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8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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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1대100으로 싸워 이겨"·"천왕 만큼 인기"…日 열도 뒤흔든 두 영웅 최배달X역도산

강선애 기자 작성 2025.07.18 12:19 조회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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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전설의 코리안 파이터-최배달 VS 역도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여행 크리에이터 원지, 개그맨 허경환, 배우 송진우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바람의 파이터

오늘의 이야기는, 역사를 새로 쓴 전설의 파이터들, 최강 고수 두 사람의 이야기야. 한 사람은, 1대 100으로 싸워서 이긴 남자야. 그는 "힘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는 말을 좋아했어. 또 다른 사람은, 거구의 서양인들을 수없이 제압한 남자야. 그는 "하여튼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해.

이 두 사람이 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 그 이야기를 시작할게.

때는 1960년 일본이야. 당시 일본 청소년들 사이에 퍼진 유행이 있어. 바로 손날로 맥주병 깨기야. 그것도 병 목 부분만 깔끔하게. 이 어마 무시한 유행의 진원지는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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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오야마 마스터츠.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최배달. 일명 '바람의 파이터'야. 세계 각국의 무술 고수와 맨주먹으로 싸워 이긴 사나이. 괴력의 소유자이자 실전 무술의 대가야. 송판 격파는 기본이고, 손으로 돌도 깨고, 맥주 병목도 손날로 깨. 심지어 최배달은, 맨몸으로 이것과도 싸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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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소야. 무게만 450kg이야. 아무 보호장비 없이 맨몸으로 싸움소와 대결했어. 초인적인 완력으로 소를 제압하고, 소뿔을 손날로 쳤어. 이 싸움의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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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한 투도관에 그 결투의 증거가 남아있어. 투도관은, 격투가들의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곳이야. 이 투도관의 한 켠에, 최배달의 물건을 모아놓은 코너가 따로 마련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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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최배달이 과거 소와 싸울 때 자른 뿔이에요. 실제로 이걸 해낸 건 격투기 역사상 최배달 한 사람뿐이에요. 격투기 역사에서 맨몸으로 자신의 힘을 증명한 최배달이라는 사람의 위대함이 뿔의 단면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투도관 운영자

지금은 동물보호를 생각하면 안될 일이지만, 그땐 일본에선 인간의 강함을 증명하려는 방법이었어. 그럼 저 소 뿔, 얼마나 할까? 1,000만 엔, 한화 약 1억 원 정도 한다고 해. 이 소 뿔을 구매한 사람이 있고, 구매자 뜻에 따라 이 곳에 전시된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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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지금까지 다룬 물건 중에서는 가장 비싸지만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약한 분이 계셨고요. 이미 판매는 완료됐어요. 살아있는 동안 이걸 간직하고 싶다고 하신 분이 구매하셨어요."

-투도관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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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최배달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강해서만은 아냐.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이 여성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해. 미군들은 덩치가 크잖아. 일본 남성들은 그걸 보면서도 나서지 못하는데, 어디선가 최배달이 나타나서 여성들을 구해줬다는 거야. 그의 좌우명,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가 딱 어울리지. 최배달은 당시 일본 청소년들의 우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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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볼 때 최배달은 상상을 초월한 슈퍼맨이었고, 초인간적인 무도가였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최배달이 한다면 그냥 따라서 하죠. 예를 들면 100엔 동전, 한국에서 말하면 100원짜리, 그것을 이렇게 손가락으로 구부렸어요. 이런 것은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죠. 그런 걸 청소년들은 나도 하겠다, 해서 유행 많이 했어요. 그리고 극진가라데라는 하나의 가라데 제도를 만들고 그걸 세계화 시켰어요. 극진가라데라는 것은 새로운 가라데였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의 전통적인 가라데가 밀린 거죠 사실상."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일본계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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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은 극진가라데의 창시자였어. 맨손으로 겨루는 실전 무술인데, 공격 강도가 아주 세. 상대를 K.O.시킬 목적의 힘과 속도로 진심을 담아 맞서는, 풀 콘택트 방식의 무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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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마쓰이 쇼케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문장규입니다. 극진가라데는 격투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극진가라데는 그전까지 없던 직접 타격을 가해 쓰러뜨리는 규칙을 채용했지만, 그런 점에서 부상은 자연스러우며 몸에 무리가 가기도 합니다. 실제로 싸우는 실전, 그리고 실제로 행하는 실전. 이 두가지 의미를 합쳐 실전 가라데라고 하는데요. 이 두가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장규, 극진회관 관장, 재일교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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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부분을 단련하면서 발전하는게 극진의 수련이거든요. 선수생활 할 때는 이 밑에 감각이 없었습니다. 애들 줄 세우고 1시간 동안 맞았습니다. 세계 대회 나가면 너무 세니까요. 한 1~2년 배우다 보면 어느 정도는 맞아지고요. 맞는 게 즐거워지면 그때부터 기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냥 맷집으로만 치고받는 운동이 아니고요. 엄청나게 공격과 방어의 기술적인 공방이 많거든요.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뭐든 다 쓴다고 보시면 됩니다."
-허동호, 극진가라데 사범

