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수)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감정노동부터 육체노동까지…'무빙' 류승룡의 완성형 연기

김지혜 기자 작성 2023.10.03 10:47 수정 2023.10.03 14:55 조회 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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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한국형 히어로 드라마 '무빙'의 주인공 '장주원'의 남다른 능력은 재생(再生)에 있다. 그는 총을 맞아도, 칼에 찔려도 오뚝이처럼 일어선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감내하고 극복한다. 한때는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는 남자가 된다.

장주원을 연기한 류승룡도 일견 닮은 구석이 있다. 그는 배우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고,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대체불가의 연기로 부활하곤 했다.

'무빙'을 마친 류승룡에게 N번째 전성기가 찾아왔다. 이 드라마에 본 시청자들은 "류승룡이 잘하는 모든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열광했다. 배우 류승룡의 모든 것을 보여준 동시에 류승룡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 '극한직업'(2019) 때도 류승룡이 부활했다고 그러더니 '무빙' 때도 류승룡이 다시 살아났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나는지 모르지만 저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으로 글로벌 OTT 드라마 시대의 포문을 열었던 류승룡은 '무빙'으로 후발주자인 디즈니+를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일조했다. 물론 홀로 이 드라마의 성공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초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무빙'이지만 류승룡은 그중에서도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하며 20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류승룡

◆ "웹툰 '무빙'의 열렬한 팬, 강풀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류승룡은 2018년 영화 '염력'에서 염력을 쓰는 소시민 연기를 한 바 있다. 평단의 평가도, 관객의 평가도 좋지 못했다. 초인을 또다시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터. 그는'무빙'이 가진 원작의 힘을 믿었다고 했다.

"원작 웹툰의 팬이었어요. 게다가 원작자인 강풀 작가가 직접 대본을 쓴다니 더욱 신뢰가 가더라고요. 한 인물이 끌어가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작품이라 제게 무슨 역할을 제안할까 궁금했죠. 사실 '20부작이 가능할까', '디즈니는 1.5배속 재생도 안되는데' 이런 우려가 내심 있었어요. 그럼에도 강풀 작가는 이야기를 정석으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저는 그런 건강한 고집에 끌렸어요. 만나고 나서 더 확신했죠."

류승룡은 무한 재생 능력을 가진 초인 '장주원'으로 분했다. 엄밀히 말해 웹툰 속 장주원과 싱크로율이 높은 배우는 아니었다. 멀티 캐스팅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에는 중량감이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주변의 이런 물음표에도 불구하고 강풀은 류승룡을 고집했다. 그는 "야수와 딸바보가 가능한 배우"라는 이유를 들었다.

류승룡

"20부작 드라마로 완성된 극본을 보고 시리즈물의 '토지'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 각각의 캐릭터에 공감하게 되고 종국에는 응원하게 되는 서사가 매력적이었죠. 프랭크(류승룡), 번개맨(차태현)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캐릭터도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 강풀 작가의 오랜 테마인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메시지에 마음이 뺏겼어요. 다만 제가 맡은 주원의 경우 20대 시절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예요. '이건 어린 배우가 하려나' 했는데 강풀 작가가 "형님, 제가 형님 20대 때 사진 다 봤어요. 괜찮아요. 직접 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이거 큰일 났다' 싶었죠. 그래서 체중을 감량했고요. 피부 관리라는 것도 처음 해봤어요. 웹툰과의 싱크로율은 크게 신경 안 썼어요. 원작자가 각본을 새로 썼기 때문에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소시민의 드라마를 잘 다루는 강풀의 필력과 평범한 사람의 페이소스를 유머로 승화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류승룡이 만나면서 시너지가 폭발했다.

'류승룡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라는 시청자의 한줄평처럼 그가 연기한 장주원은 배우 류승룡의 능력치를 집약한 캐릭터였다. 괴물의 야수성과 연애 초짜의 어수룩함, 딸바보의 애틋함까지 능수능란하게 소화해 내며 보는 이들은 웃고 울렸다. 30년이 넘는 경력에서 나온 연기 테크닉과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더해진 완성형 연기였다.

류승룡의 진솔한 연기는 '공감'에서 나왔다. 그에겐 이야기와 캐릭터를 이해하고 승화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특히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장주원의 따스한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고 했다.

