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박찬욱 감독은 '거장'보다는 '장인'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려 보인다. 결과에 의미를 부여한 '거장'이라는 호칭보다는 과정에서의 태도에 방점을 찍은 '장인'이 그를 설명하는 보다 적합한 표현처럼 여겨진다. 물론 박찬욱은 거장이기도 하고, 장인이기도 하다.
연륜이 쌓인다고 해서 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든 배우든 대체로 전성기는 젊은 시절 지나간다. 이후의 행보는 무르익느냐 뒤쳐지느냐의 기로다. 국내외를 막론한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최고작을 남기고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이를 먹는 것은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연출도 연기도 세월을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가 있다. 박찬욱 감독은 놀라울 정도로 예외적이다.
신작 '헤어질 결심'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영화적 매력이 가득한 수작이다. 멜로드라마와 수사극을 결합하고, 미스터리와 사랑의 감정을 한데 섞은 이 영화는 상충하는 요소들로 묘한 균형과 시너지를 낸다. 의심과 관심이라는 배치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두 인물을 보고 있노라면 빠져들어 탐구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 박찬욱 감독은 늘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작품의 끝에서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선사한 작품은 '헤어질 결심'이 유일하다. 박찬욱 감독과 탕웨이, 박해일.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낸 매혹의 순간들은 그만큼 잔상이 깊다.
"카메라를 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줌 인터뷰를 하고 있으면 벽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정중한 언어로 화상 카메라의 ON버튼을 켠 기자들을 향해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산더미 같은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영화 도슨트' 박찬욱 감독의 품격 넘치는 영화 이야기가 시작됐다.
(* 이 기사는 칸영화제에서 진행된 차담회와 인터뷰, 국내 개봉을 앞두고 이뤄진 인터뷰를 취합한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Q. 영화 후반까지 계속 의심이 됐는데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랑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멜로와 수사극이는 장르 결합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물에 대한 의심의 끈을 유지하게 하고 종국엔 강렬한 멜로의 감정까지 선사하셨습니다.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각본을 쓰셨고,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A. 저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정서경 작가가 절 더러 사랑 영화는 못 만들 거라고 하더군요. 자신도 못 쓸 거고요. 우리는 멜로를 못 만드는 종족이라고.(웃음)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도, 서경 작가도 멜로 영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런 과정에서 서경 작가를 어르고 달래가면서 각본을 함께 썼어요.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본인도 시나리오를 다 써놓고 실감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배우들이 연기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정말 놀라더군요. 배우의 힘이 정말 컸어요. 탕웨이와 박해일, 이 두 사람이 사랑의 낭만적인 감정을 감추면서도 관객이 다 알 수 있도록 묘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Q. 전작 '아가씨'(2016)와 '박쥐'(2009)가 원작이 있었던 작품인 반면 이번 영화는 순수 창작물입니다. 아이디어가 어떻게 나왔고, 어떤 식으로 발전된 건지 궁금합니다.
A. '리틀 드러머 걸'(2018) 촬영으로 영국에 있을 때 정서경 작가가 가족이랑 놀러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끼리 여러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무 말 대잔치' 같은 걸 했어요. "남자 형사가 있어. 예를 들어 박해일 같은 남자를 상상해보자고. 깨끗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야. 거기에 조금 변태끼도 있는. 아니 변태라기보다는 조금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그러나 무해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제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니까 서경 작가가 "그럼 여주인공은 중국인으로 해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라고 물으니까 "그래야 탕웨이를 캐스팅하죠!"라고 답하더라고요. 저도 탕웨이의 오랜 팬이라 "그거 좋네"라고 반응했어요.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Q. 탕웨이에게 먼저 캐스팅을 제안하고 각본을 집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와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크셨던 것 같은데 탕웨이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 연출을 하실 때 탕웨이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담고자 하셨나요?
A. '색,계'(2007)와 '만추'(2011), '황금시대'(2014)를 보면서 점점 더 이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녀의 매력은 몸이 꼿꼿하다고 해야 하나. 해준(박해일)이 서래(탕웨이)에게 한 그 대사는 실제로 탕웨이를 생각하며 쓴 대사예요. 이런 경우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을 좋다고 얘기할 때 그게 결국 자기에 대한 이야기거나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인 거죠. 서경 작가와 제가 대사를 쓸 때 이건 서래와 해준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탕웨이가 가진 자부심, 근데 그 자부심이 과시적인 건 아니고 '어디 가서도 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진심이다'류의 자부심이 있어요. 그래서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 똑바로 있는 사람이고, 그런 데서 오는 위엄과 기품이 있어요. 탕웨이가 연기한 서래라는 캐릭터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살인도 하고...나쁘다면 나쁜 사람이죠. 비난받을진 몰라도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해준에게 굉장한 당혹감을 안겨주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류의 행동을 하기도 하고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말하게끔 말이죠. 그런데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되레 되받아치는 당당함이 있어요. 그걸 탕웨이를 통해 중점적으로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Q. 서래는 처음부터 외국인 설정이었나요? 탕웨이가 캐스팅되면서 서래 캐릭터에 변화나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까요?
