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4일 방송된 '1975, 그 해 여름 약사봉에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티파니, 방송인 서경석, 배우 한그루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의 사고
때는 1975년 8월 17일 이른 아침, 서울 상봉동이야. 19살의 장호연 씨는 집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등산을 함께 가자며 깨웠어. 아버지와 등산을 자주 다녔던 호연 씨라, 평소였다면 흔쾌히 갔을 텐데, 이날은 좀 망설였어. 여름방학인데다 일요일 아침이라, 쉬고 싶었거든. 결국 호연 씨는 늦잠을 선택했고, 아버지는 혼자 산행에 가셨어.
그런데 호연 씨는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대. 평생의 한이 됐거든. 그 후회의 시작은 이날 오후 늦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었어.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놀란 목소리도 아니고 차분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산에서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 말에 너무 놀라서, 빨리빨리 아버지에게 가야 되겠다고 동생하고 엄마는 그렇게 해서 급하게 서둘러 나가셨고, 저는 놀라서 울었던 기억 밖에는… 큰 소리로 막 울었던 기억 밖에는…"
-장호연, 막내딸
낯선 남자가 아버지의 추락 소식을 전한 거야. 깜짝 놀란 어머니와 남동생은 부랴부랴 현장으로 향했어. 그리고 집에 남은 호연 씨는 대성통곡을 했어. 호연 씨에게 아버지는 각별한 존재였거든.
아버지는 딸바보였어. 세 아들에게는 때때로 엄했지만, 호연 씨와 언니, 두 딸에게는 한없이 자상했어. 호연 씨가 하교할 때면 아버지는 한결같이 버스정류장에서 호연 씨를 기다리셨대. 집에 늦게 들어왔다가 일찍 나가느라 딸들 얼굴을 못 보는 날이면, 아버지는 잠 든 호연 씨 베개 옆에 이걸 두고 가셨어.
호연 씨가 제일 좋아했던 캐러멜. 호연 씨는 이 캐러멜을 보고 아버지가 간밤에 다녀갔구나, 생각했어.
그런 딸바보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집에 돌아온 건, 등산 다음날인 8월 18일 새벽이야.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시신으로 집에 돌아왔어. 그런데 충격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돼. 아버지는 14미터가 넘는 절벽에서 미끄러져 추락하셨대. 더 당혹스러운 일은 장례를 준비하며 드러나. 70년대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이 아니라 집에 빈소를 차리는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방에서 다시 본 아버지의 시신이 좀 이상해. 절벽에서 미끄러졌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뭔가를 잡으려 팔과 발을 사용했을 거야.
손바닥이 너무 깨끗해. 당시 아버지가 입고 있던 등산복, 등산화, 시신 곁에 떨어져 있던 안경 등 어디에도 손상의 흔적이 없어. 아버지 장 씨의 죽음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 중에는,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 박사도 있었어.
"주먹은 이렇게 쥐고 있었거든. 그래서 억지로 그 주먹을 펴서 다 봤어요. 이 손 안에는 아무 상처가 없어 깨끗해. 손톱에 흙이 좀 배었다던가 이런 것도 없고. 실족을 했다든지 미끄러져 내려갈 때는 어떻게든지 안 내려가려고 잡는 노력이 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이 있으면 (몸에)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냐."
-조철구, 당시 검안의
전문가가 봐도 이상해. 무엇보다 석연치 않은 건, 아버지가 숨진 이유야.
"우측 측두 기저부에 직경 약 2cm의 함몰 골절을 촉진으로 확인.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이 없고, 후두부 골절 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음."
-조철구 검안의 소견서
사인은 뇌 손상인데, 추락으로는 다치기 힘든 부위래. 아버지가 발견된 곳은 계곡 아래인데, 구른 흔적이 없대. 이상하지? 이렇게 풀리지 않는 의혹을 풀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건, '현장'을 가는 거야. '답은 현장에 있다'고 하니까. 장남 호권 씨는 지인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어.
아버지의 사망 장소는, 경기도 포천시 운악산 약사봉. 호권 씨는 아버지가 추락했을 절벽 위에 서서 한참 동안 아래를 내려다봤대. 그런데 사고 현장을 본 후, 오히려 의혹이 더욱 깊어졌어.
아버지가 추락한 곳으로 추정되는 절벽 위는, 등산로가 전혀 없는 가파른 낭떠러지야. 애초에 등산로가 아니니, 절벽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게다가 이곳은 75도 이상의 가파른 경사야.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어. 이 장 씨의 죽음이 50년 넘게 이어질 미스터리가 될 거라는 걸.
▲ 의문의 목격자
모든 걸 원점에 놓고 다시 생각해 볼게. 왜 장 씨의 죽음은 실족사고로 처리됐을까? 장 씨가 떨어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거든. 41세의 김 씨야.
