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6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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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이순신의 '난중일기' 훔쳐 일본에 팔려던 간 큰 도둑들

작성 2026.11.06 15:50 조회 3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5일 방송된 '도둑들-난중일기 도난 사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슬기, 정순원, 가수 신성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쓰러진 남자

때는 1968년 1월 13일 오전 7시. 여기는 경남 양산시 금정산이야. 산길을 오르고 있는 이 남자는 53살의 이 씨, 산림 감시원이야. 산림 감시원은 산림 지역의 화재 예방과 조기 발견, 쓰레기 무단투기 단속, 조난자 구조 등을 담당해. 그런데 이 씨는 이날, 바위 틈에 웬 젊은 남자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어. '뭐지? 다친 건가?' 싶어서 다가가서 보는데, 세상에! 남자가 이미 숨졌어. 자세히 보니까, 입 주변엔 거품 자국이 남아있고, 바위 옆엔 빈 음료병과 약봉지가 보여. 이 남자의 사인은 음독사. 남자가 마신 건 청산가리였거든.

시신을 발견한 이 씨는 경찰에 신고를 했어. 현장에 도착해서 시신을 수습하던 경찰은, 또 한 번 깜짝 놀라. 이유가 뭘까? 이 무렵 전국 경찰서에 뿌려졌던 자료 하나를 보여줄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몽타주야. 사실, 숨진 남자는 수배 중이었어. 이 사람, 무슨 죄를 저지른 걸까? 남자의 혐의를 알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돼.

▲ 충격적인 도난 사건

사건이 시작된 건 2주 전, 1967년 12월 31일이야.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 충남 아산군 백암리에 있는 한 건물 관리소 직원 홍종선 씨에겐,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야. 아니, 오히려 평화로워. 밤사이 내린 함박눈 덕분에 주변은 온통 하얗고 아주 고요했거든. '올해도 무탈하게 잘 보냈다' 생각하면서 건물을 돌아보는데, 이런! 큰일이 났어! 별채 철문에 문제가 생겼어. 사진을 보여줄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철문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연 종선 씨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거든. 그런데 없어진 게 보통 물건이 아니야.

"보… 보물이 사라졌다!"

별채 안에 보관돼 있던 보물.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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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된 대한민국 국보 제76호. 주고받은 8통의 서신을 모아 엮은 '서간첩', 일종의 편지 스크랩북이야. 그리고 왕에게 올린 공식 군사보고서인 '임진장초', 그리고 7건의 일기. 혹시 이 물건들의 주인, 누굴지 감이 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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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건들이 보관돼 있던 장소는,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 전시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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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무척 특별한 존재지. 어떤 게 가장 먼저 떠올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말, 거북선, 이순신 장군 동상. 사실 충무공 이순신은 영화나 드라마, 출판물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문화, 화폐, 교육, 관광 등 전 분야에 등장하는 유일무이한 인물이자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기도 해.

이런 충무공 이순신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난중일기'야.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잖아? 난중일기는 1592년 1월부터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눈감기 이틀 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2539일의 기록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난중일기 읽어봤어? '꼬꼬무'가 몇 편을 준비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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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1592년 6월 2일, 맑음>

짧은 화살과 대 중 승자총통을 비오듯이 난사하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들이 동시에 놀라 흩어졌다.

<계사년 1593년 2월 20일>
새벽에 구름이 어둡고 동풍이 크게 불었다.
발포 두 척과 가리포 두 척이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이 틈을 탄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전투 상황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자세하지. 하지만 난중일기에 전쟁기록만 있는 건 아니야. 일기에 보통 어떤 내용을 쓰지? 보통 일기에는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개인적인 얘기를 적잖아. 이 충무공도 마찬가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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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마음으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난 것인가.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도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다.

이날 밤 10시경에 비가 내렸다.

-난중일기 中

1597년 정유재란 때 충무공의 셋째 아들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거야. 표현들이 어때? 소설 '칼의 노래' 저자 김훈 작가는 이런 말을 했어.

"난중일기는 수사도 형용사도 부사도 거의 없지만,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이다."
-'칼의 노래' 김훈

꾸밈 없이 적었는데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는 거야. 다시 말해 난중일기는, 해군 최고 지휘관이 남긴 전쟁 기록인 동시에, 작품성이 뛰어난 문학이기도 해. 그런데 그런 난중일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야. 종선 씨 입장 어땠을까?

1967년은 전화도 잘 없던 때였어. 결국 종선 씨는 4km를 뛰어가서 온양경찰서에 신고를 했다고 해. 그럼 국보 도난 사건을 접한 경찰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당시 온양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오 형사의 얘기를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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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리가 났었지 뭐. 정보 형사, 수사 형사, 엘리트들 뽑아서 경찰서에서 밤낮없이 전화받고 보고하고 비상근무를 하는 거예요. 충남 경찰청장도 말할 거 없고. 그러니까 전 경찰관이 비상 난리가 났지 뭐."