▲ 조선 출신 일본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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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일본을 휩쓴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어. 이 사람이 TV에 나오면 도시가 한산해져. 일본에 집집마다 TV가 없을 시절이었는데, TV가 설치된 역 앞 광장에 무려 2만 명이 몰려 들었어. 시청률은 무려 98%. TV를 켠 사람은 전부 다 그 사람만 보고 있는 거야. 대체 누구였길래?

거구의 서양인을 상대로 들어 메치기하는 사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가는 상대방들. 일본 열도를 열기로 몰아넣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설 역도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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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필살기는, '가라데 촙'이야. 손날로 목을 내려치면, 상대는 저기까지 날아가. 당시 일본에는 "천왕 다음에 역도산"이라는 말이 있었어. 천왕급의 인기스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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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신 같은 존재죠. 저는 그 사람이 일본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역도산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고들 합니다.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같은 훌륭한 후계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도산 같은 그런 사람은 이후에도 나오지 않았죠."

-고이즈미 에츠지, 프로레슬링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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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이라는 분들은, 일본인의 영웅이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격투기로서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역도산, 그리고 최배달. 둘이 기둥이라고 할 수 있고요. 1945년 후에 한류의 시작은 역도산과 최배달입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일본계 한국인

사람들은 이런 상상을 하곤 했어. "최배달 대 역도산.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런데 어느날, 상상이 현실이 됐어. 두 사람이 한껏 흥분한 채 마주보고 서 있는 날이 온 거야. 일촉즉발의 위기. 이 대결, 누가 이겼을까? 그 이야기는 조금 후에 다시 할게.

그럼, 최배달과 역도산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파이터는 왜, 일본에서 파이터가 됐을까? 먼저 최배달이 얼마나 셌는지, 그를 가까이에서 본 증인을 만나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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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의 장남이고요,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저도 어디 가서 무술 계열은 금방금방 습득하는 거 같아요. 별로 어렵지 않아요. 합기도를 배우든 킥복싱을 배우든 그렇게 어렵지 않고요. DNA가 운동 쪽에, 특히 격투기 쪽에 치우쳐져 있는 건 맞죠. 둘째가 주짓수를 하는데, 주짓수를 배울 적에도 그렇게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고등학생 시기) '아버님 제가 무술 쪽으로 나가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제 길을 찾아가는 게 좋을까요?' 그랬더니 '너 정도는 빗자루로 쓸 만큼 많아' 하시더라고요. 집에 샌드백이 있었어요. 그게 거의 80kg 나가니까요. 헤비백이어서 아무리 발로 차도 이동만 하지 잘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막 치는데, '그렇게 치는 거 아냐. 힘이 안 실려' 그러시더라고요. 그리고 팍 치시는데, 직각으로 팍 꺾이더라고요. '아 이 사람이 정말 강한 사람이었구나'."
-최광범, 최배달의 장남, 정형외과 의사

▲ 소년 파이터 최배달

최배달은 전북 김제 부농 집안에 넷째로 태어났어. 어릴 때 이름은 최영의. 영의는 어릴 때부터 체력과 승부력이 남달랐어. 늘 뛰어다닌 영의. 동네 뒷산에 오를 때도 절벽과 나무 사이에 매단 밧줄을 타고 올라갔어. 동네 골목대장이었는데, 의협심도 강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친구들이 항상 영의를 불렀어.

같은 소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구로다가 친구 성대를 괴롭힌다는 말에 영의는 한달음에 달려갔어. 가보니 친구인 성대가 구로다 밑에 깔려 있어. 영의는 "구로다, 너 나랑 붙어"라며 싸움을 제안했어. 구로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시간을 끌면 오히려 불리하겠다고 생각한 영의는 구로다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어. 그러자 구로다는 영의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어. 그 순간, 영의의 주먹이 구로다의 옆구리를 강타했어. 영의가 이겼어.

이런 배달의 모습을,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어. 부모님은 영의를 당장 서울로 올려 보냈어. 그 길로 최배달은 서울로 유학을 가. 서울에 올라온 최배달은 책을 엄청 열심히 보기 시작했대. 바로 '괴력법'이라는 제목의 책이야. 일본의 보디빌더가 웨이트 트레이닝 방법을 정리한 책이야. 최배달은 항아리, 돌덩이, 집안의 온갖 살림을 이용해 독학으로 근력을 키웠어. 그리고 학교보다, 복싱클럽을 더 열심히 다녔어.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에너지 많고 힘 센 소년 장사. 어떤 장래희망을 가졌을까? 그 무렵에 소년 최배달을 가슴 설레게 한 건, 비행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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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과서나 잡지엔 비행기에 관한 내용이 많이 실렸다고 해. 소년 비행병을 소재로 한 일본 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됐어. 그렇게 최배달은 파일럿의 꿈을 품게 된 거야.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해 준다는 일본의 소년 항공학교에 가기로 마음 먹어. 형이 몰래 쌀을 팔아 마련해준 여비를 들고 일본으로 향했어. 그때가 1941년이였어.

