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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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작성 2026.10.02 17:29 조회 4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악몽의 수학여행'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우먼 겸 배우 정이랑, 가수 볼빨간사춘기 안지영, 그룹 원어스 멤버 건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추억의 수학여행

때는 1970년 10월 14일 아침. 서울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 조회 시간 종소리가 울릴 즈음, 학교 운동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 왜냐. 이날은 바로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날이었거든. 경서중학교의 수학여행 일정은 원래 2박 3일이었어. 그런데 당시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학여행비를 못 내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대. 결국 당일치기 일정으로 변경됐지만, 16살 어린 나이에 떠나는 친구들과의 생애 첫 수학여행이잖아. 얼마나 설레고 신났겠어.

그중에도 4반, 종철이는 특히 더 신이 나있어. 엄마가 주신 특별 도시락과 용돈, 그리고 수학여행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희귀 아이템까지 챙겨왔거든. 그게 뭐였을까? 종철이에게 직접 들어볼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경서중학교 3학년 4반에 있었던 최종철입니다. 학교에서 버스 대절해서 간 소풍, 그때는 수학여행이라고 그랬는데. 그건 처음이었고요. 먼 길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고. 특히 어디서 빌려온 걸로 알고 있는데, 카메라를 빌려주셨고. 그때 당시에는 카메라를 쉽게 접하는 것이 아니었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날이 저한테는 아주 대단한, 특별한 날이었단 말입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그때만 해도 이런 카메라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어. 종철이는 아버지가 빌려준 새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는 바로 당시 최고의 핫플레이스, 바로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통해 의리의리하게 단장했어. 게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멋지게 단장한 현충사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게, 당시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였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게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친구들이랑 계속 웃고 있는 표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보이지. 학생들은 현충사 참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신정호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오후 4시,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야. 학생들은 앞다퉈 버스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늦게 타면 서울까지 계속 서서 가야 했거든. 종철이 역시 타고 왔던 3호차에 오르자마자, 재빨리 찜해둔 자리에 앉았어. 종철이는 운전석 바로 옆, 엔진룸 위 쪽에 앉았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옛날 버스는 이렇게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어. 보통은 짐을 올려놓거나 하는데, 자리가 없을 땐 앉기도 했어. 다른 아이들이 일반 좌석으로 몰리는 사이, 종철이는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은 거야. 순식간에 아이들로 가득 찬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어. 얼마나 갔을까? 종철이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엔진룸 위에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서 스르르 잠이 온 거야.

그런데 그때! 잠에서 깬 종철이는 주위를 살피고는 깜짝 놀랐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거든.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눈을 떠)보니까… 여하튼 피를 많이 흘렸고요. 병원에서 깨어났어요. 한 이틀 정도 뒤에 깨어났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신문도 보여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고가 났었구나…'"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눈을 떴을 땐 을지로에 있는 한 병원이었대. 그제야 몸을 살펴보니까 온몸이 만신창이더래.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오른쪽 다리는 뼈가 다 부서졌어. 그리고 왼쪽 다리는 뼈가 보일 만큼 살이 파여서 출혈이 엄청났다고 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지금까지도) 사고 난 것 자체를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다가 기절해 버린 게 아닌가 추측건대."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 의문의 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종철이가 탔던 그 3호차 버스가 가장 먼저 출발을 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는 다른 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저는 박상준이고요. 3학년 7반이었습니다. 두 번째 차로 우리가 가는데, 안 보였어요 앞차가. 아예. 그리고 한 10분 정도 우리가 탄 차가 서 있었어요. 차들이 막혀서 서 있으니까 서 있던 거죠. '왜 안 가지?' 하는데 옆에 어떤 아주머니 두 분이 가다가 창문을 막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앞에) 학생들 학교 차 같은데 사고 났어! 사고 났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몇 명인지 몰라도 후다닥 뛰어내려서 계속 뛰었어요. 우리 학교 차가 사고 났다고 하니까. 이제 급한 마음에 선생님도 나가고 막 애들이 쫓아 나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때 한 학생이 찍은 사진이 있거든. 바로 이 사진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까만 연기가 막 피어 오르지. 상준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어. 시야를 가로막은 언덕을 넘으니까 그제야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어. 앞서 가던 3호차, 종철이가 타고 있던 버스가 불길을 휩싸여 있는 거야. 상준이는 정신없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리가 접근하기가 힘들었어요. 불이 붙은 게, 어디 한 군데 붙은 게 아니라, 전체가 다 붙은 거예요. 버스가 하도 활활 타오르니까 불길이 유리창으로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고 있던 거죠. 난 그 광경이 진짜 안 잊혀져요. 불길,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게… 하얀 머리들 몇 개가 보이는 거예요. 애들이 뭉쳐서 (쓰러져) 있는데. 그게 죽어도 안 잊혀요. 왜 이게 하얄까, 까매야 되는데..."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처참한 광경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 중에는 학생회장 태선이도 있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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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경서중학교 사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최태선입니다. 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의용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주민일 수도 있는데, 딱 막더라고요. 그리고 버스에 물을 뿌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상황 종료. 그리고 연기가 나고 사랑하는 친구가… 이렇게 (쓰러져) 있더라고요. 여기에(머리쪽) 물을 맞으면서… 제가 그거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겠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불타는 버스 안에 남겨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거야. 불길에 휩싸인 3호차 버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여줄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불타고 있는 버스 옆으로 선로와 기차가 보이지. 앞서 가던 3호차 버스가 기차와 충돌한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 차량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종철이는 사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서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생존자를 찾아봤거든. 다행히 사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고의 순간을 재구성해 볼게.

