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영화 핫 리뷰

[빅픽처] 김기덕 감독, 코로나19로 마감한 24년 영욕의 영화사

김지혜 기자 작성 2020.12.12 11:23 수정 2022.03.08 14:06 조회 1,765
기사 인쇄하기
김기덕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이토록 허망한 죽음이 있을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바이러스가 한국 영화계에 생각지도 못한 비보를 안겼다.

김기덕 감독이 59년 짧은 생을 코로나19 합병증으로 마감했다. 카자흐스탄과 라트비아, 러시아 매체를 통해 전해진 김기덕 감독의 사망 보도는 이내 가족들의 확인으로 사실이 됐다. 24년간 쉼 없이 달려온 영화 인생도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됐다.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본상을 받은 유일한 한국 감독인 김기덕은 영화감독으로서 절정의 기쁨을 누렸으나 불명예스러운 논란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지치지 않은 창작욕은 여전했다. 2018년 제기된 미투 논란 이후 해외로 넘어간 김기덕 감독은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올해는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한 신작 '디졸브'를 현지 배우들과 촬영했다. 또 최근까지 한국과 에스토니아의 합작 영화인 '비, 눈, 구름과 안개'라는 제목의 신작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 창궐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영예와 치욕으로 점철된 김기덕 감독의 59년 인생사, 24년 영화사를 되짚어 봤다.

김기덕

◆ 거리의 풍운아, 영화에 빠지다

김기덕 감독은 충무로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30살이 되기 전까지 영화와는 인연을 맺은 적도 없었으나 뒤늦게 영화계에 입문해 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자수성가의 표본이다.

경북 봉화 출생인 김기덕은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 졸업 이후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15살 때부터 서울 구로공단과 청계천 일대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 성인이 된 뒤에는 해병대 하사관으로 5년간 군 복무했으며 이후 신학대에 입학했다.

30살이 될 무렵에는 또 한 번 진로를 튼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다. 이때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을 보고 영화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기덕 감독은 1995년 '무단횡단'이란 시나리오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같은 해 저예산 영화 '악어'(1996)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출 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영화들은 초기만 해도 대중의 외면은 물론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저예산, 소수의 스태프, 단기 촬영 방식을 고수하는 탓에 영화의 완성도가 좋지 못했다. 특히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뒤틀린 남녀 관계를 묘사하는 영화들로 인해 여성 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는 일이 잦았다.

김기덕

◆ 국내에선 홀대vs해외에선 찬사…논란의 영화들

김기덕의 영화는 늘 논쟁의 대상이었다. 폭력과 섹스, 가학과 피학이 넘치는 이야기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 혹은 불편함을 선사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의 일관된 영화 세계에 대한 조명이 깊이 있게 이뤄진 것은 국내가 아닌 해외 영화계였다.

4번째 장편영화인 '섬'(2000)이 해외 각종 영화제에 초청돼 주목받았고 특유의 강렬한 스토리와 야성적인 연출은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초기작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은 2002년 개봉한 '나쁜 남자'다. 조직폭력배가 첫눈에 반한 여대생에게 모욕을 당한 후 복수심에 불타 상대를 창녀로 만들어버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논란은 관객의 관심에 불을 지폈고, 전국 70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김기덕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예술에 있어 폭넓은 포용력을 보이는 유럽 영화계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단순한 스토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이고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식도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웠지만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특함으로 해외 평단을 매료시켰다.

해외영화제에서의 성취는 동시대에 활약한 이창동, 박찬욱, 홍상수보다 앞서 나갔다. '사마리아'(2004)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만든 '빈집'이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받으며 국내외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한 해에 3대 국제 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감독상을 받는 진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은 김기덕의 감독이 미국에서 주목받은 계기를 마련한 수작이다. 동자승의 일생을 다루며 윤회와 순환의 마침표를 찍은 작품으로 동양의 불교 사상을 김기덕식 색깔로 풀어낸 작품이다. 미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258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두며 10년 가까이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유지했다.

