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박찬욱의 단일한 페르소나 박해일…이 배우의 품위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7.07 11:50 조회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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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인터뷰이로서 박해일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과묵한 성격인 그는 좀처럼 들뜬 모습을 볼 수 없다. 적정 온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은 짧고 진중하다. 작품 속에서 보여준 그 다양한 얼굴들을 생각해보면 '이 배우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라는 호기심이 늘 작동한다. 적어도 짧은 인터뷰 자리에서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럴 때는 배우의 작품 안으로, 연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배우의 연기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인물을 반영하기 마련이기에.

'헤어질 결심'은 탕웨이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박해일의 영화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주체는 송서래(탕웨이)지만, 그 마음의 동력은 장해준(박해일)으로부터 기인한다.

배우 박해일의 시작이었던 연극 '청춘예찬'(2000)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부터 그의 모든 영화들을 봐왔다. 박해일의 수많은 페르소나를 봤지만, 장해준은 그의 가장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은 '헤어질 결심'을 구상하면서 품위를 갖춘 원칙주의 형사로 박해일을 단번에 떠올렸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박해일은 대한민국 남자 배우라면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형사 역할을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 박찬욱 감독이 박해일을 떠올린 건 애초부터 종전 영화에서 묘사된 클리셰 덩어리의 형사가 아닌 '형사 같지 않은 형사'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칸에서 만난 박해일은 당시 자신이 연기한 해준의 모태는 박찬욱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대로 박찬욱은 해준을 연기할 배우로 박해일을 단박에 떠올린 뒤 그의 모습들을 캐릭터에 반영했다고 했다. 마침내 성사된 두 사람의 조합은 '헤어질 결심'이라는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멜로 드라마 안에서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냈다.

헤어

Q. 박찬욱 감독님이 "만납시다"라고 전화했을 때 "감독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반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구라도 감독의 미팅 제안은 캐스팅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일 텐데요.

A. 감독님께서 그런 이야기도 하시던가요?(웃음) 어느 날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봅시다' 하시길래 그때 내가 뭘 잘못했나 싶더라고요. 제가 사적으로 그분을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팬데믹 이전에 주변 영화인들의 시사회나 뒤풀이 자리에서 자주 뵙긴 했는데 대화를 오래 나눠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랑 작품 하나 합시다"라는 제안이 더 놀랍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Q. "박해일을 앞에 두고 마치 변사처럼 작품의 줄거리를 설명했다"고 하신 박찬욱 감독님의 말씀도 인상적이더군요. 첫 미팅 때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실 수 있나요?

A. 만나서 약 1시간 동안 영화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설명해주셨어요. 형사 캐릭터다. 내성적이긴 한데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품위를 갖춘 사람이고, 예의 바르고, 청결하기도 한 인물이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데 '이게 무슨 형사지?' 싶더라고요. 종전 한국 영화에서 봐온 형사들과는 너무 달랐으니까요. 그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인물을 만나게 되고 사건에 휘말린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줄거리를 들으며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말로 들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결과물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감독님의 작품은 늘 결과물만 봤지 과정은 전혀 몰랐으니까요.

박해일

Q.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나중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어봤을 때는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A. 세세한 표현들과 지문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박찬욱 감독과 오랫동안 각본을 함께 썼던 정서경 작가의 필력도 좋았고요. 시나리오가 너무 잘 읽혔습니다. 형사 역할이 처음인데 내가 이 역할을 맡기 위해 안 해왔던가 싶을 정도로 해준의 캐릭터도 흥미로웠고요. 한편으론 그간의 영화에서 안 해본 신들이 많아 많은 도전이 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특히 송서래 역할을 탕웨이가 맡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거 되게 흥미롭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찬욱 감독님이 '덕혜옹주'때 제 연기를 보고 저를 장해준 역에 염두에 두셨다던데, 같은 장르를 하더라고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니까 지금 내 나이의 정서를 표현해보자고 결심했어요. 또한 나라는 배우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선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기대감도 컸습니다. 따로 놀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Q. 말씀대로 장해준이라는 캐릭터는 종전 한국 영화에서 묘사되어온 거친 형사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절차를 지키는 원칙주의 형사에, 용의자에게도 예의를 다하는 모습에서 그 사람의 품위가 느껴지죠. 클리셰적인 설정을 모두 비껴간 '기품 넘치는 형사'는 어떻게 디자인하셨나요?

