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①]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감독 "'비포 선라이즈'? 로드무비에요"

김지혜 기자 작성 2015.06.18 09:53 조회 2,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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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재 감독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요리사에게 처음 본 재료로 음식을 만들라는 것과 같았어요. 게다가 몇 가지 향신료를 줬는데 그것 역시 제가 생각한 요리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았죠. 재료는 정해져 있었지만, 전 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어요. 그렇게 이 영화는 만들어진 겁니다"

영화감독은 어떤 예술가보다 자의식이 강하다. 영감이 떠오르고, 이야기가 만들며, 영상으로 변환하는 창작의 주요 과정을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감독이 남이 쓴 시나리오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올해 만나게 될 가장 근사한 로드무비인 '한여름의 판타지아'(감독 장건재, 제작 모큐슈라)는 감독의 치열한 고민과 끊임없는 의심의 산물이다.

일본 지방 소도시인 나라현 고조(Gozyo, 五條)에서 만난 한국여자(김새벽)와 일본남자(이와세 료), 그들의 신비로운 인연과 마음의 파동을 그린 영화는 일본의 작가주의 거장 가와세 나오미가 제작을 맡고 한국 영화계의 시네아스트로 주목받고 있는 장건재 감독이 연출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영화로, 감독에서 배우로 형식과 중심이 이동하는 이 작품은 창작 방식에 다양한 시도가 예술적 성취로 직결된 보기 드문 예다. 무엇보다 예술가에게 제약은 창작의 방해물일 뿐이라 생각한 사람들에게 장건재 감독은 제어와 구속이 때로는 좋은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장건재 감독을 만나 지난여름 뜨겁고 치열했던 현장에 대해 묻고, 들었다. 

한여름

Q. 얼마 전 라이브톡을 진행했다. 엄청난 열기를 자랑했다던데?

A. 이동진 평론가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이런 작은 영화는 개봉관에 관객이 꽉 차있는 광경을 보기 힘들다. 적어도 앞선 내 두 편의 장편에선 말이다.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이동진 씨의 힘이라 생각한다.

Q.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한·일 합작 영화의 놀라운 성취로 평가받고 있다. 어떻게 출발한 프로젝트인가?

A. 전작 '잠 못 드는 밤'(2010)이 일본에서 열린 나라영화제에 초청됐다. 그 영화제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데 '나라티브'(Narative)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나라와 내러티브를 합친 말로 나라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을 기회를 대상 수상자에게 준다.

Q. '잠 못 드는 밤'은 수상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A. 맞다. 영화제가 끝나고 한 달 뒤엔가 연락이 왔다. 당시 대상 수상자였던 뉴질랜드 감독이 개인적인 이유로 하차했다면서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 장편 데뷔작 이후 해외 영화제를 다니며 합작영화나 해외 로케이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다.

Q. 왜 대타의 주인공이 됐을까?

A. 나도 물어봤는데 대상 후보였다고 하더라. 그렇게 믿고 제안을 수락했다.

장건재 감독

Q. 영화를 찍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조건과 전제가 붙었다고 들었다.

A. 영화제가 선정한 특정 지역에서 촬영해야 하고, 일본 스태프, 배우와 작업해야 했다.

Q. 감독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다. 창작의 영역에서 주관은 중요한 부분인데 자율성이 확보되지 않은 제작 여건이라 그다지 끌리는 프로젝트는 아니었을 것 같다.

A. 맞다. 처음 본 재료로 요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수자쿠', '너를 보내는 숲',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등을 만든 작가주의 감독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가 제작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던 같다. 그분의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Q. 주어진 조건들을 온전히 수용되던가?

A. 나라현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 단위다. 내가 참여할 때는 고조시를 로케이션 지역으로 활용해야 한다더라. 주어진 조건들을 받아들이되 나의 요구사항도 이야기했다. 우선 공동 프로듀서를 제안했다. 그건 타이틀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제작비 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화제와 고조시가 절반 이상의 제작비를 지원했고, 내가 절반을 마련했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국제공동개발기획 지원비와 독립영화 후반 작업 현물 지원을 받았다. 순제작비는 2억 원 가량 든 영화다.

Q. 자칫 관광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을 것 같다.

A. 물론이다. 그러나 내 영화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로 시작했다. 주어진 조건은 내가 가진 재료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했다.

