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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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누구나 아는 비밀', 이야기꾼이 만든 근사한 통속극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8.05 15:59 수정 2019.08.05 16:29 조회 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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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아쉬가르 파라디는 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2016년 타계한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뒤를 적임자는 단연 파라디다.

스스로 영화의 중요한 역할은 관객에게 '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듯 그가 만든 이야기들은 삶과 인간에 관한 유의미한 질문으로 구성돼있다.

대표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세일즈맨'(2016)은 영화 같은 캐릭터들의 극적인 이야기가 아닌 우리네 일상의 단면을 툭 쳐낸 것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관계의 씨줄과 감정의 날줄로 직조해 만든 수작이었다.

누구나

신작 '누구나 아는 비밀'은 이야기꾼이 만든 통속극이다. 한국 드라마에서도 익히 본 듯한 관계 설정과 이야기 구성을 띤다. 줄거리의 독창성, 플롯의 촘촘함이 전작들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거장의 평작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와 통찰력을 선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는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찾는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피로연을 즐기는 사이 딸 이레네(칼라 캄프라)가 사라진다. 이내 누군가로부터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문자를 받고 라우라와 가족들은 충격과 슬픔에 빠진다.

여기에 라우라의 오랜 친구인 파코(하비에르 바르뎀)도 라우라의 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레네의 실종과 함께 라우라와 남편 알레한드로, 전 연인 파코 사이의 비밀도 한 꺼풀씩 벗겨진다.

누구나

영화는 누구나 아는 비밀이 나만 모르는 진실임을 알게 될 때 겪는 혼돈과 파국을 그린다. 관계의 이면과 신뢰의 균열, 선택의 딜레마 등이 인물 저마다의 사정과 중첩되면서 영화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다소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그 전개는 과장스럽지 않다. 사건이 터지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음산한 기운까지 풍긴다.

파라디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왔다. 사건의 발생이 갈등의 시작이기는 해도 비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비밀로 인해 관계 내·외부에 도사리고 있던 감정이 충돌하고, 이는 이야기를 팽팽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내공 있는 연출 만큼이나 돋보이는 건 배우들의 호연이다.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의 열연은 영화의 빈틈을 채우고 품격을 높였다. 특히 하비에르 바르뎀은 파코가 겪은 혼돈과 딜레마를 감정을 머금은 대사가 아닌 심연의 눈빛으로 표현해낸다.

아무

아쉬가르 파라디는 영화 대부분을 이란을 배경으로 찍었다. 그의 영화에서 자국 사회는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계급과 제도, 시스템 안에 선 사람들의 도덕적 딜레마는 국경의 울타리를 너머 인간 사회 전체의 화두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프랑스에서 촬영했던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이후 또 한번 해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대부분의 촬영은 스페인의 소도시 토레라구나에서 이뤄졌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물리적, 정서적 거리로도 와 닿는 작은 마을은 '소문과 진실의 경계'라는 영화의 설정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이다.

또한 누구도 절대적 선이거나 절대적 악일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뿌리 깊은 통찰로 이어지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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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비밀'은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은 채 끝낸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관계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로 인한 감정의 잔해들이 각 인물의 가슴속에 남겨진 채로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관객들은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물음표를 안고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영화는 때때로 두 시간 짜리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생의 모순과 역설을 담은 난장판'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측할 수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축소판, 그것이 인생임을 탁월한 이야기꾼에 의해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를 계속해서 쫓고 싶은 이유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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