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러빙 빈센트' 여운 따라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가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17.12.26 14:25 수정 2017.12.27 12:27 조회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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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SBS연예뉴스 | 파리(프랑스)=김지혜 기자] "별이 총총 빛나는 밤, 당신의 팔레트를 파랑과 잿빛으로 칠하세요. 어느 여름날에 밖을 바라보세요. 내 영혼의 어둠을 아는 눈으로. 언덕 위의 그림자들,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하세요. 산들바람과 겨울의 차가움을 잡아보세요. 새하얀 린넨의 세상에 있는 색들 안에서."

1971년 미국 가수 돈 맥클린이 발표한 '빈센트'(Vincent)는 고흐에 관한 책을 읽고 난 뒤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다. 명화 '더 스테리 나잇'(The Starry Night)의 풍광이 떠오르는 시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로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는 지난 11월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감독 감독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맨)의 엔딩 크레딧에 삽입돼 이야기의 감동을 배가시켰다. 

러빙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일 것이다. '불멸의 예술가', '태양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아트 딜러, 교사, 전도사 등의 직업을 거쳐 다소 늦은 나이인 28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이 부지런한 화가였던 그는 약 9년간 879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살아생전 판매된 그림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유일했다. 

세상이 몰라주는 화가였던 고흐는 가난했고, 불운했다. 죽어서야 명성을 떨친 데다 생애 말기 정신 질환으로 기행을 일삼는 등 파격적인 스토리까지 더해져 그의 일대기는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러빙 빈센트'는 고흐를 다룬 여타의 전기 영화와는 다르다.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다. 고흐의 화풍을 재현한 6만 점의 유화를 프레임으로 연결해 영화로 완성했다. 107명의 화가가 2년 간 땀과 노력을 쏟아부어 얻은 결과다.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최초의 시도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아래 유려하게 펼쳐지며 큰 감동과 여운을 선사했다. 그 결과 7주 간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전국 37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올해 최고의 성적 중 하나다.

오베르

고흐가 마지막을 보낸 곳은 프랑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7km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다. 파리 시내에서 지하철과 기차로 두 번이나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왕복 3시간을 투자해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화가의 놀이터였고, 작품의 토대가 됐다. 이곳에서는 작품 속 공간을 거닐며 고흐의 마지막을 유추해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지난 12월 중순, '러빙 빈센트'의 여운을 안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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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안식처이자 죽음의 자리 '라부 여관'

고흐의 생애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널리 알려져 있다. 불운한 천재 화가, 동생 테오의 지극한 후원, 고갱과의 우정과 파국, 자신의 귀를 자른 기행 등 일대기별 중요 사건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러빙 빈센트'는 고흐의 죽음에 대한 물음표에 던진다. 자살로 알려진 그의 죽음이 어쩌면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정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했다.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를 실어나른 배달부의 아들인 아르망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고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쫓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죽기 전 두 달 남짓 묵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라부 여관이었다. 이곳에서 아르망은 주인장 딸인 아들린을 만나 고흐의 마지막 나날을 유추한다. 

영화 속 이야기는 가정이지만, 라부 여관은 실재한 장소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는 라부 여관과 고흐가 기거했던 방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1층은 레스토랑으로, 고흐가 삶의 안식과 죽음의 강을 건넜던 2층 방은 박물관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아쉽게도 라부 여관을 찾은 화요일은 휴무였다. 실내를 볼 순 없었지만 마을 중심에 자리한 라부 여관의 소박한 실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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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속 공간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남프랑스의 휴양지처럼 지중해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북프랑스의 소도시처럼 멋진 산세를 형성한 것도 아닌,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마을이다.

고흐는 고요하고 목가적인 이 마을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교회와 시청, 정원 그리고 들판의 짚더미에도 자신만의 시각을 투영해 캔버스에 옮겼다. 덕분에 마을 전체가 거대한 갤러리가 됐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파리에 머물렀다. 당시 모네, 툴루즈, 시슬레, 모딜리아니 등 인상파 화가들의 성지였던 몽마르트에 자리잡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두 평 남짓한 작은 다락방에서 가난과 외로움에 허덕였다. 이따금씩 레스토랑 '르 콩슐라'에 들러 차가운 몸을 녹이곤 했다. 화려한 파리 시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몽마르트의 풍경, 지적 허영과 예술적 자존심이 강했던 화가들과의 교류도 그의 심신을 지치게 했을 것이다. 

러빙

결국, 시골로 발길을 돌렸다. 고흐는 남프랑스의 아를과 파리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등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공간과 더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머문 이 두 곳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순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를에서 고갱과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며 귀를 자르는 등 그의 정신병은 극에 달했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는 스스로 가슴에 총구를 겨누었다. 그야말로 행복과 절망이 공존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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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만난 정신과 전문의 가셰는 구세주였다. 스스로도 화가를 꿈꾸고 쿠르베, 마네, 피사로, 세잔 등을 후원하기도 했던 가셰 박사는 고흐를 치료하면서 남다른 재능을 알아봤다. '러빙 빈센트'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그려진다.

가셰가 살고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치료차 방문했던 고흐는 죽기 전까지 약 70일을 머물며 80여 점의 그림을 그리는 등 최고의 창작욕을 발휘했다.

당시 심리적 파고는 컸을지 모르겠으나 특유의 화풍은 완성되었다. 이때 남긴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시청사', '가셰 박사의 초상',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은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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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자리에 묻힌 고흐 형제

겨울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황량했다. 주말에나 관광객으로 조금 활기를 느낄 수 있을 뿐 평일에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마을 언덕에 위치한 공동묘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수많은 묘지 속에서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묘지 입구에 두 사람은 나란히 묻혀있었다. 한겨울에도 두 사람의 무덤에는 누군가 꽂아놓은 장미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알려졌다시피 고흐의 권총 자살 소식을 들은 테오는 한걸음에 달려갔고 형의 임종을 지켰다. 그리고 6개월 후 테오도 형의 뒤를 따랐다.

고흐는 살아생전 동생의 경제적 지원과 정신적 지지에 고마움을 표하며 "돈을 갚지 못한다면 내 영혼을 주겠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둘은 어쩌면 운명 공동체였는지도 모르겠다. 테오의 아내는 남편을 고흐 곁에 안치했다. 둘은 살아생전 편지로 영혼의 대화를 나눴고, 죽어서는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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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따라… 

공동묘지 옆에는 고흐가 사랑했던 밀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봄 농사를 위해 다져놓은 민둥밭과 양배추로 빼곡한 밭이 양분하고 있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겨울 밭이 황량할 것이라는 추측은 햇살을 아낌없이 받아먹은 초콜릿빛 대지를 보며 깨지고 말았다.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1890년 5월에 와서 7월까지 머물렀다. 대표작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자살 직전인 7월에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어둡고 낮은 하늘, 황금빛 밀밭, 까마귀 떼, 세 갈래의 갈림길은 고흐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술가의 창작물은 공간과 시간, 정신을 반영한다. 만약 그가 삶을 연장했다면 이 풍경들은 어떻게 담겼을까. 밀밭의 갈림길을 따라 걸으며 든 마지막 궁금증이었다.

ebada@sbs.co.kr

<사진 =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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