일본의 소년 항공학교, 최배달의 꿈을 이뤄주는 곳이었을까? 실상은 달랐어. 14~17세 조선 및 일본 소년이 모집 대상이었는데, 어린 소년들을 순수하게 조종사나 정비사로 육성하는 곳이 아니었어. 당시는 일제강점기야. 이 곳은 사실,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를 선발하는 곳이야. 잡지나 영화로 소년 비행병의 모습을 자주 선보였던 건, 이 학교가 꿈의 교육기관처럼 보이게 선전한 일제의 철저한 계획이었던 거야. 그나마 배달이 비행사로 선발되지 않은 게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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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배달의 학교 생활도 녹록지 않아. 일본 소년들이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와. 왜? 조선인이니까. 그리고 싸움이 벌어지면, 배달 혼자만 벌을 받아. 이런 상황이면, 꿈을 접고 바로 귀향하고 싶지 않았을까. 최배달의 생각은 달랐어. '내가 더 강해져야겠다' 였어.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강해져야겠다고 마음 먹은 거야.

그 즈음에 최배달이 접한 게, 일본의 무술 가라데였어. 가라데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지역, 류큐국에서 시작된 무술이야. 사무라이들이 류큐국을 정복한 뒤 무기 금지령을 내리자, 류큐 사람들이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을 개발한 거야. 최배달은 확실히 무술에 재능을 보였어.

그렇게 혼자 체력을 키우고 무술을 연마하던 어느 날, 인생의 큰 소식이 전해졌어. 바로, 일본 패망. 최배달은 그 항공학교를 나와야 했어. 일본에 온 목적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거지. 그래도 이렇게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었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겠다는 거야. 하지만 전쟁 후 패전국이 된 혼돈이 가득한 일본. 그 곳에서 식민지 출신자가 살아남기가 쉬운 게 아니라. 최배달은 가라데 뿐 아니라 다른 무술도 섭렵하기 시작해. 태국의 격투기 무에타이까지 배웠어. 그렇게 수련을 이어가던 최배달의 눈에 뜨인 한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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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유도선수 기무라 마사히코.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말이 있는, 27살에 유도 7단을 딴 '유도의 귀신'이야. 팔을 꺾는 기술 '기무라 락'은 이 기무라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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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최배달과 기무라는 무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이 절친이 됐어. 기무라의 영향인지 최배달은 유도를 배워서 4단까지 따. 각종 무술을 섭렵한 최배달은 어느새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턱걸이가 15개 가능해지고, 주먹은 나무를 치며 단련했어. 정권 단련으로 손에 박힌 굳은살은 면도날로 잘라냈어.

▲ 극진가라데 창시

그런데 최배달은 수련을 계속 할수록, 가라데 자체에 한계를 느껴. 류큐국의 실전 무술이 너무 위험해서, 일본 본토에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룰이 따로 있었대. '공격을 하되,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춰야 한다'는 거야. 공격 직전에 멈춰야 하는 무술이라니, 최배달은 갈증을 느꼈어. '무도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는 것 뿐, 실전이 아닌 시합은 춤이나 체조에 불과하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라면서. 최배달은 결국, 실전 타격을 할 수 있는 가라데 도장을 열었어. 그리고 그 이름을 '극진가라데'라고 붙였어.

왜 극진일까? '극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끝까지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있다는 말이야. 최배달이 도장을 열자, 신입 관원들이 몰려들어. 기존 가라데 도장들이 보기에는 불편하지. 정통 가라데가 아닌 이단이라고 막 손가락질 해. 그리고 도전장을 보내왔어.

"조선인이 무슨 새로운 가라데냐. 겨뤄서 승부를 내자."

이 대결에서 지면, 도장을 폐쇄해야 해. 실전 무술을 내세우는데 실전에서 진다면, 자신의 무술을 증명하지 못하는 거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즐겨야하는 법, 최배달은 "기꺼이 상대해주겠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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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가라데와, 일본 정통 가라데의 대결. 실전은 봐주는 법이 없잖아. 가라데 도전자들이 뼈마디가 부러져 나갔어. 대결 이후 최배달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어. 그러다보니 유도, 검도 등 다른 무술 도장들에서도 도전을 해와. 여기저기서 자꾸 몰려드는 도전자들. 최배달은 '도전을 받을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과 싸우자'라며 도장깨기를 하기로 한 거야. 전국의 도장을 다 돌고 나면, 도전장도 더 이상 오지 않겠지. 그야말로 사생결단 대련이 시작돼.

