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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낙원의 밤', 박훈정의 지독한 자기복제와 짜깁기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4.13 18:08 수정 2021.04.15 09:36 조회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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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모든 것을 잃은 남자와 삶의 벼랑 끝에 선 여자 그리고 그들에게 드리운 파국의 그림자. 느와르 장르에서 꽤나 익숙한 구성이다. 여기에 이국적 풍경의 제주도가 촬영지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서 영화 제목에 걸맞는 무드가 형성된다.

박훈정 감독의 6번째 장편 영화 '낙원의 밤'은 느와르라는 장르적 특성 이해하고 봐도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의 단순함과 구성의 허술함이 두드러진다. 여기에 강력한 기시감까지 느껴진다.

양사장(박호산)파의 2인자인 태구(엄태구)는 북성의 도 회장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다. 조직에 대한 의리로 제안을 거절한 태구는 며칠 후 유일한 혈육인 누나와 조카를 교통사고로 잃는다. 북성의 소행임을 확신한 태구는 도 회장에게 린치를 가하고 북성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낙원의 밤
낙원

태구는 러시아 도주를 준비할 동안 제주도에 가있으라는 양 사장의 제안을 받고 홀로 그곳으로 향한다. 무기상 쿠토(이기영)의 집에 머무르게 된 태구는 그의 조카 재연(전여빈)과 사사건건 얽히게 된다.

느와르 장르에서 권력 암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특히 한국 조폭물은 피와 폭력이 앙상블을 이루며 권력 암투의 팽팽함과 살벌함을 배가 시켜왔다.

영화 '신세계'(2014), '마녀'(2018) 등 느와르 장르에서 남다른 장기를 보여준 박훈정 감독은 다시 한번 조폭 간 권력 암투 속에서 위기에 처하는 한 남자를 내세운다. 이번에는 조직 대 조직 간의 암투보다는 조직 대 개인의 갈등 구도를 내세우면서 태구라는 한 남자의 고독에 포커스를 맞춘다.

'낙원의 밤'의 차별점이자 강점은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제주도라는 공간이다. 태구의 고독과 허무, 재연의 무기력함과 비애를 푸른 바다와 검은 밤이 포용하며 영화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낙원의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입을 방해하는 건 낡고 뻔한 이야기다. 예상 가능한 전개, 어디에서 본듯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박훈정의 전작에 대한 기시감은 물론이고 익히 알려진 느와르 영화의 몇몇 장면을 짜깁기 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많은 각본가들은 레퍼런스를 활용해 제2의 창작을 이뤄낸다. 그러나 창작을 위한 레퍼런스가 아닌 아이디어를 답습하는 건 흉내내기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 '소나티네'의 콘셉트과 '신세계'의 권력 암투, '마녀'의 엔딩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영화가 '낙원의 밤'이다.

이쯤 되면 자기복제와 짜깁기의 악순환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는 없고, 모방이 창작에 공헌하는 봐도 적지 않다지만 그 정도가 심하다면 만든 이의 고유한 창작성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박훈정 영화의 취약점인 서사 구조의 단순함, 유치한 대사, 어색한 유머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공간의 무드와 배우들의 열연도 보완할 수 없는 아쉬움을 노출하고 만다. 이런 단점들은 발생하는 사건과 행동의 유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나누는 교감에 관객이 얼마나 동화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낙원의 밤'은 실패작에 가깝다.

영화의 최고 미덕은 캐스팅이다. 엄태구와 전여빈이라는 배우를 주연으로 과감하게 기용하면서 이야기의 허술함과 캐릭터의 빈틈을 배우의 매력으로 채우는 모양새다.

낙원

'잉투기', '밀정', '택시운전사' 등으로 주목받은 엄태구는 이번 영화에서 캐릭터에 자신만의 개성을 입혔다. 무표정 속에서 엿보이는 인물의 심리, 거친 톤과 불분명한 발음이라는 배우 개인의 약점조차 캐릭터의 특징처럼 여겨질 정도다.

'죄많은 소녀'에서 빼어난 연기력을 과시했던 전여빈 역시 삶의 벼랑 끝에 선 재연이라는 인물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마 이사로 분한 차승원은 캐릭터 연기가 뛰어난 배우인 만큼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지만 그가 구사하는 유머가 이야기의 톤과 어우러지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이는 배우의 연기 문제라기보다는 시나리오의 구조적 문제와 캐릭터 축조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다.

'낙원의 밤'은 태구로 시작해 재연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마지막 10분을 위해서 달린 것 마냥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강렬한 장면을 배치했다. 여성의 주체적 선택과 놀라운 실행력이 주는 몰입감이 상당함에도 엔딩조차 이야기의 유기적 흐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의도가 명확한 기능적 배치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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