A. 어느 순간 장해준의 모습이 곧 감독님의 모습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의 기질이라던가 내면의 어떤 모습들에서 그걸 느꼈습니다. 그 점을 참고해 해준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갔어요. 한국 감독 중에 가장 신사적인 감독이 박찬욱 감독님이시죠. 현장에 늘 양복을 입고 나오는 감독이 한국에 또 있을까요? 해준도 직장은 물론 작업장에 양복을 입고 사건을 해결하러 다녀요. 그렇지만 뛰어다녀야 하니까 양복과 비슷한 색깔의 운동화를 신죠. 박찬욱 감독은 매너있고, 때론 유머러스하시죠. 해준에게도 그 점을 느꼈어요. 역시 캐릭터란 창작자이자 작가에게서 배분돼 나올 수밖에 없구나라고 느꼈어요.

헤어

Q. 캐릭터의 시작은 박찬욱이었다 하더라도 장해준은 오롯이 박해일이 창조해내고 흡수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하면서도 섬세한 이 인물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감독님이 원하는 건 익숙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걸 공식처럼 외우고 칠판에 써둔 뒤 '딩동댕' 소리를 듣는 과정은 아닌 거죠. 느낌표는 마무리잖아요. 저는 물음표가 있는 느낌으로 작품을 대했어요. 그래서 때때로 '정답이 뭘까?'를 고민하면서 힘겨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아를 내려놨어요. 혼자 책임지려고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나니 감독님의 말이 잘 들리더라고요. 그러면서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제겐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이게 박찬욱의 마법인가 보다 했어요.

Q. 이 배우의 작품을 많이 봐왔고, 그의 연기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 속 박해일은 새롭고 흥미로웠습니다. 본인도 본인에게서 낯설 모습을 많이 발견하셨나요?

A.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주어진 상황들이 낯설었으니까요. 해준이 서래를 호미산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눈이 내리잖아요. 이상한 판타지 같은 장면이에요. 서로 쌓아놓은 감정을 교류하는 순간이었죠. 촬영 당시는 익숙하고 일반적인 감정이 나올 수 없으니 애를 먹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으로부터 '오케이'(OK) 사인을 받으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송서래를 용의자로 의심하면서 조사하는 첫 번째 취조실 장면입니다. 취조당한 경험(영화 '살인의 추억')은 있는데 취조하는 경험은 묘하더군요. 그녀를 향한 마음이 의심에서 관심으로 가게 되는 그 공간과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탕웨이 박해일

Q. 말씀하신 호미산 장면에서 서래와 해준의 유일한 키스가 나옵니다. 현실같기도 꿈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A. 로맨스가 있는 영화면 키스신이 나올 수도 있는데 박찬욱 감독 영화의 키스신이라면 그만의 키스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신 굉장히 미묘하죠?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Q. 서래와 해준의 정서적 교감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영화다 보니 두 배우의 호흡이 어느 영화보다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서로가 본 첫인상부터 친해진 과정도 궁금합니다.

A. 탕웨이에 대한 이미지는 도회적인 여성이었는데 감독님과 실제로 만난 순간은 인간적이고 수수한 모습이었어요. 탕웨이의 한국 집에 놀러 갔는데 밭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대화를 해보니 서래와 너무 잘 어울리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탕웨이는 나와 해준의 매치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는데 감독님 말로는 탕웨이가 제 사진을 보더니 "장해준이네요!" 했다더라고요. 이처럼 처음부터 서로의 역할을 낯설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서래는 중국인인데 한국어가 부족한 캐릭터로 나오잖아요. 탕웨이가 촬영 들어가기 전 저에게 장해준이 하는 대사의 한국어 녹음을 부탁했었어요. 감정은 덜 들어간 상태에서 발음을 좀 신경써서 녹음해줬어요. 저 역시 중국어로 말하는 서래의 대사를 녹음해달라고 부탁했고요. 이런 과정이 서로의 역할에 대한 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헤어

Q. 두 인물은 첫 만남부터 한국어의 묘한 뉘앙스 차이를 경험합니다. 언어의 불통은 이 영화의 중요한 코드이자 묘미이기도 하죠. 불통하는 가운데에서도 해준은 서래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껴요. 이런 순간들을 연기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나가셨나요?