사고 당일, 장 씨가 산악회원들과 운악산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무렵이야. 맑고 더운 날씨에 30분쯤 산을 올라가다 보니, 산악회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그늘에서 쉬었다 가자는 목소리가 나왔어. 하지만 장 씨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며, 홀로 정상으로 향했어. 그런데 얼마 뒤 한 남자가 뒤늦게 합류해. 바로 목격자 김 씨야. 장 씨의 행방을 물은 김 씨는, 자기도 정상에 다녀오겠다며 김 씨를 뒤쫓아 산에 올랐어.
시간이 흘러, 남은 산악회원들이 점심을 먹으려던 그때. 저 멀리서 땀에 흠뻑 젖은 김 씨가 헐레벌떡 달려와 말해. "큰일 났어요!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졌어요!"라고. 장 씨의 추락사는, 이렇게 유일한 목격자인 김 씨의 증언에서 시작된 거야. 그런데 찜찜한 건 더 있어. 현장에 있었던 산악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사고 하루 전 김OO이라는 사람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장 선생님 방문하러 왔어요. 만나 뵙자고 왔는데, 장 선생님 등산 가시느냐고, 좋다고 그럼 나도 가야겠다고."
-김용덕, 산악회원
"그래서 내일 선생님 산에 가는가 하고, 그걸 제일 처음 와서 물어본 거예요."
-김희로, 산악회원
김 씨가 그 전날부터 장 씨의 동선을 확인했다는 거야. 이쯤 되면 유족들은 목격자 김 씨에게 궁금한 게 많겠지? 김 씨가 빈소를 찾아온 건, 사고 발생 3일 뒤인 1975년 8월 20일이었어. 결정적인 목격자가 중요한 진술을 하니, 유족 측은 증거확보를 위해 김 씨의 목소리를 녹음했어.
"한참 올라가니까 군인들이 두 사람 서 있어요. 선생님(장 씨) 나 여기 있다 하시면서. 거기 앉아서 차를 군인들하고 따라서 잡수시고 계신 거예요."
-목격자 김 씨의 음성
김 씨가 산 중턱에서 장 씨를 만난 건 낮 12시 10분 무렵. 장 씨는 군인 두 명과 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었대. 원래 여기 주변에 군부대가 많으니, 김 씨는 그 광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대. 그 뒤 김 씨는 장 씨와 함께 산을 탔고 약사봉 정상에 올랐어. 그리고 오후 1시 무렵 하산 길에 장 씨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고 해. 그러면서 장 씨가 너무 늦었으니 지름길로 가자며, 스스로 문제의 절벽 길로 향했다는 거야. 김 씨는 장 씨를 만류했지만, 기왕 가는 거 앞장을 섰대. 그런데 그 후에..
"(장 씨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묻자) 휘청하는 거 봤을 때 어떻게 떨어졌는지 모르고, 나무 윗부분을 잡으셨는지, 나무에 의지하고 어떻게 잘못 뛰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서 봤을 때 나무가 휘는 건 봤어요."
-목격자 김 씨의 음성
김 씨가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니, 이미 장 씨가 추락한 다음이었다는 거야. 깜짝 놀란 김 씨는 정신없이 계곡 아래로 뛰어 내려가서, 장 씨에게 인공호흡을 했대. 하지만 장 씨가 아무 반응이 없자, 산을 내려와 산악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야. 김 씨가 산악회원들과 함께 장 씨가 숨진 곳으로 돌아온 시각, 오후 2시 10분이었어.
김 씨의 주장에 의문점들이 많아. 특히 등산, 추락 목격, 구조 요청, 다시 사고 지점 이동까지, 이 모든 게 2시간 안에 가능한 동선일까? 장남 호권 씨와 지인들은 김 씨가 말한 동선을 그대로 되짚어 봤어. 이게 2시간 만에 되는지 알아보려고. 근데 불가능했어. 심지어 전문 산악인조차 실패했어. 아무리 서둘러도 3시간이 넘게 걸려. 등산 장비 없이는 절벽길 하산은 시도하기 어려워. 게다가 장 씨와 커피를 마셨다는 군인 2명의 신원도, 확인이 안돼.
▲ 접근불가
이쯤 되니, 장 씨의 추락사는, 사고가 아닌 사건일지도 모르겠어. 이 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더 있어. 장 씨가 숨진 다음날인 1975년 8월 18일. 동아일보 사회부의 장봉진 기자는 운악산 주변 마을을 탐문 중이야. 그런데 주민들이 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여.
"거긴 보름 전에 군사보호지역에서 해제된 곳이야. 길도 없는 거길 어떻게 찾아갔어?"