▲ 사고의 재구성

사고 당일 오후 4시. 신정호수에서 자유시간이 막 끝났을 때야. 선생님이 각자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가라는 말에, 3학년 4반 용섭이는 바로 버스로 달려가. 올 때 서서 왔더니 너무 힘들었거든. 갈 때는 꼭 앉아서 가고 싶었던 거야. 3호차에 오른 용섭이는 운전석 옆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아. 맞아. 바로 종철이 옆에 앉은 거야.

잠시 후 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어.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종철이와 달리, 용섭이는 버스 앞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어. 오후 4시 20분. 천안 방향으로 가던 버스 앞에 철길 건널목이 나타나. 그리고 용섭이의 귀에 소리가 들려와. '땡땡땡땡' 건널목 경보기 소리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 소리를 들었다면 운전자는 멈추는 게 맞잖아? 그런데 3호차 기사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았대. 그러니까 앞차를 따라서 빨리 건널목을 통과하려고 했던 거야. 버스가 건널목에 들어서는 그때, 용섭이 눈에 뭔가가 들어와.

"아저씨 기차가 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기차는 버스의 왼쪽 가운데 부분을 들이받았어. 용섭이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버스 앞 유리를 깨고 튕겨나갔어.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대. 기차는 V자 모양으로 휘어진 버스를 80m 정도 더 밀고 간 후에야 멈춰서.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그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아. 버스에 있는 연료통이 폭발한 거야. 불길은 엔진이 있는 앞쪽에서 시작되더니 삽시간에 버스 뒤쪽을 향해 번지기 시작해. 그때였어.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학생 하나가 정신을 차렸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3학년 3반 54번 김현철이었어요. 얼마 동안 기절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차 안이 연기와 불로 차 있었고. 애들은 다 이렇게 쓰러지고, 이렇게 고개 숙이고. 이런 애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옆 창문을 발로 깨고 버스에서 뛰어내려서 보니까. 거기서 (정신이 들어)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훑어본 애는 나처럼 뛰어나와서 살았는데, 그냥 거기서 고개 숙이고 있던 애들은 다 거기서 그 화마에 그냥 휩싸일 수 밖에 없죠."14일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형사고구나 이거는. 정말 큰 사고구나.."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정신을 차린 현철이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그런데 그 순간, 인근 주민들이 뛰어오기 시작해. 주변에 있는 돌로 유리창을 깨고 안간힘을 쓰며 학생들을 꺼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 사진은 현충사에서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야. 왜 구조가 어려웠는지 알겠어?

"유리창 옆에 쇠파이프 같은게 지나갔어요. 그게 없었으면 더 많은 학생이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게다가 차체는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야. 그러니 구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주민들이 최선을 다해 몇몇 학생을 끄집어냈지만, 이내 버스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결국 구조를 포기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의 목격담이야.

"바람에 날리는 불덩이처럼 버스가 불에 싸여 기관차에 밀려갔다. 버스 네번째 창가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온몸에 불투성이가 된 채 '아저씨 나 살려달라'고 외마디 소리를 쳐 유리창을 깨고 그 학생을 구출하려 했으나, 끝내 몸이 밖으로 빠지지 않아 그대로 숨졌다."

