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아름다운 삶"…'깐부 할아버지'가 전한 '승자'의 의미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1.11 10:08 수정 2022.01.12 14:03 조회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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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어요.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 진정한 승자라고 한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게 승자가 아닌가 싶어요"

지난해 10월,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했던 배우 오영수는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하고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을 '승자'라고 정의했다. 순위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1등만 기억하는 사회를 꼬집기도 했다.

약 1년 전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던 윤여정이 "최고가 아닌 최중만 돼도 충분하다"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연기로 일가를 이뤄온 70대의 두 배우가 한 이 말들은 경쟁에 치여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자신의 철칙대로 한 평생을 살아오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순간을 선물처럼 얻었다.

오영수

'오징어 게임'에서 1번 참가자 '오일남'으로 분했던 배우 오영수가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지난해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펼친 배우로 평가받았던 윤여정의 후보 배제로 잡음을 낸 그 시상식이었다.

백인 위주 시상식이라는 비판과 각종 의혹에 휩싸이며 할리우드의 전면 보이콧을 받은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한국 배우 오영수에게 트로피를 안기며 자성의 노력을 보였다. 외신들도 올해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상 결과로 꼽기도 했다.

오영수는 2021년 대중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배우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이 목숨을 건 게임에 참여하며 벌어지는 환희와 충격의 순간을 자비 없이 그린 드라마다. 마지막 참가자인 '쌍문동 성기훈'(이정재)을 가장 반갑게 맞아준 1번 참가자 오일남은 훗날 그에게 '깐부'라고 칭하며 자신의 구슬을 양보한다. 그리고 충격적 반전의 순간 역시 오일남이 만들어냈다.

연기 경력 58년 차의 관록의 명배우다. 군 제대 후 일자리를 찾다가 친구를 따라 연기에 발을 디뎠다. 1963년 극단 광장의 단원으로 입단하며 연기를 시작한 그는 2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해왔다. 동아연극상 연기상(1979), 백상예술대상 연기상(1994)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영수

2000년대부터는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다섯 작품 연속으로 승려로 분해 '스님 전문 배우'로 불리기도 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표정과 깊은 감정 연기는 '달관'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연기가 오영수의 일생일대의 연기라고 할 순 없다. 그는 연극 '파우스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의 무수한 연극과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드라마 '선덕여왕' 등에서도 빼어난 연기력을 뽐냈다.

오일남은 그의 연기 내공이 빛을 발한 캐릭터였다. 어린아이처럼 게임을 즐기는 해맑은 모습부터 충격적 반전을 선사한 후반부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특히 후반부에 보여준 극 장악력은 '오징어 게임'의 백미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배우들과의 연기 호흡에서도 상황에 맞는 시너지를 내며 극 안에 녹아들었다.

오영수

골든글로브 수상 소식을 현장이 아닌 서울에서 접한 오영수는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해 전이었다면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렸을 테지만, 한국인이 주축이 돼 만든 '오징어 게임'은 지난 몇 달간 국내를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한국인들의 DNA가 투영된 문화콘텐츠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오영수는 들뜨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자신이 한 대사들이 유행어가 되고, 방송 및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도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다녔다. '깐부' 열풍으로 동명의 치킨 브랜드가 광고 제안을 했을 때도 주저 없이 거절했다. "배우로서 내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이유였다.

생애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을 때 그의 발길은 무대로 향했다. 지난 7일 막을 올린 연극 '라스트 세션'에 '프로이트'로 분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골든글로브 수상 직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지만 연극 일정을 이유로 모두 고사했다.

오영수는 넷플릭스에 전한 수상 소감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과 다른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애쓰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삶, 아름답지 아니한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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