비를 폈다. 병실 안의 김 군과 어머니 민 씨에게 석방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이날 오후 4시 35분. 김 군은 링겔 주사를 맞다가 눈물을 흘리며 '경찰관 아저씨, 빨리 나가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결과는 석방. 구속을 소명할 자료 미흡이 이유였어. 홍준이가 풀려났지만, 수사본부 측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어. 심지어 "김 군이 범인인 건 틀림없다. 반드시 배후조종자를 찾아낼 거다"라고 주장해. 이 사건이 처음부터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된 조작극이라는 거야.

▲ 조직의 명수, 엄창록

그 무렵, 국회에서도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어. 이 사안을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라 판단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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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조직의 명수요, 조작극의 전문가인 김대중 의원의 보좌역인 엄창록이의 소행이다. 이와 같은 소리가 많이 의심이 짙고 있습니다. 엄창록에 대해서 수사를 해봤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 이것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971.02.02. 국회특별조사위원회 의원 질의 中

공화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엄창록이 꾸며낸 일 일 거라고 주장했어. 엄창록. 이제부터 이 이름을 잘 기억해 둬야 할 거야. 지금껏 세상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엄청난 별명을 가진 문제적 인물이거든.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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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록은 김대중 의원의 비서야. 김대중 의원은 그를 '엄 동지'라고 불렀대. 그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어. 공식적인 기록은 '서대문 거주, 함경북도 출신'이란 것 말곤 알려진 게 거의 없었거든.

사건 당일 그는 집에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듣고도 통금시간 때문에 현장에 가진 못했대. 확실한 알리바이지. 그런데도 특조위에선 그에 대한 질의응답이 장장 4시간 넘게 오갔어. 왜 그랬을까? 앞서 이 사건을 내부소행으로 의심했다고 했잖아. 만약 김대중 측 자작극이라면? 틀림없이 배후에 이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공화당 의원들은 엄창록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부어. 근데, 질문들이 좀 이상해.

의원 "조직의 명수라는데 이북에서 배운 겁니까?"
엄창록 "사회에서 나를 조직의 명수라고 인정할지 모르나 나는 전문가가 아니오."
의원 "조직원리, 조직 비결이 무엇이오?"
엄창록 "충실하게 정도를 걷고,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이 조직 비결이오."

사건과 관련 없는 선거 조직 관리에 대한 질문들이 튀어나왔어. 하다 하다 이런 말까지 나왔대.

의원 "당신과 밤새워 토론하고 싶은 심정이오. 사석에서 만나 우리 얘기합시다."

이런 질문들에 엄창록은 가만히 미소만 지었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대화가 나오는 걸까. 엄창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얘길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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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참모죠. 조직 총지휘자. 엄창록이를 한 번 만나보셨어야 하는데…인상은 얼굴 딱 보면 냉기가 그냥 진짜 아주 싹 돌 정도로 아주 냉철하고, 인상도 그렇고 성격 자체가 그렇고. 근데 머리 회전이 기가 막히게 빨라요."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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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말해 전설적인 인물, 조직의 명수라고 해가지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사람이야. 꼭 젓가락 같아. 그러니까 소문이 어떻냐면은, 공화당 국회의원도 엄창록 씨한테 잘못 보이면 떨어뜨린다,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엄창록 씨한테 상당히 반갑게 해요. 그래서 깜짝 놀란 거지. 괜히 하는 소리는 밉보이지 않으려고 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죠 그 사람이."
-박문옥,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원

엄창록은 역대 대통령들의 러브콜도 받았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세 명에게. 그에게는 특출난 능력이 있었어. 별명도 여러 개야.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 그리고 '마타도어(흑색선전)의 귀재'. 선거판에서 그의 명성이 어땠는지 짐작이 가?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야. 엄창록은 어쩌다 이런 별명을 얻게 됐을까? 그에게는 기막힌 선거 전략과 조직을 다루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어.

엄창록의 손을 가장 먼저 잡은 사람, 김대중 전 대통령이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61년 강원도 인제였어. 엄창록은 당시 한약방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대. 당시 김대중 후보는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함께 할 동료를 찾고 있었어. 소문을 들은 김대중이 엄창록에게 동료가 되어 달라 손을 내밀어. 그렇게 도전하는 정치인과 똑똑한 한약방 청년이 만났어.