그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민의 이야기도 들어볼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소리는 '쾅!' 소리 났죠. 그러니까 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많이 나왔죠. 처음에는 불빛이 확 있었어. 그런데 불과 그게 한 30분도 안 돼서 다 타버리더라고. 완전히 싹 타더라고. 마음이 참담했죠. 진짜... 사람이 불에 탔으니까 막… 처참하게 그을려서 그냥 볼 수가 없었죠. 내가 그 당시에 한 18세 됐어요. 나도 어린 나이고 같은 비슷한 나이인데 진짜 마음이 안 좋았죠."

-고광재, 사고 당시 목격자

이후 마을 의용소방대와 소방대까지 진화에 나섰고, 불길은 50분 만에 잡히긴 했어.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아.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의 추억을 가득 싣고 올라오던 버스는 처참히 구겨져 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들이 가득해. 사람들이 한 구 한 구 버스 밖으로 시신을 옮기는데, 끝나질 않아. 부상자 32명, 그리고 사망자는 45명. 버스 운전기사까지 총 46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어.

그렇게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버스 사고는, 해방 이후 가장 참혹한 버스 참사로 기록이 됐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 참혹한 버스 참사

그러면 버스 안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곳은 어디였을까? 기차가 충돌한 버스 중간 좌석 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살아남지를 못했다고 해. 그런데 버스 중간에 앉았던 아이들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학생이 하나 있어. 부상자 중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는 그 학생을, 친구들은 아직도 기억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박민택이라고 있거든요. 내가 밥을 많이 뺏어 먹었어요 그 친구. 그때는 도시락을 난로에 쫙 쌓아 놓잖아요. 그때 중3 때 엄청들 먹으니까… 미안하죠 지금. 걔네 엄마가 새벽밥 지어서 먹으라고 자기 새끼 만들어 준 걸 엉뚱한 놈이 먹었으니 미안하죠. 특히 걔는 살아남았는데 화상을 제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제일 많이 마음이 지금도 많이 아프죠."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민택이 걔가 얼굴도 잘생겼거든요. 그랬는데 얼굴이 화상 입고 그래서, 마음이 좀 안 좋았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사실 너도 아는 얼굴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처음에 봤던 이 사진 속 이 친구가 바로 민택이야. 수학여행 날 아침,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민택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역에 도착을 했대. 그런데 함께 통학하는 친구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수학여행비를 내지 못한 친구였어. 민택이와 친구들은 등교도 미룬 채 그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대. "야 중학교 시절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같이 가자" 친구를 설득한 끝에 민택이와 동네 친구들은 함께 수학여행 길에 오르게 돼.

수학여행 가는 그 버스 안에서도 민택이는 그 친구와 나란히 앉았대. 바로 3호차 중간 자리에. 버스가 불길을 휩싸였을 때 민택이는 구조됐지만, 그 친구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어. 민택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사고 직후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얼굴과 머리 등 양팔과 손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야. 난생 처음 가본 그 수학여행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의 일이었어.

그날 저녁, 사고 차량을 제외한 버스들은 다시 서울로 출발해. 버스 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올라올 때 분위기는 완전히 참담했죠. 중3이면 어린애잖아요. 다들 울고…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라디오에서는 버스 사고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어. 뉴스에서는 병원에 실려간 30여 명의 생존자 이름을 쭉 말했어.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수학여행을 떠난 470여 명의 학생 중에 30여 명의 부상자만 생존자로 방송이 된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그 400여 명의 나머지 학생들, 그 부모들은 기절 초풍할 일이야.

"그게 아주 저는 제일… 버스 타고 오면서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수학여행을 갔는데, 이 뉴스를 들으면 생존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예요. 죽었나 살았나 몰라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결국 경서중학교 교무실로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이 불러온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마포 종점 그쪽에서부터 학부모들이 난리가 아니었어요. 모든 학부모들이 다 나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날 밤 10시 30분경 버스가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어. 학교 운동장은 물론 교문 밖 도로까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형제들, 거기에 취재진과 경찰들까지. 당시 기사에 따르면 무려 3천 명이 넘었대.

