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끼끗하게, 위대하게' 윤여정, 직설의 대화법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3.25 20:19 수정 2022.03.25 21:25 조회 1,215
기사 인쇄하기
파친코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 '끼끗하다'는 말 알아요?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저희 엄마가 항상 쓰는 말이거든요. 선자는 끼끗한 여자예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윤여정은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 '선자'를 "끼끗하다"는 형용사로 정리했다. 자신의 엄마 세대에서 즐겨 썼다는 그 말은 ▲ 생기가 있고 깨끗하다. ▲ 싱싱하고 길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음... 영어 단어로 표현하면 디그니티(Dignity)에 가까울 거야. 얘는 그게 있어서 좋았어요. 프라이드(Pride)랑 디크니티(Dignity)는은 또 다르잖아. 삶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비굴하게 사는 사람도 있거든. 그런데 선자는 아니었어요. 제가 한국 여자를 대표해서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전 이제 늙어서 어떤 역할이 들어오면 '할까? 말까?' 정도만 생각해요. '이건 꼭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작품은 굉장히 오랜만이었어요. 아마 내가 한국 사람이라 그런가 봐"

파친코

신작 '파친코'는 금지된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승리와 심판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연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4대에 걸린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가 노년의 선자(윤여정)와 젊은 선자(김민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국 Apple TV+가 제작비 1,000억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이 공동 연출을 맡고 윤여정, 김민하, 이민호, 진하, 노상현 등이 출연했다.

주인공 '선자'의 삶은 윤여정의 인생과 일견 닮은 구석이 있다. 본인은 미국에서 9년밖에 살지 않아 대부분의 삶을 일본에서 보낸 선자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성실한 삶을 산 궤적은 비슷하다. 또한 그 바탕에는 자식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그녀에게는 초이스(선택지)가 있었어요. 한수(이민호)의 첩이 되면 누리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삭(노상현)을 선택해서 일본으로 간 거예요. 그래서 모진 일도 많이 겪죠"

선자의 삶이 기구해진 것은 '잘못된 사랑'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결혼한 남자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고, 임신까지 한 그녀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비난 혹은 동정의 대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측한 선자는 한수의 제안을 거절하고 또 다른 고생길을 선택한다.

파친코

노년의 선자는 편안한 삶 대신 고난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손자 솔로몬의 질문에 "말만 하면 세상 다 준다카는 거, 내가 싫다 한기다. 내를 반으로 쪼개 놓고 살 수는 없다 아이가. 뭐는 당당히 내놓고, 뭐는 숨기고 살고. 니 그거 아나? 잘 사는 거보다 어떻게 잘 살게 됐는가 그게 더 중요한기라"라고 말한다.

윤여정이 말한 선자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는 대사였다. 연기 경력 57년 차의 대배우는 이 장면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해냈다. 연기하는 배우는 감정을 꾹꾹 눌러 세월의 질곡을 표현했지만, 그 연기를 보는 시청자는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다. 이 연기에는 '관록'이라는 말을 기꺼이 붙일 수 있다.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진행된 촬영은 녹록지 않았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낯선 환경에서 촬영하는 여건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미국 회사인 애플과의 첫 호흡도 이해하고 맞춰가야 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물론 뭐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 '난 애플이든 뭐든 난 신경 안 써'라고 말하곤 했죠. 제작 환경은 뭐, 애플이니까 괜찮았어요. 근데 일은 한국 사람이 참 잘해. 우리는 무슨 일이든 굉장히 빠릿빠릿하게 하잖아요. 한국 작품을 찍을 때 현장에서 날 부르는 사람은 한 두 명 정도예요. '얘, 지금 무슨 장면 찍고 있니?'라고 물으면 누구든 다 알아요. 그런데 여긴 큰 프로덕션이니 나를 부르는 세네 사람 이상이에요. 또 '뭘 찍고 있니' 해도 잘 몰라요. 한국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서양 사람들은 눈치가 없어요. 그래서 난 한국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해요. 이 늙은 여자와 함께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거든. 한국에서 작품 할 때 제 전제 조건이 '아침 9시 전까진 날 부르지 마라'인데, 여기서는 새벽 6시에 부르더라고요. 뭐 어떡해? 가야지. 그러면서 애플 욕을 얼마나 했던지.(웃음)"

파친코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해외 로케이션의 어려움을 말했지만, 윤여정은 현장에서 늘 베스트를 보여준다. 처음으로 윤여정과 호흡을 맞춘 코고나다 감독은 "매 순간 윤여정의 연기에 감탄했다. 그녀의 얼굴은 한국사를 담은 지도 같다"라고 극찬했다.

윤여정은 드라마와 영화,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센스8'에 이어 '파친코'로 또 한 번 OTT를 통해 해외 시청자와 만나게 됐다. OTT 작업에 대해서는 "저한테는 이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미드'든 '한드'든 상관 안 해요. 사실 난 OTT가 뭔지도 잘 몰라. 그저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늙은 여인, 늙은 할머니일 뿐이죠. 단 50년 넘게 이 일을 했으니, 일을 받으면 내 방식대로 하려고 해요. 매 작품 일을 잘 마치는 게 제 미션이에요. 다른 건 생각 안 해."라고 심플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자이니치'(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의 삶에 대해 알게 돼 좋았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파친코'에서 재일교포 3세인 아라이 소지와 모자(母子)호흡을 맞췄다.

"물론 우리가 모든 걸 다 알고 죽지는 않는데, 이번에 자이니치에 대해 알게 돼 좋았어요. 선자는 저희 엄마세대예요. 그때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많이 듣긴 했지만 잘 몰랐어요. 특히 자이니치에 대해서는요. 우리 부모 세대는 나라를 잃고, 말을 잃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어요. 그래서 그걸 빨리 극복하려고 했고요. 그 과정에서 해외에 있는 자이니치 같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잊혀져 버린 거죠.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어요. 긴 세월을요. 난 몰랐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자이니치 배우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울컥한 순간이 많았어요. 나라를 잃었다는게 이처럼 우리에게 오래 영향을 끼쳤구나 싶더라고요"

파친코

윤여정은 최근 미국에서 열린 '파친코' 프리미어 행사에서 현지 취재진으로부터 "아카데미 수상 후 달라진 게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오스카를 받기 전에도 최고의 배우였고, 지금도 최고인 윤여정의 삶에 트로피 하나가 추가됐다고 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리 없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 언론은 자국 중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윤여정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뇨. 저 만나는 친구들 그대로 만나고요. '파친코'는 오스카 수상 전에 촬영했어요. 변한 건 없어요. 수상은 좋은 거지만 배우에게 진짜 어워드란 다음 프로젝트받는 거예요"

윤여정은 여전히 윤여정으로 존재한다. 끼끗하고, 위대하게.

ebada@sbs.co.kr

광고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