당시 김대중 후보는 계속된 낙선으로 빚이 쌓여가던 상황이야. 그런 상황에서도 엄창록의 병원비를 대신 내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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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기로는 엄창록 씨가 몸이 많이 나빴는데 병원비가 좀 그랬던가 보죠. 그걸 김대중 선생이 부담을 해줬던가 봐요. 도움을 많이 줬나 봐요. 그러니까 그것이 인연이 되어가지고 계속.. 어떤 일을, 안을 내세우면 엄창록 씨 쪽의 안은 무조건 받아들일 정도로 신뢰가 깊었던 것 같아요."
-박문옥,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원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겠지? 엄창록도 그 확신에 보답했어. 두 사람이 힘을 합친 첫 번째 선거에서 반전이 일어나. 인제 보궐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된 거야. 4전 5기. 무려 다섯 번째 도전 끝에 얻은 쾌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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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선 3일 후, 5.16이 일어나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했어.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갔어. 우선 사태를 파악해야 하니까. 국회는 해산됐고, 결국 김대중 의원은 의석에 앉아 보지도 못한 채 당선은 물거품이 됐어. 그렇게 기회를 또 놓쳤어.

▲ 목포의 전쟁

그리고 5년이 흘렀어. 두 사람은 다시 힘을 합쳐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어. 이 선거는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는데, 특히 한 지역에 관심이 집중됐어. 바로, 목포야. 목포의 선거는 '목포의 전쟁'이라 불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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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선거가 아니고 전쟁이라고 한 것은 목포 선거뿐이에요. 목포 시민들이 투표하러 간 걸 폭력으로 막고 못 가게 하고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권노갑, 전 국회의원, 당시 김대중 의원 참모

이곳의 치열한 선거전은 연일 대서특필이야. 당시 목포 선거는 후보가 강력했어. 김대중과 김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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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후보는 군인 출신인데 내각사무처장을 지낸 인물로, 정부의 핵심 인사였어. 당시 목포엔 각하의 특명이 하나 떨어졌어.

"공화당 의원 열 명, 스무 명이 안 돼도 좋소. 김대중만은 반드시 떨어뜨리시오."
-박정희

김대중과 박정희,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된 건 박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때부터야. 당시 김대중은 박정희 후보가 대선 후보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어. 군인을 퇴역하기 전 공화당에 입당한 걸 문제 삼은 거야. 그 뒤로도 김대중은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면, 사사건건 문제점을 지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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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씨의 잘못된 거 철저히 조사해서 매일 치니까, 박정희 씨가 굉장하니 DJ(김대중)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해요."
- 당시 김대중 선거캠프 관계자

박 대통령은 김병삼 후보의 전폭적인 지지와 유세를 이어가.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국무위원들을 이끌고 목포에 내려왔어.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주재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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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합법적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다수당이 돼야 돼요. 그 선거를 계기로 해가지고 거대 정치 세력 여당을 만들려고 박정희 대통령이 계획한 거죠."
-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당시 김대중 의원 참모

목포에 통 큰 선물 보따리도 풀어. 일단 다리를 하나 지어주기로 해. 그리고 공장도 유치해 줘. 내친김에 비행장 설치도 진행하라 해. 지역사회 개발론을 내세워 가는 곳마다 화려한 공약들을 내걸었어. 일단 화려한 기공식부터 열어.

"다리를 놓는다고 정일권 국무총리가 와서 기공식을 했어요. 선거를 위해서 한 기공식이었는데, 기공식을 하면 그게 발파가 돼야 돼. 이게 터져야 되는데 기공식 버튼을 눌렀는데 안 터져버렸어."
- 한화갑, 당시 김대중 의원 참모

박정희 대통령은 목포역 광장에서 1만 명을 모아놓고 김병삼 후보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어. 그리고 마을에선 유권자들을 모아두고 매일 막걸리판이 열려. 그리고 선물로 고무신을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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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가 보급되기 전까지 고무신은 국민신발이었어. 고무신 가격은 약 300원 정도.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100원이었대. 비싼 만큼 고무신의 효과는 확실했어.

▲ 선거판의 여우

선거판 한쪽은 잔칫집인데, 다른 쪽 분위기는 초상집이야. 엄창록은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맸어. 이대로라면 선거에서 질게 불 보듯 뻔해. 고민 끝에 엄창록은 목포에 투입할 비선 조직을 꾸렸어. 그리고 여관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20여 일 간 특별 교육을 시켜. 이들이 한 선거운동은 일반적인 선거운동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어.