-당시 사건 담당 형사

초비상사태야. 국보가 사라졌으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이 사건에 전국 경찰이 동원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이 무렵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사람이 있었거든.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어. 충무공 이순신을 향한 박 대통령의 존경은 아주 유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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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군을 지날 때마다 현충사를 방문한 건 물론이고, 사건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966년엔 현충사 성역화 5개년 계획까지 지시했어. '현충사 성역화'는 현충사 부지를 확장하고 기념시설을 조성해서 국가를 대표하는 성지로 만들겠다는 거야. 그런 대통령이 현충사를 주목하는 이 상황에서, 경찰들은 심정이 어땠을까? 1분 1초라도 빨리 그 범인을 검거해야 되겠지.

▲ 범인을 잡아라

그런데 이 사건 현장인 현충사의 유물 전시관에 도착해보니까 문제가 있어. 당시 CCTV? 없었지. 게다가 밤사이에 함박눈이 내렸다고 했지? 그러니까 발자국, 족적까지 싹 다 사라져버린 거야. 사실 범인이 남긴 게 하나 있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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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실 세 가닥. 이때도 지문 감식 기법은 존재했어. 하지만 범인이 털장갑을 끼고 있었던 탓에 지문을 통한 신원 확인이 어려웠던 거지.

"단서가 현장에서 본 자물쇠 부순 거 그것밖에 없으니까. 범인을 체포하는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족적도 없지, 지문도 없지. 그러니까 애매모호한 거죠."
-당시 사건 담당 형사

막막한 상황에도 경찰은 포기하지 않았어. 현장 정밀 감식에 나선 경찰은 남은 흔적을 토대로 범인의 윤곽을 그려보기로 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현충사 지도야. 범인은 철조망을 끊고 현충사 안으로 침입한 것으로 추정이 됐어. 관리소 직원 홍종선 씨의 증언에 따르면, 마지막 순찰을 한 건 전날 저녁 7시. 그리고 범행 현장을 확인한 건 약 12시간 뒤였다고 해. 다시 말해서, 범인이 움직인 시간은? 오후 7시부터 그다음 날 오전 7시 사이야. 1967년 12월은, 지금처럼 가로등이 많이 없었을 거야. 모르는 사람은 진입 장소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유물 전시관까지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겠지. 범인은 이 곳의 지리감이 상당해 보여.

그 뒤 범인은 유물 전시관 철문에 구멍을 내고 난중일기를 비롯한 국보 제76호를 훔쳐 달아났어. 그럼, 범인은 그 철문을 어떻게 뚫었을까? 범인의 방식은 이랬어. 송곳으로 틈을 만든 다음에, 철판 절단용 가위로 구멍을 뚫은 거야. 사실 그 철문의 두께는 1.5mm였어.

그럼 여기서 범인에 대한 추리를 해볼게. 이 범인, 철문 두께를 사전에 알았을까? 두께를 몰랐다면 철문을 뚫을 엄두조차 못 냈겠지. 이 사건은, 이 유물 전시관의 지리와 내부 구조를 잘 아는 범인이 벌인 치밀한 계획 범죄인 거야.

▲ 첫번째 용의자

이제 현장 감식은 끝났어. 이제 주변 탐문을 해야지, 그날 오후, 경찰은 현충사 주변 동네에서 주민들을 만나고 있었어. 그런데 자꾸 묘한 얘기가 들려. "걔가 말이야. 난중일기 한 장만 갖다 팔아도 팔자를 고친다고 했다니까"라는 이야기야. 첫 번째 용의자가 등장했어. 당시 51살, 이응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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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충무공의 14대손이야. 이사람 얼굴을 잘 기억해둬.

사건이 벌어지기 전인 1967년 12월 중순, 이응렬 씨는 종친 20명을 사랑방에 모았대. 그리고는 "난중일기 한 장이 얼만 줄 알아? 30만 원씩이나 하는 귀한 물건이야"라고 말했대. 이때 돈 30만원이면 지금 3~4천만원 정도 수준이야. 그런데 평소에 하지도 않던 돈 얘기를, 사건 직전에 느닷없이 꺼냈다? 타이밍이 안 좋지. 게다가 현충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후손이었던 응렬 씨는, 누구보다 이곳 지리에 밝았다고 해. 이 소문을 들은 경찰은, 바로 이응렬 씨를 불러서 조사했어. 그러자 이응렬 씨는 "내가 그런 일을 왜 했겠어요!"라며 완강하게 부인을 해.

실제로 이응렬 씨의 집을 아무리 뒤져도 난중일기는 없었어. 그렇다면 이 씨가 다른 곳에 난중일기를 숨긴 걸까? 아니면 경찰이 헛다리를 짚은 걸까? 어쨌든 답은, 좀 더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

▲ 원한에 의한 범행?