A. 탕웨이를 캐스팅하기 위한 설정이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요. 다만 우리가 비록 탕웨이를 캐스팅하기 위해 이런 설정을 했지만 보는 사람은 캐릭터가 중국인이어서 탕웨이를 캐스팅한 것처럼 보이도록 각본을 쓰자고 다짐했어요. 여주인공이 외국인이라는 점에 집중하고 파고들어서 그것이 서래 캐릭터의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도록 말이죠.
Q. 해준은 한국의 전형적인 형사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입니다. 매일 양복을 입고 출근하고요.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고, 용의자들한테도 매너를 보여주는 인물이죠. 거친 형사의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런 캐릭터는 좀 동화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해준의 형사 캐릭터는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나요?
A. 제가 고등학교 때 읽은 '마르틴 베크'라는 스웨덴 범죄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을 좋아했어요. 최근 몇 년 전 이 시리즈가 완역돼 그걸 읽으면서 더욱 반하게 됐죠. 그 안의 형사 캐릭터는 하나같이 점잖아요. 적어도 시민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예의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죠. 절차 중심의 수사를 하고 '형사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이라는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굉장히 사실주의적인 방향인데 동화적으로 와닿는다고 하니 좀 상반되는 반응이네요. 그런데 저는 그런 구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현실에 있는 형사를 보여주겠다고 출발하지만 다르게 발전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우선 해준의 옷차림부터 예의를 갖추고 싶었어요. 그는 늘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고. 하지만 수사를 하는데 불편하니까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어요. 해준은 마틴 베크처럼 총을 휴대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일을 할 때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으니까 주머니가 많은 옷을 선호하죠. 또한 청결한 것도 공무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품위 유지랄까. 출발은 사실주의였는데 결론은 동화가 됐네요.(웃음)
Q. 칸영화제에서부터 '헤어질 결심'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이 영화는 감독님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절제된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이런 방식을 택하셨는지요?
A. 좀 과묵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단순히 대사의 양이 적은 영화를 하려는 건 아녔어요. 사실 이 영화가 다른 제 영화에 비해서 대사가 적은 것도 아니지요. 다만 (인물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잖아요. 관객이 금방 알 수 있는 대사나 감정 표현도 적은, 그런 면에서 과묵한 영화죠. 요즘 시대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아요. 저 같은 나이대의 사람, 혹은 동양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구닥다리처럼 보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젊은 사람에게조차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늘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연출을 해온 반면,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클래식한 연출 방식도 추구해오셨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스마트 워치를 활용한 인물 간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외신에서는 이를 '디지얼로그'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감독님의 굉장한 변화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아이디어의 시작(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과 수용하게 된 과정, 연출에서의 고민점이 궁금합니다.
A. 각본 쓰면서 서경 작가와 '문자 보내는 장면이 이렇게 많아서 어떡하지?' 했어요. 비슷한 앵글의 클로즈업이 많아지고 스마트 기기 장면이 많아질 테니까요. 첨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현대인의 생활을 이런 것 없이 표현한다는 것도 너무 억지스러운 거 아닌가 싶고. 이런 걸 쓰면 간단히 의사소통할 수 있는데 이걸 안 쓰면 우회하는 수단을 억지로 강구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냥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죠.
다만 기왕 이렇게 된 거라면, 탕웨이를 위해서 중국인 설정을 한 것처럼 이것이 영화에서 중요한 주제인 것처럼 사용하자. 그래서 의사소통의 다양한 방식, 때로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 다양한 방식으로도 써먹자고 생각했어요. 이런 디지털 기기의 사용법이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게 됐어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놓은 것처럼요. 이를테면 핸드폰 시점샷 같은, 마치 기계 시점인 것처럼 쓴다던가. 해준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지만 전화기가 아닌 서래에게 보내는 거잖아요.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이런 장면을 한 번만 써서는 안 되고 하나의 스타일로 기능할 수 있게 여러 번 썼어요.
