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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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미국은 왜 '미나리'에 열광하나…보편성의 비범함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3.02 16:21 수정 2021.03.16 13:37 조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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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보편성과 비범함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을까. 영화 '미나리'를 보며 서로 다른 개념의 두 단어가 함께 떠올랐다.

개인에게는 특별한 기억이지만, 타인의 관점에서는 그리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사사로운 개인의 경험이 국적과 세대를 넘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보편성의 힘이다. 익숙한 듯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1980년대 미국, 제이콥(스티븐 연)은 가족을 이끌고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이주한다.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 대신 내 땅에 씨앗을 뿌리고 가족을 부양할 풍요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다.

미나리

남편을 따라 먼길을 온 모니카(한예리)와 딸 앤(노엘 조), 아들 데이빗(앨런 김)는 허허벌판에 놓인 바퀴 달린 자동차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버젓한 집이 아닌 이동식 트럭 안에서 기거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제이콥은 비옥한 토지를 찾아다니고 땅을 일군다. 아내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며 생계에 이바지한다. 자신들이 일을 나갈 때 홀로 남겨질 아이들, 특히 심장이 약한 아들 데이비드가 걱정된 모니카는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에게 도움을 청한다. 천연덕스럽게 밝고, 넘치게 수다스러운 순자를 본 데이비드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라고 볼멘소리를 낸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순자와 아이들은 어색한 일상을 공유하며 가족 되기 과정을 이어나간다.

우리네 밥상머리에 흔하게 올라오는 채소인 미나리는 미국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이콥 가족을 상징한다. 미나리는 씨앗을 뿌리는 첫 해에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데 흙에 뿌리면 그 흙을 깨끗하게 하고 물가에 뿌리면 그 물까지 깨끗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시냇가 옆에 뿌린다. 비옥한 땅도 아니고, 물을 따로 주지도 않았지만 미나리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성하게 피어오른다.

미나리

처음엔 그저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네이밍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이토록 절묘한 은유라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직설적인 동시에 시적인 비유로도 읽히는 제목이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정이삭 감독은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났고, 남주 아칸소 시골 마을 농장에서 자랐다. 이민 1세대인 부모의 이야기를 극화했다.

극적인 사건이나 허를 찌르는 반전은 없다. 주요한 갈등과 해소 역시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놓여있다. '아메리칸 드림' 서사는 드라마적 관점에서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꿈과 이상향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난과 역경, 갈등과 해소, 실패와 성공 그리고 성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 과정을 섬세한 연출로 형상화했고, 미학적인 영상과 음악을 가미해 정서적 친밀감을 높였다. 또한 가족의 고난과 화해에 종교적 은유까지 넣어 풍성한 함의를 완성했다. 

'미나리'는 보편성의 기반 아래 공감대를 쌓아 올린 아름다운 드라마다. 어떤 감정도 조장하지 않는다. 격렬한 액션과 시각적인 자극, 감정의 파고를 강요하는 한국의 어떤 상업 영화들과는 달리 덤덤하고 심심하게 가족이 함께 이겨낸 시간들을 조용히 뒤따를 뿐이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느끼는 각각의 혼란과 고민을 섬세하게 표현해내 시나리오의 작은 빈틈마저 채워 넣었다.  

미나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의 후보 분류를 놓고 영화의 국적 논쟁이 불붙기도 했다. 미국의 자본이 투입되고 미국의 제작사가 제작했으며 미국 국적의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린 것은 '인종차별 논란'을 제기하기 충분했다. 이 촌극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민으로 살아왔음에도 머리색,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외국계 미국인의 현실을 문화적 벽으로 마주한 느낌까지 전했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배우가 다수 등장하고 한국말이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다소 독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지지하면서도 버거워하는 어머니의 인내, 자식을 위한 할머니의 희생 등 한국의 가부장제에서 익숙히 봐왔던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를 한국 영화라고 우길 순 없다.

'미나리'는 미국에 이민 와서 그 땅에 뿌리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저 이 가족이 한국에서 넘어갔을 뿐 이 이야기는 국적을 초탈한 보편성을 띠기도 한다. '이민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나의 이야기이자 너의 이야기이고 우리네 이야기로 읽힌 것도 그 이유다.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다"는 이상한 규정에 의해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골든글로브의 선택을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 중 유일한 미국 영화였던 '미나리'는 수상의 기쁨을 누렸지만 그 상이 '외국어영화상'이라는 건 여전한 아이러니다. 국적과 인종, 성별과 소재를 다양화하는 영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변화 속에서 이같은 규정은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

미나리

'순자'를 연기한 윤여정을 향한 찬사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 배우의 다양한 면모를 봐온 국내 관객들에게 이 연기는 베스트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소 전형적일 수 있는 캐릭터를 폭넓은 레이어로 입체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범치 않은 아우라에서 뿜어져 나온 위트와 유머 그리고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푸근한 정(情)을 윤여정은 특유의 리듬감으로 표현해냈다. 명배우의 특별한 매력을 더 큰 무대, 더 많은 관객이 알아보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자부심이다.

미국 내 시상식에서 26개의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윤여정은 골든글로브의 홀대를 뒤로 하고 오는 4월 아카데미 시상식에 도전한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의 색깔과 느낌을 이렇게 규정했다. 이보다 더 절묘한 설명을 없을 것 같다.

"조미료가 없는 영화예요. 담백하고 순수하지만 건강해요. 한번 잡숴보세요"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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