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3일 방송된 '크로마이트 작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맨 지상렬, 곽범, 배우 이영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끔찍한 6.25의 시작
때는 1950년 6월 2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살고 있는 국민학교 1학년 승혁이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버지를 애타게 찾고 있어. 며칠째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거든. 창경궁을 지나 성균관대 앞까지 왔을 때였어. 저 멀리서 흙먼지를 날리며 눈앞에 큰 트럭 수십대가 나타나.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복장을 한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어. 1950년 하면 떠오르는 사건, 바로 6.25 전쟁이 일어난 거야.
"큰 트럭이었어요. 운전병이 있고 그 옆에 장교가 있고. 위에는 사병이 한 명씩 타고 앉아 있었어요.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관단총이에요. 모자 테에 보면 인민군 동그란 마크에 별표가 있는 모자 쓰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지나가는 거 보면서 그냥 가만히 쳐다만 봤죠. 저 사람들 왜 왔나…"
-한승혁, 1943년생, 현재 만 82세
승혁이가 본 사람들은, 6.25 전쟁 당시 서울로 진격한 북한군이었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3.8선을 넘으며 전쟁이 시작됐어. 이날은 북한군이 남침한 지 3일 정도 지난 시점이야. 북한군이 미아리고개 전선을 뚫고 서울로 진입한 거야.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 상상해 본 적 있어?
서울 한복판에 펼쳐진 인공기. 포박된 채 끌려가는 시민들. 그리고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 당시 김일성의 목표는, '서울을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만든다' 였어. 북한군들은 주요 기관들을 빠르게 장악했어. 지금은 사라진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건물, 그리고 현재 서울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시 청사를 점거했어. 게다가 한국은행 지붕에는 이런 게 걸렸어.
소련 지도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야. 서울 전역에 두 사람의 초상화가 걸렸어. 지금의 KBS인 서울중앙방송국을 점령하고 이런 방송도 내보냈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보도"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 지대에 돌입하여 이승만 괴뢰 정부의 소위 중앙청을 비롯하여 서울시청, 검찰청, 방송국, 각 신문사 주요 기관들을 차지하였다.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이승만 정부를 괴뢰정부로,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해방시켰다는 거야. 당시 서울 곳곳에서는 "인민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대. 그럼 진심으로 북한 체제에 동조한 걸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팔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사상검증을 했어. 누구 한 사람이라도 "저자는 악질 반동분자요!"라고 외치면, 그대로 끌고 나와서 저작거리 한복판에서 즉시 처형을 당했어. 이게 바로, '인민재판'이야. 목적은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반동분자를 찾아내 처형하는 것.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이 아닌, 민간 지역에서도 이런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어. 그리고 이 시기에 벌어진 참극 중에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건이 있어.
서울 종로에 있는 이 건물.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야. 대학로 혜화역 근처에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이야. 전시 상황이잖아. 서울을 지키기 위해 싸운 부상병들로 가득했대. 그리고 원래 입원해 있던 민간인 환자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이런 와중에 북한군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야. 병원 측은 병원 지붕 위로 올라가 이걸 내걸었어.
적십자기. 이건, '제네바 협약'을 지켜달라는 거야. 제네바 협약은 전시 중에 군대 부상자나 민간인 보호에 대한 국제 협약이야. 아무리 전쟁 중이더라도 부상자나 민간인은 보호하자는 거야. 그럼 적십자기를 본 북한군, 어떻게 했을까?
북한군은 무자비했어.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병원 주변을 에워싸고 잠시 동태를 살피던 북한군은 병동 안으로 진입해. 그리고 부상당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 환자와 가족들까지 병실 구석으로 몰아넣었어. 그리고 사정없이 총살. 심지어는 도망가는 사람들까지 쫓아가며 사살했대. 그렇게 병원을 완전히 점령한 뒤, 병원 곳곳을 뒤지며 숨어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잡아냈어. 그리고 보일러실로 끌고 가서 보일러실의 석탄 더미에 생매장시켰다고 해.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무려 1,000여 명.