해외 영화제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국내 영화계에서도 김기덕 감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해외에서의 명성이 견고해지면서 국내에서의 대접과 영화 작업 환경은 좋아졌지만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감독이었다. 해외에서 수상을 하고 돌아와도 국내 개봉 여건은 좋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대중성이 떨어지는 데다 예술 영화라는 인식이 극장이 선호하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은 대기업 투배사 영화들의 독과점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며 한국 영화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거장'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 건 2012년 만든 '피에타'가 한국 영화 최초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면서부터다. 복수와 용서,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그린 이 작품은 종전의 김기덕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은유와 상징으로 메시지를 부각해 김기덕표 영화의 완성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김기덕

◆ 페르소나는 조재현…장동건·이나영 등 톱스타와의 협연

페르소나는 조재현이다. 조재현은 데뷔작인 '악어'를 비롯해 '야생동물 보호구역', '나쁜 남자' 등 김기덕의 초기작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김기덕의 연출 스타일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였다. '나쁜 남자' 이후 사이가 껄끄러워진 두 사람은 한 동안 영화 작업을 함께 하지 않다가 '뫼비우스'(2013)로 재회했다.

그러나 오랜 영화 동지였던 두 사람은 미투 논란에도 함께 휩싸이며 명성이 동반 추락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톱스타들과의 협연으로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 잘생긴 톱스타이자 선역 전문 배우로 인식되어온 장동건과 '해안선'(2002)을 작업하며 악역으로도 매력을 발할 수 있는 배우임을 입증시켰다. 또한 이나영과는 '비몽'(2008)을 촬영하며 배우의 내면 연기를 끌어냈다는 반응을 얻었다. 위안부 화보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승연과는 '빈 집'(2004)을 촬영해 활동 복귀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김기덕 감독은 페르소나인 조재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화에서 신인 배우를 기용해왔다. 이로 인해 배우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을뿐더러 쉽게 휘발되고 감독의 색깔만 남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톱스타들과의 작업에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결과를 낳으며 그들이 배우로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김기덕

◆ 논란으로 얼룩진 명성…미투 논란으로 해외行

굴곡진 성장 배경만큼이나 감독 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명성을 얻은 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후배인 장훈 감독과의 트러블이다. 김기덕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었던 장훈 감독은 김기덕 감독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는 영화다'(2008)를 만들어 충무로에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차기작인 '의형제'부터는 각자의 길을 갔다. 김기덕 감독은 "지인에게 배신을 당했다"며 칩거에 들어갔고, 그 시간을 그린 영화 '아리랑'으로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받았다.

이후 양측은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고 밝혔지만 1년에 1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냈던 김기덕 감독이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김기덕

2017년에는 '뫼비우스' 촬영 당시 여배우를 폭행을 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해 벌금 500만원에 약식 기소됐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김기덕 감독의 촬영 방식에 대한 논란도 긴 시간 이어졌다.

김기덕 감독의 국내외 명성을 한 순간에 추락시킨 사건은 2018년 촉발된 미투 논란이다. 과거 감독의 직위를 부당하게 남용하여 여배우와 스태프를 성적으로 희롱, 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이 내용을 담은 'PD수첩'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됐다며 자신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배우와 MBC PD수첩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2018년 12월 검찰은 여배우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으며,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PD수첩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김기덕 감독은 2019년 3월 폭로 여배우와 PD수첩을 상대로 10억 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잇따른 추문과 논란에 휩싸인 김기덕 감독의 국내 영화 경력은 사실상 끝나다시피 했다. 결국 그는 한국을 떠나 해외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은 러시아 영화계의 도움을 받아 작품 활동 재개는 물론 이주 계획까지 세우며 새 출발을 준비했다. 그러나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아프고 외롭게 눈을 감았다. 어떤 의미로든 한국 영화계를 대표했던 거장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쓸쓸한 말로였다.

ebada@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