그 결과, 최배달은 도장깨기 연승을 거둬. 특히 도장깨기의 하이라이트는 이거야. 한 일본인 관장이 이런 제안을 했어.

"내 제자를 다 쓰러뜨리고 나면,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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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모두 99명. 관장 포함 총 100명이야. 100대 1의 싸움이야. 100명을 상대하려면 속전속결로 끝을 내야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제자들. 그렇지만 최배달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져. 99명을 물리치고 드디어 100번째 관장의 차례야. 관장은 최배달의 복부 정권 공격에 쓰러졌어. 그러자 일본 무도계도 최배달을 인정하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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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다 이겼죠. 만약에 그때 졌으면 죽었어요. 왜? 조선인이니까. 그런데 그 때 이기면서 이쪽에 대한 걸 배우고, 이쪽에 대한 걸 배우고 그래서. 공짜 스파링을 정말 많이 한 거죠. 목숨을 건 스파링이었지만. 그래서 자기 실력이 확 올라갔다고 해요. 정형외과 의사 입장에선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요…"
-최광범, 최배달의 장남

이 100인 대결은, 지금도 극진가라데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대. 승단을 하기 위해선, 20명, 50명, 100명을 상대로 대련을 해야 한대. 2단 승급 심사를 위해 20명의 상대와 대련을 해. 대련이 시작되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공격이 이어져. 20인 대련이 종료된 후,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면, 실전 같은 대련의 분위기를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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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사람들이 바뀌고 들어오고, 저는 계속 지쳐있는 상태로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되게 힘든데요. 본인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는 거죠.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겼을 때 정말 진정한 강자가 되지 않나…"
-조기성, 극진가라데 사범

▲ 천하장사 역도산

다시 때는 1941년. 최배달이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실전 무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야. 한반도의 북쪽 이북땅, 함경남도에 이름난 장사집안이 있었어. 해마다 5월 단오날마다 큰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김 씨네 3형제가 힘이 장사야. 씨름 대회만 열리면, 3형제가 황소를 다 휩쓸어 가.

그런데, 씨름대회 한 켠에서 김 씨 형제들을 유심히 눈여겨 보는 사 람이 있어. 이름은 모모타 미노스케. 스모 선수단의 스카우터야. 조선에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러 온 거야. 그가 눈여겨 본 사람은, 김씨 3형제 중 막내 김신락이었어.

"나와 함께 일본에 가서 스모 선수가 되지 않겠나. 자네는 요코즈나가 될 수 있을 걸세."

요코즈나는, 스모 챔피언 같은 거야. 김신락은 기회를 잡고 싶었어.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컸어. 그 먼 곳에 어떻게 막내를 보내냐. 부모님도 큰 형도 막내를 일본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해. 하지만 일본인 스카우터도 물러나지 않아. 일본에 가면 큰 돈도 벌고, 형들의 징병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했어. 당시는 태평양 전쟁 때문에 조선의 건장한 청년들이 징집되던 시기야. 신락은 본인 뿐만 아니라 형들의 징집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가겠습니다"라며 수락했어.

신락은 산에 나물을 캐러 간다 하고, 가족 몰래 일본행 배에 올랐어. 신락의 나이, 17세 무렵이야. 김신락, 이 사람이 바로 역도산이야. 일본에 가서 신락이 사용한 예명이 역도산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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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를 처음 접한 역도산, 잘했을까? 우리나라 씨름 장사인데, 실력 어디 안가. 게다가 근성이 어마어마해. 조선에서 건너와 돈도 빽도 없는 역도산이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야.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연습했어. 그 결과 스모 입문 3달만에 입문 시험에 합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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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는 철저한 계급제야. 10개로 나눠진 계급을 차례로 밟고 올라가, 이 서열에 따라 수입, 대우, 지위가 완전히 달라져. 역도산은 파죽지세로 이 서열을 높여 갔어. 역도산의 서열이 높아갈수록, 다른 스모 선수들의 반응은 안 좋아. 조선 출신 역도산에 대한 차별과 텃세가 장난이 아니야. 모욕 당하고 몰매 맞는 건 일상이야. 안그래도 고된 훈련에 도망치는 선수가 많은 게 스모인데, 역도산은 다 참아내. 지독한 연습벌레야. 한 동료가 역도산에 대해 이런 말도 했어.

"누구나 당연히 연습하면 비 오듯 땀을 흘린다. 하지만 오직 역도산만이 그 땀이 소금이 될 때까지 훈련한다."

역도산이 선배가 되며, 후배들을 연습시키기도 했어. 한번은 맹훈련을 견디다 못한 후배가 역도산의 다리를 깨물기도 했대.