"여기 집에 있으면 총소리가 그냥 콩 볶듯이 '탕! 탕!' 쏘는 소리가 나. 그래 저게 뭔 소린가 물어봤더니 총 쏘는 소리래.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시체는 나중에 군인들이 갖다 버려 버렸어. 불태워버렸다고 그러더라고. 집하고 서울대병원하고 거리가 5분도 안 돼. 그래서 가서 보니까 아주 눈 뜨고 못 보겠어요. 제가 그때 어린 나이지만, 전쟁이 저런 거구나…"
-한승혁, 당시 서울대병원 인근 거주
지금도 매년 6월 28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이때 희생당한 분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전쟁의 아픈 역사야.
▲ 6.25전쟁 1129일
이건 <6.25 전쟁 1129일>이라는 제목의 책이야. 이 책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날부터, 휴전 협정을 체결한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책이야. 이 책을 보면 6.25 전쟁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내용을 알 수 있어.
<6월 25일 일요일>
전황 북한군 인민군 전면 남침. 새벽 4시.
남침 암호 폭풍을 전군에 하달.
유엔 안보리, 특별 회의를 개최하여 한반도에서 전투 중지와 북한군의 38도선 철수 결정
<6월 29일 목요일>
미 항공모함, 한국해협에서 북한군 상륙 경계.
미 해군 부대, 북한의 동서해안에서 함포 사격.
<7월 1일 토요일>
미 지상군 선발대 부산 도착.
<8월 29일 수요일>
F86 세이버 제트기 20대, 신의주 부근 상공에서 MIG 15 제트기 약 40대와 공중전.
8월 29일 이날은, 스무 살이 된 젊은 미 공군 장교가 처음 전쟁에 참전한 날이야. 불과 5일 뒤 이 젊은 장교는 전투기를 타고 함경북도 일대를 정찰하다가, 북한군의 대공포에 피격당했어. 이대로 가면 적의 진영 한가운데로 떨어지게 돼. 이 젊은 장교는 낙하산을 이용해 비상탈출을 한 뒤, 극적으로 아군 진영에 착지했어. 만약 우리가 이날 이 젊은 미 장교를 잃었다면, 인류 역사는 크게 뒤바뀔 수도 있었어.
낙하산을 이용해 착지하고 15년 뒤인 1966년. 이 젊은 장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 착지했어. 바로 이 사람이야.
인류 역사상 달에 최초로 착륙한 닐 암스트롱. 그도 사실 UN군 참전 용사였어.
이처럼 6.25 전쟁에는 우리 상상 이상으로 수많은 UN군이 참전했어. 6.25전쟁에 참전한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미국, 영국 등 전투 지원국만 16개국. 거기에 의료지원 6개국, 물자지원 38개국. 합치면 무려 60개국이 UN군 이름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어. 반대 진영으로는, 중국, 소련 등 북한을 지원하는 나라 총 10개국이 참전했어. 당시 전세계 국가가 93개국이었는데, 그 가운데 70개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거야. 이건 UN군 조직 이래로 대규모 무력을 행사한 유일한 사례라고 해.
근데, 이렇게 방대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은 어떻게 쓰인 걸까? 직접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어.
"한 2~3년 걸렸을 겁니다. 제가 직접 편저했으니까. 지금 6.25 치른 지가 75년입니다. 45년생만 돼도 6.25가 뭔지 모를 거 같아요. 5살 전이니까. 그런데 우리 세대가 가고 나면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지 않느냐. 그것을 우리 세대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와 같은 불행한, 비참한 전쟁이 있었으니, 다시는 이런 전례를 밟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가르쳐줘야 되겠다 해서 그런 의미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중근, 만 84세, 대한노인회 회장
▲ UN군이 된 사람들
다시 6.25 전쟁 상황으로 돌아가서 광복절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8월 16일 수요일>
미 제1기 병사단, 대구 북서쪽 낙동강의 북한군 200명 격퇴.
당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어. 여기서 무너지면, 한반도 전체가 북한군 손아귀에 넘어갈 수도 있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까지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선에 뛰어들었어. 이렇게 국군과 UN군이 연합해 사력을 다한 덕분에 대구 이남 지역을 겨우 사수할 수 있었어.
당시 대구에 살던 19살 영봉이는, 8월 16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길이었어. 이날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집령이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웬 남자들이 영봉이를 불러 세워.
