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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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우리가 몰랐던 다이애나… '스펜서', 성(姓)을 찾아서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3.18 07:51 수정 2022.03.22 09:10 조회 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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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다이애나 영국 전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그린 '스펜서'는 영화 제목으로 다이애나의 결혼 전 성(姓)을 선택했다.

한 나라의 왕세자비였으나 전 세계의 아이콘으로 사랑받았던 다이애나는 사망 후 그 인기와 명성이 더 공고해진 인물이기도 하다. 떠들썩했던 결혼과 이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한 여성의 삶은 먼 나라 왕실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낯설지 않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신데렐라'로 불렸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삶은 동화책 속 이야기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영화 제목을 '스펜서'라고 정한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왕세자비였으나 스펜서이길 원했던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 영화에는 세기의 결혼식 장면이나 전 세계를 순방하며 평화의 아이콘으로 사랑받았던 다이애나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스펜서

영화 속 시간은 단 3일. 1990년대 초반, 크리스마스 이브(12월 24일)부터 박싱데이(12월 26일)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전통적으로 영국인들은 이 기간을 '가족들의 시간'으로 보낸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대중교통도 운행하지 않는다.

겉보기엔 영국 왕실도 다를 바 없다. 왕족들은 별장에 모여 그들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요리사와 경비병 등 왕실의 일꾼들은 그들이 최고의 연휴를 보낼 수 있도록 전투에 가까운 준비를 한다. 연휴 때는 체중을 늘리는 게 미덕이라며 식사 전 왕족들의 몸무게를 재는 기이한 풍경도 등장한다.

홀로 스포츠카를 타고 별장으로 이동하던 다이애나는 휴게소에 들러 사람들에게 "길을 잃었다"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일대의 지리를 모를 리 없다. 수년간 지나다녔던 그 길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건 마음의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혼란스럽다.

은유적인 오프닝으로 문을 연 영화는 다이애나가 왜 유리 구두를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밀도 높게 담아낸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인물의 전사(前史)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이애나의 심연으로 곧장 침투한다.

다이애나는 미디어에 박제된 미소 띤 온화한 얼굴이 아니다. 우울하고 쓸쓸하고 처연하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 '보수적인 왕실과의 마찰' 등 신문기사에 축약돼 등장했던 이혼 전 갈등은 곪을 대로 곪아있는 상황이다. 오랜 외도에 빠진 남편 찰스 왕세자는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며느리의 고통을 외면한 채 왕실의 체면과 규율만을 강조한다.

스펜서

영화 대부분의 장면은 별장 안이다. 이따금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다이애나의 모습과 드넓은 광야가 나올 뿐이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을 그리면서 공간 이동도 최소화했다. 다이애나의 내적 고통은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다. 들판의 허수아비, 헨리 5세에게 버림받았던 왕비 앤 불린의 환영 등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두 이미지 모두 다이애나를 상징한다.

안개 필터를 씌운 듯 몽환적인 느낌을 내는 야외의 풍경과 화려한 조명이 더없이 쓸쓸해 보이는 별장 내부는 대비를 이룬다. 바깥 세상에서는 동경하는 왕실의 삶이지만, 왕실의 허수아비가 된 다이애나의 시선은 밖을 향해있다. 그녀는 마음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배회한다. 바로크풍의 음악에 파열음을 섞어 만든 조니 그린우드의 OST는 극단으로 치닫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고조시킨다.

타이틀롤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돋보인다. 하이틴 로맨스 영화 '트와일라잇'(2008)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이 청춘 배우는 각종 구설에 휘말렸던 방황의 시기를 거쳐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최근 몇 년간 작가주의 감독들과 만나 작품 보는 안목과 연기력을 키웠고, 자신만의 연기 색을 내기 시작했다.

'스펜서'는 스튜어트의 연기력이 만개한 작품이다. 사실상 1인극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든 장면에 등장해 혼돈의 내면을 보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스펜서

다이애나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단발머리에 어깨를 강조한 재킷, 화려한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착용한 스튜어트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 두 인물을 한데 포개 놓은 것 같은 착시효과를 준다.

이 싱크로율은 실존 인물의 외면을 관찰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 배우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스튜어트는 수개월에 걸쳐 영국 악센트를 익히고, 체중을 감량했다. 섭식장애로 고생했던 다이애나의 모습도 실감 나게 재현해냈다. 무엇보다 신경쇠약 직전의 예민함과 날카로움을 담아낸 표정 연기들을 통해 대사보다 더 강력하게 인물의 고통을 전달한다.

'스펜서'는 뛰어난 심리 드라마다. 재클린 케네디를 그렸던 감독의 전작 '재키'와 마찬가지로 매스컴이 비춘 이미지로만 익숙했던 유명인의 심연을 해부하듯 들여다본다.

다만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의 전개인 데다 단 시간의 이야기를 느린 호흡으로 따라가는 연출을 구사하기에 유명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나 드라마틱한 결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이애나의 탈주로 보이는 듯한 엔딩이 영화의 가장 희망적인 판타지다. 이 인물의 진짜 마지막을 알기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스펜서'는 왕세자비로 살았으나 스펜서이길 원했던 한 여성의 내면의 갈등과 전투에 관한 영화다. 사랑도 자유도 없는 성(城)을 뛰쳐나와 다이애나가 회복하고자 한 건 자신의 성(姓)이었다. 그토록 되찾기 원했던 그녀의 풀네임은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Diana Frances Spencer)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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