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믿기 힘들겠지만 이 이야기는 전부 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물론 듣고 나서 이게 진짜냐고 물어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접 듣고 판단하길 바란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의 포문을 여는 강인구(하정우)의 내레이션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공통된 본질 중 하나는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도 실화처럼 느껴지는 게 잘 만든 영상의 힘이다. 물론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도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영화를 능가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의 재료는 없다.
'한국인이 중남미의 마약왕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수리남'의 토대가 됐다.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집단의 이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며, 인간의 선택과 딜레마를 그리는데 동물적 감각을 지닌 윤종빈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의 미묘한 줄타기가 '수리남'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 마약 누아르에 더한 한국적 정서...강인구로 획득한 개성
'수리남'은 남미 국가 수리남에서 마약 대부로 불리는 한인 목사(황정민)를 잡기 위해 민간인(하정우)과 국정원 요원(박해수)이 비밀 작전을 벌이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2009년 범죄인 인도로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서 체포된 한국 출신 마약왕 J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소재와 장르의 유사성 때문에 한국판 '나르코스'로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수리남'의 톤 앤 매너는 확연히 다르다. '나르코스'가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활약과 그를 추적하는 미국 DEA(마약단속국) 간의 쫓고 쫓기는 싸움에 방점을 둔 마약 범죄물이라면, '수리남'은 '보통 사람' 강인구가 국정원의 작전에 가담해 용기와 기지로 마약왕을 체포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자가 시종일관 묵직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장르적 매력을 부각한다면, 후자는 누아르와 풍자극 사이를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과 유쾌한 웃음 사이의 줄타기를 절묘하게 해낸다.
인상적인 건 6부작 전반에 녹여낸 한국적 정서다. 윤종빈은 시대를 재현하고, 집단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역량을 가진 연출자다. 여기에 저마다의 사정으로 고군분투하는 남자들을 등장시켜 생동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한다.
하정우가 연기한 강인구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한국형 가장의 표상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돈'이고, 돈은 곧 사랑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하는 '씨앗'이다. 이름조차 낯선 이국땅에서 그가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동력은 가족이었다.
어떤 이들은 강인구의 활약에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발휘하는 기지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종빈 감독은 이런 류의 장르물에서 흔히 선택하는 클리셰를 보란 듯이 비껴갔다. 이는 보는 이에 따라 장점처럼, 혹은 단점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강인구에게 보다 센 강도의 절박함을 부여하고, 전요환에 대한 복수심을 강화해 보다 쉽게 '보통 사람'을 '영웅'으로 진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종빈은 필모그래피에서 단 한 번도 범인(凡人)을 영웅으로 만드는 식의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인물이 무게를 잡거나 말도 안되는 에피소드를 가미해 이야기가 느끼해지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감독이다.
'수리남' 역시 윤종빈 감독의 영화적 신념과 취향대로 완성한 범죄물이다. 국내 시청자들에게 낯선 마약물에 한국적 정서를 가미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냈다.
◆ 픽션을 운용하는 방식...실제 사연대로+영화적 설정
'수리남'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허구와 실제 이야기가 섞여있다.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윤종빈 감독은 어떤 사회와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 치밀한 취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작품 역시 실존 인물인 K씨를 만나 실제 사건에 관한 취재를 했다. 이후 줄거리의 뿌리는 실화로 삼되, 줄기는 허구의 에피소드로 엮어나갔다.
강인구의 전사(前史)를 녹여낸 1화가 실제 K씨의 삶에서 착안한 것이라면, 마약왕 전요환의 수리남 장악기를 그린 2화의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다. 전요환이 수리남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에 종교를 통한 현혹이 있었고, 심지어 그가 목사로 활동했다는 것도 모두 허구다.
강인구와 전요환의 대립과 결탁, 동업과 배신의 이야기는 '수리남' 재미의 핵심이다. 하정우와 황정민이라는 걸출한 배우는 각자의 개성과 내공을 바탕으로 강인구와 전요환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
하정우는 윤종빈 감독의 6편의 작품 중 5편에 출연했다. 윤종빈은 '하정우 사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며, 하정우는 '윤종빈식 연출'에 특화된 배우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멋진 하루', '비스티 보이즈' 속 하정우의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캐릭터를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수리남'에서의 연기에 큰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하정우의 연기 스타일은 더하기가 아닌 빼기다. 설정을 최소화하고 군더더기를 뺀 담백함이 오히려 인물에 생기를 부여한다. 하정우는 강인구를 연기함에 있어 카리스마 대신 능청을 선택했다. 이건 하정우가 가장 잘하는 연기다.
'수리남'이 여타 마약 범죄 드라마와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것도 강인구라는 화자의 매력이다. 윤종빈 감독은 강인구를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한국형 가장'으로 빌드업하며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는 임기응변형 인물로 완성시켰다. 익살과 해학은 '수리남'의 확실한 개성이다.
황정민은 최고의 캐릭터 연기로 '수리남'의 또 한 축을 담당한다.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 '신세계'의 정청, '아수라'의 박성배를 합쳐놓은 듯한 전요환은 황정민식 캐릭터 연기의 최상위 버전처럼 느껴진다. 리모컨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중남미를 뒤흔든 한국의 마약왕'이라는 설정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여겨진다면, 황정민의 연기를 본 순간 '소름 돋는 진짜'로 완벽하게 설득된다. 그의 연기는 그만큼 강력하고 파괴력 있다.
하정우와 황정민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연기 색깔부터 캐릭터 축조법까지 모든 게 정반대인 두 배우의 앙상블은 육류와 해산물을 섞은 미슐랭 레스토랑의 요리를 먹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기에 적시적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박해수, 조우진, 장첸의 열연이 더해진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완벽한 풀코스다.
◆ 진짜와 가짜의 미묘한 줄타기...윤종빈이 하려는 이야기
'수리남'은 오프닝과 엔딩이 수미상관을 이룬다. 강인구의 손에 쥐어진 전요환의 '박찬호 사인볼'은 진짜와 가짜, 진심과 가심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의심과 신뢰 사이를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지만, 은근한 브로맨스도 형성한다. 이 야구공은 브로맨스의 진위 여부를 묻는 영화적 도구기도 하며 나아가 실화와 허구가 섞인 이 시리즈 전체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강인구와 전요환은 '돈'이라는 공통된 목적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전요환은 강인구가 자신과 같은 DNA를 가졌다며 속절없이 그를 믿었고 신뢰했다. 욕망의 지향점은 같았을지 모르나 그 방향성이 달랐다. 그렇기에 '속이면 살고, 속으면 죽는' 언더커버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건 강인구와 마약 왕국을 세워 끝없는 욕망을 충족하려 했던 전요환의 운명은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수리남'은 남자들의 드라마다. 마약 조직에 침투하는 언더커버와 작전을 지시하는 국정원, 마약왕 사이의 공조와 배신의 하모니에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공간은 없다. 왜 이런 소재를 선택했느냐에 대한 지적이 있을 순 있겠지만 왜 이 이야기에 여성 캐릭터가 없느냐는 지적은 트집에 가깝다. 캐릭터 성비의 기계적 배치가 작품의 수준을 높인다고 생각지 않는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필요한 역할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누가 뭐래도 '수리남'은 윤종빈 감독의 역량을 집대성한 수작이다. 지난 17년간 펼쳐온 윤종빈의 작품 세계에서 대중들이 가장 좋아했던 요소들을 응집해 완성한 매력적인 범죄 드라마다. 탄탄한 연출을 가능케 한 생기 넘치는 각본, 특급 배우들의 열연, 촬영과 미술과 음악 등 모든 기술적 요소까지도 흠잡을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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