"자네는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일단 뒤에 있는 트럭에 타."
다짜고짜 트럭에 타래. 그리고 거기엔 영봉이랑 비슷한 또래 학생들로 가득해. 영봉이가 탄 트럭이 출발하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도착해서 보니 바다가 보여. 여기가 어딘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이번엔 서둘러 배에 올라타래.
"길에 가는 남자들은 학년과 연령 불문 없이 무조건 검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관 아저씨가 '학생 이리 와' 하니까, 제가 '왜 부릅니까?' 하니까 군대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당신들은 앞으로 UN군이 되어 모든 활동을 UN군과 똑같이 한다'… 그날 저녁에 부산에 가서, 부산에서 또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 항에 내려, 또 거기서 전철 타고 후지산에 있는 미 7사단의 훈련 캠프에 합류했습니다."
-류영봉, 1932년생, 현재 만 93세
영봉이를 포함해 313명의 남자가 갑자기 UN군이 된 거야. 후지산 아래에 있는 캠프에서 미군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대. 당시 모습이야.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에서 복무하고 있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도시와 논에서 바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어요. 미군은 한국인들에게 약간의 훈련을 시키고 군복을 주었습니다."
-로버트 알사, 미 해병 7사단 31연대
"우리한테는 군화도 크고 한국 사람들 발이 작잖아요. 군화가 크지요, 옷도 크지요. 말아 올려서, 걷어 올려서 모든 훈련을 미군들과 똑같이 받았어요. M1(소총)이요 내 키만 한데 너무 부담스러워요. 들 것 거머쥐지요. 또 M1 총 거머쥐지요. 또 철모 쓰지요. 배낭 거머쥐지요. 그래도 다 참고 견뎌냈어요."
-류영봉, 현재 93세, 미 7사단 캠프 징집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 그래도 한국 훈령병들은 악착같이 훈련에 임했다고.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대면, 우리나라 훈련병과 미군들, 피지컬 차이가 엄청 낫겠지. 그런데 왜 UN군은 한국 병사들을 차출한 걸까.
"미군들은 한국 지리도 모르죠. 또 어떤 모습이 북한군인지 남한군인지 구분도 못하고. 북한군이 피란민 속에 섞여 들어가 미군들 향해 총을 쏩니다. 그래서 미군들이 많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미군들의 전투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한국군을 징집해라…"
-류영봉, 현재 93세, 미 7사단 캠프 징집
산이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주변 지리를 잘 아는 길잡이가 필수였던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언어. 말이 안 통하니까. 당시 UN군은 옷에 이런 걸 붙이고 다녔대.
"나는 미국 사람입니다. 나는 한국말을 못합니다. 나의 모든 불행은 음식과 거처와 보호를 당신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안전을 도와주고 우리 미국 사람 있는 곳으로 인도할 사람에게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이걸 '블러드 칫(Blood Chit)'이라 부른대. 말이 안 통하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주변 민간인들에게 목숨을 살려주면 보답하겠다고 하는, 일종의 생명 청구서 같은 거지.
그리고 6.25 전쟁 중엔 또 하나의 아주 큰 골칫거리가 있었어. 언어가 같다는 거야. 북한군이 우리의 교신 내용을 엿들으면, 너무 쉽게 정보가 유출되는 상황이야. 그때, 우리나라의 한 해병대 대위가 묘안을 생각했어. 이건, 실제 교신 내용이야.
"글로 쭉 가당 보믄 큰큰헌 소낭이 나옵니게. 그듸서 나단펜으로 돌아상 돌으멍 돌으멍 갑써."
"알아수다. 온 덴 헌 건 어떵 된수과?"
바로, 제주도 사투리야. 이 무전 내용을 표준어로 바꾸면 이래.
"그리로 쭉 가다 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나옵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빨리 달려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온다고 한 건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6.25 전쟁에 참전한 해병 중엔 특히 제주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이유로 제주도 사람들을 통신병으로 많이 배치했다고 해.