일본에 온지 어느덧 10년. 한 단계씩 올라간 끝에, 역도산은 스모 3등급 자리까지 올랐어. 역도산은 포부가 큰 사람이었어. '나는 아직 목마르다. 내 꿈은 스모 서열 1위 요코즈나다'라고 했어. 요코즈나는 스모계에서 전설의 경지야. 스모 역사 400년 중 요코즈나에 오른 사람은 74명 뿐이야.

스모 3등급에 올라간 뒤 하루하루 열심히 하는 역도산 귀에, 자꾸 이런 말이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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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우리 스모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역도산이 요코즈나라니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아무리 스모를 잘해도, 조선인으로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유리천장이 있던 거지. 어느날 밤, 역도산은 엄청난 결심을 해. 조용히 칼을 집어 들고, 12년간 머리 위에 올리고 있던, 스모선수의 상징, 마게를 베어 버렸어. 스모를 그만둔 거야.

이때가 1950년 8월. 조선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야. 고향으로 돌아갈 길도 막막해.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 역도산은 건설 현장 관리자가 됐어. 그런데 역도산은 스모 선수 시절에도 튀는 선수였거든. 머리에 마게를 한채 가죽재킷을 입고 바이크를 타는 남자. 그러니 이 평범한 회사원 생활이 맞겠어? 요코즈나까지 꿈꿨던 그 포부와 걸맞지 않아. 쌓인 울분을 못 참고 술집에 가서 괜히 시비를 걸고 사고만 쳐.

그러던 어느날, 또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어.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는데, 서로가 안 밀려. 부딪힌 상대는 헤럴드 사카다. 일본계 미국인인데, 역도 은메달리스트 출신에 헤비급 프로 레슬러야. 그는 역도산에게 제안했어.

꼬꼬무

"자네, 프로레슬링 한 번 해보지 않겠나?"

1951년은 미국 프로레슬링 통합 단체가 막 출범한 직후였어. 일본에는 프로레슬링이 들어오기 전이야. 근육과 뼈, 정신력으로 겨루는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역도산은 매료됐어. 그리고 역도산에겐 돈도 필요했거든. 조선인이라고 더 이상 핍박 받고 배고프게 살고 싶지 않았어.

한달 후에 테스트를 받았고, '경험만 쌓으면 미국에서도 통할 실력'이라는 평가가 나왔어. 이후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을 더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어. 소년 역도산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처럼, 또 다시 빈손으로 역도산은 일본에서 하와이로 향한 거야. 할 수 있는 건 연습 뿐이야. 매일 달리고, 하루에 스쾃은 수천개 씩 했어. 스모선수 시절 나온 배를 줄이기 위해 매일 복근 운동 천개를 했어.

그리고 역도산은 '챔피언 벨트'를 준비했어. 당시에 일본에는 프로레슬링이 들어오기 전이야. 자비를 들여 셀프로 챔피언 벨트를 만들었어. 그리고 프로필 사진을 찍었어. 타고난 쇼맨십을 지녔던 그야.

▲ 최배달과 역도산, 전설의 시작

역도산은 하와이 도착 2주 만에 첫 승리를 거뒀어. 스모 출신 프로 레슬러의 화려한 데뷔.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아서, 점점 역도산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 그러던 어느 날, 역도산이 하와이에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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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최배달이야. 그 무렵 최배달의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사람이, 미국에서 열리는 격투대회에 참가하라고 권했거든.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장사 둘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하와이에 있던 거야. 최배달의 미국 활동명은 마스 토고. 최배달은 자신의 극진가라데 기술로 프로 레슬러 선수와 격투를 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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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스(상대선수)는 체격이 좋고 동양 사람인 저는 작고요. 톰 라이스하고 시합에서 한대 맞았더니, 그대로 이가 부러지더라고요 어금니가. 한대 맞았더니 그대로 나가떨어져요. 링 위에서 바깥으로. 정면에서 싸워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알게 돼서요. 발로 차서 다운시켰죠."
-최배달

최배달은 미국 무대에서 자신이 만든 극진가라데를 알리는데 힘써. 손으로 뭐든지 부숴버리는 그의 격파 실력에 '신의 손(God Hand)'이란 별명이 붙었어. 그렇게 미국에서 자신의 극진가라데를 알리고 있던 최배달에게, 역도산이 운명처럼 찾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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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신체 조건이 뛰어나고, 꺾기 조르기 던지기 기술이 좋아. 반면에 타격 기술은 약한 편이었어.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가라데 기술을 배우려 한 거야. 손날로 상대방을 가격하는 기술, 몸통을 가격하는 수평 촙. 목의 경동맥을 공격하는 빗겨베기 촙. 일명 '가라데 촙' 기술을 장착한 역도산은 미국에서 9개월간 260회나 되는 시합을 소화했어. 엄청난 강행군이지.