첫 번째 전략은 일명 '줬다 뺏기' 전략이야. 신민당원들이 전날 공화당원들이 휩쓸고 간 집 대문을 두드려. 그리고 공화당에서 나왔다며, 어제 고무신을 잘못 드린 것 같다며 수거해 가. 애초에 안 받았음 모를까, 줬다 뺏기면 기분이 어떨까? 너무 치사하지. 그걸 노린 거야. 그리고 다음 날, 그 집에 이번엔 신민당원 복장으로 다시 찾아가. 그리고 전날 회수한 고무신을 건네며 "김대중 후보 잘 부탁드린다"고 말해. 이런 식으로 내 돈 한푼 안들이고 상대방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방어해.

엄창록의 두 번째 전략은 '돈봉투'야. 공화당원인 척 하면서 김병삼 후보 이름으로 봉투를 건네. 봉투 안에는 지금 돈의 가치로 1천원 정도를 넣어 놔. 성의 표시라기엔 좀 치사한 액수의 돈이지. 이렇게 돈을 받는 쪽의 빈정을 팍 상하게 만들어버려.

그리고 이런 방법도 써. 담배를 같이 피우자고 하며 상대방에게 국산 담배를 권해. 그래 놓고 본인은 양담배를 꺼내 피우는 거야. 유권자에겐 국산 담배를 주고, 비싼 양담배를 피우는 공화당원. 어떻게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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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록이 이런 식의 흑색선전만 했던 건 아냐. 요즘 시대에 참고할 만한 마케팅전략도 있어. 선거운동원이 유권자의 집을 방문할 때, 엄창록은 꼭 화장실에 가라고 했어. 세수하는 척 화장실에 들어가 일부러 고급 비누를 두고 가는 거야. 집주인 입장에선 비누를 쓸 때마다, 좋은 향을 맡을 때마다 김대중 얼굴이 떠오르겠지?

이 무렵 목포에선 집집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집 대문마다 'O, X, △' 이상한 기호가 적혀 있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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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화당에서 집집마다 공화당 지지자의 집은 ○표, 중립은 △표, 신민당을 지지하는 집에는 X표, 이런 식으로 표시를 해둔 거야.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당시 공화당은 목포에만 약 2억 원의 자금을 쏟아부었대. 그러니까 이건 지지자에게 돈을 건네기 위한 암호 같은 거야. ○표인 집에는 돈을 많이, △표에는 적게 돌리게 했어. '상대 후보가 목포 곳곳에 돈을 뿌리고 있다'는 소식은 엄창록의 귀에도 들어갔어. 그는 이를 역이용할 묘수를 생각해 내.

밤에 집집마다 찾아가 몰래, 대문에 적힌 ○표를 X표로, X표를 △표로, △표를 ○표로 바꿔 표시해 놓은 거야. 이러면 받아야 할 사람은 돈을 못 받고, 신민당 지지자에게 돈이 뿌려지게 돼. 엄창록은 부정선거엔 정당한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런 꾀를 생각해 낸 거야.

이렇게 치열했던 선거전이 끝나고, 마침내 그날이 왔어. 1967년 6월 8일,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어. 너도나도 투표장에 나왔어. 유령까지 와서 투표를 했다고 하니, 말 다했지. 이게 무슨 말이냐고? 주민등록상 사망신고 된 사람이 버젓이 투표권을 행사 해. 이 선거는 '6.8 부정선거'라고 불릴 정도로 부정이 난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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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소에서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 개표 중 갑자기 전등이 꺼진 거야. 한두 번이 아니야. 알 수 없는 이유로 세 번이나. 혹시 '올빼미 투표'라고 들어본 적 있어? 부정 투표가 판을 치던 시절 붙여진 이름이야. 불을 꺼버리고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일이 종종 있었거든.

다행히 이번에는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 엄창록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거든. 바로 손전등. 엄창록은 이 상황까지 예상한 거야. 개표장의 불이 꺼질 때마다 신민당원들은 이 손전등을 꺼내 들어 어둠을 틈타 표 바꿔치기 시도를 원천봉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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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목포의 전쟁은 누가 승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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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는 공화당의 압승. 하지만 목포는 달랐어. 29,279표 대 22,738표로, 신민당 김대중이 이겼어. 김대중이라는 정치적 스타가 탄생한 순간이야. 동시에, 엄창록이라는 선거의 귀재가 제대로 진가를 발휘한 선거였어. 이 선거를 계기로 김대중 후보는 엄창록과 손을 잡고 더 큰 도전을 하게 돼.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거야.