-주민
민간인은 접근조차 하기 힘든 장소라는 거야. 의문점을 정리해 기사를 쓴 장 기자는 추가 취재를 이어가. 그런데 사건 발생 3일째, 그 취재가 중단됐어.
"본사에서 빨리 들어오라고 야단이 났다는데, 왜 그러냐 하니까 대충 설명을 해주더라고. 그 기사 때문에,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장봉진,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장 기자는 이 일로 구속이 돼. 유언비어 유포죄라는 거야. 사건에 접근하지 못한 건, 언론사뿐만이 아니었어.
"제가 그때 했던 일이 속보계라고 해서 사건 같은 게 나면 바로바로 기초 자료를 만들어서, 상급부대로 보고하는 그 역할을 했어요. 그날이 아마 제가 현장에 도착한 게 밤 열한 시 반쯤 됐을 거예요. 다음날 밝은 다음에 현장조사에 가야겠구나, 당연히 생각을 했었는데, 거기서 바로 종결처리가 됐죠. '민간인 사고로 그런 것으로 종결지어라'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죠. 모르는 일로 해라…"
-오영, 인근 군부대 수사과 근무
종결짓고 모르는 것으로 해라…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1975년 8월 21일 오전 10시.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난 장 씨의 영결식이 명동 성당에서 열렸어.
이날 조문객 수는 1,500명. 유명 재야인사들을 비롯해 김영삼, 김대중 같은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도 참석했어. 숨진 장 씨 어떤 사람일까? 남자의 이름은, 장준하.
그를 수식하는 이름은 정말 많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장 선생'이라 불러. 심지어 아들인 장남 호권 씨까지도 '장 선생'이라 불렀대.
"우리 집에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그들이 '장 선생님 장 선생님' 그렇게 호칭을 했고, 저도 그들하고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장 선생님 장 선생님' 하게 됐죠. 아버지라는 개념보다는 선생님이다, 그게 호칭이 편해지더라고요."
-장호권, 장준하 장남
▲ 시대의 거목 장준하
1950~6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타임지와 같이, 들고 다니면 지식인으로 인정받던 책이 있어.
바로 '사상계'라는 책이야. 1953년 4월 창간된 이 잡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까지 아우르는 종합교양 월간지였어. 주요 필진은 함석현, 최인훈, 이어령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어. 이 잡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장준하 선생이야.
사상계는 창간호 3천 부가 발간 되자마자 완판. 1955년 발행 부수는 1만 부까지 늘어.
"지식인 축에 든다면 사상계 정도는 봐야 된다, 뭐 이런 분위기 때문에. 사상계를 끼고 다니고 이런 게 조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버스 탈 때 사상계를 보이게 이렇게 서 있으면 '오~' 하고 바라보고 실제로 그랬다고 합니다."
-이준영, 전 장준하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새로운 지식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 사유의 폭을 넓혀준 사상계. 다만 사상계가 사랑받을수록 껄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어. 바로, 이승만 정권이야.
왜 그럴까? 장준하 선생이 쓴 글 안에 답이 있어.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다. 백성은 언제까지나 특권계급의 밥이 될 수는 없다. 묻노니 그대들은 언제 고급차에서 내려 초막에 신음하는 백성들과 그 괴로움을 같이 한 일이 있던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그대 자신이 배고픈 쓰라림에 이 생을 원망한 일이 있는가?"
백성은 특권계급의 밥이 될 수 없다.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글귀지? 이 글을 본 이승만 정권은 불편했겠지. 그의 거침없는 비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1950년대 초 대한민국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제였어. 4년씩 두 번, 최대 8년이 가능한 거야. 하지만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바꿔. 대통령 임기가 4년 중임제이긴 한데, 초대 대통령은 예외라는 거야. 그게 바로 사사오입 개헌이야.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은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어.
그렇게 대통령을 세 번 하니, 여기저기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어. 그러자 1958년 12월 24일, 이승만 정권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을 끌어내 지하실에 감금하고,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이런 시기에 장준하 선생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 1959년 2월호 사상계에 또 글을 써. 바로 이렇게.
"무엇을 말하랴"면서. 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 할 말은 많지만 아무 말 하지 않겠다.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어. 발행 부수가 폭증해 8만 부를 돌파했어. 그렇게 사상계가 시대의 등불이 되어갈 무렵,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일이 밝았어. 12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서, 또 역대급 사건이 벌어져. 바로 '3.15 부정선거'야. 선거 당일, 자유당 표로 40% 정도 채운 투표함이 빈 투표함과 바꿔치기가 됐어. 게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문맹률이 높았거든. 투표를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슬쩍 자유당을 찍어. 심지어 정치깡패들이 자유당을 찍으라고, 유권자를 대놓고 협박하는 일도 벌어져.