강인한 육체, 본인만의 가라데 기술 구사. 미국에서 활동 중인 다른 일본 프로레슬러들도 있었지만, 역도산의 스타성은 단연 최고였어. 일본 신문들도 역도산을 비중 있게 보도하기 시작해.

1950년대 조선의 두 청년이 미국에서 격투가로 이름을 날렸어. 그렇게 미국 순회 경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둘의 행보는, 그야말로 스타의 행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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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최배달. '사람 중에 더 이상 상대할 자는 없다' 그래서 소싸움에 도전한 거야. 싸움소 대 인간. 대결 소식에 현장에 구경 온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북새통이야. 숨을 죽이는 긴장감 속, 마침내 소를 가둔 문이 열렸어. 무게 450kg 소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그리고 싸움소와의 힘겨루기가 펼쳐져. 소가 뒤로 밀리는데, 최배달이 뿔에 찔리고 말았어. 저 때 뿔에 긁혀 복부에 10cm 길이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해.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최배달. 결국 소를 넘겨버린 최배달은 인간의 강인함을 증명했어. 배달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소와 대결을 벌이며 강인함을 뽐냈어.

한편 역도산은 미국에서 시합하면서 프로레슬링의 상업성과 장래성에 눈을 떴어. '이 프로레슬링을 일본에 가져가자' 싶은 마음으로, 미국에 온지 1년만에 많은 돈을 번 역도산은 건물 한 곳에 간판을 내걸었어.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라고. 하지만 생소한데 과격한 스포츠를 들여오겠다고 하니,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럴 때마다 역도산은 "전 확신합니다"라며 흥행을 자신했어.

이때 역도산의 귀에 운명 같은 소식이 들려와. 바로 방송국 개국. 마침 일본 최초의 방송국이 개국한다는 거야. 역도산은 거길 찾아가서, 프로레슬링을 중계해달라 했어. 방송국 입장에서도 개국을 앞두고 콘텐츠가 필요한 상황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고 구매까지 이어질 수 있게. 그래서 방송국도 오케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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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미국의 프로레슬링팀 샤프 형제를 초청했어. 기술 위주의 형과 난폭한 거구의 동생. 두 명의 선수가 팀을 이뤄 겨루는 태그매치 방식의 최강팀이었어.

역도산의 파트너는,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야. 최배달과 절친인 유도선수지.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무도인 유도의 인기가 시들해져서 기무라가 막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상황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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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2월 19일. 일본에서 TV 방송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경기가 중계돼. 이때 일본 수도권에 보급된 TV수가 12,000대 정도였다고 해. 니혼TV는 220대 TV를 역 앞 광장에 설치했어.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역도산이 검정 레깅스에 은색 가운을 걸치고 나타났어. 이어 상대팀이 등장했어. 일본인들은 깜짝 놀랐어. 샤프 형제가 키가 2미터의 거구들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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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매치는 링 위에 한 명씩 올라 싸우다가 교체하는 거야. 경기가 시작되고, 기무라가 선제공격을 날렸어. 그런데 상대인 형 샤프도 강해. 기무라가 힘에서 밀리는 거 같아. 위기야. 그때 역도산이 외쳐. "기무라 터치해! 교체하자고!" 샤프 형제는 터치할 틈도 주지 않고, 잡아 끌고 인정사정 없이 몰아부쳐. 기무라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팔을 뻗어 터치했어. 역도산이 링 위에 올라서, 단숨에 형 샤프를 들어 매쳐. 그리고 연이어 동생도 들어 메치기. 2미터 거구들이 링 바닥에 꽝 떨어지니, 그 충격이 관중석까지 전해져. 이어진 가라데 촙 공격에, 일본 관중들은 난리가 났어. 그들은 프로레슬러를 단순한 스포츠로 느끼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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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한테 엄청 당한 일본이. 10년도 되지 않는 그 정도의 시기였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한테 특히 미국인에게 열등감이 엄청 컸어요 일본 사람들이. 그런데 미국의 챔피언이라는 프로레슬러가 일본에 온 거니까. 그러니까 역도산에 대한 열광이 엄청났습니다. 당시 역도산은 진짜 일본의 영웅이었어요."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일본계 한국인