Q. 오랜 파트너였던 정정훈 촬영 감독이 아닌 김지용 촬영감독과 첫 작업을 하셨는데 만족도는 어떠셨나요? 새로운 촬영 감독과 작업하시면서 느꼈던 신선함 혹은 시너지가 궁금합니다.
A. 정정훈 감독은 이제 제 스케줄대로 작업할 수 없는 사람(정정훈 감독은 2013년 박찬욱 감독과 협업한 '스토커'를 계기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이 됐어요. '스타워즈' 시리즈가 들어왔다는데 어쩌겠어요? 제 첫 드라미였던 '리틀 드러머 걸'(2018)때는 김우형 촬영 감독과 작업을 했는데 즐겁더군요. '이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되겠지' 하면서 든든해했는데 이번에는 둘 다 안 된다는 거예요. 김지용 감독은 '달콤한 인생', '밀정'도 좋았고, '남한산성'은 기가 막혔죠. 그 작품으로 에너가 카메리마주 영화제에서 황금 개구리상을 수상했어요. 이 상은 촬영감독들이 오스카 촬영상 만큼 받고 싶어하는 상이예요. 김지용은 제가 호흡을 맞춰본 촬영 감독 중에 나이가 가장 적어요. 독특한 시점샷의 제안이라던가, 별난 앵글 등 신선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더라고요. 그게 단순히 '이거 재밌잖아요' 차원이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결합해서 논리적 이유가 있는 아이디어였어요. 아주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이 세분과 계속 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셋 중에 한 명은 되겠죠?(웃음)
Q. '헤어질 결심'에 대해 여운이 깊고, 곱씹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영화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평가에 대해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못 알아 들어서 여러 번 봐야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한 번 보고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좋겠죠. 집중만 한다면 이해하고, 즐기는데 문제가 없는 영화요. 다만 관객에게 영화의 시간은 똑같은 흘러가는데 다른 레이어가 이중 삼중으로 있다면 두 번 볼 때는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겠죠. 그건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Q. 모처럼 '잔혹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멜로 영화를 만들으셨습니다. 차후에도 이런 얌전한 스타일의 작품을 만드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이번 영화에 대한 개인의 만족도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아주 폭력적인 것도 있고, 덜 폭력적인 것도 있어요. 이제 이 길로 진로를 바꿔 탔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때그때 스토리에 맞는 표현 방식, 수위에 맞춰 만드는 거죠.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글쎄요. 제 영화를 놓고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음, (만족도가) 비교적 높은 편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우리 배우들의 연기가 참 귀여워서 제가 만든 영화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즐거워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크게 거슬리는 장면이 적고, 후회되는 장면이 적은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Q. 서래의 집 벽지 무늬의 파도, 서래가 보는 책의 표지도 파도, 마지막에 실제로 등장하는 파도의 이미지까지 영화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파도'의 연출이 재밌었습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파도'는 어떤 의미이고, 무슨 상징인가요?
A. 서래의 집 벽지는 언뜻 보면 산이고, 언뜻 보면 파도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어요. 마찬가지로 서래가 입은 원피스도 파란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녹색으로 보이기도 해요.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감정조차도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일 수 있죠. 서래의 정체도 불쌍한 피해자의 부인처럼 보였다가 나쁜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잖아요. 파도는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어요. 운명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자연현상이기도 하고 잔잔했다가 거칠게 일어나는 난폭한 면도 가지고 있죠.
Q. 탕웨이가 외국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어 대사 전달력이 다소 떨어지는데 혹시 자막을 넣을까에 대한 고민도 해보셨는지요?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집중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기 위해 고려조차 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A. 한국 영화에 대해 '대사가 잘 안 들린다' 하는 지적은 항상 나오는데 그건 판단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외국영화는 대사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막에 의존하잖아요. 우리도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영화관의 조건에 따라 잘 들리기도 안 들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사운드가 잘 조율되어 있는 극장 조건에 맞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어요. 탕웨이의 한국어 대사는 정말 몇 백 번씩 녹음을 해서 넣은 것이라 잘 들릴 거예요. 차라리 다른 배우의 대사가 잘 안 들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게 있어요. 외국인이 하는 한국어라는 선입견이요. 그래서 더 긴장하게 되고 '내가 잘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같은 마음이 악영향을 주기도 할 거예요. 자막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건 탕웨이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우리 목표는 자막 없이 관객들이 알아 듣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Q. 서래는 '마침내', '단일한', '붕괴되다', '꼿꼿하다' 등의 한국인들이 구어체에서 잘 사용하지 않은 언어들을 구사합니다. 특히 '마침내'의 경우 해준과의 첫 만남에서 그의 형사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파열음 같은 것이기도 했는데요. 서래가 외국인이라는 설정, 그녀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어색함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고, 키(Key)처럼 여겨집니다. 또한 서래와 해준은 소통과 불소통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종국에는 두 사람만의 언어를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설정이 국내 관객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갈 것 같습니다.
