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좋은 음성과 올바른 발성, 정확한 딕션. 배우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기본을 제대로 갖춘 배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는 연기할 때 대중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극 안의 드라마, 배우가 만들어낸 캐릭터에 집중하며 따라갈 수 있다.
배우 박해수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탄탄한 기본기에 신뢰가 간다. 극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호소력 짙은 감정 연기를 펼치는 것은 둘째치고 배우가 극안에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구현한다. 군더더기 없고, 빈틈이 보이지 않는 정제된 연기다.
지난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오징어 게임'을 시작으로 '야차',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 파트1', '수리남'에 이르기까지 지난 2년간 박해수는 다양한 작품에서 자신의 역량과 매력을 발산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촬영을 마친 작품이 연이어 공개된 탓이 컸지만, 배우의 매력을 대중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하나같이 세계 시장을 타겟팅한 OTT 작품이라는 점도 박해수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넷플릭스 작품에 잇따라 나온 탓에 '넷플릭스 공무원'이라는 수식어도 붙었지만, 그의 이런 행보로 인해 박해수는 '효자 수출품' 같은 이미지도 남겼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은 박해수의 대표작이 될만한 작품이다. 국정원 요원 '최창호'라는 본 캐릭터 뿐만 아니라 극 중 극 연기를 펼치며 마약 사업가 '구상만'이라는 부캐릭터도 연기해냈다. 한 편에서 극 안에서 두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출연 배우들 중 가장 다채로운 매력을 뽐냈다고 볼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박해수는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대학로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으로 정평이 났던 이 인물은 연극계 선후배들이 입을 모아 '대성할 배우'라고 손꼽는 재목이기도 했다. 2017년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기회를 잡은 뒤 그는 드라마와 영화를 종횡무진 오가며 대중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연극배우들이 드라마와 영화 등의 매체로 넘어올 때 겪는 시행착오를 박해수 또한 겪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클로즈업과 바스트 샷 구분도 어려웠다. 화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신이 있는데, 연극을 할 때는 온몸을 사용해 연기하지 않나 그런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매체 연기도 연극과 본질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의 문제였다"고 밝혔다.
"연극은 무대에 오르기 전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충분히 연습을 하지 않나.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는 혼자 연습을 하고 100~200명의 스태프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이런 상황의 차이가 있다. 초반에는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극복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더라. 그러나 경험치를 쌓으며 연극이든 드라마든 '연기'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매체(카메라) 연기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달라고 하자 "후배들이 많이 물어본다.'어떻게 이 장벽을 뚫어야 할까요?'라고. 장벽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렵다. '너도 이 신에서만큼은 주인공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라고 한다. 연극판에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이 많다. 환경에 주눅 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두 가지는 매체가 다를 뿐이다. 근본적으로 '연기'라는 것의 본질을 같다"고 답했다.
박해수에게 배우가 된 계기를 물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큰 인상을 담긴 한 장면을 소개했다.
"어린시절 암사동에 '둥근달카바레'라는 공간이 있었다.중년의 어르신들이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그런 곳이었다. 아버지랑 함께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무대에 올라 로봇 춤을 멋있게 추더라. 아버지께 저건 뭐냐고 물었더니 "뮤지컬이야"라고 하셨다. 무대 위에선 선 한 남자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고등학교 연극반은 그가 연기를 하게 된 촉매제가 됐다. 박해수는 "고2때 연극반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일제 강점기 배경으로 각색해 극을 올렸다.그때 연극을 해야겠다고 진로를 정했다. 그때는 스타가 되겠다 이런 개념도 없었다. 그저 무대에 오르고, 관객 앞에 서는 것에 대한 희열에 빠져있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는 무대 배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나 뮤지컬이 아닌 연극 배우를 꿈꿨다"라고 말했다.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박해수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연극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연기에 몰두했다. 그는 그 시절을 '인생의 황금기'처럼 묘사했다.
"대학에서 RDP(reading, discuss, performance)라는 동아리에 들었는데 좀 특이한 성격의 조직이었다.연극 인큐베이터, 연기 인큐베이팅의 성격을 띤 동아리라고나 할까. 이름 그대로 연기에 대해 (대본) 읽고, (연기에 관해) 토론하고, 공연하는 동아리였어요. 조명을 설치하고 세트를 만들어 제대로 공연하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 형광등 켜고 연기하는 그런 '암흑같은 동아리'였어요. 심지어 관객도 1명도 없었다. 조교랑 교수님들만 참석하시곤 했다. 그렇게 1년에 열 두 작품씩 공연을 했다. 고전부터 현대극까지 가리지 않고. 그러다 보니 연극영화과에서 하는 정규 공연은 참여할 시간이 없었다. 과에서 주축으로 활동하던 8명이 다 이 동아리 소속이었고, 이 공연에만 미쳐있다 보니 학교에서는 동아리를 없애라고 아우성이었다.학교에 알려지면 안되는 동아리처럼 지하에서 연습했다.이때 선생님께서 제게 했던 말씀이 '(공연이나 캐릭터를) 편식하지 마라, 다 외워라, 다 먹어라'였다.또 대본을 눈에 붙이고 자라고 하기도 했다.이때의 경험이 지금 제 연기의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해요"
이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 박해수의 눈은 유독 반짝였다. 그리고 아이처럼 신나서 말을 쏟아냈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직업인이 됐다. 오롯이 연기의 즐거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이 안에서의 고민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렇다. 배우의 삶이라는게 재미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다. 배우라는 직업만 있으면 퍼포먼스는 할 수 있지만 자위행위는 아니지 않나. 특히 대중 예술이라는 건 메시지, 재미까지 대중에게 선사해드려야 하니까 부담도 되고 스트레스도 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부담과 책임감을 가지고 연기를 할 수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낀다. 힘들 때마다 함께 작업하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설경구 선배, 하정우 선배, 조우진 선배들도 다 지나온 고민들이더라. 선배들의 말씀을 새기며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최근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작품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두 영화를 언급했다.
"얼마 전에 '칼리토'(1994)를 봤다. 알 파치노의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그가 어떤 변화의 시간을 거쳐왔는지가 보이더라. 또 니콜라스 케이지의 코미디 영화 '미친 능력'(2022)을 봤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물간 니콜라스 케이지를 연기하는데 기가 막히더라. 코미디 연기까지 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를 외치게 되더라. 나 또한 B급 코미디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김씨표류기'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또한 '튼튼이의 모험', '습도 매우 낮음'을 만든 고봉수 감독의 영화도 좋아한다"
그가 언급한 두 배우 모두 정통파로 분류되지만 폭넓은 연기 범위를 자랑한다. 박해수의 지향이 보이는 듯 했다.
"예전에는 작품을 선택할 때 잘 할 수 있는 건 일부러 안했다. 공부할때 선생님께서 '해수, 넌 하기 싫은 역을 해야해. 그래야 성장해'라는 조언을 늘 하셨는데 이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물론 과거에는 내가 뭘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을 아녔다. 그런데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걸 해왔던 것 같다. 사실 정말 하고 싶은 건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데 무겁고, 복잡한 감정이 오가는 작품을 선택해왔다. 그러다보니 도전하는 걸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어느 순간이 되면 편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연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만, 아직은 한참 멀었지 않나 싶다. 계속 도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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