경남 마산을 시작으로, 지식인, 학생, 주부 등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이승만은 물러나라!"를 외치며 시위했어. 이런 시위대를 향해, 실탄이 발포됐어. 경찰이 국민에게 총을 쏜 거야. 당시 사망자는 확인된 것만 무려 186명. 부상자는 6,000명이 넘었어. 이런 공포에도 국민들은 침묵하지 않았어. 성난 민심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어.
대한민국 국민이 스스로 역사를 바꾼 이 사건.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4.19 혁명이야. 이 4.19 혁명을 바라보는 장 선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 방송에서 장준하 선생은 이런 말을 했어.
"나이 좀 먹었다고 하는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정말 그…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4.19를 통해서 그 젊은 학도들이, 우리 후배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고, 부상을 당하고, 고생을 하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선배 되는 사람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나라를 제대로 지키고 바로잡기 못했다는데 부끄러움뿐이죠."
장준하 선생님을 부끄러워했어. 혼란한 시대에 어른이 역할을 하지 못해 젊은이들이 희생됐다는 거야. 그래서였을까.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 장 선생은 더더욱 수위 높은 비판을 이어갔어. 그리고 1962년 장준하 선생님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야. 같은 해 수상자 중에는, 마더 테레사도 있어.
그런데, 이때부터 사상계 사무실에 기막힌 일이 생겨. 분명 책은 배송됐는데, 못 받았다는 독자들이 생겨난 거야.
"그 독자들 집 앞에 형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기다리고 섰다가, 그 집 사람인 척 배달부에게서 그 책을 받아서 그거를 따로 창고에 다 쌓아둔 거예요. 한두 달 지난 다음에 책을 모두 반품시키는 거예요. 그럼 그 책을 쓸 수 없잖아요. 그럼 아버지는 당신 분신 같은 책이니까 혼자 앉아서 그 사상계 겉장을 다 뜯어내신대요. 그러고선 속지만 폐지로 보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뜯는 그 심정이 어떠셨을지 커서 생각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이른바 '사상계 죽이기'가 시작된 거야. 원래부터 넉넉하지 않았던 장 선생은 빚더미에 나앉더니, 결국 사상계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났어. 그럼, 장 선생이 박정희 정권에 굴복한 걸까? 아니. 바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어. 싸움의 방식을 바꾼 거야. 글에서 직접 정치로. 선거 결과, 압도적인 표 차이로 첫 출마에 당선됐어.
그렇게 반독재 정치 활동을 이어가던 1969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져. 두 번째 임기 절반을 넘겼을 무렵, 박정희 대통령도 개헌을 시도한 거야. 법대로라면 대통령을 두 번까지 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처럼, 자신도 예외를 만들려 한 거야. 정치인, 재야 인사,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당시 대학생이었던 광언 씨와 장 선생이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어.
"학생들한테 갖다 줄 시국 선언문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걸 만들어서 썼는데, 그러니까 결국 내가 잡혀야 되는데, 장 선생이 자기가 쓰고 자기가 인쇄해서 자기가 나눠줬다고… 나는 보니까 장 선생님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남한테 미루는 거 없어요. 앞장서고 책임지는 사람.. 그게 눈에 보이더라고. 모든 게."
-유광언, 64학번 대학생
내가 책임자니 나만 잡아가라고 한 거야. 학생들을 생각해 모든 책임을 감수한 장준하 선생. 하지만, 3선 개헌안이 가결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1972년 또다시 헌법을 바꿔. 이른바 '유신헌법'. 대통령의 임기는 6년, 횟수 제한은 없다고 한 거야.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는, 직접 선거제도 폐지했어. 대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관에서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고 해. 그 기관의 대표는 대통령이야. 대통령이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야.
장 선생, 이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겠지? 1973년 크리스마스 이브. 호연 씨는 가족과 함께 서울 YMCA 회관을 찾았어. 이곳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이야.
"저희 식구들 다 갔어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자 해서, 엄마가 같이 다 데리고 가셨어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재야 인사는 물론, 대학생들, 언론사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그 가운데, 결연한 표정으로 장준하 선생이 단상 위 마이크 앞에 서.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해.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그야말로 정면승부야. 백만인의 서명을 받아서 박정희 정권에 민심을 전하겠다는 거야. 이러니까 박정희 정권에서 장준하 선생은 눈엣가시야. 5일 뒤 12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해.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서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선동과 유언비어를 유도하면서 소위 개헌청원서명 운동을 계속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저의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일절의 불온한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 중
장 선생을 불온세력,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집단으로 몰아세우며 공개적으로 협박한 거야. 장 선생은 그래도 멈추지 않았어. 전국을 다니며 서명 운동을 주도했어. 그 당시는 인터넷도 SNS도 없던 시절인데, 단 열흘 만에 30만 명이 서명을 해.
