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9일(일)

영화 스크린 현장

[필름人사이더] '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의 영화·배우·인생①

김지혜 기자 작성 2018.09.06 14:55 수정 2018.09.08 12:25 조회 9,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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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픽쳐스 한재덕 대표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제 영화 인생의 동반자죠. 친구고. 제가 제일 믿는 제작자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안목과 추진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진중하고 사려 깊은, 근사한 사람이에요."

배우 황정민은 제작자 한재덕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이 배우에게 한재덕 이름 석 자를 꺼내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가 꼽은 한재덕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는 '동반자', '친구', '제작자'였다.    

여기에 2015년 4월, 배우 전도연과 나눴던 인터뷰 녹취록을 소환하고자 한다. 

"'무뢰한'의 출연을 결정하고 제작사인 사나이픽처스 사무실에 갔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 양쪽에 직원들이 일렬로 쭉 서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충무로 시대 때도 그렇게까진 안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전도연은 사나이 픽처스와의 특별했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도연은 사나이 픽처스와 작업한 1호 여배우였다. 그녀의 말을 빌려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면 그 풍경은 흡사 어떤 조직, 형님 문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진다. 게다가 이 제작사는 범죄 느와르 영화 '신세계'를 만든 곳이 아닌가.

사나이 픽처스가 제작하고 오승욱 감독이 연출한 '무뢰한'(2015)에 주연을 맡았던 전도연은 당시의 작업 환경에 대해 '그들 방식'대로 배우에게 잘해줬다고 표현했다.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 방식에 어느새 익숙해졌고, 진심을 느꼈다고 했다.

한재덕

그렇다면 '사나이 픽처스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이 제작사를 거쳐 간 배우들은 공식 석상에서 자주 제작사 이름과 대표 이름을 언급한다. 단순히 제작사가 영화를 만드는 무비팩토리를 넘어 살아있는 생물처럼 배우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사나이 픽처스의 수장인 한재덕 대표는 충무로에서 입지전적인 제작자로 꼽힌다. 스스로를 '근본 없는 사람'이라고 낮추는 이 사람은 고졸에 전문적인 영화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현장에서 실무와 감각을 익힌 영화인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영화를 잘 알고, 좋아한다. 

30대 초반에 제작부로 영화계에 입문해 30대 후반에는 백수가 돼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40대 초반부터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제작사 사나이 픽처스를 세우고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공작' 등의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인간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츤데레' 같은 인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를 가졌지만 제 사람을 챙기는데는 누구보다 살뜰하다. 무엇보다 일처리에 있어서 확실하고 분명하다. 때문에 송강호나 설경구처럼 아직까지 한 번도 인연이 닿지 않은 배우는 있어도 황정민, 최민식, 조진웅, 이성민, 곽도원, 박성웅, 정만식처럼 한 번만 작업한 배우는 없다. 전도연, 정우성, 주지훈, 김남길도 한재덕 대표의 일에는 두 팔 걷을 준비가 돼 있다.

상업 논리가 발 빠르게 작용하는 충무로, 그것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바쁜 톱배우들이 단순히 의리만으로 한 제작사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사와 제작자의 이름이 곧 신뢰의 척도가 됐다는 의미다.

창립 6년 만에 사나이 픽처스만의 색깔을 확립하고, 흥행작도 여러 편 만들어냈다. 규모보다 내실을 다지며 발빠르게 충무로 일급 제작사로 도약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함께 할 배우들을 얻었다.

한재덕 대표는 자신을 포장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3시간 30분에 걸쳐 나눈 인터뷰는 투박한 화법에서 영화를 향한 애정과 배우를 향한 존경과 인생을 향한 진중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칸영화제

Q. 영화 '공작'(감독 윤종빈, 제작 영화사 월광·사나이 픽처스)이 개봉 22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을 통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고 8월 8일 국내에 정식 개봉하기까지 숨 가쁜 석 달이 아니었나 싶다. 소회가 어떤가?

