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카운트' 진선규 "연기 더럽게 못했던 나…꿈 90% 이뤘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3.03.02 18:48 수정 2023.03.03 09:32 조회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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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규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진선규는 지난 2월, 8년간 살던 경기도 고양시의 임대 아파트를 떠났다. 이사를 앞두고 느낀 소회를 적은 SNS 글과 사진에는 10만 명의 '좋아요'와 7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같은 동 주민부터 집배원, 미용실 주인, 교회 지인 등 진선규 가족을 근·원거리에서 지켜봤던 '도래울 주민들'의 진심 어린 댓글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뭉근하게 달궜다.

어떤 배우의 서사는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데뷔 18년 만에 영화의 주인공 자리에 오른 '배우 진선규'의 서사, 결혼 8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한 '가장 진선규'의 서사는 마냥 화려할 것만 같은 여느 연예인과는 다른 진솔한 감동을 준다.

진선규는 악역으로 떴지만, 누구보다 선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얼굴에 인생이 드러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이런 배우가 캐릭터라는 가면을 쓰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타고난 재능에 오랜 노력으로 단단해진 연기력 덕분이다.

첫 주연작인 '카운트'(감독 권혁재)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진선규는 긴장 반, 설렘 반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자신의 인생과 닮은 점이 있다며 '운명'에 가까운 만남이라고 했다.

진선규

◆ "'카운트' 시헌, 나와 닮았다"…운명 같았던 만남

'카운트'는 금메달리스트 출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마이웨이 선생 시헌(진선규 분)이 오합지졸 제자들을 만나 세상을 향해 유쾌한 한 방을 날리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박시헌 선수의 이야기를 극화했다.

진선규는 시나리오를 읽어본 뒤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의 고향인 진해가 배경인 이야기인 데다 주인공이 과거 자신이 꿈꿨던 체육 교사라는 점, 복싱을 사랑하고 가족을 누구보다 아끼는 인물이라는 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고 했다.

"시헌 캐릭터가 90% 가까이 나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역할이나 상황보다는 배역의 사고와 가치관, 삶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역할을 이렇게 만들어야지'라는 설계를 하지 않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걸 영화 속에 묻혀내자라고 생각했다. 촬영 두 달 반 전부터 복싱 연습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박시헌 쌤(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훈련을 직접 봐주셨다. 이후 회식 자리에서 쌤과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통한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운동을 좋아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동료들에게 힘을 얻어 지금까지 살아오신 분이라는 것이 닮았더라"

진선규

'카운트'는 표면적으로는 한물간 복싱스타가 유망주를 키워내는 과정을 그린 코믹 드라마지만 이 작품은 이야기를 통해 스포츠의 윤리 문제도 언급한다. 시헌은 편파 판정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며 손가락질받는 전 국가대표 복싱 선수다. 그런 그가 편파 판정의 희생양이 된 복싱 유망주 윤우를 육성한다. 이는 부끄러운 승리보다 떳떳한 패배를 가르치며 세상에 차마 내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선규는 수년 전부터 취미로 복싱을 배워왔다. 마치 이 작품을 오기를 기다린 것 마냥 모든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복싱 장면에서 진선규는 누구보다 능숙한 몸짓을 보여준다. 진선규는 "37살 때부터 취미로 배웠다. 사실 아버지가 중학교 때까지 대전에서 아마추어 복싱선수를 하셨다. 아버지를 따라 복싱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다"고 복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헌의 서사에서 트라우마 역할을 하는 해당 올림픽 경기에 대해 언급했다. 진선규는 "그때 제 나이가 11살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과거 대전에서 아마추어 복싱선수를 하셨다. 때문에 경기도 자주 보러 다녔다. 솔직히 88 서울 올림픽에 대해 기억이 나는 건 호돌이(마스코트)와 굴렁쇠 소년 그리고 우리나라가 종합 순위 4위를 했다는 것뿐이다. 박시헌 쌤을 만나면서 당시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일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카운트'는 실존 인물에 대한 어떤 평가를 한다거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연출을 하지는 않는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주홍글씨를 찍힌 채 살아가는 한 사람과 그에게 희망과 용기, 위로를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웃음과 감동을 자아낸다.

진선규

"당사자들의 아픔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분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용기를 내주셨다. 이 작품이 박시헌 쌤에게 치유와 희망이 되길 바란다. 시사회 때 시헌쌤이 오셔서 '30년 가까이 가지고 있던 응어리가 두 시간의 이야기 속에서 풀린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사모님은 마음이 아파서 못 보셨다더라. 언젠가 영화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란다"

실존 인물이 등장하고, 실제로 벌어졌던 어떤 사건이 언급되지만 '카운트'는 시종일관 웃음이 넘치는 코미디 영화다. 그 중심에는 정겹고 따뜻한 연기로 시종일관 영화에 온기를 불어넣는 진선규가 있다. 대학로 무대에서 오랫동안 연기를 갈고닦은 진선규는 코미디 연기에 아주 능한 배우다. 과한 액션이나 애드리브가 없이도 대사의 리듬감과 적절한 몸짓으로 코미디의 박자를 잘 살려내는 재주가 있다. 그는 코미디 연기를 잘하는 비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리 짜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상황 속에 잘 놓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진지하게 임하고자 한다. 뭘 보여준다? 의식하는 건 없다. 나는 애드리브도 잘 안 하는 편이다. 대본에 충실하려고 한다. 설령 아이디어가 있다고 한다면 미리 연습하고 '이거 이렇게 해볼게요'라고 미리 확인을 받는다. 연기는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상대의 연기를 잘 봐주고, 그에 맞게 리액션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영화는 협업의 최고점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배웠던 게 상대 배우와 협업을 할 수 있게끔 나 자신을 만들어놔야 한다는 거다. 난 "쟤만 보여"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걔도 잘하더라"하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진선규