다시 영봉이 얘기로 돌아와서, 영봉이는 일본에서 3주 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정식으로 배치됐어. 소속은 미 육군 7보병사단 17연대 의무 부대. 보직은 전투 위생병.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을 수송하며 군의관을 보조하는 업무를 해. 그때 받은 군번은 'K1101755'. 미군들이 한국인을 구별하기 위해 군번 앞에 'KOREA'를 뜻하는 'K'를 붙였는데, 이 군번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 이때 훈련병들 외에는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K'로 시작하는 군번이 없대.
영봉이 몸 담았던 부대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어.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직역하면, '미국에 증강된 한국군'이란 뜻이야. 미국에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바로 '카투사(KATUSA)'야. 영봉은 카투사 1기였어. 우리가 아는 그 카투사가 여기서 시작된 거야.
영봉을 포함해 카투사 1기가 받은 부여받은 첫 임무는 바로, '크로마이트 작전'이야. 크로마이트 작전에 대해서는 이따 다시 설명할게.
▲ 작전명 크로마이트
영봉과 카투사 1기 대원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날은 8월 16일. 그날 밤, 영봉과는 반대로 한 척의 배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 목적지는 인천 영흥도. 어둠을 틈 타 은밀하게 배가 정박하고, 몇 명의 사람들이 빠르게 내리기 시작해. 선두에 있는 건, 26살 연정.
연정은 안주머니에 한 장의 문서를 소중히 품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해. 그가 도착한 곳은 또 다른 함선이야. 곧장 배에 올라타 함장 이용남 중령과 만났어.
"연정,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요. 다들 당신이 행방불명된 줄 알고 있어."
사실 두 사람은 해군 동기였어. 근데 함장은 어쩐지 연정의 등장이 꺼림칙한 눈치야. 연정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가 1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한데, 차림새 또한 미군 복장이었거든. 하지만 연정에겐 시간이 없어. 설명도 없이 곧장 함장에게 문서를 건네.
<극비 명령서>
이 특수 공작대에 전면 협력하라.
-해군 참모총장 소장 손원일
이 문서 하나 보고, 연정을 믿을 수 있을까? 6.25 전쟁에는 첩보전도 치열했어. 연정이 미군으로 위장한 간첩일 수도 있잖아. 함장은 연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어. 그런데 이 문서, 진짜 극비 명령서가 맞았어. 그럼 연정의 정체는 뭐였을까? 바로, 미군 첩보부대 비밀 요원이었어.
원래 연정은 1949년까지 9월까지 대한민국 해군 소속으로 동해안 묵호에 있는 부대에 경비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대.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이런 명령이 내려왔어.
"지금 즉시 경무대로 갈 것"
경무대는, 청와대의 옛 이름이야. 그리고 이 사람을 만나.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연정과 만나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
"아무도 모르게 동경의 GHQ로 가주게. 물론 승낙하여 주겠지?"
GHQ.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를 뜻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을 연합군 사령부가 통치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곳의 사령관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 한국 전쟁의 영웅이지.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인 비밀요원 한 명을 연합군 사령부에 파견해 달라 했는데, 그 적임자가 바로 연정이었던 거야. 그렇게 연정은 연합군의 비밀요원이 된 지 1년여 만인 8월 16일 밤, 맥아더의 극비 임무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당시 연정이 속한 첩보부대 요원들이야.
이들이 가장 먼저 개시한 첩보작전은 어떤 거였을까? 이들의 행보가 아주 뜻밖이야. 동네 꼬마들을 불러 모아놓고 갯벌에서 같이 노는 게, 하는 일의 전부야. 사실 이건, 작전에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전략이었어. 아이들이 갯벌에서 놀게 하며 물길을 확인하고, 인천 앞바다의 해안선과 수심을 파악하는 거야. 아이들이라면 북한군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진 이후에는 민가로 잠입해 주민들을 하나씩 포섭하기 시작해. 처음에는 경계가 아주 심했대. 주민들의 의심을 풀기 위한 방법은 바로 전투식량. 전쟁 중 민가에서 가장 필요한 게 식량이잖아. 6.25 전쟁 후에는 먹을 게 하도 없어서 UN군이 남기고 간 전투식량을 물에 불려 먹었다고 해.