같은 시각, 경찰만큼이나 범인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사람이 또 있어. 당시 28살 입사 2년차의 변평섭 기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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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에 제가 대전일보에 입사를 했었는데, 병아리 기자라고 할까. 이제 한 2년밖에 안 된 기자였어요. 그래서 그때 용맹심이 있어서, 뭐 하나 특종을 잡으려고 하는 열의가 대단했었죠 그때는. 특별 취재반이 구성됐었어요. 출근 하자마자 사건이 났으니까, '사건 기자들 빨리 현장에 가라' 그래서, 저희 그때 시무식이니 이런 것도 없이 그냥 현장으로 달려갔었죠."

-변평섭, 당시 대전일보 기자

신년 분위기를 느낄 새도 없이 취재를 이어가는데, 옆 동네에선 또 다른 의혹이 새어나와. "아니 이거, 누가 현충사 사람들 애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여?"라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누군가 앙심을 품고 범죄를 저지는 것 같단 얘기야. 이게 돈을 노린 범죄라기엔 사건 현장이 좀 이상했었거든.

"경찰은 이날까지의 수사에서 범행 동기를 원한 관계로 보고 수사 방향을 잡고 있는데, 난중일기 옆에 있는 장검, 요대, 옥로, 도대 등 값진 유물엔 범인이 손을 대지 않고 있어, 관리사무소 측에 골탕을 먹이려고 한 짓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라진 난중일기 옆엔 이 충무공의 장검과 허리에 차는 요대, 갓에 다는 옥장식인 옥로 같은 값진 유물이 진열돼 있었어. 특히나 옥로는 한 손에 쏙 들어갈 정도의 크기라서 가져가기도 훨씬 더 수월했어. 그런데도 범인은 상징성이 있는 난중일기를 택한 거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올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저는 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3대손, 이종천이라고 합니다. 1967~68년도 그때 이제 도난을 당했었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할 때예요. 내가 백암리에 살았죠. 그리고 현충사 바깥으로 다 나갔어요. 박 대통령이 (현충사 부지 밖으로) 다 내보냈죠."

-이종천, 덕수 이씨 충무공파 13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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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를) 성역화해서 (충무공을) 모시면서, 그래서 피해 본 사람들도 많죠. 몇 대 할아버지 때부터 지켜온 재산인데 이걸 집어치우고 이사를 나가라, 그냥 거기서 농성을 했어요. (마을 앞에서) 돗자리 깔고 잠자고 말이야. 죽어도 못 나간다… 어쨌든 현중사하고 자기가 잊지 못할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다 조사를 했었죠."

-당시 사건 담당 형사

새로운 용의자는, 현충사 성역화 때문에 피해를 입은 후손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했던 현중사 성역화, 그 진행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거든. 정부는 부지 확장을 위해서 후손들을 울타리 너머로 이주시키고, 18평 남짓한 시멘트 집을 지어줬다고 해. 하지만 더 큰 문제가 터져나왔어.

"호당 38만원을 들였다는 새 집은 석달도 못 돼 장마철을 지나면서 천장에 금이 가고 기와가 깨어지는 등 날림 공사에 바닥이 드러나 원성을 사게 됐다."

이 일로 당시 충남지사는 문책을 받고, 시공업자는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기까지 했대.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이었던 거지. 그러면 누군가가, 그 현충사 관계자들, 정부를 골탕 먹이려고 벌인 범행일 가능성, 있어보여? 사실 경찰이 원한에 의한 범행을 의심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어. 불과 두 달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거든.

▲ 금불상 도난 사건

1967년 10월 24일, 사건이 벌어진 곳은 서울 덕수궁 미술관이야. 당시 이곳에선 문화재 애호기간을 맞아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어. 관람객들의 방문이 이어지던 오전 9시 40분 무렵, 갑자기 정전이 돼. 문제는 이 사이에 보물이 사라진 거야. 사라진 보물은 이거였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국보 제 119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이건 제작 연대가 확인된 것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 불상이야. 무려 539년 고구려 때 만들어졌거든. 국가의 보물 이 국보가 백주대낮에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그런데 불상이 놓여있던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니 수상한 쪽지 하나가 놓여 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국장님께 직접 알리시오. 24시간 안으로 반환한다고. 타인에게 알리거나 얕은 수작 부리지 마라. 이따 11시경 국장님께 직접 알리겠음."

관계자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전시는 즉시 중단됐어. 그런데 얼마 뒤에 문화재 관리국장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와.

"내가 바로 범인이오."

당연히 문화재 관리국장은 국보를 돌려달라고 범인을 설득했겠지. 하지만 별다른 대답 없이 전화를 끊은 범인은 그날 밤 11시 5분쯤 이번엔 문화재 관리국장의 집으로 연락을 해 왔어.

"금불상은 한강 철교 제3교각 16번과 17번 밑에 파묻어 뒀으니 찾아가시오."

