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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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유열의 음악앨범', 오 사랑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8.28 11:30 수정 2019.08.28 12:09 조회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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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어떤 장르 영화의 개봉만으로도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멜로 영화의 가뭄 속에 선을 보이는 '유열의 음악앨범'(감독 정지우)은 관객의 감성 공백을 채워줄 작품이다.

이 시대에 사랑의 순수와 낭만을 이야기하는 건 조금 촌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짧은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는 세태 속에서 시간과 추억을 쌓아가며 나눈 사랑의 역사를 지켜보는 건 얼마나 희귀한 일인가.

'유열의 음악앨범'은 11년의 세월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두 남녀를 통해 사랑의 과정과 청춘의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다.

유열

세상을 떠난 엄마가 남긴 제과점을 지키고 있던 미수(김고은) 앞에 현우(정해인)가 나타난다. 소년원을 갓 퇴소했다는 현우를 미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풋풋한 연정을 나눈다. 그러나 현우의 과거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고 두 사람의 인연 또한 어긋나 버리고 만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 제목은 무려 13년간 전파를 탔던 KBS Cool FM 라디오 제목에서 따왔다. 1994년 10월 1일 라디오 '유열의 음악앨범' DJ가 바뀌던 날 처음 만난 두 사람이 11년에 걸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이야기 구조를 띠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핸드폰이 아닌 이메일로 소통하고, 디지털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찰나의 순간을 담는 두 남녀의 사랑을 보여준다.

뉴트로(New-tro: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가 유행 키워드가 된 2019년, 두 사람의 아날로그 사랑은 19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낭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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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피엔드'(1999)로 데뷔한 정지우 감독은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왔다. 특히 그는 멜로 장르에서 발군의 연출력을 보여줬다. 대표작 '사랑니'(2005)는 2000년대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멜로 영화 중 한 편이다.

정지우 감독은 어느덧 50대가 됐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소년이 살고 있다. 보다 많은 대중들과 교감하기 위해 눈높이를 조정했지만, 결이 다른 섬세한 감성 만큼은 여전히 반짝인다.

'사랑니'가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문학 소설이라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음악이 이야기를 받치는 뮤직 드라마다. 플롯과 음악이 상응하며 보는 이의 감성을 폭죽처럼 터트린다.

두 남녀가 만나는 1994년과 1997년, 2000년과 2005년을 챕터 구성으로 엮은 영화에서 때로 서사의 생략과 갈등의 뭉뚱거림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 틈은 음악이 메워준다. 차마 입으로 토해내지 못한 미수와 현우의 마음을 노랫말로 대신하는 형식이다. 청취자의 사연에 맞춰 라디오 DJ가 음악을 선곡하듯 영화는 노래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유열

유열의 '처음 사랑', 이소라의 '데이트', 신승훈의 '오늘 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토이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핑클의 '영원한 사랑', 루시드 폴의 '오 사랑'과 '보이나요', 콜드 플레이의 '픽스 유'(Fix you) 등이 흐를 때 가사를 음미하면 두 남녀의 내면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천의 화수동과 서울의 북촌 마을 등 주요 공간에서 파생되는 드라마 연출도 돋보인다. 온벽이 있는 골목이 골목으로 연결되고 그곳을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감정도 켜켜이 쌓인다. 카메라는 빵집이 부동산으로 바뀌고, 동네 슈퍼가 프랜차이즈 편의점으로 바뀌는 공간의 변화를 담아내면서도 변하지 않은 남녀의 순정을 대비시킨다.

영화 '4등'(2016)에서 정지우 감독과 첫 호흡을 맞춘 조형래 촬영감독의 공이다. 그의 촬영은 담백하면서 수려하다. 35mm, 40mm 단 두 개의 렌즈만을 사용해 복고 감성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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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유열의 음악앨범'의 플레이리스트를 풍성하게 만든 것은 김고은, 정해인이다.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담아낸 두 사람의 얼굴은 직접적인 대사보다 힘이 세다.

정지우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 '은교'(2013)로 데뷔한 김고은은 7년 만에 은사와 다시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를 대표할 여배우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중심 역할을 잘 해낼 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봐도 근사한 미수의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TV 드라마에서 여심을 사로잡은 정해인은 스크린에서도 섬세한 멜로 연기로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해인의 매력은 여타 또래 배우와는 차별된 강점이다.

또한 김국희, 최준영, 심달기, 김도영 등 감독의 남다른 안목으로 캐스팅한 매력적인 배우들의 활약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사랑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허덕이는 청춘들의 성장 드라마기도 하다.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며 오롯한 나로 우뚝 서는 두 남녀를 보는 뿌듯함을 선사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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