▲ DJ vs YS, 그리고 엄창록의 작전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을 먼저 거쳐야 해. 당내 경선에서 이겨야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어. 그런데 그 경쟁이 만만치 않아. 신민당 내에서 진짜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거든. 또 한 명의 강력한 라이벌. 부산에 지역구를 둔 스타 정치인, 김영삼 의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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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어. 그 이유였을까. 1차 투표에선 김영삼 의원이 무난하게 승리했어. 사람들은 결선 투표에서도 김영삼 의원의 승리를 점쳤어. 그런데 투표 결과 51.8% 대 46.4%로,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후보로 뽑혔어. 어떻게 이겼을까? 그 방법을 알려면 일단 정당 내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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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70년대 정당 내 구성원들의 관계도야. 여기서 키를 쥔 인물은 바로 대의원이야. 대의원은 일반 당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대통령 후보 선거권을 갖고 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각 지역의 지구당위원장. 이들이 대의원의 지명권을 갖고 있었거든. 그래서 당시 김영삼 의원 측은 지구당위원장을 끌어들이는 작업을 했어. 지구당위원장을 포섭하면, 대의원들도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거야.

여기에 엄창록은 정반대 전략을 짰어. 직접 표를 가진 대의원을 설득하기로, 밑바닥 표부터 훑기로 한 거야. 이를 위해 엄창록은 다시 한번 비밀조직을 꾸렸어. 전국 각도에 철저히 교육받은 여러 명의 조직원을 파견해. 그럼 어떻게 대의원을 설득했을까?

일단 대의원을 마주치면, 냅다 큰절부터 올렸어. 30, 40리 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는 날엔 일부러 우산도 안 써. 비를 쫄딱 맞은 그 모습으로 대의원들을 찾아가. 이른바 감동 작전을 펼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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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주소를 가지고, 산골이고 바닷가고 집집마다 찾아간 거예요, 한 100여 명을. 그때 당시 제일제당에서 3키로짜리 백설탕이 나왔어요. 방문하는 집마다 백설탕을 하나씩 사 들고 가요 나는. 가서 무조건 큰 절을 해. 제가 그때 20대 30대 초기인데 노인네든 젊은이건 무조건 큰 절을 하고..."
- 한화갑, 당시 김대중 의원 참모

그렇게 대의원들을 하나하나 포섭해 나가던 어느 날, 경기도 쪽 조직원 한 명이 얼굴이 벌게져서 문을 쾅 열고 들어와. 그리고 대의원 명단을 책상 위에 휙 내던져. 명단에 있는 주소를 보고 기껏 힘들게 찾아갔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거야. 이 말을 들은 엄창록의 반응은 어땠을까? 시험 통과야. 일부러 그런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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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록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조직원 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조직원들이 제대로 활동하는지 알 수 없잖아? 활동하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이런 작전을 생각해 낸 거야. 일명 '두더지 작전'. 대의원 명단에 가공의 인물을 한 명 숨겨두는 거야. 예를 들어 대의원이 다섯 명이라면, 가짜 인물을 한 명 추가해서 여섯 명으로 명단을 만든 뒤 조직원에게 전달했어. 이 명단을 보고 한 명 한 명 찾아갔다면, 명단 속 가짜 인물이 누군지 찾아낼 수 있겠지. 엄창록은 이걸로 조직원의 활동을 평가했어.

▲ 사라진 엄창록

이쯤 되니, 그의 명성은 중앙정보부의 귀에도 들어갔어. 선거판의 말을 움직이는 자가 누군지 드디어 알게 된 거지. 작전명은, '선거판의 여우를 생포하라'. 이 과정에서 김대중 의원의 자택에 폭탄이 터진 거야.

대선을 3개월 앞두고 발생한 이 사건은 단숨에 대선판을 뒤흔들었어. 당시 수사 대상에 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질문을 받았대.

"엄창록 씨는 언제부터 알게 됐습니까?"
"엄 씨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시오."