버스가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해. 버스는 할 수 없이 옆 학교 운동장으로 핸들을 돌려. 하지만 부모들은 버스를 에워싼 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옆 학교까지 따라와. 아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부모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한 부모는 어땠을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철수야', '아무개야', '어디 있냐 어디 있냐' 그러니까 (자식을 찾아서) 기뻐서 우는 사람. 자기 자식이 안 와서 슬퍼서 우는 학부형. 그게 막 혼재돼서, 이산가족 찾기의 한 10배쯤 된다고 봐야 할까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냥. 엄마들은 이름 부르고 다니는 거야 내 아들 이름을. 전부 다. 누가 살았는지 모르니까.저 같은 경우도 어머니가 오셨더라고요. 막 밖에서 '상준아 상준아' 부르면서 울면서 다녀요. 근데 자식이 산 엄마들은 괜찮은데, 죽은 아이들 엄마는… 그건 생각하기가 싫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아들을 만나지 못한 부모들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 뭔가 착오가 있을 거다, 우리 아들은 살아있을 거라 믿었어. 그런데 잠시 후에 누군가 운동장 한쪽에 이걸 갖다 놨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칠판 가운데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망자, 오른쪽에는 부상자. 생과 사를 나누는 무정한 칠판 앞에 결국 희망의 끈은 끊어지고 말아. 사망자 중에는 4대 독자도 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돈을 벌며 힘겹게 동생을 뒷바라지해온 누나의 통곡 소리도 들려. 중학교 3학년, 불과 16살이야. 이 어린 생명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말았어. 대체 왜 이렇게 피해가 컸던 걸까?

경찰은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에 나서. 이제부터 드러난 사실들을 이야기해줄게.

▲ 참사의 이유

먼저 사고 버스를 보여줄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사고가 났던 버스는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버스였어. 이 버스의 정원은 39명. 아까 사고 당시 생존자 32명, 사망자는 45명이라고 했지? 사고 차량에는 77명의 학생들이 탑승했었어. 이건 뭐 지금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하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대.

"통상 그 당시에는 모든 버스들이 그렇게 다 타고 다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타니까. 그렇게 탔었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줄여 줄여'한 게 버스 수도 줄이고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7대가 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총 9개 반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버스는 7대를 불렀다고 해. 473명의 학생, 그리고 11명의 선생님. 총 484명이 이 7대의 버스에 나눠 탔던 거야. 계산해 보면 한 대에 약 70명 정도 탄 셈이야. 그런데 하필 사고가 났던 3호차에 특히 더 많은 77명의 학생이 탔던 거지.

"3호차 버스에 3반이랑 4반 애들이 많이 탔어요. 3학년 3반 애들은 다 타고, 4반 애들이 한 15명, 20명 가까이 타서 그 버스에 7, 80명이 탔던 것 같아요."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그래서 사고가 난 버스 단 한 대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던 거야. 그런데 조사 결과,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사고 버스에는 선생님이 탑승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버스에 애들만 태우고 출발하냐, 직무유기 아니냐,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관리 감독에 소홀했다며 질타했어. 당시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 있어.

"학생들이 바깥 풍경에 취해 '즐거운 우리 캠프' 등 노래를 한창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운전사가 너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들이 함께 공중 분해됐다."
-당시 보도 中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를 제지할 선생님이 버스 안에 없었다는 걸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어.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56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 얘기는 꼭 해야 돼요. 학생들이 다 나눠 타고 이제 선생님들이 버스에 올라 타야 되잖아요 인솔 교사들이. 그런데 그 차를 탈 때, 출발하기 전에 안 온 아이들이 있었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회장 다 왔니?' 그래서 '아니요, 두 명이 안 왔습니다' 인원 파악을 했는데 두 명이 안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두 명 본 사람 없냐고 하니까, '아까 저수지에서 배 타는 거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수지로 한 200여 미터 정도 되는데 막 뛰어갔어요. 제가 '아무개야!' 막 불렀죠. '빨리 와! 다 탔어! 기다리고 있어!' 그랬더니 '알았어' 그러면서 그 친구들이 막 노를 저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서 선생님한테 '쟤네 이제 여기 타면 끝입니다' 딱 하는데, 버스 한 대가 갑자기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3반하고 4반 탄 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저 차 왜 떠나지?'"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그래서 선생님들이 3호차에 못 타고, 거기서 이제 뒤죽박죽이 돼버린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 당시 뭐 전화기가 있습니까 무전기가 있습니까.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도 빨리 타고 갑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그 출발 당시까지의 정확한 팩트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3호차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선생님이 안 탄 게 아니라 못 탄 거였다는 거야. 그리고 아까 내용 중에 학생들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고 했잖아? 사고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의 말에 따르면, 기사에 나온 '즐거운 우리 캠프'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대.