"기자들도 서명을 많이 하고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했고, 문화 예술인들, 목사님, 신부님들도 했고… 들판의 불길처럼 번졌죠."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박정희 대통령도 멈추지 않았어. 거의 창과 방패의 대결이야.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제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선포돼. 유신헌법에 반대하면 영장 없이 체포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거야. 이로 인해 가장 먼저 구속돼 최고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년 뒤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을 장준하 선생이었어. 박정희 정권 때 장준하 선생이 구속된 건 세 번이야. 연행과 조사는 수없이 반복됐고.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장준하 선생의 죽음, 쉽게 납득이 되겠어?
아버지의 49제가 끝난 뒤 장남 호권 씨는 진실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한 1년 동안, 이걸 갖다가 좀 밝혀달라 그래서, UN에도 보내고 앰네스티에도 보내고,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제가 테러를 당하죠. '장호권이 맞지? 너 까불고 다닌다며?'"
-장호권, 장준하 장남
괴한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거야. 이 일로 호권 씨는 6개월 동안 입원해야 했어. 이후 호권 씨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무려 25년 동안. 한국에 남은 다른 가족 역시,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했어.
"저희 아버지 돌아가시고 장례 끝난 다음에 어머니가 집에 돌아가서 형제들 불러놓고 하신 말씀이, '끝까지 살아남아라' 그 얘기였어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거 이겨 내야지, 이걸 당연히 이겨 내야 해… 정말 이 악물고 견뎌냈던 것 같아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이들은 버티고 또 버텼어.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으면서.
▲ 드러나는 전말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03년. 며칠 째 같은 서류를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이 있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이야. 1999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장준하 선생 사건도 조사 대상이 됐거든. 그런데 한 보고서 안에 놀라운 이름이 등장했어.
장준하 선생이 사고가 났을 때, 누군가 집에 전화를 걸어 알렸다고 했잖아. 이 전화를 건 발신자는, 목격자 김 씨였어. 자료의 출처는 중앙정보부가 공개한 보고서야.
"동대문구 이문동에 거주하는 김OO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시 30분경 현장에 도착하였음."
-중앙정보부 보고서 중
이게 왜 이상하냐면, 지금이야 다들 휴대폰이 있지만, 70년대엔 전화기 자체가 귀했어. 특히 포천 운악산 일대에 전화기가 있는 집은, 이장님 댁뿐이야. 전화를 걸려면, 이장님의 허락이 있을 때, 행정 업무로만 걸 수 있어. 그런데, 장준하 선생 사망 당일인 1975년 8월 17일. 이 마을 이장님은 누구에게도 전화기를 빌려준 적이 없다는 거야. 공중전화도 없는 곳이야. 그럼 김 씨는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경찰보다 먼저 가족들에게 그 사고를 알릴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김 씨의 행적은 낮부터 좀 수상했어. 산악회원들과 사고 현장에 돌아온 게 오후 2시 10분 경이라고 했잖아? 김 씨는 한동안 사라졌다가, 자정 무렵 다시 사고 현장에 방문했어. 고상만 조사관은 한 가지 짚이는 게 있대.
"밤 12시경, 김 씨와 또 한 사람이 같이 옵니다. 바로 105보안부대장 한 씨. 105보안부대는 포천 약사봉 바로 옆에 있는 부대였습니다. 이장 집에서도 전화를 할 수 없었고, 그 일대 어디에서도 전화가 없는데, 했다면 어디서 해요?"
-고상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이 보안부대는, 군대 안의 정보기관인 국군보안사령부 소속의 군부대야. 이 무렵 보안사에서는 재야 인사나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수집하고, 고문과 강압 수사로 간첩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어. 김 씨의 행적에 보안사가 겹치는 게, 우연일까? 풀리지 않는 의심을 품고, 고상만 조사관은 김 씨를 만났어.
"전화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걸 다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런 적이 없고 다 모든 게 조작이라고."
-고상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목격자 김 씨는 자신이 전화를 했다는 것도, 자정 무렵 현장에 있었다는 것도 다 부인했어. 모든 게 조작이라며, 책상을 뒤엎고 조사실에서 나갔다고 해.
"본인이 겪은 일인데도 말을 바꾸고, 이해하기 어려웠죠."