A. 개봉 초반의 기세가 좋아 내심 600~700만까지도 기대를 했기에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손익분기점에 이어 500만 돌파도 앞두고 있어 만족하려고 한다. 이제부턴 감독과 배우들이 상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웃음)

Q. 1990년대 활약한 북파 공작원의 '영화 같은 실화'라 많은 감독들이 탐낸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암호명 흑금성으로 활약한 실존 인물 박채서 씨를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이 대화를 나눌 때 옆방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김성수 감독('비트', '태양은 없다','무사', '아수라' 연출)이 들어왔다. 그는 "2014년 팟캐스트 '이이제이-흑금성 편'이 방송되고 난 후 이 소재는 영화계의 핫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흑금성 취재를 담당했던 김당 기자가 이 영화에 관심 있어 하는 영화감독을 모아놓고 영진위에서 강의를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김성수 감독은 한재덕 대표가 발로 뛰며 박채서 씨와 김당 기자에게 영화화 허락을 구했던 일화를 첨언하기도 했다.) 

A. 우리가 영화를 준비할 때 박채서 씨는 수감 중이었다. 딸과 아내를 설득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박채서 씨는 영화화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박채서 씨와 친한 김당 기자가 '범죄와의 전쟁'의 팬이라 "윤종빈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면 믿어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준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다만 그쪽에서 박채서 씨가 출소할 때쯤 촬영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프리 프로덕션을 조금 길게 했다. 박채서 씨가 옥중에서 쓴 수기를 큰 따님이 가져오셨고, 윤종빈 감독과 국수란 프로듀서가 읽고 압축시키는 과정을 시작했다. 실제로 있었던 애니콜 광고를 엔딩에 두고 막후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를 픽션과 논픽션을 섞어 윤종빈 감독과 권성휘 작가가 시나리오로 완성했다. 

공작

Q. 박채서 씨가 한 인터뷰에서 흑금성 이야기의 드라마화를 언급했는데, 함께 진행해나가는 건가?

A. 애니콜 광고 성사 이후 북한의 조명애와 남한의 남성을 결혼시키는 남남북녀 결혼 이벤트를 추진한 적 있다더라. 그걸 소재로 한 드라마다. 박채서 씨와 따님이 아웃라인을 썼다. 중국 쪽에 직접 투자를 유치하신 걸로 안다. 제작을 도와달라고 하시긴 했다. 드라마화에 도움을 드릴 용의는 있다.     

Q. 영화제작사 '사나이 픽처스'(Sanai Pictures)의 역사에 대해 소개해달라.

A. 2012년 1월 26일에 사업자 등록을 했으니 올해로 6년 반 됐다. 2013년 2월 창립작 '신세계'를 발표했고, 이후 '남자가 사랑할 때', '대호', '무뢰한', '아수라' 등을 만들었다. 또한 윤종빈 감독이 이끄는 영화사 월광과 '검사외전', '보안관', '공작'을 공동 제작했다. 영화사 이름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내가 화가 많다 보니 '앵그리 픽처스'도 생각했고, 내 아파트 호수를 딴 '영화사 1204호'를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받침이 없어서 외국 사람이 부르기 편하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사나이 픽처스로 결정했다.

Q. 영화사 명을 쓴 켈리그라피는 손글씨인가?

A. 그렇다. 원래는 손글씨가 예쁜 최민식 배우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다. 이준익 감독도 써준다고 하셨는데...그 전에 내가 사무실에 있는 붓펜으로 A4용지에 연습 삼아 써봤는데, 다들 괜찮다고 해서 직접 쓴 글씨를 사용하게 됐다.

Q. 소위 말하는 '영화계 먹물'은 아니다.

A.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갔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소질이 없었나 보다. 군대 제대 후 뭘 할까 하다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영화 지식이 없으니 학교를 가자 싶어 그때 막 문을 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험을 쳤다. 1994년 1기 때부터 3기까지 내리 3번을 도전했는데 결국 면접에서 떨어졌다. 내 길이 아닌가 싶어서 막노동을 하면서 밥벌이에 나섰다. 그러다가 꿈을 못 버려서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에 들어갔다. 기초반, 전문반, 연구반까지 총 1년 6개월을 수료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쓴다고 끄적거렸는데 잘 안됐다.

