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7일(금)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햄넷', 예술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작성 2026.02.27 17:29 수정 2026.02.27 18:12 조회 41

햄넷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문학의 순기능 중 하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다. 희열, 쾌감의 의미로도 사용하는 말이지만 감정의 정화라는 보다 넓은 의미도 내포한 단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러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달성한다"고 말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희극과 비극으로 그려냈던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대표작은 1603년에 발표한 '햄릿'(원제 :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영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를 낳은 이 비극은 존재의 불확실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심리적 깊이와 언어적 장치로 풀어낸 걸작이다.

영화 '햄넷'(HAMNET)은 햄릿의 탄생 배경을 상상력으로 그려내며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는가"와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삶의 고통은 예술에 어떻게 반영되고 변형되는가"를 마음으로 체험하게 한다.

햄넷

윌리엄(폴 메스칼)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마을에서 라틴어를 가르친다. 그는 마녀의 딸이라는 소문이 도는 아녜스(제시 버클리)에게 반해 구혼한다.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고 첫째 딸에 이어 이란성쌍둥이를 낳는다. 결혼 이후 윌리엄은 글쓰기에 몰두하며 극작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가고 기회를 얻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그리고 집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영화는 매기 오페럴이 2020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햄릿'이 초연되기 7년 전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이 11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고, 이 사건이 '햄릿' 집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상상력에 기반한 작품이다.

실제로는 '햄릿'은 덴마크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지은 역사서 '데인인의 사적'의 암렛 왕자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만 희곡의 제목인 햄릿은 작가의 아들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당시 '햄릿'은 '햄넷'과 혼용돼 썼다고 영화는 알린다.)

셰익스피어의 가족사가 창작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들을 잃은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아버지를 잃은 햄릿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고 창작자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사고와 영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실에 관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작품에도 반영됐으리라는 게 무리한 상상은 아니다.

햄넷

'햄릿'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삼촌에 대한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듯 '햄넷' 또한 아들을 잃은 부모의 진혼곡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는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 출산의 고통과 탄생의 행복, 자연의 신비와 죽음의 불가사의라는 상반된 현상과 감정이 폭넓게 공존한다. 이 모든 정서는 예술과 문학의 토양이 되는 것들이다.

영화 '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유명한 촬영 감독 우카시 잘의 카메라는 '햄넷'의 원초적인 신비로움을 돋보이게 한다. 영화 초반 '마녀의 딸'이라는 괴소문이 제시되고 난 후 카메라는 자연과 물아일체 된 듯한 아녜스의 행적을 쫓는다. 관객에게도 선입견을 전이시키려는 것인지 괴소문의 진실을 알리려는 것인지 의도는 모호하다. 확실한 건 이 장면들은 아녜스라는 여성의 원시적인 아름다움과 원초적인 신비로움을 층층이 강화한다.

아녜스로 분한 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신비롭고 경이롭다. 그녀의 영험한 기운은 자연과 하나 되거나 아니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며 신비감을 조성한다. '마녀로 딸'이라는 선입견이 거둬지면 강인한 모성애를 갖춘 '엄마의 얼굴'이 고개를 든다. 제시 버클리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이미지와 두 목소리를 소화해 내며 활자의 표현력을 능가하는 입체적인 연기를 펼친다.

햄넷

후반부 들어 극중극으로 전환되는 '햄릿'은 아녜스와 함께 관객을 런던의 글로브 극장으로 안내한다. 아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아녜스는 그의 연극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죽은 아들의 이름을 배우에게 부여한 것을 알고 분노에 몸서리치지만 이내 극에 몰입하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상태에 빠진다.

햄릿에 햄넷이 포개지고, 그의 독백에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경이의 순간을 체험한 아녜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문학과 예술의 순기능인 카타르시스와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다. 그깟 글이, 그깟 연기가 비탄에 빠진 인간을 위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이들조차 이 마법과 같은 순간에 함께 '눈물 목욕'을 하게 될지 모른다. 저마다 경험한 삶의 고통과 상실의 아픔이 불쑥 떠올라 동화될 수도 있다. 인생은 예측불가하며, 신은 가혹하고,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순간, 아름다운 예술이 나약한 나를 위로한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다.

제시 버클리는 이 작품으로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상실의 고통을 처절하게 표현해 낸 버클리의 연기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하다.

햄넷

햄넷

▲ 영국 스트랫퍼드온에이번 '성 트리니티 교회'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무덤.

영화는 윌리엄의 동선을 쫓지 않고, 그가 감내한 고통들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그리고 후반부 극중극을 통해 한 번에 쏟아낸다. 윌리엄은 제 육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상실의 고통을 창작으로 승화해 냈다. 이를 통해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창작자의 고통은 예술에 어떻게 투영되고 변형되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에 대한 답을 깊고 진한 카타르시스로 보여준다. 관객도 이런 승화와 정화의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애프터 썬' 이후 한층 성숙해진 연기력을 뽐내며 젊은 셰익스피어를 스크린에 소환해 낸 폴 메스칼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다.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지 않는 게 이변으로 여겨질 정도다.

영화를 연출한 클로이 자오는 2021년 영화 '노매드랜드'(2020)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했다. 마블 영화 '이터널스'(2021)라는 시행착오를 거쳐 '햄넷'으로 돌아온 그녀는 색깔과 결이 맞는 작품을 할 때 비로소 역량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몸에 맞지 않는 블록버스터 연출보다 인간의 삶과 고통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압도적으로 특출난 감독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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