일본으로부터 핍박 받은 조선인이, 일본인의 콤플렉스를 오히려 벗겨준다.. 참 아이러니 하지?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은 일본을 완전히 사로잡았어. 인기 대폭발. 일본 어린이들은 당시 둘이 만나기만 하면, 프로레슬링 놀이를 했대. 이기는 아이는 "나는 역도산이다!"라며 좋아했어. 그야말로 '천황 다음 역도산'의 시대가 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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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도산의 인기가 점점 많아질수록, 불만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역도산과 같은 팀인 기무라야. 프로레슬링이 사실 각본에 의한 엔터테인먼트 스포츠잖아. 근데 그렇다고 쳐도, 실력이 없으면 절대 1인자가 될 수는 없어. 근데 역도산 경기의 흐름은 늘 이랬어. '기무라가 위기에 빠져 있으면, 역도산이 나타나서 가라데 촙을 날려 승' 기무라는 들러리고, 역도산이 구해주는 스토리가 반복되는 거야. 사람이다 보니, 마음이 상해. 결국 둘은 갈라져. 그리고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선전포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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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레슬링은 제스처가 많은 쇼다. 쇼가 없는 진짜 레슬링으로 일본 최강자를 가리고 싶다."
"실력이라면 나도 역도산에게 지지 않는다."
-기무라

기무라는 일본 정통 무술 유도 최강자잖아. 사람들은 기무라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수군대. 언론에서도 은근히 둘의 대결을 부추겨. 역도산의 반응? "그래 기무라 붙자. 대결을 수락한다"는 거야.

프로레슬러 스타 역도산과 유도의 귀신 기무라의 대결. 역대급 빅매치에 일본 열도가 들끓었어.

1954년 12월 22일 시합 당일. 2만석 경기장이 꽉 찼어. 유도의 신 기무라, 가라데 촙의 역도산. 그리고 이 경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최배달이야. 최배달도 링 가까이에서 경기를 관람 중이야. 역도산과도 알지만, 기무라의 오랜 절친이니까.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팽팽한 접점이 이어져. 그런데 경기 시작 15분만에,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기무라가 역도산의 급소를 차버린 거야. 분노가 터진 역도산이 가라데 촙을 난사하고, 쓰러진 기무라를 공격했어. 잔혹할 정도로 이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기무라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어. 결국 심판은 15분 49초만에 시합 속행 불가 선언. 기무라는 병원에 실려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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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 선수권 챔피언에 올랐어. 하지만 기무라는 큰 수모를 당했지. 절친이 수모를 당하니, 최배달도 너무 화가 났어. 분노가 치민 최배달은, 역도산을 찾기 위해 주변을 뒤지고 다녔어. 역도산이 눈에 띄면 자신에게 연락하라면서.

그러고 몇 달 후인 12월의 어느날. 한 파티장에 역도산이 참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배달이 찾아갔어. 그렇게 조선 최강의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섰어. 극진가라데를 창시한 최배달, 프로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과연 승부의 결과는 어땠을까?

"그만! 같은 조선인끼리 싸우지 마라!"

이들의 싸움은 성사되지 않았어. 싸움을 만류한 재일 교포들의 말에 두 사람은 여기서 멈칫 했어. 이 자리에 서기까지 지나온 고난과 역경을 서로가 가장 잘 알기에. 최배달과 역도산의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어.

▲ 조국을 향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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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역도산은 사업가로 변신해 승승장구 했어. 프로레슬링 전용 구장이 있는 리키 스포츠 팔레스 건물을 지어. 혈혈단신으로 부의 제국을 완성했어. 그토록 원하던 성공을 이룬 역도산. 그는 그 다음으로 뭘 하고 싶었을까?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조국이 그리워. 분단된 조국. 부모 형제가 있는 북한으로 가기는 어려워. 당시 북한은, 자본주의 국가 국민의 입국조차 허가하지 않았어.

1963년, 성공한 프로레슬러가 된 역도산은 남한을 방문했어. 그리고 대한민국의 체육 발전을 위한 지원을 약속해. 서울에 스포츠센터를 건립하고 이듬해 열리는 동경올림픽 참가도 지원하겠다면서. 사실 역도산은 그동안 비밀리에 한국 스포츠계를 지원해 왔었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때, 원정 경기를 치를 경비가 없던 한국팀을 위해 재일 동포들이 성금을 거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역도산도 자신의 파이트머니 전액을 기부했대. 또 '박치기 왕' 김일을 제자로 받아들여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러로 키웠고.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 재일야구 선수 장훈 선생도 후원했다고 해.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성공신화를 썼던 재일동포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아마 역도산도 성공했지만, 그런 그리움은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런데, 역도산의 방한 소식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 바로 일본 국민들이야. "역도산의 모국이 일본이 아니었어?"라며. 일본인의 영웅이라고 난리였는데, 그 역도산이 일본인이 아니라고? 그것도 자신들이 무시해 온 조선인이라고? 역도산이 한반도 출신이란 건 스포츠계 소수만 알았어. 역도산 자신도 자신의 출신이 알려질 때 후폭풍을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왜 한국을 방문했을까. 설령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모국을 돕고 싶었다고 해. 역도산의 아내는, 그의 마음을 이렇게 기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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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한국와 일본, 북한을 이어주고 싶어했어요. 늘 조국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살았어요."
-역도산 아내

한편 최배달도 성공가도에 들어섰어. 도쿄에 자신만의 극진가라데 수련관인 극진회관을 세우자,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지. 그런데 극진회관을 후원하던 전 일본총리가 성장을 반기는 만큼, 좀 곤란한 기색을 보여. 일본은 일본 출신의 영웅이 필요한데, 외국인이 우상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래서 최배달에게 귀화를 요구했어. 그때까지 최배달은 귀화를 하지 않고 있었거든. 최배달은 극진가라데를 보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화를 선택했어. 그때 만든 이름이 '마스터츠'. 한자로는 배달(倍達)이야.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이라는 말을 쓴 거야.