Q. 이런 프로젝트는 예산도 예산이지만 촬영 기간이 넉넉지 않다.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됐나?

A. 2013년 8월 촬영을 시작해 11일 만에 마쳤다. 중편 영화 정도의 짧은 촬영일정이었다.

한여름

Q. 그 어느 영화보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 공을 많이 들일 수밖에 없었겠다.

A. 일단 시나리오 작업이 오래 걸렸다. 영화제 측 요구 사항이 있었기에 맞춰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촬영 전 3박 4일 일정으로 고조시에 취재를 다녀왔다. 도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제공해주는 것들을 직접 봐야 했다. 그 후 무슨 영화를 찍어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내가 가서 본 공간들, 만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고 마음먹었고 그게 영화의 1부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영화 속 태훈의 모습이 실제 내가 고조에서 보낸 3박 4일이라고 할 수 있다.

Q. 제작자 가와세 나오미는 어떻던가?

A. 제작자 겸 프로듀서긴 하지만 감독의 눈으로 많은 걸 보더라. 그분 역시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어온 분이라 노하우가 많았고 그게 도움이 됐다. 성격적으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였다. 그건 상대하기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단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 역시 장건재니까. 내가 지키고 가져갈 것에 대해서는 타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Q. 진행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딪힘이나 변수가 있었다는 말로 들린다.

A. 쉽지만은 않았다. 감식안과 시선, 가치관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내 고집을 부린다거나 영화 제작의 전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적절한 제어와 조언 혹은 참견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

Q. 장소는 제공이라 치자. 이야기는?

A. 고조에 유일한 연례 축제가 있는데 불꽃놀이다. 그걸 영화에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감독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넣고 싶어서 찍는 게 아니라 제안한 것이었고 그건 요구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 조건을 영화에 어떻게 넣을지에 대해 고민 했고, 결과적으로 불꽃놀이는 영화의 중요한 소재이자 모티브가 됐다. 1부와 2부의 브리지 역할을 하면서 마지막 두 남녀의 감정선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여름

Q. 영화 속에 비친 고조는 시간이 멈춘 도시 같았다. 실제로 그 곳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나?

A. 솔직히 말해 특별한 영감을 받지는 못했다. 그곳은 한적한 지방도시였다. 처음엔 '여기서 내가 무슨 영화를 찍을 수 있지. 난 도시에서 자랐고,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만 찍어왔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주어진 조건에 맞춰 영화를 찍어야 하는 게 미션이나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Q. 그 막연함이 해소되고 구체적으로 일이 진척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A. 가을이나 겨울쯤 촬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사정상 여름에 찍어야만 했다. 원래 두 가지의 에피소드로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1부 시나리오만 나온 상태였다. 일단 고조로 넘어갔다. 다행히 나는 상황이 닥치면 그 여건 안에서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1부 촬영을 5일 만에 끝내고 3일 정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2부 시나리오를 완성하리라 생각했다.

Q. 그러나 2부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한채 촬영에 임했다고 들었다. 시나리오 없이 영화를 찍는다는 건 어떤 과정일까?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A. 시나리오 없이 촬영하는 건 영화라는 매체에 어울리는 방식은 아니다.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수많은 스태프가 참여하는 것이 영화인데, 즉흥적으로 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가 나를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다행히 나 혼자 모험을 한 건 아니었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기꺼이 동참해줬다. (때마침 옆에 있던 배우 김새벽에게 "맞나요?"라고 물었다. "네 그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Q. 이와세 료와 김새벽을 캐스팅했다. 한·일 상업영화계에선 보기 힘든 신선한 얼굴들이다.

A. 이와세는 6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알게 된 뒤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왔다. 언어가 달라 완벽한 의사소통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취향이 비슷해 그 이야기만으로도 지루하지 않게 떠드는 사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도시에서 시골로 온 청년 '유스케'를 만들었는데 '이 캐릭터를 내가 그냥 만들었을까. 무의식적으로 이와세를 생각하며 쓴 건 아닐까?'싶더라. 언젠가 한 번쯤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말해왔는데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왔어"라고 출연 제안을 했다. 

혜정·미정의 경우 일본어가 되는 한국 여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새벽 씨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기자: 정말요?) 아니요. 농담이에요. 하하. '줄탁동시'의 김경묵 감독으로부터 "남한말, 북한말, 일본말까지 가능한 여배우"라는 말을 듣고 만나게 됐다. 새벽 씨는 일본어를 독학했기 때문에 영화를 찍기엔 부족하다며 걱정을 하더라. 실제로 일본인을 섭외해 대화를 시켜봤는데 무리 없는 수준이었다.