"요새 젊은 사람들은 뭔 소리인지 모르는데 '꿀꿀이 죽'이라는 게 있었어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C-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이라든가 그런 걸 갖다가 한국 사람들이 재탕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걸 팔아요 길에서. 너나 나나 할 거 없이 사 먹었어 C-레이션을. 사람이 연명한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느꼈죠. 그때는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다들 비참하니까."
-한승혁, 1943년생, 현재 만 82세
이런 식량을 주고 정보를 얻는 전략을 펼친 거야. 이렇게 매일 물길의 흐름을 체크하고, 북한군의 병력과 동태를 확인하는 사이, 점점 작전의 디데이가 다가오고 있었어. 디데이는 9월 15일. 작전명은, '크로마이트'.
크로마이트, 무슨 뜻일까? 크롬이라는 금속은 단단하고 잘 녹슬지 않아. 크로마이트는 바로 이 크롬을 얻을 수 있는 광석이야. 사실 크로마이트라는 이름은, 작전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어. 역설적으로, 오히려 작전의 보안 유지를 위해 일부러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름을 붙인다는 거야. 그리고 이 작전을 다른 말로는 '인천상륙작전'이라 불러. 이건 들어봤지? 세계 전쟁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작전이야.
▲ 인천상륙작전
다시 당시 전선 상황을 살펴볼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전선 상황에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대구, 부산까지. 계속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 북한군은 계속해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며 전력을 다해 몰아쳤어. 이제 남은 도시는 대구, 경주, 마산, 부산뿐이야. 그런데 여기까지 함락되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어.
이때 맥아더는 전세를 뒤집을 묘안을 생각했어. 바로 '적의 허리를 끊어버리자'는 것. 평양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있는 적의 보급로를 중간에서 차단한 뒤 적군을 양방향에서 궤멸시키려는 전략이었어.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서 남쪽에 내려와 있는 북한군을 차단한다, 전 세계 전쟁사에서 그 정도로 거대한 병력이 완벽하게 차단돼서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해요. 우리나라도 지형상 그게 될 수가 없어요. 인천상륙작전은 유례없는 시도였고, 군사 작전에서 남이 해보지 않는 유례없는 시도를 한다는 걸 정말 높이 평가합니다."
-임용한, 역사학자
원래 인천상륙작전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어. 8월 19일의 도쿄. 맥아더 사령관과 미 합참부의 수뇌부들이 모인 군사 작전 회의가 한창이야. 그런데 분위기가 좋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두고, 맥아더와 미 해군 참모총장이 대립 중이었거든. 그 이유는,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 때문이야. 최대 9미터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힐 만한 큰 편이야. 해군 참모총장은, 조수가 바뀌기 전까지 충분한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밀물이 빠지고 썰물이 되면 최대 9시간 동안 후방 지원이 어렵다면서.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야. 인천항을 둘러싸고 있는 해벽의 높이도 9미터나 됐어. 이건 10미터가 넘는 사다리가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거지. 미 육군참모총장도 "인천이 어떤 곳입니까? 서울에서 가장 인접한 외항입니다. 북한군이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것 같습니까?"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어.
"상륙작전은 어떻게 보면 기본적으로 다 불가능한 작전이에요. 이게 말이 안 돼요.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 없이는 수행하기도 힘들고. 진짜 어려움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상륙작전을 1차, 2차로 나눠서 하게 돼 있어요. 만조 때 1차 들어갔다가 빠졌다가 다시 밖에서 기다렸다가 들어가는 거죠. 이런 2단계 상륙작전은 역사에 없어요."
-임용한, 역사학자
하지만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어. 이유는 간단해. 전세 역전의 유일한 카드는 적 보급로의 허리를 끊어서 차단하는 게 중요한데 그 조건에 맞는 유일한 장소가 서울뿐이거든. 평양에서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보급 경로는, 무조건 서울을 거칠 수밖에 없으니까.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의 본래 목적을 잃지 말자는 거지.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고민은, 소형 보트로 상륙할 건지 상륙작전용 함정으로 상륙할 건지요.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소."
