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벨라(Bella)와 갓윈(Godwin). '가여운 것들'(Poor things)에서 유사 부녀 관계로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름에서 이야기를 만든 이의 의도가 읽힌다.
벨라는 이탈리아어로는 '아름답다'는 뜻이고, 라틴어로는 '전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1879) 주인공 노라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 희곡의 시초이고, 노라는 그 요체다. 저명한 의사이자 벨라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갓윈은 창조주인 신(GOD)과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Darwin)의 합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두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가여운 것들'이 무엇을 말하는 영화일지를 유추해 볼 수 있고, 극장을 나설 때쯤이면 감독의 의도와 영화의 콘셉트가 절묘하게 조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지난 11일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4관왕(여우주연상, 미술상, 분장상, 의상상)에 올랐다. 작품상과 감독상은 '오펜하이머'에게 뺏겼지만 여주인공의 연기와 미장센 부문은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작품은 올해 가장 빼어난 영화 중 한 편이다.
천재 과학자이자 의사인 갓윈(윌렘 데포)은 벨라(엠마 스톤)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벨라는 아름답지만 종잡을 수 없는 성격,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유아 수준의 언어 능력 등 일반적인 성인 여성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또한 그녀는 세상과도 단절된 채 집 안에서만 생활한다. 벨라는 갓윈의 딸이라기보다는 소유물처럼 보인다.
갓윈 박사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는 스승의 부탁을 받고 벨라의 행태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한다. 한집에 살면서 벨라를 관찰하던 맥스는 벨라의 '이상한 매력'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를 눈치챈 갓윈은 맥스와 벨라를 결혼시키려고 하고 자신만의 룰이 적힌 '약혼 서약서'를 작성하고자 한다. 이 문서를 공증하기 위해 갓윈의 집을 찾아온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은 벨라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벨라 역시 던컨에게 빠져든다. 던컨은 벨라에게 바깥세상을 알려주겠다고 꼬시고, 벨라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소설(1992)을 원작으로 한 '가여운 것들'은 원작의 토대 위에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각본가 토니 맥나마라의 개성을 투영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논쟁적인 작품이다. 개성 넘치는 페미니즘 영화라는 호평을 받은 동시에 남성적 시선(Male gaze)으로 가득한 반페미니즘 영화라고 공격받고 있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에서 왜 이토록 극단적인 반응이 나온 것일까.
◆ '인형의 집'을 나선 벨라…색(色)을 입다
동명의 원작은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흉측한 외모의 남성이었으나 '가여운 것들'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또한 원작이 맥캔들리스(영화에선 맥스)의 시선으로 벨라를 묘사한 것과 달리 영화는 벨라의 시선으로 세상 보기를 시도한다. 또한 벨라의 자아 형성 과정이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갓윈은 임신한 채로 템즈강에 투신한 여성을 건져내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켰다. 태아의 뇌를 엄마의 머리에 이식시켜, 몸은 어른이나 머리는 유아인 혼종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 경악스러운 실험이 윤리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실현 가능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자. 영화는 이 괴상한 실험이 빚어낸 혼돈과 파국을 상상 이상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영화 초반, 벨라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유아기의 어린아이임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보통의 인간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육체와 정신의 성장이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벨라는 육체와 정신은 엇박자를 낸다. 하드웨어는 성인인데 소프트웨어는 유아 수준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 일반적인 상식 등은 탑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이미 성장해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뿜어내고 있다.
가장 경악스러운 장면은 벨라가 식탁 위의 사과를 '그곳'에 갖다 대는 장면이다. 사춘기 소년이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복숭아'를 사용했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가여운 것들'의 '과일 체험'은 꽤나 서정적으로 묘사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는 달리 과격함이 두드러진다. 엄마의 젖가슴을 탐닉하는 프로이트의 유아성욕론에 의거하면 유아기를 관통하고 있는 벨라의 행동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여운 것들'의 초반 20여 분은 흑백 화면이다. 갓윈과 벨라의 수상한 관계가 베일을 벗고, 던컨이 벨라의 삶에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두 사람이 함께 대륙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영화는 색(컬러)을 입고, 벨라도 색(욕망)에 빠진다. 벨라는 던컨에 의해 육체의 욕망에 눈을 뜨며 '뜨거운 뜀박질'이라 부르는 섹스에 탐닉한다.
영화의 시각적 요소들은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 인물이 발딛는 모든 공간은 초현실주의 건축이나 그림처럼 다가온다. 가우디의 손길이 닿은 듯한 기괴한 건물, 달리의 그림과 같은 초현실적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보는 재미를 더한다. 공상과학소설과 스팀펑크의 영향 아래 있는 이 공간들은 대부분 세트다.
미술, 세트, 의상, 분장 등 영화의 미장센을 완성하는 모든 요소가 비현실적 이미지들의 조합처럼 보여 이 자체가 누군가의 거대한 꿈이나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상 역시 남다르다. 벨라가 여행을 떠난 후 입는 옷들은 알렉산더 맥퀸의 오뜨꾸띠르 의상처럼 전위적이고 화려하다. 또한 무성하게 자란 헤어스타일도 인상적이다. 이는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벨라의 자유로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섹스신이 의미하는 바…여성 해방인가 성적 대상화인가
'가여운 것들'은 벨라의 모험극이다. 영화는 챕터 구성이며, 벨라의 여행지가 곧 챕터의 제목이다. 영국 런던에서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프랑스 파리를 거친 벨라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다.
