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시인이자 투사였던 '이육사 시인'…그의 이름에 담긴 또 다른 의미는?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4.04.05 06:40 조회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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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이육사 시인의 그날을 조명했다.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라는 부제로 이육사 시인의 그날을 이야기했다.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의 한 집에서 예쁜 딸 옥비가 태어났다.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딸에게만은 세상 가장 다정했던 옥비의 아버지. 그런데 옥비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용수를 쓰고 옥비 앞에 나타난 아버지. 옥비의 아버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옥비의 아버지는 수능출제 빈도 1위, 시인 이육사. 저항 시인으로 불린 이육사 시인은 친우인 신석초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됐다.

1935년 봄, 정인보의 집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다섯 살의 나이 차에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된 두 사람은 자금난으로 지면을 채우지 못했고, 이에 이육사는 신석초에게 직접 글을 쓰면 어떻겠냐며 함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서로의 버팀목이 된 두 사람. 신석초 선생은 이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두 시인, 하지만 이들의 인연도 길지 못했다. 이육사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중국으로 떠나게 됐다. 그리고 떠나기 전 신석초를 만나 함께 눈밭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함께 눈길을 밟을 수 있기를 빌었다.

1943년 여름, 이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신석초 시인. 하지만 이육사는 약속한 장소에 오지 않았고 다음 날 그가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며칠 후 용수를 쓰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이육사를 만난 것이 신석초 시인이 그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육사 시인은 친우 신석초 시인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도쿄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동 대학살을 목격한 이육사는 다음 해에 귀국해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 결사에 가입해 독립 투쟁을 시작했다.

중국과 만주를 여러 번 다녀온 이육사. 그는 요시찰 인물로 1927년 10월 대구의 조선은행 폭발 사건에 휘말린다.

일본 경찰들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이육사와 그의 형제들에게 거짓 혐의를 씌웠고 허위 자백을 위한 고문을 했다.

하지만 이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1년 7개월 옥고 끝에 증거가 없어 석방됐다.

그 후 이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그에게 붙인 수인번호였던 이육사를 이름으로 삼았다.

이후에도 이육사는 수차례 체포됐고 그때마다 고문을 당했다. 거듭되는 체포와 고문에 그의 몸은 점점 망가졌고, 그럼에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1932년 봄, 갑자기 사라진 이육사가 향한 곳은 남경이었다. 일본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 곳에서 그는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 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대규모 부대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운 의열단의 뜻과 함께 하며 독립군 장교가 되기로 했던 것.

군사 훈련을 받고 6개월 뒤 조선으로 돌아가서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 학교 2기생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은 이육사. 그러나 그는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또다시 체포됐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풀려난 이육사 시인은 그 후 신석초 시인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자신이 하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이는 친구를 지키기 위한 마음이 아니었을지.

여러 고초를 겪으며 강렬한 시를 써내려 간 이육사. 수능에 많이 출제된 시 '절정'은 만주를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시였다.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던 이육사. 그는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 아닐까.

이후 딸 옥비가 태어나고, 이육사는 너무나 소중한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에 그는 딸과 함께 종로에서 가장 큰 백화점 화신백화점에 가서 딸을 위해 분홍색 모자, 벨벳 투피스, 까만 구두를 선물로 사주었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친우 신석초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후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육사는 중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어머니와 큰 형의 첫 번째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시 귀국한 이육사. 그는 곧바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혔다.

조사 후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된 이육사. 손목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진 채 용수를 쓰고 기차에 오르려던 이육사.

그리고 이를 기다리던 그의 아내는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고 이육사가 오는 방향을 향해 딸을 높이 들어 보였다.

이를 본 이육사는 걸음을 멈추고 딸에게 다가왔고, "아버지 다녀오마"라는 인사를 남긴 채 압송되었다.

곧 올 것처럼 딸에게 인사를 남긴 이육사.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혔던 사촌 병희를 풀어 달라며 자신이 보증을 섰고 홀로 감옥에 남았다. 그리고 병희가 풀려난 지 닷새쯤 되던 날 형무소에서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북경 지하 감옥에서 해방을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에 생을 마감한 이육사. 병희는 형무소로 달려가 "아무 걱정 말고 가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편히 가시오"라며 그의 눈을 세 번 쓰다듬어 눈을 감겼다.

그리고 이육사의 사망 소식을 전보로 받은 가족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오열했다.

병희는 이육사의 유품을 챙겼다. 그가 남긴 유품은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그리고 마분지에는 유언 대신 그가 남긴 시 "광야"라 남아 있었다.

이육사가 떠난 지 1년 후 조국은 그토록 기다렸던 해방을 맞았고, 그가 떠난 지 2년 후에는 그의 동생이 이육사의 시를 모아 시집을 냈다.

그리고 신석초와 그의 친구들이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평생 시와 함께 살다 1975년 세상을 떠난 신석초 시인.

그의 조카는 신석초 시인의 유품 속에서 이육사 시인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편지에는 이육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가득했다. 서로를 의지하고 가까웠던 두 사람. 이에 신석초 시인의 조카는 두 사람이 하늘에서 만나 시를 쓰며 살고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또한 이육사의 딸 옥비는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대로 욕심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 말미에는 이육사 시인의 이름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가 공개됐다. 수인 번호 이육사 외에도 한자로 죽일 육, 역사 사. 역사는 죽었다는 뜻을 가진 이름을 붙였던 이육사. 이는 일제 치하의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우려 속에 그는 죽일 육 대신 땅 육으로 한 글자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의미로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고기 육, 설사할 사를 썼다고. 이는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된 된다.

하지만 어쩌면 이 의미는 딸에게 붙인 이름처럼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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