문화재 관리국장은 반신반의하며 현장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달밤에 땅을 파헤치는데, 금불상이 정말 모래 속에 묻혀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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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당한 일을 벌인 범인의 정체, 밝혀지지 않았어. 그저 젊은 남자라는 것만 확인된 채, 지금까지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어. 다만, 이상한 거 없어? 쪽지에 적혀있는 호칭이 '국장님께'였지. 그리고 이 범인, 문화재 관리국장의 사무실 번호는 물론 개인 집 번호까지 알고 있었잖아. 경찰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문화재 관리국장을 골탕 먹이려고 저지른 범행일 거라 추정했어. 그리고 두 달 뒤에 벌어진 난중일기 도난 사건 역시, 같은 성격의 범죄일 거라 의심한 거지.

문제는 전국의 경찰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를 펼쳤지만, 탈탈 털었는데도 털끝만한 증거도 안 나왔다는 거야. 그렇다면 난중일기 도난 사건 역시 미제로 남는 걸까?

▲ 대통령의 최후 통첩

이런 상황에서 시간은 흘러 1968년 1월 8일. 경찰과 용의자로 몰린 사람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 피가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때 심지어 계룡산에서 난중일기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을 정도로, 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한 마음으로 빨리 난중일기가 돌아왔으면, 또 범인이 잡혔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지 않았나."

-변평섭, 당시 대전일보 기자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 바로 박정희 대통령. 국보를 훔쳐간 도둑을 검거하기 위해 대통령이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전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범인을 체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부치고,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게는 특별 상금을 주겠다. 범인이나 정보 제공자는 청와대 민정반에 통보를 해줄 것."

-박정희 대통령

열흘 안에 자수해서 광명 찾지 않으면, 전 수사기관을 움직여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야. 대단한 엄포지. 그런가 하면 제보자에겐 특별 상금을 주겠대.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의 최후 통첩이야. 심지어 제보 받는 곳이 청와대 민정반이야. 청와대에서 직접 제보를 받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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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 사건이 쉽게 말하면 도둑놈 아니에요. 국가원수가 '도둑놈을 잡아라'라고 엄명을 한 거는 역사 이래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럼 혼신을 다해서 수사하는 거죠, 전국 경찰이. 어떻게든지 잡아야 되겠다, 내 자신도 어떻게든지 잡아야 되겠다는 그런 각오가 비장하였었죠."

-당시 사건 담당 형사

가뜩이나 비상이었던 전국 경찰들은 완전히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심지어 남은 시간은 단 10일. 그런데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가 있은 뒤 사건은 정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뜻밖의 장소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남자가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했어.

▲ 시민 영웅

다음날인 1968년 1월 9일 점심 무렵, 이곳은 아산 현충사에서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부산 동래구 온천동이야. 서른 살 박정웅 씨는 동래 표구사에서 일하는 17살 김 군과 마주 앉았어. 여기는 중화요리집이야. 일단 정웅 씨는 김 군한테 짜장면을 권했어. 김 군이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정웅 씨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본론을 꺼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근데 느그 사장이 그 난중일기 갖고 있다 카던데? 야 다 알고 왔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라."

김 군의 사장님이 범인이다? 이날 오전 정웅 씨는 아버지로부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게 돼.

"니 그 강사장이 운영하는 그 표구사 알제? 자꾸 그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든나 카던데?"

내용은 이랬어. 이때까지만 해도 복덕방 겸 다방, 시계방 겸 사진관처럼, 가벽으로 한 공간을 나눠쓰는 가게가 많았거든. 정웅 씨의 아버지가 자주 찾던 복덕방도 표구사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고 해.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꾸만 책장 너머로 난중일기에 관한 얘기가 들려왔다는 거야. 여기까지 들은 정웅 씨, 순간 눈이 번쩍 띄었어.

"아버지! 그거 참말입니까?

8남매 중에 장남이지만 군 제대 이후에 딱히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던 정웅 씨는, 늘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 같았대. 그런데 이 난중일기를 훔친 도둑을 잡으면, 포상이 있잖아. 가짜 정보여도 해프닝이고, 혹여 이게 진짜 정보면 나라의 영웅이 되는 거야. 이런 상황이라면 수상한 이웃의 정체, 확인해 봐야겠지?

정웅 씨는 당장 범인 검거 작전을 실행에 옮겼어. 친구 황 씨와 둘이서. 표구사를 운영하는 강 사장의 뒤를 밟은 거야. 거의 탐정처럼. 그런데 주위를 경계하면서 한 다방 안에 들어간 강 사장이, 은밀하게 남자를 만나네. 그리고 뭔가 소곤거리는데, 잘 안 들려. 정웅 씨는 신문으로 얼굴을 싹 가리고 강 사장이 앉은 테이블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어. 그리고 다시 얘기를 엿들었어.

대화를 엿들으니 "아니, 국보를 그렇게 하면 잡힌다니까." 이런 소리가 들려. 정말 수상하지? 정웅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 보다 확실한 증언을 듣기 위해, 강 사장네 표구사 직원 김 군을 만났어. 정웅 씨는 김 군한테 짜장면을 사주면서 아는 게 있으면 얘기를 좀 해달라고 한 거야. 그런데 짜장면 그릇을 비운 김 군, 상상도 못한 얘기를 꺼내.