벨라의 여정은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지만 그 여정을 통해 욕망에 눈을 뜨고 두뇌의 자극도 받는다. 이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악함, 인간의 친절함과 가식, 성(姓)의 계급화와 빈부의 격차 등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빠르게 성장해 간다.
가장 논쟁적인 챕터는 '파리'다. 벨라와 던컨은 무일푼 신세가 돼 크루즈 여행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들이 내린 곳은 유럽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로 불리는 파리다. 벨라는 우연히 사창가의 여성 포주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돈도 벌고 여러 남자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껴 매춘의 세계에 뛰어든다.
이때부터 영화는 살색의 향연이다. 벨라에게 매춘은 노동인 동시에 유희다. 소년과 노인, 장애인, 부자(父子) 등 벨라의 몸을 탐하는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벨라는 이 행위에서 일말의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다. 불편함을 느끼는 건 벨라를 바라보는 관객이다.
영화는 매춘이 벨라의 주체적 선택이며, 자유 의지임을 강조한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기 표현을 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매춘의 행위조차 자유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들 수 있는 묘사다. 특히 벨라의 지적 성장, 사회화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이 돈의 교환 수단이 되는 거친 사회와 맞닥뜨려졌기에 소아성애 논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이 상황들은 꽤나 가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섹스신을 그리는 방식도 불편한 지점이 있다. 매음굴이라는 공간, 매춘이라는 행위에 걸맞은 묘사라고 볼 수 있지만 지나치게 길고 전시적인 행위들이 반복된다. 이 챕터에서 드리워진 요르코스 란티모스의 집요함과 지독함은 '남성적 시선'(Male gaze)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이 장면을 연기한 엠마 스톤은 "벨라의 여정과 성장에 꼭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촬영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말했다. 엠마 스톤의 연기는 숱한 '섹스신'을 수행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끝까지 간다. 일종의 차력쇼처럼 그린 섹스신보다 놀라운 것은 벨라의 성장 과정을 단계별로 묘사한 연기다. 벨라의 걸음걸이, 말투, 표정 등으로 아이의 행동 양식을 스텝업시킨 다음 정신의 진화 과정도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한 사람의 열정과 욕심이 합쳐졌을 때 '야심'이라는 표현을 쓴다. 엠마 스톤은 그 마음을 품는 데 그치지 않았고, 불태워 날려버렸다. 이 대담한 연기에 박수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인간을 향한 조소…란티모스의 우화, 불편한데 통쾌해
감독이 의도한 바는 '벨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다. 화면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카메라가 망원렌즈에서 광각렌즈로 바뀌는 양식의 전환 역시 역시 벨라의 변화와 성장과 관련돼 있다.
당연하게도 '가여운 것들'은 여성의 성장을 욕망의 발화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벨라는 육체의 탐닉에서 시작해 세상과 인간을 향한 탐구로 학습의 범위를 넓혀간다.
벨라에게 세상은 호기심 덩어리였으나 곧 모순으로 가득한 불합리한 세계임을 알게 된다. 자기표현에 솔직한 벨라는 비정상과 불평등에 대해 의의를 제기를 하고, 자신의 호기심과 무지를 해소하려고 끊임없이 경험하고 학습한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필터가 없다. 편견도 선입견도 없으며,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벨라가 떠난 모험의 최종 목적지는 거대한 물음표이자 공란으로 가득한 '나'라는 인간이다. 그녀의 성장과 진화는 매춘 여정을 다룬 파리보다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마주하고 극복하는 런던 파트에서 극대화된다. 끝내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행했던 과거와 이별한다.
그녀의 과거는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압축된다. 19세기 영국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던 빅토리아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했지만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무관심했던 시대다.
빅토리아는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 '나'는 지워졌고, 남편이 만든 '틀'에 갇혀버렸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빅토리아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벨라의 선택은 달랐다.
영화를 연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벨라의 생애를 '탄생-모험-해방'에 명징한 구조로 전개하며 끝내 전복의 통쾌함까지 선사한다.
그리스 출신인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데뷔 초부터 인간을 소재로 한 우화를 만들어왔다. '송곳니'(2012)와 '더 랍스터'(2015)가 대표적이다. 그의 영화에선 비정상적 세계 혹은 이상한 질서가 제시되고 인간은 순응과 타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
이상한 세상은 현실 사회의 풍자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 사람 구경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간을 자각할 능력이 없는 '개돼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유의지와 행동 본능을 가진 인물로 그리기도 한다.
'가여운 것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 세계의 집대성과 같은 결과물이다. 미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정서적으로 가장 불편하며, 메시지적으로 가장 선명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전작들과 미세하게 달라진 태도다. 도발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향한 냉소를 보여줬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만의 방식으로 인간을 보듬는다. 그 변화는 엔딩에서 두드러진다. 유토피아와 지옥을 한 공간에 펼쳐놓았다. 이 역시 요르고스 란티모스스럽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는 '가여운 것들'은 누구인가. 미치광이 과학자에 의해 분해되고 재조립된 벨라일까. 영화의 제목은 복수형이다. 우매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 남성들, 나아가 통념이라는 필터를 끼고 벨라를 바라보는 스크린 밖 관객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닌 자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다"라고. 벨라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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