-문형래,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수십 차례의 면담에도 답을 얻지 못한 조사관들.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했던 김 씨는 지난 2017년 사망했어. 그럼 이제, 사건의 진실을 알 사람은 누구? 당시 보안사 관계자겠지. 고상만 조사관은 보안사가 이름을 바꾼 기무사의 문서고에서 장준하 선생의 문서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대. 그런데 '장준하'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니 자료가 단 한 장도 없었대. 그래서 다시, 장 선생과 함께 구속됐던 사람들의 이름을 검색해 봤어. 그랬더니 관련 자료가 주르륵 나와. 장준하 선생 관련 자료만 의도적으로 삭제한 거 같아.
정보기관의 벽에 막힌 조사관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어.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이유는 정보기관의 자료 공개 비협조 때문이라면서. 그러면 1975년 8월 17일의 진실은 이대로 미스터리로 남는 걸까. 아니, 장 선생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 땅 속에서 발견한 사건의 실마리
장준하 선생이 숨지고 36년이 지난 2011년 8월. 역대급 폭우가 쏟아지던 그때, 장남 호권 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 비가 많이 내려서, 장 선생 묘지 뒤쪽 석축이 무너진 거야.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은 이장을 결정했어. 옮길 장소를 정하고 다음 해 여름, 관을 여는데,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아.
"관을 여는 순간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이거 뭐야?'"
-장호권, 장준하 장남
"그걸 보는 순간 참 이루 말하기 어려운, 너무 참담하고 참혹하고 너무 잔인해서. 어찌 이럴 수가 있었을까.. 그 심정은 그 직접, 그 처음에 발굴했을 때 그 심정을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이준영, 전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처장
37년 만에 드러난 장 선생의 유골.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는 지름 6cm의 함몰 흔적이 뚜렷했어. 그리고 다른 곳의 골절은, 엉덩이 뼈에만 있어. 호권 씨는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의 도움으로 유골을 정밀 감식하기로 했어. 엑스레이와 CT 촬영이 이어졌어.
"엉덩이 깨지고 두개골 깨지면서 어깨뼈가 안 나갔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라. 등뼈 하나도 안 나갔어요. 목도 안 나갔어요. 갈비뼈도 안 나갔어요. 그런데 엉덩이뼈는 누가 때려서 깨질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굉장히 세게 부딪혀야 깨질 정도예요. 그래서 떨어진 건 맞는데, 내 생각에는, 머리 부위를 맞고, 누군가 던졌다…"
-이정빈 법의학자, 장준하 유골 감식
결과적으로 추락한 건 맞다, 하지만 경사 70도 이상의 경사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면, 목, 허리, 어깨뼈도 부러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거야. 특히 출혈과 외상이 적다는 건, 추락 전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거야. 이 의혹이 불거진 지 37년째, 장준하 선생의 유골은 스스로 증명했어. 내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사건일 수도 있다는 걸.
1975년 8월 17일 일요일. 장준하 선생은 왜 이때 숨진 걸까? 이 무렵 장 선생은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어.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말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어.
▲ 청년 장준하
1944년 7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중국 동부 쉬저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쓰카다 부대 안이 떠들썩해. 각 내무반은 일왕이 보냈다는 술과 담배가 보급됐고, 곳곳에선 취한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이날은 중일전쟁 7주년 기념일이었어. 하지만 축제 같은 그날도 점호 시간이 돌아왔어.
밤 9시, 다른 조선인 3명과 함께 내무반 밖으로 나가는 인물이 있어. 바로 25세의 장준하. 어둠 속의 은밀한 움직임 끝에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탈영을 한 거야. 사실 그는 탈영을 목적으로 이 부대에 입대했어. 시작은 짧은 신문기사 하나였다고 해.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 신문에 짧게 나왔던 것을 놓치지 않으셨던 거죠. 굉장히 불량하고 위험한 인물들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라고 하는 짧은 뉴스였다고 합니다."
-이준영, 전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준하가 본 건, '불령선인'에 관한 기사야. 불만을 품고 멋대로 행동하는 조선인. 즉, 독립운동가들이야. 나라를 빼앗기고 수십 년이 지난 그때에도, 누군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었던 거야. 그 일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독립운동가의 존재. 심지어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있대. 이때부터 청년 준하에겐 꿈이 생겼어.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는 거야.
"그 임시 정부를 찾아가는 유일한 방도로 일본군에 입대해서 중국 전선에 배치가 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탈출해야만 나는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다…"
-이준영, 전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그렇게 동료들과 무사히 담은 넘었지만, 이게 일본군한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어. 일단 뛰어야지. 경계병에게 발각돼 총소리가 들려. 준하 일행은 무조건 달렸어. 3일 밤낮 동안 이어진 목숨을 건 탈출 끝에 간신히 한 마을에 도착해. 극심한 체력 고갈에 하나, 둘, 땅바닥에 벌렁 누워 눈을 감아. 그러다 느낌이 싸해서 눈을 뜨는데, 총을 든 남자들이 다가와. 그리고 중국어로 뭔가를 물어. 중국군인가? 일본군 앞잡이면 어쩌지? 고민 끝에 준하는, 땅바닥에 한자를 써 내려갔어.