"아 이거 뭐,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그 사장님이예. 5일 날 밤이던가? 그 묵직한 보따리 하나를 갖고 오더니만은 다음날 그걸 또 들고 나가삐던데예?"

김 군과 헤어진 정웅 씨는 공중전화 앞에 섰어.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

"난중일기 훔친 놈을 지가 알 것 같거든예. 동래에서 표구사 하는 강찬영(가명) 일당을 수사해보이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다방에서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것을 옆에 시민이 듣고 바로 시경 국장한테 제보를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국운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해요."

-변평섭, 당시 대전일보 기자

제보를 접한 부산시경에서는 바로 검거하러 갔어. 낮 12시 30분 무렵 표구사 강 사장의 집을 포위한 부산시경 형사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사람, 강 사장이야. 강 사장은 저항조차 못한 채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고 해. 그런데 집을 수색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게 안 보여. 국보 제76호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이 없는 거야. 시민탐정 제보자 정웅 씨가 뭔가 잘못 알았을까?

▲ 드디어 잡은 범인

그냥 돌아서기에도 어딘가 찜찜한 상황에서, 형사들은 추궁을 시작했어.

"난중일기 어디에 숨캈어? 다 알고 왔데이!"

그러자 강 사장 자포자기한 듯 이렇게 말해.

"내한테 없습니더. 다른 사람한테 넘겼십니더."
"그게 누군데?"
"나까마요."

나까마? 그게 누구일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문화재 범죄는 일반 범죄와 달리 전문성을 가진 특수 범죄입니다. 전국을 다녀볼 거 아니에요. 문화재 절도범들은 유물이 '이게 언제 유물이고 여기는 뭐가 있다'하는 걸 오히려 나보다도 더 많이 알아요. 유물을 훔쳐와서 절대 집에 안 갖다 놔요. 석조물도 마찬가지고 다른 유물도 외딴곳에 은닉시켜 놓고, 나까마, 즉 중간 상인 매매업자를 통해서 모든 걸 처리하는 거지."

-강신태, 전 문화재청 문화재 사범단속반장

강 사장이 물건을 건넸다는 사람은 경남 마산시에 살고 있는 일명 마도로스 박. 속칭 나까마라 불리는 브로커야. 그는 일본을 오가며 장물을 거래하는 인물로 확인이 됐어. 강 사장은 국보를 일본에 밀반출할 계획이었던 거야. 형사들은 강 사장에게 질문을 해. 일본 갈 배편은 언제 마련되냐 물으니, 내일이라고 해. 이게 어떤 뜻일까? 오늘 당장 못 찾으면 난중일기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거야. 이거 보통 일이 아니지.

부산시경은 곧바로 마산 경찰서에 공조를 요청했고, 마산 형사들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해서 마도로스 박의 행방을 뒤졌지.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 그럼 난중일기, 마도로스 박한테 있었을까? 없어. 일본행 배편을 알아볼 동안 마도로스 박 역시 또 다른 공범한테 난중일기를 맡겨뒀던 거야. 그 사람은 바로, 부산에서 인쇄소를 하고 있는 이 사장. 그럼 이번에야말로 난중일기를 찾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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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경찰은 이 사장 집 주변을 조용히 에워싸기 시작했어. 그리고 형사들이 담을 훌쩍 넘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현관 밖으로 나온 사람, 바로 이 사장이야. 형사들은 순식간에 이 사장을 제압했어. 그리고 난중일기가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이 사장 입이 너무 무거워. 어떤 말에도 대답을 안 해. 그런데 마당 쪽을 살피던 형사가 연탄 창고 안에 들어서는데, 이 사장의 눈빛이 흔들려. 그 안에 뭐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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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니에 있던 보자기 꺼내서 풀고, 그 안에 종이까지 벗기자, 그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그리고 서간첩이야. 마침내 국보 제76호를 찾았어. 이 순간에 형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 그런데 사건이 마무리되려나 싶던 그때, 절도 혐의로 조사를 받던 표구사 강 사장이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

"절도예?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보관만 했심미더! 내는 현충사는 간 적도 없어예."

난중일기를 훔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지. 그럼 여기서 '그 사람'은 대체 누굴까? 답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들려왔어.

▲ 절도단과 설계자

1968년 1월 9일, 여기는 청와대 특별 민정반 사무실이야.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등장해. 누가 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뗐어.

"저 그… 대통령 담화 보고 자수하러 왔습니다."

부산에서 상경했다는 남자는 32살의 김 씨. 이 남자 정체가 뭘까? 김 씨는 난중일기를 훔친 도둑이 될 뻔했던 사람이야. 김 씨가 털어놓은 얘기는 이래.

사건 발생 일주일 전인 1967년 12월 24일. 김씨는 다른 공범들과 함께 현충사 답사를 갔어. 그런데 차마 국보를 훔칠 수가 없어 자기는 범행에서 손을 뗐다는 거야. 이게 어떤 의미야? 김 씨는 진짜 절도범의 정체를 알고 있다 는 거지. 김 씨에 따르면 현충사를 사전 답사하고, 난중일기를 직접 훔친 사람은 2명이야. 사기 전과가 있는 38살의 이 씨, 일명 포마드리. 그리고 또 한 명, 절도 전과가 있는 27살의 정 씨, 일명 정선수야.