A. 서래는 쓰는 한국말은 구어체라기보다는 문어체에 가깝죠. '마침내', '단일한' 같은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잖아요. 우리가 익히 안 쓰지만 좋은 표현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쓰니 독특한 느낌을 주죠. 감독님은 이걸 영화의 무드로 생각하신 듯했어요. 장해준이 그 정제된 느낌을 부각해야 모순된 분위기가 살아난다고 봤어요. 그래서 저는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려고 노력했어요. 목소리도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알려주는 것처럼 친절한 톤으로 했고요. 탕웨이는 언어 감각이 탁월한 배우예요. 한국어 습득도 빠르지만, 순간적인 감각과 판단력이 뛰어나요. 특히 말보다 답답한 감정을 먼저 표현하는 재치가 아주 좋아요.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오해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점이 우리 영화의 차별화된 재미를 전한다고 생각해요. 관객도 '안개' 같은 느낌을 받으시는 거죠. 또 이런 것이 수사극 안에서 펼쳐지니 흥미롭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어요. 영화를 찍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작품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의 그 맛을 잘 살리고 싶었습니다.

Q. 어느 작품보다 그 과정은 어려웠겠지만 배우니까 이런 작품을 해내면서 연기로 느낀 성취감, 해방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A. 모자이크를 맞추는 느낌이 있었어요. 편집 구조상 나중에 알게 되는 상황이 있잖아요. 감정을 뒤늦게 알려주기도 하고요. 이런 건 배우가 미리 고려해서 연기를 하진 않아요. 감독도 그걸 염두에 두고 디렉션하지는 않고요. 모든 게 자연스럽게 찍혔고, 당시 감정에 솔직하게 연기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조합하는 것은 감독님의 영역이니까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 때의 감정이 이렇게 쓰여졌구나' 하는 놀라움도 있었습니다. 관객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마음을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느끼시는 바는 각각 다르겠지만 인물에 집중하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헤어

Q. 탕웨이와 촬영 중간중간 산책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A. 부산에서 세트 촬영을 한 달 정도 했는데 숙소 생활을 했어요. 촬영이 없는 날, 쉴 때는 쉬어야 하는 데 워낙 감정의 파고가 큰 영화잖아요. 그래서 서로의 컨디션을 체크해보고 싶었어요. 팬데믹이라 회식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힘들진 않은지, 답답하진 않는지 등을 알아보고 싶었죠. 현장에서는 촬영에 집중하다 보니 마음 놓고 얘기할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매니저를 통해 탕웨이에게 산책을 권유했어요. 해운대 달맞이길을 걸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수락해줬고요. 탕웨이가 이전에 '만추'라는 한국 영화를 작업한 적 있지만 그건 해외에서 촬영된 것이기에 한국에서의 촬영은 '헤어질 결심'이 처음 이잖아요. 다른 문화권의 배우가 한국에서 촬영하는 것이 낯설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힘든 건 없는지, 앞으로 좀 더 센 장면을 찍어 나갈 텐데 건강은 어떤지 등을 체크했어요. 절 장면을 찍을 때도 공기 좋은 데서 산책도 하고 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까 싶어요.

Q. 박찬욱 감독님은 거장이라기보다는 장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분이지만 작품은 처음 하셨는데 현장에서 거장의 면모, 장인의 면모로서 이런 것이 놀라웠다 하는 것이 있었다면요?

A. 전 오히려 '박찬욱은 이렇구나'라는 게 덜 보여서 놀랍고 좋았어요. 영화의 색깔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감독님은 미묘하고 모호해요. 그게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른이 되어서는 사람을 만날 때 상대의 기운을 판단해보게 되잖아요. 감독님은 그걸 안 보여주셔서 모르겠더라고요.

박해일

Q. 20년 이상 배우로 살아오시면서 40여 편에 가까운 작품을 해오셨습니다.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왔는데 여전히 많은 감독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다만 저도 매너리즘에 빠져요. 수렁에 빠진 것 같다가도 해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가까스로 올라오죠. 그런 것의 반복입니다. 관객들에게 어떨 때는 칭찬받고 어떨 때는 질타는 받아요. 다만 전 제가 해온 어떤 작품이나 연기에 대해서도 후회하진 않아요. 선택하기 직전까지 '이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긴 해요. 이후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 때는 이미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나아간다는 태도로 임하려고 해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누적된 작업의 경험들이 새로운 작업을 해나갈 때 큰 원동력이 되겠죠. 박찬욱 감독님과 만나 한 경험들도 저축해뒀다가 잘 쓰고 싶습니다.

Q. 처음 참석하신 칸영화제에서 폐막까지 머무셨는데, 여유 시간이 조금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A. 감독님은 정말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을 정도로 바쁘셨는데 저는 공식 상영 이후 이틀 정도 여유가 있었어요. 체육복을 입고 물통 하나를 들고 칸 거리를 좌로 10km, 우로 10km 걸었습니다. 좋더라고요.

ebada@sbs.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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