한여름

Q. 2부는 1부의 감독 태훈이 만들었음 직한 이야기이다. 또한 1부에서 만난 공무원 유스케의 사연에 따라 그의 과거를 상상한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A. 두 가지 해석 다 가능하다. 그러나 2부를 만들 때는 1부의 김 감독의 눈으로 찍었다. 그가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1부의 촬영을 마치고 3일간의 휴식이 있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그때 새벽 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고조는 관광지는 아니고 작은 지방도시일 뿐이다. 여기에 누가 온다면 어떤 이유로 오게 될까. 그녀는 누구일까. 이런 물음표를 채워나가면서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그러다가 배우 혜정이라는 인물을 만들었고, 그 배우는 고조시에 왜 왔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2부의 이야기를 구체화 시켰다.

Q.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게 영화를 찍은 방식이었다. 형식의 변주가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1부는 다큐멘터리 형식, 2부는 극영화 형식, 그리고 흑백에서 컬러의 전환 같은 것 말이다.

A. 1부를 흑백으로 찍겠다고 생각한 건 고조시를 다녀오고 나서였다. 극 중에서 인물들이 고조시는 사람이 적고, 활력도 별로 느껴지지 않지만, 한편으로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 같다고 하지 않나. 또 1부는 인물 인터뷰가 많이 들어가기도 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되 고전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흑백 영상을 선택했다. 사실 나에게 흑백은 흑백필름으로 찍은 영화인데 우리 영화는 디지털이다. 그런데도 고전적인 우아함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Q. 그렇다면 2부는? 컬러 화면이라는 것도 차이지만 카메라 움직임이 1부와는 사뭇 다르다.

A. 컬러로 찍자 정도의 생각만 있었지 구체적이진 않았다. 촬영 감독님이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도 1부에 비해 인물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고 무브먼트도 다양하다.

한여름

Q. 풍경은 원거리에서 인물은 뒤나 옆에서 잡는 앵글들이 인상적이었다. 카메라가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의 눈처럼 여겨졌다.

A. 촬영은 후지이 마사유키라는 일본 분이 담당했다. 그는 이와이 슈운지의 촬영감독을 했던 시노다 노보루의 어시스턴트 출신이다. '무지개 여신' 등과 같은 상업영화는 물론 드라마, 광고 등의 상업활동을 많이 하셨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소개해줬는데 저예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 촬영 전 필터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영화에는 콘티가 없었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에서 촬영 감독과 잘 맞았다. 렌즈 선택은 내가 했는데 표준 렌즈를 주 렌즈로 했다. 1부에서는 우아하게 2부에서는 공간을 새롭게 보이도록 촬영을 했다.  그 결과 1부가 멈춰있는 도시 같았다면 2부에서는 같은 공간이지만 인물이 머무는 곳에 따라 활력도 채워지는 느낌이길 바랐다.

Q. 콘티를 짜지 않는 이유가 있나?

A. 배우에게 자유를 주고, 현장에 집중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장편 영화 데뷔 이후 고수해왔다.

Q. 1, 2부에 같은 대사가 여러 차례 나온다.

A. 재밌어서 그렇게 했다. 작위적이면 어떨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관객들이 그렇게 느끼시진 않는 것 같더라.

Q.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시적인 제목이 만들어진 배경이 궁금하다. 

A. 처음부터 '판타지아'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그래서 하이든의 'C장조 판타지아'라는 곡을 영화에 쓰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 영화의 영문번역을 해주신 분이 영화를 보고 여름에 일어나는 일이니 제목에 '한여름'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 그렇게 이 제목이 탄생했다.  

Q. 영화음악은 과하지 않으면서 극안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라 좋았다. 엔딩곡 '판타지아'는 김새벽 씨와 공동 작사했던데?

A. 음악감독을 찾는 과정에서 본 중요한 두 편의 영화가 있었다. '주님의 학교'(감독 전상진)와 '파스카'(감독 안성경)였는데 음악감독이 같았다. 2인조 밴드 '무키무키만만수'(Mukimukimanmansu)의 만수(본명 이민휘 )씨였다. 밴드 음악을 듣다보면 이런 영화음악이 가능할까 싶지만 '무키무키만만수'의 음악을 하는 만수 씨와 영화음악을 만드는 이민휘 씨의 영혼은 완전히 다르다. 엔딩곡의 경우 이민휘 씨가 "노랫말 만큼은 감독과 배우가 함께 썼으면 좋겠다"며 숙제를 내줬다. 영화를 생각하며 가사를 썼는데 흡족해하시더라. 

Q. 여행과 로맨스라는 공통 분모 때문일까. '한국판 비포 선라이즈'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A. 홍보 전략 아닐까.(웃음) 그런 로맨틱한 영화와 비교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비포 선라이즈'가 떠오른다는 건 우리 영화가 두 남녀의 모습을 끝으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뭘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감독은 영화의 이야기를 찾고, 배우는 자신을 찾고자 떠나온 여정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로드무비라고 생각한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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