"'시끄러웠었었다'라는 이런 부분들이 그냥 입담으로 하는 소리지, 사실과는 다른 얘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애들이 조잘조잘하는 이런 정도. 우리 일반적으로 교실에서도 그렇잖아요. 시끌벅적하잖아요 노는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이지, 더 이상의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냥 친구와 잡담 정도 나누거나 잠을 자는 분위기였다는 거야. 그런데 당시 기사 중, 선생님들에 관한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어.

"사고 버스 700m나 뒤떨어져 온 맨 마지막 버스에 탔던 교사들은, 사고로 버스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마을 건너 불 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있었으며, 버스가 완전히 불길에 싸여 구조작업이 어렵게 되자, 교사들은 주민들의 눈매와 눈초리가 무서워, 사고 현장 인근 중학교 교무실로 피신했다."
-당시 보도 중

'꼬꼬무'가 만난 학생들은 5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꼭 밝히고 싶다고 말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기사들 나온 거 보니까 '선생님들이 동네 사람들 무서워서 학교로 도망갔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그건 완전 잘못된 거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거나 그런 분들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갔다' 이거는 아니에요. 그 부분은 좀 명예회복이 돼야죠."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하지만 사고 직후 경서중학교 교장, 교감, 피해가 집중된 3학년 3반, 4반 담임교사는 파면되고 말았어. 또 수학여행에 동행됐던 교사 8명은 직위해제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은, 선생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기사의 무단 출발 때문이었다고 하나같이 얘기하고 있어.

"버스가 임의대로 출발하는 걸 무슨 재간으로 막습니까."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진짜 선생님 타실 때까지만 기다렸어도, 사고가 안 났다고요. 근데 그런 얘기는 어떤 매스컴을 찾아도 없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리고 버스기사, 잘못한 게 또 하나 있어. 버스기사는 철길 건널목 앞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엑셀을 밟았잖아.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사고 현장에 있었어. 서울에서 장항으로 가는 단선 철도와 온양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야. 사고 직전 3호차 버스는 천안 방향으로, 그리고 기차는 온양 방향으로 가던 중이었어. 그때 경보기 소리가 기차가 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만 버스기사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건널목을 지나가려고 엑셀을 밟았지. 조사 결과, 현장에 있던 건물들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걸로 보인대. 철길 건널목 바로 앞, 불과 2, 3m 거리에 2층짜리 정미소 건물이 있었어. 게다가 그 옆으로도 철길을 따라 민가 여러 채가 늘어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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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이렇게 옵니다. 근데 코너에 방앗간이 있어요. 높은 방앗간. 그 방앗간 건물 때문에 기차가 오는 게 안 보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원래는 철길 건널목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당시 철도청은 건설부와 협의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미소를 방치했던 거야. 결국 버스기사는 경보기 소리에도 기차가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던 걸로 보여.

또 하나 사고를 불러온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건널목이라면 꼭 있어야 할 그것, 차단기. 철길 건널목에는 등급이 나뉘어 있어. 먼저 1종 건널목에는 경보기와 차단기. 그리고 24시간 차량을 통제하는 관리원이 배치돼. 그 다음 2종 건널목에는 1종 건널목과 동일하지만, 관리원이 주간에만 배치되게 돼 있어. 그리고 3종 건널목에는 관리원이 아예 없고, 차단기도 없어. 기차가 오는 걸 알려주는 경보기만 있는 거야. 이 사고가 일어난 건널목은 3종 건널목이야.

현충사 성역화가 끝나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건널목을 지나는 차들이 하루에 5천 대가 넘었대. 그런데 교통량에 비해 건널목 등급이 너무 낮잖아. 등급을 상향시켜달라고 전부터 요청했지만 철도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예산이 부족해서 안 된대.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수많은 작은 사고들과 징후가 있다는 뜻이야. 이 건널목에서도 여러 차례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어. 만약 시야를 가리는 정미소 건물을 정리했다면, 그리고 건널목의 등급을 조정해서 차단기가 설치가 됐었다면. 그래도 사고가 일어났을까?