"우리는 한국 청년. 그제 밤 일군 병영 탈출. 지금 팔로군 진영을 찾아간다."
이 내용을 읽은 상대방 역시 한자로 대답해.
"우리가 바로 그 팔로군이다."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중일전쟁 때 항일전을 펼친 부대 중 하나였어. 준하와 동료들이 마침내, 일본군의 주둔지에서 벗어난 거야. 며칠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잠다운 잠을 잤어. 하지만 편안함의 유혹에도 이들은 떠날 준비를 해. 이들의 목적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니까.
그렇게 서쪽으로 걷고 또 걷다 보니, 계절이 바뀌었어. 찬바람이 불더니 완연한 겨울이야. 그런데 준하 일행 눈앞에 어마어마한 높이의 산맥이 등장했어. 파촉령이라고,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높고 험한 산이야. 한라산의 높이가 해발 1,947m인데, 파촉령의 높이는 해발 3,000m 이상이야. 가도 가도 오르막인데, 눈까지 펑펑 내려. 방한복도, 방한화도 없어. 겨울 등산 대비는 전무해.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지고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야.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마저 흐릿해졌어.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준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어. 그러다 문뜩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해. 이게 다 내 나라가 없어서 생긴 일이잖아. 준하는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대. 그리고 곁에 있는 동료들과 한 가지를 결심했대.
"나는 내 자손에게 이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 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
다시는 이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데, 마침내 등 뒤로 온기가 느껴져. 희망의 해가 떠오른 거야. 그제서야 힘을 낸 준하는 얼어붙은 몸을 주무르고 다시 걸음을 내디뎌. 그렇게 걸음을 반복하다, 1945년 1월 31일. 이들이 한 건물 앞에 도착했어. 그런데 계단 위에 뭔가가 펄럭여. 준하는 얼어붙고 말았어.
바로 태극기였어. 이들이 태극기를 실물로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 거야. 벅찬 감격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준하와 동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어.
이들이 임시정부까지 오기 위해 걸은 거리는, 2,356km. 서울에서 베이징을 왕복하고도 남는 거리야. 그 먼 길을 오직 조국독립만 생각하며 걸은 거야. 당시 이들의 나이는 26세였어.
이건 OSS 군복이야. OSS는 미국정보기관 CIA의 전신이야. 이 무렵 OSS 중국 지부에선 비밀스러운 작전이 진행 중이었어. 작전명 '이글 프로젝트'. OSS 중국 본부의 한반도 비밀 침투 작전이야.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무력화하겠다는 거야. 작전은 이래. 우선 한반도의 주요 거점에 특수 요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그다음에 첩보 활동을 통해 유격대를 조직하고, 주요 군사 시설을 파괴해. 그러다 마지막엔,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후방을 교란한다는 작전이야.
이 작전을 수행할 요원들의 능력이 뛰어나야겠지. 침투를 위한 지옥 훈련이 펼쳐져. 사격, 폭파 같은 전투기술을 연마하고, 게릴라전에 필요한 적지 침투 공작에, 암호문 해독과 무전 교신도 숙달해야 해. 매주 평가를 받는데, 통과 못하면 바로 작전에서 제외돼. 그렇게 석 달 뒤인 8월 10일. OSS 최종 평가를 통과한 요원은 50명 중에 38명. 그중엔 청년 장준하도 있었어.
모든 준비는 끝났어. 작전을 앞두고, 준하는 유서를 썼어. 사실 이 작전은,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거든.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그런데 초조하게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상상도 못 할 소식이 전해져. 일제가 항복한 거야. 준하는 기쁘면서도,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어.
"죽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안도감? 이거는 어떤 인간이든지 다 있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광복군과 연합군이 함께 한반도로 진공해 들어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군이 됩니다. 승전국이 되죠. 그럴 때만이 올바르고 똑바로 된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작전이 실패한 거죠. 그러니까 이 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준영, 전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조국의 자주독립하길 바랐으니까. 광복 이후 그의 걱정은 현실이 돼.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고, 전쟁까지 일어나.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거라 믿었던 조국에는 독재가 이어져.
▲ 장준하의 마지막 거사
그렇게 시간은 흘러 시간은 다시 1975년. 아까 그가 이 시기에 '거사'를 준비 중이었다고 했잖아. 그는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 선고 후 수감 중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거사를 준비했을까.