계속 엄창록에 대해 물어. 수사기관은 폭발 사건과 관련 없는 대통령 선거 전략, 각자 담당하는 임무, 조직 체계 같은 것에 대해 캐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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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서 자작극으로 했기 때문에 범인을 잡자 하는 그거보다는, 주변 인물들하고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거를 앞두고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그러니까 결국 그게 조직을 점검하는 그런 결과가 됐잖아요. 폭발물 준비를 안 했으니까 그 시간에 나는 누구 만나 뭐했다, 그 측근들의 동향이 금방 나오잖아요? 그거 때문에 한 거예요."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실장

이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은 사람은 51명. 모두 김대중 의원 측 관계자였어. 그리고 그중 가장 집요한 추궁을 받았던 인물이 엄창록이야. 그의 아내와 가정부까지 조사를 받았으니까. 김대중 의원 측의 주장대로, 선거조직을 파헤치려는 조작극이었을까? 이 사건은 누가 했을까?

그 무렵, 엄창록 주변엔 이상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어. 항상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미행을 당했대. 심지어 대낮부터 헬리콥터가 나타나 엄창록의 집 위를 저공 비행한 적도 있었대.

"후보를 수행하고 갔는데 코리아 호텔로 들어가시더라고. 조직팀을 모으라 해서 이제 집합했나 봐요. 갔더니 조직팀들이 다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게, 엄창록 씨가 가지고 있는 서류가 있다 이거지. 그때 엄창록 씨가 못 나오고 있었던가 봐요 집에서. 지붕 위에 헬리콥터가 돌아다니고. 집에서 나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난 그때 알았어. 이 사람한테 문제가 있는 것을."
-박문옥, 당시 김대중 의원 경호원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분의 증언도 있어.

"중앙정보부가 그를 회유할 때 그의 집 앞에는 육군헌병들이 보초를 서 사람들을 막았고, 헬기가 집 앞 상공에 떠서 시위를 해 주민들이 항의도 했어요. 당시 정보부장인 이후락이 '당신이나 나나 오야붕(우두머리)을 모시는데 나는 나를 인정하는 지도자를 갖고 있고 당신은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갖고 있지 않느냐. 나하고 일을 하자'고 회유했다더군요."
- 김대중 부산조직책 서호석의 증언

1971년 4월 16일. 신민당 선거 캠프에 비상이 걸렸어. 엄창록이 연락두절이야. 그날은 중요한 회의를 하기로 한 날이었어. 핵심 참모가 잠수를 탔으니, 얼마나 난리가 났겠어. 참모 중 하나가 직접 엄창록의 집을 찾아갔어. 근데 엄창록은 없고, 아내 혼자 울고 있더래. 아내는 어떤 사람들이 남편을 데려갔다고 말했어.

"하루 종일 이틀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전화해도 안 받고 그래서 제가 그 집에 갔어요. 부인이 그때 네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약간 '어디 가서 좀 대화 좀 하자' 하고 출근을 하는 날인데 모시고 갔대요. 그러면서 부인한테 '곧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때까지 동교동에 연락하지 마시오' 했던 거예요. 또 한 이틀 있다 가보니까 이미 이사 가버렸어요 집이."
-당시 김대중 선거캠프 관계자

엄창록은 그날 감쪽같이 사라졌어. 대선을 열흘 앞둔 날의 일이었어.

▲ 엄창록의 행방은?

핵심 참모의 부재에 김대중 캠프는 술렁였지만, 선거 날은 다가왔어.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김대중 후보는 서울 장충단 공원을 찾았어. 이날, 현장에 무려 백만 명이 모였대. 그만큼 선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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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의 독재 체제를 단호히 일소할 것입니다. 여러분! 7월 1일은 청와대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식을 올리는 날입니다. 7월 1일날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김대중, 1971년 4월 18일, 장충단 연설 中

박정희 대통령은 더 높은 고도성장, 가난과 빈곤을 추방하기 위해선 경제건설이 필요할 때라고 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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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이 튼튼해야만 경제건설이 됩니다. 또 경제 건설이 잘 돼야만 우리의 국방을 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겁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 대전 선거 유세 中

'목포의 전쟁'에 이은 두 번째 전쟁이야. 3선이냐,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이냐. 두 후보 모두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싸움이야. 열기는 점점 고조돼. 그렇게 운명의 날이 밝았어.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의 날이.