류승룡

"주원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지만 인생의 길잡이가 없었어요. 그러다 지희(곽선영)라는 빛을 만나 총체적으로 인생이 달라져요. 나를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게 된 거죠. 그게 우리네 가장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쓸모를 응원해 주는 사람, 바로 가족이죠. 저 역시 외롭고 힘들 때 가족을 보면서 힘을 내거든요. 우리네 모습, 그게 '무빙'의 가장 큰 공감 포인트가 아닌가 싶어요."

류승룡은 여느 작품보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OTT 플랫폼에서 방영되다 보니 관객 수와 시청률 등 수치로 반응을 체크할 순 없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성원과 응원을 얻었다"며 "매주 새 회차가 공개될 때마다 열광적인 반응을 느꼈고, 지금은 모든 회가 공개됐지만 이제 막 시청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특히 SNS에 아시아 여러 국가말로 '아빠'라고 부르며 응원하는 DM이 오는데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라며 행복해했다.

류승룡

◆ "배우는 감정 노동자"라던 배우가 액션까지 능하다니

류승룡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무빙'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절절한 감정 연기는 물론이고 '괴물'이자 '야수'인 장주원의 능력치를 육체 연기로 표현해내야 했다.

과거 영화 '최종병기 활', '표적' 등에서도 액션 연기를 수행한 바 있지만 초인으로 등장해야 하는 '무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류승룡은 이번 작품에서 100대 1 액션, 3분여의 롱테이크 액션, 러시아 액션, 무장공비 액션, 수로 액션 등 다양한 액션 장면을 연기해 냈다.

올해 나이 쉰넷. 100세 시대에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고 볼 수 있지만,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고난도의 액션 연기를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액션은 '이걸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면 더 힘들더라고요. 왜 김연아 선수가 "몸 풀 때 무슨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뭔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하잖아요. 그런 거 같아요. 대본에 충실하고, 연습한 대로 하면 나머지는 스태프들이 보완을 잘해주니까 믿고 했어요. 저희 작품 속 액션 '휴먼 액션'이라고들 하잖아요. 현장에는 '휴먼 스태프'가 있었어요. 행여나 배우들이 다칠까 봐 어찌나 준비를 철저히 하시던지. 현장에서 그런 도움을 받았기에 처절하고 어려운 액션신도 재밌게 찍을 수 있었어요."

류승룡

원테이크 액션으로 화제를 모았던 '파크텔 액션'은 장장 6개월간 찍어 완성한 장면이다. 충주와 부산 등 전국을 오가며 찍었기에 액션과 감정 연결도 쉽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은 영하 20도의 날씨에 찍은 것이다. 바닥이 차가우니까 피가 자꾸 굳더라. 그래서 토치로 계속 땅을 데우고 피도 계속 뿌려가며 촬영했다"라고 촬영후기를 전했다.

류승룡은 오래전부터 "배우는 감정 노동자"라는 지론을 펼쳐왔다. 학자들은 지식의 노동을 하고, 예술가들이 창작의 노동을 한다면 다양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배우는 감정의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액션 연기에 대한 그의 지론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역시나 '감정'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사실 액션이 아무리 화려해도 1분 이상 보기 힘들잖아요. 이야기가 없고, 감정이 없으면 공허한 몸짓에 지나지 않죠. '무빙'은 이야기와 감정이 있는 휴먼 액션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피가 낭자한 장면도 있어서 고어한 측면이 있죠. 그런데 그건 장주원 인생의 치열함, 처절함을 보여주는 장치기도 하니까요."

류승룡

◆ 명장면·명대사의 향연이었던 '무빙'... 류승룡의 최애 장면은?

'무빙'에는 류승룡의 명장면과 명대사가 넘쳐난 작품이다. 주원과 지희와의 풋풋한 데이트를 그린 다방신, 류승룡의 오열 연기가 빛났던 지희의 장례식신, 파크텔에서의 원테이크 액션 등은 시청자들이 꼽은 명장면이다.