이 모든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건널목 앞 '일단 멈춤'이라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안전수칙만 지켰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결국 각기 다른 어른들의 사정으로 안전을 소홀히 한 결과, 45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거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운전기사로서 자기가 지켜야 될 의무', '철도청에서 지켜야 될 의무', 그것만 지켰어도 사고 같은 건 충분히 안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99%가 아니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 돌아온 아이들

사고 다음날 새벽, 경서중학교 운동장으로 구급차들이 줄지어 들어서. 그리고 45개의 목관을 내리기 시작해. 수학여행을 떠났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온 거야. 싸늘한 주검이 된 채로. 아이들이 꿈을 그리던 미술실이, 노래소리가 들려오던 음악실이, 임시 안치소가 됐어.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안치소로 달려와. 안 된다고 막아도 막무가내야.

"나는 내 아들 얼굴 보기 전엔 못 믿습니다! 왜 못 보게 합니까!!"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안치소 문을 열어줬어. 그리고 시신을 확인한 부모들은 충격과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16년을 키운 내 자식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훼손된 시신을 보고 졸도하는 부모님도 많았다고 해. 한 어머니는 손에 바나나를 들고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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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던 바나나 엄마가 사왔다. 바나나 먹고 싶다며… 어디 있니?"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해. 오후 1시경, 안치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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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중학교 수학여행 사고 시신의 개인 식별을 담당한 김종렬입니다. 시신의 손괴 상태가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개인 식별을 가족이라 하더라도 보고 몰라요. 누군지 알 수가 없죠. 얼굴이 타서 시커멓고 숯덩어리가 되니까. 얼굴 윤곽이나 이런 것이 없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소속

시신 식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 유전자 감식. 그런데 이때가 70년대,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자리 잡기 전이야. 두 번째 방법, 지문 감식. 하지만 시신들의 상태가 지문 감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마지막 식별 방법, 바로 치아 감식. 치열의 구조와 치료 흔적 등을 대조해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거지. 이런 걸 '법치의학'이라고 해. 국과수에서 파견된 김종열 교수는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자야. 김 교수는 조심스럽게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해. 다른 현장에 비해 특별히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거든. 시신을 식별할 때 가장 기본적인 구분 방법은 성별과 나이라고 해. 그런데 지금 사망한 시신들, 모두 성별이 같고 나이도 같잖아.

"'남녀, 나이' 이것이 개인 식별의 기본적인 구별 방법 중 하나인데, 이 경우는 그것이 다 동일하기 때문에, 난이도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어렵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어. 바로 학생들의 건강 기록부야. 거기엔 아이들의 키와 체중은 물론 구강검사 기록까지 나와 있잖아. 김 교수는 그 내용을 대조하며, 피해자의 신원을 한 명씩 확인해 갔어. 그런데 그때, "당신 이거 엉터리로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내 동생이냐고!"하며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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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의 형이 나에게 항의를 했어요. '자기 동생은 목걸이를 한 적이 없는데, 식별한 이 시신에 목걸이가 있다' 이거예요. '당신이 지금 감정을 엉터리로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처럼) 잘못됐다고 그러면 이건 큰일이거든요. 그게 틀리면, 그건 다 틀린 거예요. 한 명이 꼬이면, 한 명이 꼬인 게 아니라 다 꼬인 거지. 그런데 제가 침착하게 다시 보니까, 그 목걸이의 펜던트를 뒤집어 보니까, 관광지 기념품이야. 그 학생이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사서 목에 건 거였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잘못하면 아주 봉변당할 뻔했어요."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김 교수는 아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45명의 아이들을 부모의 품으로 모두 돌려보냈어.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그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신이 확인이 안 돼도 고통스럽고, 확인이 돼도 고통스러운 그 마음. 사고 이틀 후 경서중학교에서는 45명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돼. 그리고 이건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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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태선이가 친구들을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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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두 번 다시 불러보지 못할 이름들이여. 벗님들께서는 이미 가셨지만, 벗님들의 얼은 이 교정에 있습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벗님들의 노랫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벗님들의 다정한 얼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누리시길…"

"그건 뭐 비통한 마음이죠. 비통하고 슬프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울었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태선이는 조사를 읽는 동안 특히 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왜냐하면 부상자 중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거든.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때 저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 병국이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16일에 장례가 치러졌고, 그날 오후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데,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을 때 가서 봤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니까 침상에 누워있는데, 온몸이 새파랗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절망감이 드는 거 있잖아요. '병국아 일어나, 일어나야지' 이런 식의 얘기를 제가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날 학교로 왔는데, 이제 병국이가 죽었다 하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부상자 명단에 있던 병국이의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새로 적히게 돼. 결국 경서중학교 학생 사망자 수는 총 46명이 된 거지. 이들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한 공원 묘지에 함께 묻혔어. 학생들은 묘역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어.