-맥아더 장군
그의 이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어. 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는 약 50회에 달하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이 있었거든. 맥아더의 강력한 주장에 미 국방부와 합동 참모부는 고심 끝에 9월 8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했어. 디데이는 9월 15일. 맥아더는 9월 10일 전 함대에 출격 명령을 내려. 요코하마, 부산, 고베 등 각지에서 출발한 함대들이 인천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그리고 작전 개시일 하루 전인 9월 14일 새벽. 연정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한 무인도에 도착했어. 섬의 이름은 팔미도. 아주 작은 섬이야.
군함이 정박할 수도 없고, 지상군이 내린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어. 그런데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선점하는 게 필수라는 거야.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게 있었거든.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팔미도에 있었던 거야. 이 등대를 장악하면, 아군에게 유리한 대로 뱃길을 밝힐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점거 과정에서 총격전이 일어날 경우, 근처에 있는 인천항에 주둔한 북한군이 몰려올 수도 있어.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해. 그런데 연정이 등대 아래에 도착해 살펴보니, 예상과 달리 북한군 6명 만이 등대를 지키고 있어. 이들이 북한군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마침내 팔미도 등대에 불이 환하게 켜졌어. 인천 상륙을 위한 길이 열린 거야.
상륙이 개시된 건, 9월 15일 새벽. 연정이 지키고 있는 등대 양 옆으로, 무수한 상륙정들이 진격하기 시작해. 7개국에서 파견한 군함의 수가 무려 261척. 작전에 투입된 상륙 병력은 7만명. UN군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상륙작전이 펼쳐진 거야.
천여 명의 1차 선발대가 상륙정을 타고 월미도 해안으로 돌진해. 그리고 200여 개의 사다리로 기어 올라 방파제를 넘어.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 썰물로 바뀌기 전에 작전을 끝내야 해. 선발대는 신속하게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어.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어. 다음 밀물이 될 때까지 약 12시간 동안 선발대는 고립된 채로 버텨야 해. 선발대는 '선공필승' 전략을 펼쳤어. 먼저 공격하자는 거야. 결과는 대성공. 그리고 약 12시간 후인 오후 5시 30분. 주력 부대가 차량과 전차, 대포 등과 함께 인천항으로 물밀듯이 몰려왔어. 전쟁 발발 이후 UN군이 처음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바뀐 순간이 바로 지금이야.
"전선 구조로 봐서 인천상륙작전은 상황적으로 또는 자연조건으로 봐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봤는데, 맥아더 장군의 특수한 작전이 주요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9m나 되고, 아주 위험한 지역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천 상륙을 안 할 걸로 북쪽에서도 생각했던 것 같은데, 과감한 작전에 성공했고, 인천상륙작전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수복이 가능했고. 대한민국을 지킨 작전 중 가장 명작전이었다…"
-이중근, 대한노인회 회장
인천항과 인천 남동부, 그리고 월미도에 상륙한 UN군은 본격적으로 인천 수복 작전을 개시했어. 이들은 세 방향에서 나란히 서울을 향해 진격을 시작해. 그런데, 북한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지가 않아. 당시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어려울 거라 판단한 거야.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성격상 상륙작전을 할 거라는 거는 알고 있었고. 상륙작전을 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징후도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상륙작전을 어디로 할 거냐는 건데, 김일성이 '인천'설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인천에 2만 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그 2만 명의 거의 90%를 낙동강 전선으로 또 투입해 버렸어요. 그래서 인천의 방어 병력이 극도로 약화됐던 거죠."
-임용한, 역사학자
다음날인 9월 16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모습을 드러냈어. 군용보트에서 내린 맥아더는 해안가에서 한 무리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리고 힘차게 어깨를 두드린 뒤 손을 내밀며 "당신들, 아주 잘했어. 이번 작전의 성공은 바로 자네들 덕분이야"라고 말해. 팔미도의 등대를 밝힌, 연정과 첩보 부대원들이야.
한편 그 시각,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에 온 대규모 지상 병력 중에는 비장한 마음으로 전쟁에 임한 사람들이 있어. 바로, 3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작전에 투입된 카투사 1기.
"보병부대, 해병부대가 먼저 상륙합니다. 소총 부대원이 다치잖아요? 부상당했잖아요? 그럼 '메딕', '위생메딕' 부릅니다. 그래서 그 다친 부대원을 끌고 내려와서 전장 밖까지 나오라 그래요. 네 명이 들것을 받쳐 들고 나오잖아요. 적에게 노출이 많이 됩니다. 그 바람에 위생병이 많이 당했어요."