박정희 대 김대중. 개표는 이틀 뒤 정오가 지나서야 완료됐어. 역사가 스포일러니까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 박정희 6백 34만 2828표, 김대중 5백 39만 5900표. 약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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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엄창록이 있었다면,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치열했던 선거 이후, 묘한 얘기가 떠돌아. 이 이야기는 선거 직전 경상도 지역에 뿌려진 정체불명의 유인물에서 비롯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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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인이여, 단결하라!"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경상도 지역 생산 OO치약 불매운동"

보면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문구들이야.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추측했어. 엄창록이 사라진 후에 이런 유인물이 돌았고, 이 것이 만약 선거전략 중 하나라면, 엄창록스러운 선거전략이라는 거야. 그리고 이 유인물이 지역감정을 최초로 선거에 이용한 사례로 보기도 해. 그래서 엄창록을 '지역감정의 설계자'라 말하기도 해. 하지만 실제로 엄창록이 기획한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사라진 엄창록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대선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엄창록이 돌아왔어. 멀쩡한 모습으로 말야. 그런데 돌아온 그는 어딘가 이상해졌어. 김대중의 참모들이 모인 동교동엔 발걸음도 안 하더래.

한번은 우연히 길에서 신민당원을 마주쳤대. 그동안 어찌 된 거냐 물으니, 엄창록은 지금껏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했어.

"여당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김대중의 조직 참모 엄창록을 회유해 우선 200만원으로 병 치료와 요양을 구실로 속리산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엄창록의 명단에 따라 사조직을 완전히 밝혀냈다. 엄창록은 그 대가로 2,000만원을 받았고 선거 후 생계도 책임지도록 했다."
- 초대 국정원장 이종찬 회고록 중

엄창록이 돈을 받고 중정에 협력했다는 얘기야. 엄혹한 시절이었잖아. 만약 목숨을 위협받았던 상황이 맞다면? 실제 회유를 당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순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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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분이 엄창록 씨하고 아는데 간접적으로 선거 끝나고 나보고 한번 만나자 한다고 그럽디다. 왜 그러냐 하니까, 자기가 하소연할 것이 있다고. 자기는 권력에 의해 당했지 내 본심은 그거 아니다, 이 말을 하려고 그랬던가 모르고 내가 거절했었어요. 그때 내가 판단하기로는 이 사람이 정말로 할 말이 있다면은 자기가 자진해서 선거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내가 도리가 없었다, 그 말을 하려고 그랬던 거 아닌가…"
-한화갑, 당시 김대중 의원 참모

▲ 문제적 인물 엄창록

이후의 역사는 '꼬꼬무'에서도 자주 다뤘지. 유신의 시대가 열렸고, 그 후 한동안 선거는 열리지 않았어. 정치인 김대중은 의문의 납치 사건에 휘말리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각종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어.

엄창록의 존재 역시 세상에서 잊혀졌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7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대통령 후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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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시 노태우 후보가 사람을 보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물었대. 이때 엄창록은 그냥 돌아가라 했어. 어차피 당신들이 이긴 선거라는 거야. 당시 노태우 후보의 경쟁자는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두 사람은 이미 단일화에 실패한 상황이었어. 이런 상황에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테니 자신이 개입할 필요도 없다는 거야. 엄창록이 엄청난 지략가인 것은 맞는 거 같아.

엄창록이 등장한 건, 이 선거가 마지막이었어. 1988년 1월 3일, 엄창록은 지병인 호흡기질환으로 사망했어. 죽기 전 그는 뭔가를 알고 싶어 했대.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엄창록의 아내에 의하면, 그는 평소 함께 일한 참모들에게 미안하단 말을 자주 했다고 해. 사라졌던 그날의 진실은 아마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

오늘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김대중 자택 테러 사건'. 이후 진범은 잡혔을까? 아니, 아직까지도 미제로 남아있어. 그날의 일은 홍준 씨의 인생을 뒤흔든 경험이었고, 엄창록이란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기도 했어. 누구에게든 이 사건은 각자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이야.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그 시대,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고초를 겪어내야 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 오늘날 우리가 한 번쯤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선거에서 행사하는 우리의 한 표는, 격동의 시대를 겪어내고 지켜낸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야. 그래서 투표는 꼭 해야 해.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거판의 귀재 엄창록. 그에게 선거란 무엇이었을까? 만약 엄창록이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정치인 김대중이 두각을 드러낸 목포 선거, 71년 대선의 결과도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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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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