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핫 리뷰

[빅픽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넘어지고 깨지며 성장한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8.26 09:37 수정 2022.08.26 10:08 조회 702
기사 인쇄하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인간이 살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장 단기간에 경험할 수 있는 건 '사랑할 때'다. '사랑'은 완벽히 남인 누군가를 맹목적인 감정을 매개로 알아가고, 이해하며, 빠져드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한다. 그러나 이 감정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피고 지는 꽃처럼 감정이 불타올랐다가 일순간 사그라들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의 기적으로 인해 인생의 환희를 맛보고, 사랑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는 모든 관계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만 '사랑'과 '연애'는 보다 더 잔인하고 지독할 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로맨스 장르의 탈을 쓴 성장 영화다. 이 영화는 한 여성과 두 남성의 연애담을 담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좀 더 포괄적인 범위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스물아홉 살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돌연 공부를 중단한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아주 이르지도, 아주 늦지도 않은 나이인 율리에는 자신의 적성을 탐구하듯 이런저런 일에 도전한다.

영화 사랑할땐누구나최악이된다 포스터

그러던 중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안데스 다니엘슨 리)과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한다. 20대와 40대, 같은 시간을 나누고 있지만 삶의 다른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두 사람은 삶의 지향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이때 율리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를 만나 악셀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12개의 챕터로 구성돼있다. 여기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더해졌다. 파란만장한 연애담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 율리에의 삶을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고민을 다룬다. 일과 사랑, 임신과 출산, 가족과 관계 등에 관한 이야기가 망라돼있다.

스물아홉 살 율리에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감정은 불안과 초조다. 어떤 남자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율리에를 이해하지 못할 순 있어도, 삶의 어떤 순간에 이르러 겪는 인간의 불안과 초조함은 공감할 수 있다. 누구나 이런 불안의 순간을 경험한 적 있고, 스스로 올곧게 정립되지 못해 가까운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못나게 굴고, 스스로 초라해지는 경험 말이다.

사랑

율리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불안과 초조는 관계 속에서, 특히 가장 내밀한 교감을 나눈다고 생각한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못난 형태로 불쑥불쑥 노출되고 만다. 물론 이런 모습이 단순히 율리에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서 발현된 것은 아니다. 율리에는 정서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가족 관계 속에서 성장했고, 이는 그녀의 '관계 맺음'에도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일부 반영됐다.

그녀는 똑똑하고 당찬 여성이다. 그러나 IQ와 BQ가 높다고 해서 현명한 사람이라고는 규정할 수 없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를 가지고, 감정을 쌓으며 농익어간다. 영화는 이런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포착하며 한 인간이 넘어지고 일어서, 나아가는 성장의 이야기로 발전시켰다.

자유롭게 살며 분방하게 행동하는 율리에가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고민과 결정은 가볍게 치부될 수 없는 것이다. 29살에서 30살로 넘어가는 불안의 시기, 그녀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며 임신과 출산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도 하게 된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느끼는 내외부의 시선과 모순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기도 하지만, 선택에 관한 영화기도 하다. 율리에는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그 결과가 충만한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나마의 위로라면 누구에게 등 떠밀린 인생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는 것이다.

사랑

본능을 따르고 감정에 맡기는 삶, 누군가에겐 '오늘만 사는 철없는 청춘'처럼 보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후회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스스로 '세상 최악의 인간'이라며 자조하지만 악인을 자처해야 했던 율리에의 선택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게 깨지고 넘어진 후 단단해진 이 여성의 삶이 낯설지 않다.

에필로그에 이르러 '율리에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답은 쉽게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여성은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장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해피엔딩이다.

영화의 명장면은 에이빈드를 만나러 가는 율리에의 모습을 담은 롱시퀀스다. 그가 있는 장소로 달려가는 율리에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차 있는 반면 그녀가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정지화면처럼 멈춰서 있다. 시간의 상대성, 찰나의 마법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감각적인 연출이다. 디지털 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 사람들을 가만히 서있는 상태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을 멈추고 내 연인과 다른 시간 속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그린 판타지 장면"이라고 감독은 연출 의도를 밝혔지만, 로맨스 영화의 연출적 기교만으로 그 의미를 국한할 순 없다. 이 순간 카메라가 포착한 율리에의 표정에는 연인에게서 벗어난 해방감, 마음 이끄는 대로 발길을 움직이는 자유, 비로소 솔직한 나는 마주하는 기쁨까지 읽을 수 있다. 율리에를 연기한 레나테 레인스베는 이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랑

노르웨이 오슬로의 근사한 풍광과 무드를 고조시키는 촬영과 음악도 탁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사고, 행동 양식과는 사뭇 다른 북유럽 정서가 가미돼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라우더 댄 밤즈', '델마'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연출을 맡았다. '리프라이즈', '오슬로, 8월 31일'에 이은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영화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올해 가장 잘 지은 영화 제목으로 꼽을 만하다. 영화의 원제는 'Verdens verste menneske'(영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즉 '세상 최악의 인간'이다. 이 제목이 한국에서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번역됐다.

ebada@sbs.co.kr

광고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