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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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노출만 내세운 졸작…관객에게 사과하라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2.24 09:34 수정 2022.02.24 09:56 조회 8,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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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문제작이라는 말도 과분하다. 문제작은 도발적인 화두나 질문을 던지고, 영화 문법에 있어 실험적인 도전을 감행할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게는 졸작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가난한 농촌 출신인 '무광'(연우진)은 입신양명의 뜻을 품고 군에 입대한다. 성실한 군 생활로 모범사병에 뽑히고 '사단장'(조성하) 사택의 취사병이 된다. 그의 목표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출세의 길에 오르는 것이다. 사단장이 출장을 간 사이 젊은 아내 '수련'(지안)은 무광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무광은 자신의 목표와 신념 그리고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선을 넘고 만다.

처음에는 상사의 부인에게 잘 보여 출세하겠다는 권력욕이 앞섰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광은 욕망과 사랑을 넘나드는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수련 역시 성불구인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무광과의 관계에 심취한다.

인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2005년에 발간된 옌렌커(중국)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 소설은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군부대에서 벌어진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마오쩌둥의 사상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출간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판금조치를 당한 화제작이다.

장철수 감독은 원작의 풍자와 해학적 요소를 깃털처럼 가볍게 소비한다. 문학이 가진 명성을 19금 성애 영화의 액세서리로 활용한 모양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마오쩌둥이 내세운 정치 구호였고, 혁명의 언어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옷을 벗으시오"와 동의어처럼 쓰이며 끊임없이 실소를 자아낸다. 무광이 수련에게 할 수 있는 노동이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것에서 육체 서비스로 확장되면서 이 말은 섹스를 뜻하는 시그널처럼 영화 내내 울려 퍼진다.

물론 원작에서도 이 말은 혁명의 언어에서 욕망의 언어로 바꿔 사용된다. 그러나 섬세한 심리묘사와 고도의 상징, 체제를 향한 통렬한 풍자라는 소설의 장점이 납작하게 연출돼 웃긴데다 우습기까지 한 영화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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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첫 만남부터 관계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순간까지 꽤 긴 시간을 할애하며 두 사람이 상황을 설명하지만, 극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뚝뚝 끊기는 감이 있다. 그러다보니 육체 관계를 맺는 결정적 순간이 긴장감 있게 연출되지 않고, 촌극처럼 펼쳐져버린다. 그 이후부터 영화는 두 사람의 성행위를 전시하기 시작한다.

개인을 억압하던 체제와 사상, 사회적 의무로부터 탈주한 이들은 서로의 몸에 탐닉하며 자유를 만끽하지만 활자로 느낄 수 있었던 통쾌함이나 해방감이 영상으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살색의 향연과 묘기에 가까운 성행위는 어느 순간부터 지루하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은 원작을 가져오면서 시대적 배경을 블러 처리하다시피 했다. 1970년대 사회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중국도, 북한도 아닌 가상의 나라로 설정하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한다. 또한 주인공들의 대사로 이들이 느끼는 억압과 고통을 설명하고, 카메라는 사단장의 집 내부에 부적처럼 붙어있는 사회주의 장식품들을 반복적으로 비추지만 기계적 대입과 상징에 그치고 만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사회주의 안에서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과 사랑을 그리려고 하지만 전후 맥락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해 풍자와 해학의 의도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 본편에 쿠키영상까지 넣어 러닝타임은 무려 2시간 26분에 달하지만 감독의 연출 의도는 겉돌 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편차가 심하다. 우선 영화를 위해 체모 노출까지 불사한 전라 연기를 펼친 두 주인공의 용기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작품을 위해 투신한 결의가 호평으로만 이어질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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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진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로서 성실하고 좋은 연기를 펼친다. 외형적으로도 캐릭터와 맞아떨어지고, 안정적인 발성과 연기력으로 무광의 불안한 내·외면을 잘 형상화했다.

문제는 수련을 연기한 지안이다. 10년 이상의 연기 경력을 가진 배우가 이 정도의 연기력을 선보인다는 것이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로봇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지안의 대사 처리에 대해 감독은 "의도한 디렉팅"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배우의 함량 미달의 연기만 남았다.

장철수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로 전국 695만 관객을 동원한 바 있는 흥행 감독이다. 당시 김수현의 인기에 힘입은 바가 컸지만 그에게는 대중을 사로잡는 감각이라는 게 있었다. 데뷔작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에서 보여줬던 명징한 주제의식도 이번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민에게 복무하라'는 '색, 계'와 '화양연화'를 카피 문구로 가져다 쓴 패기를 보인다. 비교 자체가 안될뿐더러 괘씸하게까지 느껴지는 마케팅이다. 주인공들은 연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영화를 감내한 관객에게 사과해야 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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