◆ 체육 교사 꿈꾸던 진선규, 배우가 된 사소한 계기

진선규는 영화 속 시헌처럼 체육 교사가 꿈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마냥 실실 웃다 보니 괴롭히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운동이 너무 재밌고 또 잘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체육 교사를 꿈꾸게 됐다.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지망학교, 지망전공으로 체대, 체육학과를 적곤 했다. 그러다 고3 무렵 친한 친구의 지인이 있다는 연극 연습 현장에 따라갔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다"

진선규가 찾아간 곳은 극단 '진해무대'의 연습실이었다. 그는 좁고 어두운 지하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옹기종기 연습하는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 풍경을 잊지 못해 그는 자율학습 대신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연기의 '연' 자도 몰랐던 진선규는 연극과를 꿈꾸며 "이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후 한국예술종합교 실기 시험을 봤다.

진선규

"셰익스피어의 5대 비극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독백 3개를 달달 외워서 시험을 봤다. 3차까지 통과해서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를 하셨다. 다행히 합기도 도장에서 만난 고향 친구들과 어머니의 응원과 지원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등록금 120만 원을 마련해 주셨고, 가방 3개를 들고 서울에 올라왔다"

진선규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떠올리며 "연기를 더럽게 못했다. 두 달 만에 급하게 연습해서 대학교엘 왔으니 뭘 알았겠냐. 연기를 잘하지 못했으니 학교에서도 주로 단역을 했다"라고 말했다. 불완전했던 그에게 힘에 되는 말이 있었다.

"어느 날 기국서 선생님이 대학교 공연에 오셨다. 저를 보더니 "너는 참 도화지 같다"고 하시더라. 제가 "예?"하니까.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못생것도 아닌데 그래서 뭐든 표현이 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진선규

그 말을 기둥 삼아 묵묵히 20년을 걸어왔다. 진선규는 '성실', '꾸준함'이 재능이 되고 능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명이 길었다고 하기엔 난 늘 즐겁게 일했다. 매일매일 연기를 해보고 발전해 가는 나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선규, 잘하지"라는 소리도 대학로에서 듣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어 "내 원동력은 집에서는 가족이고, 현장에서는 동료다. 늘 내가 잘할 수 있게끔 도와줬던 친구가 있었고, 꿈을 공유했다. 저보다 먼저 잘된 친구 (이)희준이, (김)민재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이 잘 됐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나와 비교하지 않았다. 내가 숙제를 잘 풀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준 친구들이었다. 아직도 워크숍을 하고 극단 공연을 하는 게 내겐 큰 자산이다. 연기의 기술, 연기력, 카리스마라는 건 내게 전혀 없다. 촬영 현장, 동료들의 울타리 그게 내 힘이다"라고 덧붙였다.

진선규

◆ '배우 박보경'을 응원하던 남편…"일터에서 돌아온 아내 얼굴에 행복"

진선규는 2017년 영화 '범죄도시'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수상을 예상하지 못해 무대에 올라와서도 어쩔 줄 몰라하던 그는 준비하지 않은 날 것의 수상 소감으로 많은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오랜 무명시절에 대한 회고와 자신을 응원해 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한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배우 박보경'을 언급했다. "제 와이프, 배우인데 애기 둘 키우느라 고생했다"며 "여보 사랑해"를 외쳤다.

가정과 아이를 돌보느라 잊고 살았던 아내의 이름을 만천하에 외쳤다. 그로부터 6년, 배우 박보경도 날갯짓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진선규와 함께 오랜 기간 대학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에서 활약해 온 박보경은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잊고 지냈던 열정을 다시 불태우고 있다. 진선규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요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진선규

"작은 분량이지만 아내가 오디션으로 배역을 따냈다. 그리고 그 실력을 대중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기쁘다.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 내가 더 기운을 얻는다. 내가 '범죄도시'로 대중에게 알려지고 유명세를 탔을 때 촬영장에 일하러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내가 그 힘으로 아이들을 키웠겠구나 싶더라. 내가 지금 그 반대의 모습으로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더라. 또 '오늘 너무 좋았다'고 현장 이야기를 하는데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더라. 가족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대학로의 숨은 실력파 배우에서 충무로의 신스틸러, 이제는 한 영화를 이끄는 주인공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다음 목표를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진선규

"'니가 뭔데 그런 얘기를 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꿈의 90%를 이뤘다. 단역 생활할 때 '나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오디션 없이 캐스팅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라는 바람을 가졌다. 20대 때 꿈이 그거였는데 그걸 이뤘다. 또 하나의 꿈은 서울 바닥에서 따뜻하고 행복하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비록 경기도지만 그 꿈도 이뤘다. 더 큰 꿈을 꾸고 싶지 않다. 청룡영화상 때 수상 소감으로 "저 멀리 우주에 있는 '좋은 배우'를 향해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요즘은 가끔씩이라도 '좋은 배우'란 소리도 듣고 있다. 더 큰 욕심은 안 내려고 한다. 칸도 가고 아카데미도 가고, '어벤져스'에 출연하고 싶어요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이제는 저를 기다려준 가족들, 제 아내와 아이들이 꿈을 찾아가는 걸 돕고 싶어요. '카운트'에 "내 바통 좀 받아도~"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처럼 이젠 제가 바통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넘길 차례 같다. 배우로서는 큰 욕심 없이 나를 써주는 날까지 계속 연기 고민하고, 좋은 연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무대에서도 관객을 만나길 기대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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