그런데 김 씨의 얘기 중에서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바로 이거였어.

"근데 그게, 주범은 따로 있습니다. 이게 다 그 양반이 꾸민 거라예!"

김 씨가 지목한 난중일기 도난사건의 설계자. 그는 바로, 37살의 유 선생(가명). 마침내, 국보 제76호 절도단의 조직도가 완성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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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범죄를 모의한 건 1967년 12월 13일 밤. 다방에서 정 선수, 포마드 리, 이 둘과 만난 유 선생은 이런 말을 했대.

"언제까지 이래 살끼고? 난중일기만 일본에 갖다 팔면 못 받아도 천만원은 받는다 카던데."

1967년에 천만원 어느 정도의 가치였을까? 지금으로 치면 3억 7천만원 정도야. 아까 표구사 김 군이 먹었던 짜장면. 그때 당시에 짜장면 한 그릇은 40원이었대. 그러니까 천만원이면 짜장면 약 25만 그릇을 먹을 수가 있는 거야. 그야말로 초대형 범죄판을 짠 유 선생은 처음부터 계획이 다 있었다고 해. 포마드 리와 정 선수에게는 절취를, 표구사 강 사장과 인쇄소 이 사장에겐 운반과 보관을, 그리고 마도로스 박에겐 해외 밀반출을 맡겼지.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야. 유 선생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했어. 그러다 보니 역할이 다른 공범들끼리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었다고 해.

게다가 이들이 범행을 실행한 날짜는 1967년 12월 31일. 연말연시에 분주하고 어수선한 틈을 노린 거야. 범행을 설계한 유 선생, 어떤 성격일까? 어쩌면 유 선생은 완전 범죄를 꿈꿨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는 끝까지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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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친필로 쓴 난중일기를 훔쳐서 팔아먹으려던 문화재 도둑 일당이 쇠고랑을 찼습니다. 뜻있는 시민들의 협조로 드디어 범인들은 일망타진 된 것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때 참 사람들 많이 구경꾼들이 모였어요. 서울에서도 내려오고 전국에서 기자들이 다 쫓아왔는데, 일본 NHK에서도 왔었다고 그래요. 그때 저는 물론이고, 구경왔던 사람들도 전부 욕을 내뱉고 소리지르고 그랬죠. 그런데 유 선생은 끄떡도 안 해."
-변평섭, 당시 대전일보 기자

앞서 마도로스 박, 이 사장, 강 사장이 붙잡힌 데 이어 포마드 리와 유 선생도 결국 검거된 거야. 박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가 있고 나서, 주범 검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유 선생의 태도, 어떨 것 같아? 그는 난중일기를 훔친 뒤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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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손에 넣었으니 참으로 뿌듯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지금부터야. 경찰이 유 선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몰랐던 사실이 하나 둘 밝혀졌거든.

▲ 수상한 방문자

시간을 또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볼게. 1963년 4월, 여긴 서울 수도산에 위치한 봉은사. 하루는 한 스님이 종무소를 찾아와.

"제주 관음사에서 올라와 행각 중인데, 며칠 신세를 좀 져도 되겠습니까?"
"아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묵으실 방이 없어서, 저희 직원이랑 같이 쓰셔야 하는데."
"아이고 그만하면 과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렇게 직원 김 씨와 한 방을 쓰게 된 스님의 법명은 법호. 사범대학을 나와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는 법호스님은 3년 전 속세를 떠나 수양 중이라고 했어. 그런데 얼마 뒤 법호스님이 사라져. 바로 이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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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청동은입사향완. 1344년 고려 때 만들어진 보물 제321호야. 워낙 귀한 문화재라 평소엔 별당 장롱 깊숙이 보관하다가, 연구자나 외국의 귀빈이 왔을 때만, 그것도 주지스님의 입회 아래에서만 공개를 했었다고 해. 향완의 관리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법호 스님과 한방을 쓰는 직원이었던 김 씨. 김 씨가 열쇠를 방에 둔 채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법호스님이 향완을 훔친 거야. 그리고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매매하려다 검거됐어. 이 법포스님, 누군지 알 것 같지 않아? 맞아. 유 선생이야.

더 놀라운 게 있어. 이 향완이 보물로 지정이 된 건 1963년 1월 21일.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석 달 전이야. 그러니까 유 선생, 기가 막히게 돈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인 거지. 그렇다면 그의 전과는 이게 전부였을까? 유 선생은 1966년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도 향로, 감로병, 철불상을 훔쳐 판매하려다가 검거돼. 그리고 유 선생의 곁엔 공범이 있었지. 그 중 한 명은,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난중일기 절도 이후 유일하게 검거되지 않았던 정 선수야. 두 사람은 이미 1년 전부터 합을 맞추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정 선수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앞서 시신으로 발견된 남자. 그 사람이 바로 정 선수였어. 공개수배가 시작되자 비극으로 인생을 마쳤던 거지.