-류영봉, 93세, 카투사 1기, 위생병
영봉의 보직은 위생병.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후방에서 치료만 할 거 같잖아? 다친 전우들을 실어와야 해서, 최전선까지 진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리고 다니는데, 맡은 임무는 부상병의 호송이잖아. 반격을 할 수 없으니, 그 과정에서 다치는 위생병들이 많았대.
▲ 서울을 수복하라
인천상륙작전은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가 됐어. 상륙 3일째인 9월 17일, 인천 시가지의 잔존 북한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으면서 UN군은 인천을 완전히 수복했어. 그럼 UN군의 다음 임무는 뭘까? 수도 서울로 진격하는 거지. 하지만 UN군은 또 다른 장벽에 부딪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서울의 상징 한강. 한강은 세계적으로도 폭이 넓고 큰 강인데, 유속까지 빠른 편이야.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여기서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북한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수도 있잖아. 바로 밀어붙여야 해.
당시의 서울 지도야. 북한군은 안양천을 기점으로 영등포 방어선을 구축했어. 지금의 목동 SBS 쪽에 UN군이 있다면, 안양천 건너편 문래와 당산 쪽으로 북한군이 있는 거야. 북한군도 필사적인 방어에 나섰어. 북한군은 전차 부대를 앞세워 밤새 저항했어. UN군은 즉시 공군 지원을 요청했고, 포병대와 항공대 지원 하에 끝내 안양천을 도하하는데 성공하고, 영등포 시가에 진입했어. 그리고 그 사이, 미5해병 연대와 국군 해병대는 북쪽으로 진격. 덕양산 행주산성을 점령했어. 점점 북한군을 둘러싸고 압박하기 시작한 거야.
영등포와 행주산성 쪽을 장악했으니, 이제 서울 중심부 방향인 동쪽으로 가야겠지. 이때 북한군은 뭘 하고 있었을까? 서울 시민들을 동원해서 서울시내 교차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박격포와 기관총, 저격수를 배치시키며 시가전을 준비했어.
UN군은 또 다른 장벽에 가로막혔어. 바로 산. UN군의 위치는, 연세대를 중심으로 서쪽 서대문구 일대야. 와우산, 연희고지, 안산을 잇는 방어선에 막힌 거지. 북한군은 산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UN군을 내려다보고 있어. 게다가 그 앞은 시야가 뻥 뚫린 곳이라, 산을 오르려고 시도하면 다 보여. 아군에 불리한 지형이지. 하지만 UN군의 선택은, 정공법이었어. 수류탄을 이용해 적의 시야를 분산시킨 뒤, 전방으로 돌격하는 작전이야.
딱 봐도 무모해 보이는 고지전. 그래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만큼 서울 탈환이 간절했던 거야. 하지만 이 작전은, 실패였어. UN군과 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채 100미터도 진격하지 못했어. 그런데 그때, 후방에서 굉음이 들려왔어. 공군과 야포 부대에서 지원을 온 거야. 이에 지상 병력들도 힘을 내고 다시 한번 고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긴 시간의 혈투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고 고지 점령에 성공했어.
순식간에 서울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북한군은, 서울 사수 방침을 포기하고 후퇴하기 시작해. 9월 27일에는 삼각지와 남대문 일대에 잔적들을 궤멸시키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해.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을 완전 수복하는데 성공했어.
"군인들이 길을 한 번 지나가면 그때부터 시민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1차로 갈 때는 시민들이 안 나옵니다. 겁이 나서 안 나옵니다. 숨었던 피란민들, 시민들이 나와서 우리한테 태극기 흔들고 반가워하고 그랬죠. '만세!' 하면, 우리도 '만세!' 하고 손 흔들고. 시민들이 좋다고 계속해서 흔들고 있죠. 아직도 기억납니다."