사나이 픽쳐스 한재덕 대표

Q. 영화 현장에는 언제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가?

A. 냉정하게 말해 글 쓰는 것에 열정은 있지만 실력이 없었다. 엉덩이도 가벼웠고. '언젠가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을 해야지'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제 파악을 하게 되더라. 그래도 영화 쪽 언저리에는 있고 싶고, 먹고는 살아야 하고 자연스레 제작부 일을 시작하게 됐다. 30대 초반에 막내로 들어갔는데 나이가 있어서인지 바로 제작부장을 시켜주더라. 첫 작품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였다. 운이 좋아 두 번째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를 하게 됐다.

Q. '주먹이 운다'(2005) 프로듀서를 한 이후 2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땐 뭘 했나?

A. '주먹이 운다' 이후 옐로우 엔터테인먼트에 영화사업본부장 제안을 받고 들어갔는데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퇴사 후 2년간 놀았다. 그러다 보니 차 할부 값도 못 낼 정도라 차도 팔았다. 마지막에는 남동생 마이너스 통장으로 천만 원을 대출 받아 최소한의 생활을 했다. 마흔 즈음이었는데 덤프트럭 운전이라도 하려고 대형 면허도 따고 그랬다. 그러면서도 영화 현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다시 영화를 하게 되면 정말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영진위 지원작이었던 영화 '죽이고 싶은'(2010) 프로듀서로 다시 복귀했다. 그러면서 영화 연출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류승완 감독이 '부당거래'를 좀 도와달라더라.

Q. '부당거래'(2010)는 프로듀서로서의 이력에 중심점이 된 영화인 동시에 배우 황정민과의 인연이 시작된 작품이라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A. 그렇다. 당시 황 배우는 주연 배우였고 나는 제작 PD였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편한 사이가 나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친해지고 싶었지만 섣불리 다가가진 않았다. '부당거래' 촬영이 끝나면서 조금 가까워졌고 황 배우가 먼저 술자리에서 "우리 동갑이니 친구 합시다"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냐. 다음날에도 서로 높임말을 쓰고 있더라(하하). 사나이 픽처스 창립작인 '신세계'(2012)를 하면서 조금 더 친해졌다. 

부당거래

Q. 황정민과 한재덕의 우정은 충무로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10년 '부당거래'부터 2018년 '공작'까지 무려 6편의 작품을 함께 했더라.  

A. 좋은 시나리오를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배우다. 나에게 베풀어준 게 많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나 생각을 하면서 산다. 되게 고마운 양반이다. 진심이다.

Q. 한국 영화계가 보이지 않게 인맥, 학연이 많이 작용하는 곳 아닌가. 그런 것 없이 이 자리에 오른 게 대단하게 여겨진다. 영화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A. 난 쉽게 말하면 족보가 없고, 듣보잡이고, 약간 날림공사한 건물 같은 근거가 없는 놈이다. 감독을 하려면 어디선가 뭔가를 배워야 하는데 공부 능력은 없었다. 그러니 어느 대학을 나왔고, 누구랑 어떤 사이고 같은 인맥도 전무했다. 그런데도 영화는 하고 싶어서 후회하지 않게 부딪혀 보자는 마음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했는데 운 좋게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일찍부터 주제 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누구나 꿈은 꿀 수 있는데 어떤 분야든지 간에 진입을 하려면 자격 조건이 많지 않나.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계는 그게 좀 덜 까다로운 것 같다. 가령 시나리오 작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든 고졸이든 글만 잘 쓰면 된다. 단, 끈기는 중요하다.

Q.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 현장에서 최대한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프로듀서이자 제작자인 한재덕 최고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A. 일에 구멍을 안 내려고 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기질이 있다. 효율적으로 하려고 할 뿐이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효율을 무시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 사람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을 진행해나간다. 자기 돈으로 영화 찍는 게 아닌 이상 약속한 예산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또 스태프, 배우와의 약속도 잘 지켜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기분 좋고 설레는 일인데 길이 막힌다? 그럼 스트레스가 시작되고 지옥이 열린다. 물론 영화는 아름다운 지옥이긴 하다. 그걸 알면서도 가는 건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참을 만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나이 픽쳐스 한재덕 대표

Q. 사나이 픽처스는 창립작 '신세계'를 시작으로 월광과 공동제작한 '검사외전', '보안관' 같은 영화를 만든 반면, '아수라', '무뢰한'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대중성을 겨냥한 오락영화와 색깔 뚜렷한 웰메이드 영화의 줄타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A. 우리는 다 상업영화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 됐을 뿐이다. 결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무뢰한', '아수라'가 대표적이다. 

