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칸영화제가 택한 변화…그 중심은 '여성'이었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7.19 17:44 조회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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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황금종려상은 '티탄'...."

17일(현지시간) 오후 7시 30분 프랑스 칸의 팔레 데 페스티벌 뤼미에르 대극장, 스파이크 리 감독의 한 마디에 제74회 칸영화제 폐막식 현장이 얼어붙었다. 행사가 시작된 지 10여 분 만에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스포일러가 심사위원장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똑바로 살아라'(1989)로 유명한 미국의 사회파 거장은 평소 할 말 하는 이미지로 유명했지만, 이날 시상식에서는 천기누설로 주최 측의 진땀을 흐르게 했다.

지난 201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이 잘못 발표된 것만큼의 충격적인 실수는 아니었지만, 매년 격식과 품위를 지키며 조용하게 시상식을 진행해왔던 칸영화제 풍경을 생각하면 이 상황은 한 편의 콩트 같았다.

칸

그러나 축제의 마지막 날인 만큼 뤼미에르 극장을 채운 영화인들은 미소와 박수로 스파이크 리의 실수를 포용했다.

폐막식의 해프닝을 제외하면 2년 만에 열린 칸영화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를 의식한 듯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영화제가 보여준 '변화'의 움직임은 그 어느 해보다 컸고, 의미 있었다.

영화제의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은 프랑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연출한 '티탄'에게 돌아갔다.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1993) 이후 28년 만에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게 그랑프리가 수여됐다.

뿐만 아니라 황금카메라상, 주목할만한 시선 그랑프리 등 주요 부문이 여성 감독에게 돌아갔다. 올해 칸영화제는 그 어느 해보다 강력한 여풍이 불어 닥쳤다. 괄목할만한 변화였다.

티탄

◆ 황금종려상→주목할만한 시선→황금카메라상…모두 여성 감독 작품

올해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파격'에 가까운 선택으로 보인다. 코로나19가 닥치기 전인 2019년 영화제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러나 '티탄'은 마지막까지 심사위원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칸에서 공개된 후 "2021년 가장 충격적인 작품",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매혹적 작품"이라는 극단의 평가가 나왔다. 영화제 기간 경쟁 부문 초청작들의 평론가 평점을 싣는 스크린 데일리에서도 총점 1.6점(4.0 만점)을 받는데 그쳤다.

야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메모리아', 레오 카락스 감독의 '아네트' 등이 평균 3점이 넘는 점수를 받아 수상이 점쳐지는 분위기였다.

'티탄'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와 조우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칸

2016년 공포 영화 '로우'로 주목받은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티탄'을 통해 한층 충격적인 스토리와 압도적인 연출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과도한 폭력성 탓에 심사위원단 내부에서도 의견이 충돌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심사에서 만장일치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기생충'이 이례적인 경우였을 뿐, 앞선 수상작인 '어느 가족'(2018), '더 스퀘어'(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디판'(2015) 등은 심사위원 간 치열한 논의 끝에 탄생한 결과였다.

올해도 그랑프리 선정을 두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칸 심사위원단은 거장의 '무난한 수작'이 아닌 젊은 감독의 '문제작'을 선택하며 패기 넘치는 영화인의 미래를 응원했다.

이로써 뒤쿠르노 감독은 네 번째 연출작이자 생애 첫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으로 황금종려상을 타는 영예를 안았다. 뒤쿠르노 감독은 무대에 올라 "어떤 영화도 영화를 만든 사람 눈에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가 괴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 "다양성을 불러내고 괴물을 받아들여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하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여풍이 거셌다. 상을 수여하는 전 부문의 최고상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받았다. 주목할만한 시선상은 그랑프리는 러시아 키라 코발렌코 감독의 '움켜쥐었던 주먹 펴기'에게, 황금카메라상은 크로아티아 출신 안토네타 알라맛 쿠시야노비치 감독의 '무리나', 단편 황금종려상은 홍콩 탕이 감독의 '세상의 모든 까마귀들'에게 돌아갔다. 이는 칸영화제 74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칸

◆ "이 상이 내가 여성인 것과 관련이 없길 바란다"

뒤쿠르노 감독은 폐막식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받은 상이 여성인 것과는 관련이 없길 바란다"며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여성이기 때문에 제인 캠피온이 수상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많이 생각했고 곧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성 수상자가 뒤를 이을 걸로 본다"라고 말했다.

여성 감독의 수상이라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메시지였다. 영화제에서의 제1의 심사기준은 '작품'이다. 여성 감독이라서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상을 받은 영화의 감독이 여성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뒤쿠르노의 수상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라면서 "최근 수년간 칸영화제의 성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돼 왔다"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호주 출신 제인 캠피온 감독이 '피아노'로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와 공동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28년 간 여성 감독의 영화는 그랑프리와 인연이 없었다.

이 결과가 '차별'이나 '불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만 영화계에서 여성 인력은 증가하는 추세이고, 또한 좋은 여성 감독들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 만치 영화제에 초청을 받거나 상을 받는 빈도는 낮았다.

2018년 칸영화제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여성 거장 아녜스 바르다와 호주 출신의 연기파 배우 케이트 블란쳇 등을 필두로 여성 영화인 82명이 레드카펫에서 성평등을 요구하며 퍼포먼스를 벌인 것. '82'라는 숫자는 1946년 칸 영화제가 시작된 후 초청된 여성 감독의 수다. 같은 기간 남성 감독이 1,645명 초청된 점과 비교해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칸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미국과 유럽에 비해 영화 변방으로 평가받았던 나라의 영화를 조명하는 것만큼 우수한 영화나 감독들이 성(性)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고 영화로만 평가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칸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 중 가장 우수한 영화는 여성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 2019년 영화제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각본상)으로, 마티 디욥 감독은 '애틀란틱스'(심사위원 대상)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다. 2018년 영화제에서는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심사위원상),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각본상)가 황금종려상에 근접했다.

'티탄'의 황금종려상은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과 작품의 힘이 만나 이뤄낸 결과였다.

ebada@sbs.co.kr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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