특히 '괴물' 장주원이 세상 모든 것을 잃은 순간을 표현한 13회에서의 오열 연기는 보는 이들의 눈물샘도 훔쳤다.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찍기 전부터 크게 긴장했던 신이에요. 그런데 실제 장례식장을 빌려야 하는 문제로 촬영이 3~4번 정도 연기됐어요. '앓던 이를 빨리 뽑아야 할 텐데'라는 마음이 들어 초조해지더라고요. 결국 촬영 말미에서야 찍었는데 감정이 잘 터져 나와서 연기를 잘 마칠 수 있었어요. 저는 그 장면의 경우도 앞서 장주원의 서사가 잘 쌓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류승룡

류승룡의 꼽은 명장면은 따로 있었다. 자해 교통사고로 생계를 이어가던 장주원이 뺑소니 차를 놓치고 골목에서 만난 지희에게 "길을 못 찾겠습니다"라고 목놓아 울던 장면이었다. 단순히 길을 잃어 운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인생의 길과 방향을 몰라 막막함에 터진 눈물이었다. 류승룡은 "이 에피소드 이후 주원과 지희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주원에게는 신체에 관한 한 무한 재생 능력이 있지만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은 없다. 그 능력은 '지희'를 만나고 '희수'를 얻으며 후천적으로 단련됐다. 류승룡에게도 다친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 혹은 절대적 존재라는 게 있을까.

"그런 방법은 없어요. 저도 수없이 넘어지고 상처받아요. 그런데 주원과 일견 닮은 점이 있어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우리 가족을 잘 지켜내는 거 그 마음은 닮았다고 볼 수 있어요. 주원을 관통하는 마음은 '소중한 것을 지킨다'예요. 지희를 만나고부터 생긴 마음이죠. 그전에는 그저 건강한 몸뚱이로 먹고살기 힘을 썼다면, 지희를 만난 이후로부터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액션을 펼칩니다. 수많은 칼을 받아내던 주원이 어린아이처럼 우는 장면이 그를 가장 잘 보여준 것 같아요."

무빙

류승룡은 나이 들었지만, 그의 연기는 낡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 듦의 장점, 연륜이 돋보이는 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제는 강한 캐릭터가 아니라 단단한 연기만으로도 충분한 배우가 됐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을 물었다.

"인생을 얘기할 수밖에 없네요. 다들 각자의 서사가 있잖아요. 누구나 희로애락, 생로병사가 있어요. 주원이 20대부터 굴곡진 삶이 살았듯 저 역시도 인생에 여러 굴곡이 있었어요. 직업인으로서의 굴곡도 적잖았고요. 그럴 때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내가 조급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다고 이루는 것도 아니란 것을요. 이런 경험들이 제 연기에도 자연스레 녹아든 게 아닌가 싶어요."

류승룡

◆ "시즌2, 나도 기다려… 강풀을 대본 쓰게 묶어놔야"

연극 '난타'(1997)의 초기 멤버로 활약하는 등 연극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류승룡은 2012년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의 일급 배우로 떠올랐다. 이후 천만 영화 '명량'을 찍었고, 단독 주연작 '표적'으로 칸 초청도 받았다. 한때 충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인성 논란'과 차기작의 흥행 부진이 잇따라 겹치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이런 부침을 '굴곡'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우는 기다림의 연속이고, 그 기다림 속에서 뜻하지 않는 행운을 만난다고 했다.

"'무빙'이라는 작품이 제게 올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최종병기 활', '내 아내의 모든 것' 등 항상 생각지 못했던 작품이 제게 왔거든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유지하다 보면 지금처럼 생각지도 못한 좋은 작품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무빙' 시즌2 출연에 대한 의사를 묻자 "아직 작가님과 따로 논의를 한 것은 없어요. 그래도 원작이 있는 작품이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요. 저는 '타이밍'이랑 '브릿지'도 정말 재밌게 봤거든요. 제작이 된다면 빨리 보여드리고 싶죠. 강풀 작가가 잠이 안 오는 초능력을 발휘해서 서둘러 각본을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가둬놔야 할 거 같아요. 글만 쓰게.(웃음)"라고 답했다.

"이제 막 배우 인생의 하프타임을 지났다"는 류승룡에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의 지향은 명료했다.

"위로와 공감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로 살면서 사랑도 많이 받고, 위로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그걸 돌려줄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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