▲ 되찾은 국보

그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난중일기 도난 사건. 이렇게 막을 내린 걸까? 아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부산에서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국보 제76호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그리고 서간첩은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 그날 밤에 항공편으로 서울에 보내졌어. 청와대가 직접 관리를 하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문화재 관리국에서 훼손이 됐는지 일일이 확인을 하니까 어? 없어! 편지가 없어! 누군가 이 충무공의 서간첩에 들어있던 편지 세 통을 몰래 빼돌린 거야. 회수 당시엔 경황이 없어 미처 확인을 못했던 거야.

수사 결과, 범인은 표구사 강 사장. 부산경찰은 곧장 강 사장의 집으로 다시 달려갔어. 그런데 느낌이 싸해. 강 사장의 부인이 부엌에 서있는데, 손에 뭔가를 쥐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앞 아궁이에선 장작이 타고 있어. 손에 쥐고 있는 건, 잃어버린 이 충무공의 편지야. 남편이 구속되자 부인이 두려운 마음에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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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지금 뭐 할라 카는데예! 내라 노으소!!!"

활활 피어 오르는 불 앞에서 형사들은 부인을 진정시키려고 했어.

"이거 그만 확 태워버리고 말지!"

국보가 눈앞에서 잿더미가 되려는 순간, 형사들이 몸을 날려. 이 충무공의 편지, 무사했을까? 다행히 무사해. 비로소 모든 국보가 제자리에 돌아온 거야.

소식은 충남 아산에서 가슴 졸이고 있던 오 형사한테도 전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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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더라고.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 절도단이 야비하게 애국지사로 목숨을 바친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훔쳐서 일본놈한테 준다, 적한테 준다… 죽겠지, 오기도 생기고, 환장하겠더라고."

-당시 사건 담당 형사

사실 오 형사가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한 이유는 더 있었어.

"우리가 일본 글을 4학년 때까지 배웠어요. 조선말을 못했어. 일본말만 했어. 7살에 초등학교 들어갔는데 조선 말을 안하고 일본 말을 어떻게 해. 그래 막 벌 섰어요. 그거 생각하면 참 통탄할 일이야. 눈물나…"
-당시 사건 담당 형사

오 형사는 1935년생이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몸소 겪었던 거지. 그런 그에게, 이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 등장했던 인물 중에, 같은 마음이었을 사람은 또 있어. 사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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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얼굴, 어딘가 낯익지 않아? 첫 번째 용의자로 몰렸던 이 충무공의 14대손, 이응렬 씨야. 이 사진이 촬영된 건 1942년 10월 19일. 좀 젊을 때 찍은 사진이지. 촬영 장소는, 서대문 형무소야. 이건 당시의 머그샷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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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렬 선생님은 1942년 어느 날 자기 하숙집에서 지인들하고 담소를 나누다가 '내선일체는 불가하다', '현 상황에서 조선인이 독립하기는 어렵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할 수 있다', 이 발언이 일본경찰에게 들어가 체포당했고, 1943년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습니다. 내선일체는 (일제가 강요한) 국체(국가체제)거든요. 국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그래서 사형까지 자기가 감내할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죠."

-박광종, 민족문제연구소 특임 연구위원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이응렬 선생은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창씨개명조차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어. 그런 이 선생한테 이 충무공은 조상이자 위인을 넘어, 삶의 멘토였다고 해. 무엇보다 이 선생, 처음에 난중일기 절도 용의자로까지 몰렸었잖아. 난중일기가 돌아왔을 때는 어떤 심정이셨을까. 이응렬 선생은 이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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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내 생명을 되찾은 것 같구먼유."

사건이 마무리된 뒤, 시민탐정 정웅 씨와 친구 황 씨에게는 대통령 특별상금 50만원이 전달됐어. 정웅 씨, 드디어 효도하겠다던 그 뜻을 이루게 된 거야. 그리고 범인을 검거했던 경찰들 모두 1개급 특진이 됐어.

그럼 유 선생 일당은 어떤 벌을 받았을까? 검찰은 상습 절도를 한 유 선생에겐 징역 10년을, 포마드 리에겐 징역 7년을 구형했어. 실제 선고는 어땠을까?

"피고인 유 씨(유 선생)를 징역 5년에, 동 이 씨를 징역 3년에, 동 강 씨(강 사장)를 징역 2년에, 동 박 씨(마도로스 박)를 징역 1년 6개월에, 동 이 씨(포마드 리)를 징역 10개월에 처한다."

국보 제76호가 모두 회수가 된데다가, 재판부는 이 피고인들이 반성을 하고 있다고 판단을 했던 거야. 그러면 판결 이후에 유 선생은 범행을 멈췄을까? 더 충격적인 얘기들이 기다리고 있어.