참사 5일 후, 다시 수업이 재개된 3학년 3반의 모습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교실 한 편의 빈 책상들. 그 빈자리는 채울 수 없는 구멍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어.

"3학년 3반에 가면 애들이 다 죽었으니까. 죽은 애들 책상은 다 비어있잖아요. 그 책상이."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졸업할 때까지 계속 그랬을 거예요. 그게 난 제일 가슴 아프더라고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이듬해 1월,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졸업식이 치러져. 그리고 이걸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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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중학교 20회 졸업 앨범. 다행히도 이 앨범엔 모든 친구들의 얼굴이 담길 수 있었어. 참사가 있기 전 미리 졸업사진을 찍어놨거든.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3반 31명, 그리고 4반 15명. 이들이 실린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사라진 별들'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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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아이

그런데 참사 이후 생존자 중에 사라진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너도 아는 아이야. 맞아. 민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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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심하게 다친 애들은 메디컬 센터로 갔어요. 박민택 같은 애, 수술해야 되고 이런 사람들. 여기 있네요 박민택. 공부 잘했어요. 그때 헤어지고는 못 봤는데."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사고 당시에 가장 큰 화상을 입었던 친구,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병원에 실려간 이후 소식이 뚝 끊겼다고 해.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거야. 혹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병국이처럼 변고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민택이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한 1976~77년 정도? 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가 파주 문산에 계셨으니까. 그래서 걔가 문산에서 다녔던 게 기억이 났죠. 그래서 그 동네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여기 내 중학교 동창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동네에서는 서로 다 알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이 돼서, 만나서 잠깐 얘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20대 초반이 돼서야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종철이는 민택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해. 민택이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어. 화상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나타났거든.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 같은 걸 감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안 좋았죠. 민택이랑은 그때 만나고는 전혀 연락이 안 닿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어. 그때 만남이 사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 거야. 그렇게 또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택이를 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 당연히 동기들 모임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왜일까? 친구들은 '어쩌면 화상 때문에 변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어.

수학여행 참사를 겪은 지 올해로 56년. 그 시절 까까머리 친구들은 어느새 70살이 넘어버렸어. 친구들은 여전히 민택이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친구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꼬꼬무'가 그를 직접 찾아보기로 했어. 과연 민택이를 찾았을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55년생이니까, 올해 일흔 하나 됐죠. 이름은 박민택입니다. 교우 관계는 다 좋았죠. 다 좋았는데 같이 놀고 그랬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 안나고 얼굴도 생각 안 나요. 제가 볼 때는 사고를 당했을 때 모든 걸 잊어버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때는 참… 뭐 어떤 특별한 심정 그런 거를 갖지도 못한 나이예요. 살아가면서 참 여러 가지를 느꼈죠. 자꾸 움츠러들고 뭐 그렇게 살았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요. 왼쪽 손은 신경이 다 훼손돼서, 지금도 안 펴지는 상태죠. 제 자신을 꾹꾹 누르고 살다시피 했다고 보면 돼요. 그런 거예요."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사고 직후 그는 어떤 생활을 했기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참사 이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민택이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

"좌측 손의 동맥, 다리, 척추, 왼쪽 다리가 모두 화상을 입은 채 기능이 마비된 경서중 3학년 4반 박민택 군은 두 번이나 피부 이식 수술을 했으나 완치되지 못했는데, 이제 더 떼어 옮길 살갗조차 없는 형편."