"아버지 면회를 가면 '아이고 많이 컸네. 아프지 마라' 그러면서 뭐 이런저런 격려 얘기해 주시고, 그러면서 손에다가 꼭 종이쪽지를 주세요. 이거는 절대 누구한테 들키지 않고 갖고 가야 돼 하는 그런 걸 느꼈어요. 밖에 나가서 '엄마 이거 아빠가 줬어' 그러면 엄마가 나중에 그걸로 또 다 연락하고 이렇게 하셨던 것 같아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그 뒤 협심증을 앓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은 형집행정지로 1975년 1월 풀려나긴 하지만, 바깥 생활도 창살 없는 감옥인 건 마찬가지야. 중앙정보부 요원의 감시가 계속되고 있었거든. 그러던 1975년 7월 29일, 장 선생이 동교동에서 은밀히 만난 사람이 있어. 바로, 김대중. 재야 인사들 사이에선 장준하 선생이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
"긴급조치 9호를 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중운동으로서 반전 평화대회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1993년 인터뷰)
"중대한 그 성명을 8.15를 전후해서 하려고 그랬죠. 그때 마침 윤보선 씨가 휴가 가느라고 어디 시골 내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15일경엔 못 하고 '그럼 언제 하느냐?' '8월 22일경에 하자'"
-故계훈제, 민주화 통일 운동가(1993년 인터뷰)
이들의 디데이는 1975년 8월 22일. 하지만 거사 5일 전인 8월 17일에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 계곡에서 죽음을 맞았어. 공교로운 우연이자, 갑작스러운 불행일까? 장 선생의 죽음이 50년 넘게 미스터리로 남은 건, 끝끝내 공개되지 않은 자료, 기어이 침묵한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장준하 선생과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중앙정보부는,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도 유족들을 따라다녔어.
"형사들이 맨날 지키니까. 친척들도 못 와요 무서워서. 누가 집에 방문하고 이렇게 오면, '왜 여기 왔냐', '누구냐' 다 물어보고, 그랬으니까. 함부로 누가 못 왔죠."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친구란 친구는 다 도망가고. 어디 직장을 구하려고 가면 봉투를 주면서 '미안하네' 왜냐하면, 직책을 주게 되면 곧바로 중앙정보부에서 와서 닦달을 하니까. 그런 것도 우리 장준하라는 한 인간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죠."
-장호권, 장준하 장남
장준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를 자유롭게 만나는 것도 안 되고, 취업도 안돼. 가난과 고립이 일상이었어. 서른 번 넘게 이사를 가다가, 나중엔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에서 산 적도 있대. 그럼 가족들은 장준하 선생을 원망했을까? 아니. 이들을 구한 것도, '장준하' 라는 이름 석자였어.
"어느 날 집에 이렇게 있으면, 마당에 뭐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그래서 뭐야 하고 나가보면, 쌀자루가 떨어져 있어요. 겨울에 연탄이 다 떨어져서 어떡하나 걱정하면, 연탄 배달이 와요. 우리가 잘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바르게 잘 살고 있구나...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누가 보낸 걸까? 정확히는 알 수 없어. 한 가지 분명한 건, 장준하 선생의 뜻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사람일 거라는 거지. 불령선인, 불순분자, 위해분자로 불렸던 남자 장준하. 돌이켜 보면, 장준하 선생은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불온한 꿈을 꿨어. 독립운동이 폭동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자주독립을 꿈꾸고, 침묵과 억압을 강요받던 시대에도 바른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으니까.
"보통 사람은 아니죠. 저희 청년들의 마음을 달구고 굳게 만든 그런 분이었어요. 우리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대는 당신이 살아왔던 시대와는 다른, 평온한 세월이 됐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정말 꿈을 꾸신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모두가 다 행복하고 다 평화로운 그런 세상을 꿈꾸신 거 같아요. 나라를 잃어보면서 전쟁이라는 아픔을 아시잖아요. 그런 경험들이 아버지한테 이런 세상은 오면 안 된다 하는 그런 마음이지 않으셨을까요?"
-장호연, 장준하 막내딸
혼란한 시대에 부끄러움을 알았던 진짜 어른.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자 했던 장준하의 꿈은, 과연 이루어진 걸까.
지난 2013년 1월 24일, 장 선생의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에 대한 재심이 개시됐어. 그 판결문 내용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게.
"국민주권. 주권재민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근대 헌법의 기본적인 헌법 가치가 무참히 핍박받던 인권의 암흑기에 고인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회복하고 어둠을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스스로 개인적인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고인의 숭고한 역사관과 희생정신은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는 바, 고인께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이 사건 재심 판결이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에게 조금이라도 평안한 안식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주문과 같이 판결을 선고한다. 피고인은 무죄."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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