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최초의 월드스타' 강수연…영원히 기억될 그 이름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5.08 12:48 수정 2022.05.09 14:04 조회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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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씨받이'에서의 연기가 지금까지 최고의 연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오. 전혀요. 굉장히 아쉽고 내가 왜 저렇게 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최상의 연기'라고 만족할 수 있는 때는...글쎄요. 제 목표가 거기예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20살의 배우는 '최고의 연기'라는 말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반응했다. 그러면서 "스타요? 아니에요. 지금부터 시작이죠"라고도 했다. 겸손과 패기가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전설의 시작을 알렸던 배우는 이후 30여 년간 한국 영화계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자리했다. 그 이름은 강수연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렇지 않던 이 이름 석자는 대중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있다. 강수연은 '월드 스타'의 시초였다.

지난 7일 오후 3시 강수연이 5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지난 5일 자택에서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아오던 강수연은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영화계는 물론 대중들은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배우는 죽어서 이름과 작품을 남긴다. 원조 월드 스타 강수연의 데뷔 51년 발자취를 되짚어봤다.

강수연

◆ 4살 때 아역 데뷔…20대에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석권

1966년생인 강수연은 4살 때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동양방송(TBC) 전속 배우로 연기 활동을 하며 20살 전까지 약 10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매력과 연기력으로 뛰어넘었다. KBS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 등으로 '하이틴 스타'에 등극했으며, '고래 사냥 2'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도약했다.

임권택 감독과 만난 강수연은 20대의 젊은 나이부터 연기력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아 국내외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것은 강수연이 최초였다. 2년 후인 1989년에는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인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다.

강수연_영화 씨받이 스틸컷

어린 나이에 받은 국제적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이 될 법도 했지만 강수연은 수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과감한 도전을 이어나갔다. 1990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92년 '경마장 가는길', 1993년 '그대 안의 블루', 1995년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9년 '송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혔다. 1990년대는 '한국 영화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기였다. 이미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던 강수연은 임상수, 이현승 감독 등 신인과의 작품을 마다하지 않으며 한국 영화의 질적 발전에 힘을 보탰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대종상영화제·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10여 차례 이상 받으며 최고의 배우로 각광받았다.

20대엔 한국의 고전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았지만 30대에는 현대 한국의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연기력을 뽐냈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의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어떤 작품에서도 흔들림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강수연_드라마 여인천하 스틸컷

◆ '여인천하'로 지상파 연기대상…행정가로서의 역량도 발휘

강수연은 아역과 청소년 시절에는 TV 드라마 출연을 많이 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커리어는 영화 위주였다. 그러나 2001년 TV 드라마에 도전해 성공적인 안방 복귀를 알렸다. 2001년 방송된 SBS 사극 '여인천하'였다.

이 작품에서 강수연은 미천한 신분을 딛고 지략과 암투로 궁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는 정난정으로 분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이 작품의 시청률은 50%를 육박하며 국민드라마급 인기를 얻었다. 장장 150회에 이르는 드라마를 이끈 강수연은 연말 연기대상을 받으며 방송가에서도 최고 배우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명예와 위치가 공고해지면서 연기 활동뿐만 아니라 영화인으로서의 행정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영화계 현안에 크게 관심을 가졌고, 목소리를 냈으며, 발로 뛰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부단장을 맡으면서 미국의 통상압력에 맞서 한국영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강수연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시작부터 함께 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영화제 초석을 다지는데 이바지했으며 2015년에는 집행위원장을 맡아 2년간 영화제를 이끌었다.

이 당시는 영화제가 최악의 위기 사태에 직면했을 때였다. 2014년 '다이빙벨' 사태 이후 외부의 압력은 물론 내부의 내홍까지 겪으며 2016년에는 영화제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기자회견에 나선 강수연은 "영화제를 하지 않고 영화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면서 영화제 개최의 핵심 화두인 정관 개정을 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위기의 영화제를 맡아 모든 책임을 짊어진 강수연은 상당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년 동안 계속된 갈등과 파행의 책임을 지고 2017년 사퇴했다.

부산영화제

◆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어록으로 본 강수연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인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강수연이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래전, 류승완 감독이 한 영화인 모임에 참석했다가 강수연이 한 말을 기억해 대사로 만든 것이다. 영화인은 부와 명예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2015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강수연은 "작품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다"면서 "아역 시절에서 청소년 시절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이 힘들었다. 작품도 많이 안 들어왔고, 자아가 생성되던 시기였는데 나름 잘 넘어간 것 같다. 청소년 시기에서 성인 연기자로 넘어가는 시기도 아주 혹독하게 겪었다. 지금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이런 전환기를 처음 겪는 배우라면 힘들어했겠지만, 과거 여러 차례 비슷한 경험을 해보니 지금은 덜 힘든 것 같다. 나이를 더 먹었을 때 관객에게 편안한 배우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강수연

'할머니 배우'에 대한 바람을 밝힌 강수연은 자신의 본분이 '연기'임을 거듭 강조했다. 또한 '선택받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배우의 숙명은 하염없이 좋은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강수연의 이런 바람은 10여 년 만에 이뤄졌다. 현재 영화계와 OTT계에서 가장 핫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에 캐스팅된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부터 강수연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강수연은 지난 1월 촬영을 모두 마쳤다. 10년 만의 연기 복귀였지만 어느 배우보다 열정적으로 작품에 임했고, 동료와 제작진들을 챙겼다고 알려졌다.

20대 초반에 한 말인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다시 쓸 수 있는 때였다. 영화계를 대표하는 어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을 내려놓고, 배우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그러나 강수연은 지난 5일 자택에서 쓰러져 깨어나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됐다.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했던 배우 조현철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녀는 생물학적 변화를 맞았을 뿐 우리 모두 가슴에 '배우 강수연'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ebada@sbs.co.kr

<사진 = 故 강수연배우 장례위원회, 영화 '씨받이', 드라마 '여인천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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