A. 그렇죠. '마침내'라는 말을 우리가 잘 쓰는 표현이 아니죠.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고, 곱씹어 보면 심오한 거 같기도 해요. 해준이 서래에게 한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관심이 생기게 되는 말이기도 하고요. 해준은 서래의 말을 들으며 끄덕끄덕 하다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 마음이 길게 지속되죠. 그 장면을 촬영할 때 박해일이 너무 뜸을 들여 엔지(NG)라고 생각했어요. 현장 편집을 하면서 그 장면을 다시 보는데 '이게 박해일이다'라고 생각되더라고요. 대담한 클로즈업인데 심지어 배우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대단하다고 느낀 순간이었어요. 또한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일상 대화에서는 안 쓰죠. 신문 기사에서나 쓸까. 또한 "내가 만들 수 있는 '단일한' 중국 음식"이라는 서래 대사에서도 '단일한'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어색하죠. 그런 재미를 많이 가져가고 싶었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말인데 약간 억양이 다르고, 발음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낯설게 들리나 싶은거죠. 이런 언어의 미묘한 사용과 차이가 우리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이번 작품도 엄청난 극찬을 받으셨고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수상하셨습니다. 매번 작품을 만들 때 이런 평가와 관객들의 기대가 부담이 되실 것 같습니다. 수많은 극찬과 호평 속에서도 정말 기쁘고 감동이 되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 스스로 평가하는 '박찬욱'은 어떤 감독인가요?
A. 부담은 있죠. 특히 흥행에 대한 부담이 큽니다. 다음 작품을 투자받을 수 있을 정도의 흥행이 돼야 하니까요. 투자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이익도 안겨줬으면 하고요. 이건 감독으로서의 생존이 달린 문제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요. '흥행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만드냐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능력을 발휘하고자 해요. 제가 갑자기 최동훈을 흉내 낼 수도, 류승완이 될 수도 없거든요. 내가 즐겁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 잘할 수 있기도 하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선에서 흥행을 목표로 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듣기 좋았던 칭찬은 '여태까지의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는 말, 그리고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참 반갑더군요. 나이도 있고 30년이나 감독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즐거울 따름이지요. 저는 지루한 걸 못 참는 감독이에요. 그래서 반복하는 걸 싫어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해서 했던 걸 또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는 즐겁게 일할 수 없거든요. 영화 연출은 각본을 쓰기 시작해서 촬영, 개봉까지 너무 긴 세월을 필요로 하고 모든 걸 갖다 바쳐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즐거워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Q. '헤어질 결심'의 영어 제목은 'Decision To Leave'입니다. 그런데 'Leave'라는 동사는 보편적으로 떠나는 대상이 '장소'일때 쓰잖아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처럼요. '헤어질 결심'의 한국 제목과 영어 제목에 담으시려고 했던 의미가 궁금합니다.
A. 맞아요. 미국 영화인데 이런 제목을 갖고 있다면 한국에 개봉할 때 '떠나갈 결심'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죠. 그런데 뉘앙스 차이가 조금 있어요. 그래서 이것이 완벽한 번역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영문 제목을 지었어요. 한국 영화의 영어 제목을 지을 때 꼭 곧이곧대로 직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어떤 단어보다는 이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 '결심'이란 게 결심은 하지만 실행하기는 힘들잖아요. 더불어 이 사랑이 힘들었으면 이런 결심까지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양쪽의 입장이 다 들어있어요. 매 순간 그런 결심을 했지만 실패하고 또 하고 또 하는 헛된 노력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Q. 영화 후반부에 해준이 서래에게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느냐"라는 되묻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소통과 불통의 그 미묘한 경계, 언어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과 느끼게 하는 것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감독님께서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것 같아 재밌게 여겨졌습니다. 이 장면에 대한 감독님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A. 서래가 그렇게 말을 할 때 "내가 언제 그랬어요?"라고 해준이 되묻고, 서래가 씁쓸하게 웃죠. 탕웨이의 그 씁쓸한 표정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 남자는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 남자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후 그녀는 중국말로 대답합니다. 해준은 10배로 답답해지죠. 해준은 설명을 원했는데 서래는 중국어로 말하니까요. 그런 수수께끼를 남기고 헤어지는 사람인데 핸드폰을 남겨놓고 가요. 해준은 인공눈물을 뿌리고 그의 시야는 뿌예졌다가 다시 맑아져요. 그러면서 비번을 풀죠. 핸드폰 속 녹음을 듣고서는 모든 걸 알게 됩니다. 직업적 자부심에서 자신의 품위가 발생한다고 믿는 이 자긍심 높은 형사가 "핸드폰을 버리라"고 말해요. 그건 이 남자에게 "아이 러브 유"를 백번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게 돼죠. 그렇게 서로 직접 대화하지 않지만 우회하는 여러 경로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뜻이 통하는 그런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감독 박찬욱' 움직이게끔 하는 '자극'은 무엇인가요?
A. 이전에 만든 영화들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것까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런데 다르기 위한 다름은 안돼요. 다르면서도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러면서 항상 옛날의 대가들과 비교 해봐요.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매체의 대가들도 그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봉조 작곡가가 도달했던 수준을 떠올려봐요. 진짜 훌륭했던 예술가들이 기울였던 노력과 성취를 생각하면서 나 또한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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