-당시 보도된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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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한 4개월을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었죠. 그 화상 치료를 하느라고. 그때만 해도 화상 치료를 어떤 식으로 했냐면, 터널 같은 걸 만들어 놓고 화상 부위에 거즈를 붙여 식염수를 뿌려줬어요. 그 다음에 하루에 한 번인가 이틀에 한 번씩, 농 같은 게 끼면 그거 긁어내고. 진짜 끔찍해요. 이 생살을 후벼파는 정도. 그때만 해도 제가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날은, 생일 같았어요. 피부 이식 수술을 하면 붕대로 감아놓고 한 일주일 정도는 치료를 안 하거든요. 치료를 안 하니까, 수술 받는다 그러면 더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4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있다가 일어나니까, 팔다리가 다 굳고 고개는 이렇게 옆으로 돌아가 있어서. 그러다가 물리치료 한 2개월 하고서는 퇴원을 했죠."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참사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갔지만 민택 씨의 아픔은 가시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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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치료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그는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붕대를 감고 살았다고 해.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아들의 화상 자국을 마주해야 했어. 꿈 많았던 소년은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어. 그런 민택 씨가 아버지가 된 후, 깨달은 게 있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꾹꾹 참고 살았죠. 아들을 둘 낳았지만, 같이 데리고 목욕탕도 못 가봤으니까요. 부모가 되고 나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희생된 46명, 거기에 딸린 가족들. 그 모두가 참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 날에 참사가 낳은 희생자는 46명의 사망자가 아닌, 마흔 여섯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 힘겨운 시간을 살아온 민택 씨. 그럼에도 그 고통을 같은 아픔이 있는 친구들과는 나누려고 하질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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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있죠. 항상 친했던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움은 있죠. 제가 (동참 모임에) 참석을 안 하고 있습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참석을 했겠죠. 동창회 가는 건 그렇습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친구들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는 민택 씨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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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택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야 있죠. 어디 사냐, 식구들 어떻게 되냐, 우리 통상 그런 얘기 나누고…"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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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택이) 얘가 제일… 한 60년을 제일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이 친구가. 특별히 할 말은 없어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꼬꼬무'가 동창생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줬어. 민택 씨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민택 씨는 친구들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

▲ 친구를 그리며

그로부터 얼마 후, 경서중학교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어. 그날, 친구들의 마음을 전달 받은 민택 씨가 용기를 냈어. 50여 년 만에 친구들을 마주한 민택 씨. 드디어 친구의 생사를 확인한 친구들은 감격했어. 어떻게 사는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종철 씨를 제외하고는 다들 민택 씨를 무려 56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야.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엊그제 만난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웠어. 많이 늦었지만 민택 씨와 친구들의 작은 동창회가 이루어졌어. 이제는 민택 씨한테도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반가운 만남을 가진 이들에게는 보고 싶은 또 다른 친구들이 있어. 바로 묘역에 묻혀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가족들에 의해서 이장이 됐고, 지금은 11분만 남아계시다고 해. 동기들은 민택 씨와 함께 그들을 만나러 갔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여름내 자란 잡초로 가득한 묘역. 동창들은 56년 전 떠난 친구들의 묘를 정성껏 정리했어.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오랜만의 인사를 건넸어. 현재 무연고자일 수도 있는 11명의 친구들.

"아마 무연고라고 봐야 돼요. 아무도 오질 않으니까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고, 형제 자매들이 있어도 여기까지 신경 못 쓰죠. 그 유족들도 이제 나이가 거의 70대가 다 됐을 테니까."

"너희들 버려졌다고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 기억하는 우리 친구들이 있고, 앞으로도 몇 년이 더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와서 우리 친구들을 덜 외롭게 할 거야. 잘 있어라. 우리 10월에 또 올 거야. 그래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매년 10월이 되면 동창들은 묘역을 찾아서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해. 56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챙겨주는 이들의 우정. 친구들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수학여행의 그날처럼 사진을 남기기로 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부터라도 이들의 학창 시절이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사고 당시에 마포구에 있다가 지금 강서구로 이전한 경서중학교는 학생수 부족으로 내년 3월에는 폐교가 된다고 해. 학교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이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지. 더욱 많은 사람이 이 기억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의 이야기를 해봤어. 그런데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고 당사자들 외에도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71년 사고가 일어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어. 충남 아산시 배방읍 청년들은, 참사가 일어났던 10월 14일이 되면 매년 그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고 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잊혀져요. '이 사건이 만약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이걸 기억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 이 제를 지내면서 우리 배방 주민분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분들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정광재, 배방청년회 회장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이후로도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 희생되는 대형 참사를 겪어왔어. 그때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반복해왔던 것 같아.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돼. 그러기 위해선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외양간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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