-류영봉, 인천상륙작전 참전 용사
▲ 1129일 전쟁의 상흔, 꼭 기억해야 할 희생
다음날인 9월 29일 정오. 중앙청 앞에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환도식이 거행됐어.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되찾아온 거야. 그 뒤로는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어. 국군과 UN군은 북진을 거듭한 끝에 38선을 넘어 압록강 전선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아. 이때부턴 후퇴와 진격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1953년 7월 27일 휴정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그 과정에서 전사한 UN군과 국군의 수는 무려 18만여 명. 민간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어. 거리엔 상이군인, 피란민, 고아가 쏟아져 나왔지. 혹시 '앙카라 학원', '보화원'이라고 알아? 각각 튀르키예와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우리나라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만든 보육시설이야.
그중 앙카라 학원에는 '아일라'라는 6살 여자 아이가 있었어. 아일라는 이곳에 온 날부터 맨날 울었대. 아빠가 보고 싶다며. 아일라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빠는, 튀르키예 군인 슐레이만이었어. 어떻게 된 일일까?
슐레이만은 북한군의 습격으로 온 주민이 몰살당한 마을을 지나던 중 혼자 살아남은 여자 아이를 발견했어. 그리고 튀르키예군 진영으로 데려와서 전쟁 속에서도 1년 반동안 함께 지냈어. 튀르키예 말로 달을 뜻하는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친부녀보다 더 각별하게 지냈대.
그러던 중 1952년 봄,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져. 슐레이만에게 고국 귀환 명령이 떨어진 거야. 슐레이만은 아일라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자신의 가방에 아일라를 숨기고, 어떻게든 데려가려 했지만, 결국 적발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어.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일라에게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슐레이만은 떠났어. 그 뒤로 둘은, 어떻게 됐을까?
"한국전 참전 당시 '아일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작은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슐레이만은 어느덧 백발의 할아버지가 됐어. 그리고 2010년 4월, 그는 60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을 찾았고, 꿈에 그리던 아일라와 재회했어.
"왜 이제 왔어요. 왜 이제 찾으셨어요. 진작에 찾아주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슐레이만과 아일라는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어.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6.25 전쟁. 그날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전쟁의 아픔을 이렇게 기억해.
"사람이 죽는 걸 하도 많이 봐서, '전쟁 나면 안 되는구나' 그거는 평생 생각하고 있지."
-한승혁, 1943년생, 현재 만 82세
"내가 총알 피하는 게 아니라, 이 총알이 나를 피해 줬기에 나는 살았다고 봅니다. 전쟁은 삶 아니면 죽음입니다."
-류영봉, 1932년생, 현재 만 93세
"서울 시내만 하더라도 참혹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손수레 끌고 다니고 자전거 끌고 다니고 하는 정도로, 참혹 정도가 아니라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전쟁 가운데서 살아 있어서 오늘 저도 존재합니다. 그 무서운 전쟁들 젊은 사람들 대비하는 길은 힘이 있어야 대비하지, 전쟁이 있었다는 기억력 만으로는 전쟁이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중근, 1941년생, 현재 만 84세
'6.25전쟁 1129일'이라는 책을 쓴 저자 이중근 회장님. UN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해 책까지 집필했잖아?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에 가보면, UN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UN군 참전 기념비가 있어. 그 기념비도 이 분께서 기부하신 거야.
'UN데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UN의 창설을 기념하는 날인데, 6.25에 참전해 준 용사들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1975년도까지는 우리나라의 국가공휴일이었대.
"그때 UN군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우리 힘만으로는 대한민국 현재가 없을 수도 있다. 고마운 생각에 UN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중근, 대한노인회 회장
6.25전쟁이 발발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1950년, 10살에서 지금은 85세가 되신 이중근 회장님이 전쟁을 겪은 마지막 세대로서 후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의 말이 있대.
"잊지 말자. 6.25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절대로 그와 같은 참화를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된다. 준비 없이 방관했다가는 아무 때나 당할 수 있고. 평화라는 용어는 강한 힘이 있는 자에게 평화가 유지되지, 약자에게 보장된 평화나 평등한 권리는 없다. 난 그리 생각합니다. 6.25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60개국이 돈과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새롭게 뿌리내려서 우리가 지금 코리아 컬처 그 자체가 60개 국가 교류할 좋은 기회가 됐고. 대한민국 국민이 현재 존재하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UN데이가 기념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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