Q. 그래서인지 '아수리언', '무뢰한당' 같은 팬덤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크게 흥행이 되지 않아도 영화의 가치를 알아주는 팬들을 얻어서 영화를 제작한 사람으로서 보람이 있었을 것 같다.

A. 관객들에게 감사드린다. '무뢰한'때도 팬덤이 있었지만, '아수라'는 욕을 워낙 많이 먹은 영화라 팬덤이 형성됐을 때 특히 기뻤다. 아수리언들은 김성수 감독과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등 주연배우는 물론이고 금광산, 윤대열 등 조·단역 배우들까지도 열광적으로 환호해주셨다. 중복 관람이나 단관 행사는 물론 컵, 종량제 봉투, 안남 시민증 등 다양한 굿즈까지 만들어주셨다. 엎드려 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Q. '마초 영화의 명가'라는 긍정의 표현부터 "알탕 영화만 만든다"는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일부 시선에 대해서는 억울한 면도 있을 것 같다.

A. 회사 이름 때문에 비롯된 것도 있는 것 같다. '영어로 어렵게 지을걸'하는 후회도 가끔 한다. 과도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수라' 때 조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시선과 감상은 관객의 자유고,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당시에는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괘념치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영화라는 게 모든 사람의 취향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는 거니까.

Q. '무뢰한'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전도연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왔다. 사나이 픽처스가 제작하고, 전도연이 멋지게 활약하는 영화를 또 한 번 보고 싶다.

A. 좀 더 부지런하게 기획을 하고, 기회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투자를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더라. 나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같은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 여성이 주인공이면서도 소비되지 않는 그런 영화 말이다. 내 역량 부족이기도 하고 게으름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전도연 씨 뿐만 아니라 국내에 좋은 여배우들이 많다. 상업적이면서 예술적 성취까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건 모든 제작자들의 마음이다. 노력해야지.

공작

Q. 그간 제작해온 영화의 색깔 때문에 영화사의 주축도 남자일 것이라는 오해가 있지만 사나이 픽처스를 이끌고 있는 프로듀서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 중심인 국수란 PD와 박민정 PD와의 인연도 궁금하다.

A. 창립작 '신세계'를 준비할 때 '베를린' 촬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월수금은 '신세계', 화목토는 '베를린' 이렇게 진행했다. '신세계' 투자받으러 다니면서 '베를린' 촬영 현장도 가야 할 때라 정신이 없었다. '베를린' 때 국수란 PD를 다시 만났다. '올드보이' 때 제작실장과 부장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박민정 PD의 경우 류승완 감독의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해 제작부로 넘어온 케이스다. '부당거래' 때 류승완 감독이 일 잘한다고 제작실장으로 추천해서 처음 같이 호흡을 맞추게 됐고 지금까지 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굉장히 꼼꼼하다는 것이다. 겉으론 차갑고 와일드해보이지만 섬세하다. 오랜 경력을 지닌 베테랑이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친구들이라 현장에서 빵꾸가 날 일이 없다. 든든하다.

Q. 일 잘하는 사람들이 사나이 픽처스에 잘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아우르는 한재덕의 리더쉽이 궁금하다. 

A. 쑥스럽게...그런건 없다. 대부분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때부터 함께 해온 멤버들이다. 작품을 하나 끝내고 나면 행군을 같이 한 것처럼 전우애가 생긴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못 걸을 거 같고, 배낭도 처음엔 안 무거웠는데 나중엔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거워지는 기분도 든다. 영화 찍는 게 행군 같은 면이 있다. 돈 때문에 힘들고, 날씨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별별 어려움을 겪는다. 그 과정을 끝내고 나면 헤어지기가 싫다. 그래서 제작사를 차리게 되면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꼭 일이 아니라 지나가다가 들려서 탕수육에 짜장면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땐 우리 모두 계약직이었으니. 작품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영화가 수익을 내야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부지런히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내 취향과 그들의 취향이 맞는 것도 있었다.