고향을 떠난 지 26년만인 1967년. 최배달도 금의환향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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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괴력을 떨치고 있는 태권왕 최영의 8단이 태권 시범을 보였습니다. 최 8단은 호흡법과 함께 대련과 격파 시범까지 보여줬는데, 맨주먹으로 황소 수십 마리를 때려눕힌 그야말로 태권왕입니다."
-당시 뉴스

당시 한국에서는 태권도가 대중에 전파되던 시기야. 근데 극진가라데가 들어온다? 그럼 태권도 전파에 부정적일 수 있다고, 그러니 극진가라데를 태권도로 소개해 달라는 정부의 부탁이 있었대. 최배달도 고국의 무술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후계자들에게도 일러뒀어. "태권도가 정착하기 전에는 한국에 극진가라데를 진출시키지 말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극진가라데가 우리나라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먼저 퍼졌어. 최배달은 우리 국가대표 태릉선수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해주기도 했어.

격투사의 한페이지를 썼던 영웅들의 황혼기는 어땠을까. 1963년, 역도산은 39살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어. 피로연 비용만 무려 1억 엔. 지금 가치로 따지면 50억 원 정도야. 역도산이 당시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보이지? 그런데, 결혼 6개월 후 엄청난 일이 발생해. 역도산이 야쿠자의 칼에 찔리고 만 거야.

클럽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뒤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에 사소한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 야쿠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역도산의 왼쪽 복부를 찔렀어.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어. 역도산은 큰 병원이 아니라 부인이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받았어. 천하의 역도산이 야쿠자 졸개의 칼에 맞았다, 웃음 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다행히 수술 결과도 좋았어. 그런데 수술 일주일 후 역도산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더니, 손쓸 틈도 없이 숨지고 말아. 그렇게 39세의 나이로 역도산은 세상을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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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피를 타고나 세계 프로레슬러의 왕자로 군림했던 역도산은 한 청년의 칼에 찔려 치료를 받아오던 중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1만 명이 팬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시 뉴스

역도산의 사망 소식에 일본 열도는 큰 충격에 빠졌어. 역도산의 공식적 사인은, 화농성 복막염. 6개월 전 결혼한 아내는, 딸을 임신한 상태였어. 영웅의 허무한 죽음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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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충격을 받았죠. 그때 프로레슬링을 그만 보게 됐다는 사람들도 있었죠. 역도산이 안 나오니까 봐도 의미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고이즈미 에츠지, 프로레슬링 전문가

최배달의 노년은, 강인한 무사로서 살아온 후유증과의 싸움이었다고 해. 최배달은 일흔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어. 사람들은 최배달을 어떻게 기억할까. 소와 싸운 괴력의 사나이? 강호들을 쓰러뜨린 무술인? 그런데 최배달이 싫어하는 말이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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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대에 떨어지고 '아버님 죄송합니다 이번에 실패했습니다. 다음에 최선을 다해서' 그랬더니, 아버지가 여태까지 저한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처음 화를 내셨어요. '왜 최선을 다 한다고 얘기하지? 꼭 한다고 얘기해. 왜 한발 빼려고 해 처음부터. 네가 정말 의대에 가고 싶다면 모든 걸 던져봐' 그러셔서 '꼭 이루겠습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해서 반드시 했죠. 그래서 저는 일반인들이 소뿔을 꺾었다, 100명과 싸웠다, 그거보다. 최배달 정신이란게 '극진'이라는 건데. 이 '극'이라는 게 만약에 진짜 이루고 싶으면 다 던지는 거구나…"
-최광범, 최배달의 장남

역도산은 팬이 사인을 부탁하면, 사인 옆에 투혼, 인내심, 노력 등을 같이 썼다고 해. 아직도 일본에선 두 격투가를 기억하고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강한 힘과 성공 신화만이 아니라, 수많은 차별과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낸 그 과정들을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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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은) 당대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차별을 받고 그걸 버텨냈어요. 극진가라데 대표로 미국에 건너가 거기서는 일본인으로서 또 차별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겨내고 극진가라데를 세계에 보급한 인물입니다. 그 뿌리는 분명히 한국, 한반도에 있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위인이 여러분의 곁,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장규, 최배달의 후계자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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