▲ 끝나지 않은 범행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7년 뒤인 1975년 6월 30일 새벽. 여긴 천년고찰 충남 당진군 영탑사야. 캄캄한 어둠을 틈타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대웅전 문을 드라이버로 뜯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불상 하나를 들고 달아났어.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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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보물 제 409호야. 이 보물을 노린 도둑들은 누굴까? 유 선생은 아니야. 전과 8범 김 씨와, 그의 교도소 동기 송 씨야. 오늘 처음 등장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경찰이 이들을 붙잡아 조사하다 보니까, 또 익숙한 인물이 등장해.

"이 불상을 일본에 팔아준다고 한 사람이 있었슈."

바로 유 선생이야. 이번에도 뒤에서 장물 거래를 주선하고 있었던 거야. 결국 1976년 12월 6일, 유 선생은 또다시 검거됐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거 없어? 유 선생의 주요 거래처는 왜 계속 일본이었을까?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엔 우리 문화재를 찾는 수요층과 거래 시장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어. 어떻게든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가기만 하면, 두둑이 값을 쳐줬다는 거야. 그러다 보니 60, 70년대엔 이런 사건도 잦았대.

"서울 지구 밀수 합동 수사반은 우리나라 골동품 100여 점을 반출하려던 일본인 2명을 공항에서 검거, 출국 정지시켰다. 수사반은 이들에게 골동품을 사준 국내 골동품상을 수배했다."

이 무렵 일본인과 손을 잡은 한국인들의 문화재 밀반출 시도가 잇따랐어. 유 선생도 그들 중 하나였던 거지. 그런데 경찰 조사를 하는 동안, 더 당혹스러운 사실이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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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동혈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종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옛날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혈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일제시대 때는 반출되기도 하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구국제민'이라고 하는 현판 글씨가 (1974년 9월) 도난을 당했고, 골동품 30만 원 그 당시에 팔려나가고 나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쉬운 현실이죠."

-종성 스님, 동혈사 주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 일찍이 그는 동혈사에 '구국제민(救國濟民)',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자필 현판을 남겼다고 해. 그런데 1974년, 이 현판을 훔쳐 달아난 사람이 있었던 거야. 맞아. 유 선생이야. 이 사실은 그의 자백으로 확인됐어.

그간 유 선생이 손댔던 난중일기와 봉은사 향완, 그리고 통도사와 영탑사의 문화재는 다행히 돌아왔지. 그런데 이 현판은 달라. 이 유 선생이 부산의 한 골동품상한테 30만 원에 팔아넘긴 뒤,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가 없거든. 이 밖에도 유 선생은 네 차례에 걸쳐서 비지정 문화재를 훔쳐서 팔았다고 털어놨어.

검거 이후 유 선생은 경찰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해.

"선조들이 만든 고귀한 문화재를 만져보고 읽어본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범행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있은 뒤에 1968년, 정부에서는 문화유산 국외 불법 수출 방지를 위해서 문화재 감정관실, 지금의 문화유산 감정관실을 설치했어. 그리고 문화유산 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문화재 보호법도 개정했지. 그럼 지금 난중일기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일반 공개가 제한된 채 현충사 수장고에 보관돼 있어. 대신 연구나 교육용 열람을 위해, 원본을 그대로 복제한 난중일기 영인본 50부가 주요 기관에 배포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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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2013년. 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어. 한국의 문화재라는 차원을 넘어서 인류가 보존해야 할 기록물로 인정이 됐다는 얘기지. 만약에 그날, 그 유 선생 일당이 난중일기를 정말 일본에 넘겼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됐을까.

다시 난중일기 한 편을 소개할게.

<정유년 1597년 10월 16일 맑음>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대로 통곡하지도 못했다. 밤 10시경에 순천 부사, 우후 이정충, 금갑도 만호, 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는데 왜적의 머리 열세 급과 투항해 들어갔던 송원봉 등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충무공 이순신은 여전히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어.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이 충무공이 지키려 했던 건 무엇일까.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이었던 거지. 만약 이 기록을 잃었다면, 우린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돈에 눈이 멀어 수차례 문화재를 절도했던 유 선생. 그가 진짜 일본에 팔아넘겼던 건 뭐였을까.

1967년 12월 31일. 현충사에서 벌어진 난중일기 도난사건. 그저 값비싼 국보를 노린 도둑들의 단순한 절도 사건만은 아니었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었지.

근데 말이야. 이 사건을 그냥 과거의 일이라고만 생각을 해도 될까? 1985년부터 지금까지, 도난당하거나 유실된 국가유산의 수. 몇 점 정도일 것 같아? 무려 3만 435점. 그 중 회수된 국가유산은 6천 932점이라고 해. 여전히 수많은 국가유산이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는 거야.

어쩌면 우린 중요한 걸 잃고도 그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끝으로 동혈사 종성 스님이 시청자들한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국가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겨 있는 그러한 삶의 무게가 바로 문화재입니다. 있던 국가유산이 원래 있던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혹시 '꼬꼬무'를 보시는 분께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구국제민'이라고 하는 현판을 소장하고 계셨다면, 꼭 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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