사나이 픽쳐스 한재덕 대표

Q. 언젠가 "내가 만드는 영화가 후져서 감독과 배우들이 등을 돌릴까 봐 겁난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아직도 그런 불안함을 느끼는가? 

A.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 불안함이 싫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그것 때문에 작품에 조금 더 신경 쓰게 된다. 동기부여랄까. 아마도 내가 족보가 없고 기반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영화를 조금 더 잘 만들려고 애쓰지 않으면 누구도 나와 일을 안 하려고 할까 봐 그런 거다. 호구지책이랄까.

Q. 월광과 공동제작한 '돈'(감독 박누리, 내년 초 개봉 예정)에 대한 관객의 기대도 크다. 무엇보다 요즘 핫한 배우 류준열의 주연작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류준열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해왔다. 현장에서 직접 느낀 류준열의 매력은 무엇인가?

A. (류)준열이는 조금 과하게 이야기하면 완벽하다. 어린 친구인데 완벽주의가 있다. 마치 무명일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 것처럼 연기, 인간관계, 자기 관리, 예의 등 모든 면에서 남다르다. 열심히 하니 보면 볼수록 예쁘달까. 나는 예전부터 이 친구가 굉장히 롱런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내 경험상 폭이 넓은 연기가 가능한 마스크고 성장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래서 요즘엔 "나 좀 굽어살펴줘", "네 뒤에 줄 설 거야"라고 말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론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 준열이가 손흥민 선수와 친하다. 얼마 전에는 나 준다고 손흥민 굿즈에 사인을 받았다더라. 곧 받기로 했다.(웃음)

사나이 픽쳐스 한재덕 대표

Q. 제작자로서 새로운 배우와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배우가 있다면?

A. 새로운 배우랑 작업하는 것도 좋지만 작업을 했던 배우들과 다양한 영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젊은 배우들 중에서는 주지훈, 김남길, 류준열 배우와 그런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요즘 새롭게 눈에 들어온 배우가 있다면 박서준이다. 술자리에서 3~4번 정도 마주쳤는데 느낌이 좋더라. 드라마를 봤는데 연기도 잘하는 것 같고.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게 아니라 매력이 있달까.  

Q. 고전 영화 관람에 심취해있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A. 밑천이 다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 봐야지 하고 사뒀던 DVD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졸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무 재밌더라. 밀린 방학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흑백 고전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에 놀라고 있다. 한참 슬럼프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만 1년 정도 고전 영화를 보면서 회복이 됐다. 요즘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 같아 일기처럼 그날 본 영화를 SNS에 기록한다.

Q. 영화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A. 우리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이 상 받을 때다. 예전에는 투자됐다, 캐스팅됐다 그러면 만세 부르고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매 순간이 행복하다. 최근 '공작' 스태프 시사회를 마치고 동료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데 그들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더라. 그때만 해도 흥행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공간에서 같이 웃고 떠드는 게 너무 좋더라. 요즘엔 거창한 것보다 이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들이 대스타라서가 아니다.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게 쉬운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그 후 '공작' 무대인사를 돌면서 '신과함께-인과 연'팀과 같이 동반 회식을 한 적 있다. 그 자리에 정우성, 강동원도 왔었다. 내가 술자리에서 남 노래시키는 걸 되게 좋아한다.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 배우가 함께 '너만을 느끼며'를 듀엣 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렇게 보기 좋더라. '신과함께2'는 이미 잘 됐고, '공작'은 흥행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이었지만 그렇게 한데 어울려 술 마시고 대화하는 순간이 행복했다.

Q. 한재덕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일까? 

A. 직업이다.(웃음) 사랑하지만 20~30%의 애증도 있는 연인이다. 영화를 안 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딘가에서 "노후라는 건 돈도 중요하고, 돈이 있으면 좋은 안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 추억이 좋은 안주가 된다"는 글을 읽었는데 공감이 되더라. 내일 당장 죽거나 혹은 나의 능력 부족으로 영화를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영화 일은 못하게 되더라도 예전 동료들과 추억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필름人사이더] 한재덕 대표 "윤종빈 감독과 만든 투자제작사, 청사진은…"②
[필름人사이더] 한재덕 대표가 밝힌 김성수·오승욱·나홍진 감독의 신작③ 에서 이어집니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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