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610년 만의 붕괴, 숭례문 방화 사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뮤지컬 배우 최정원, 배우 진기주, 가수 적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국보 1호 숭례문 화재 사건
때는 2006년 6월,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야. 서울청 강력계는 살인, 변사, 방화, 강도 같은 강력 사건들을 수사 및 지휘, 감독하는 역할을 해. 안 그래도 강력 사건들로 분주한 곳인데, 특히 2003년부터 2006년 초까지 서울청 강력계 형사들은 매일 전쟁 같은 날을 보냈대. 당시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유영철, 정남규의 연쇄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거든. 계속되는 강력사건 때문에 서울 전체 전 지역 경찰들이 제대로 쉬는 날이 없었어. 그러다 2004년에 유영철, 2006년에 정남규가 각각 검거돼. 다행히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며 서울청 강력계 형사들도 다시 전과 같은 일상적인 분위기로 돌아왔어. 당시 서울청 강력계에 근무했던 강상철 형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서울 시내에서도 하루가 거의 멀다 하고 살인 미수나 살인 사건, 이렇게 발생을 하는 꼴이었는데. 유영철 그다음에 정남규가 검거돼서 강력 사건이 확 줄어버렸죠."
-강상철,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사건분석팀 경사
그러던 어느 날, 강 형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형사의 전화를 받았어. 일상적인 안부를 물으며 통화를 하는데, 선배 형사가 갑자기 "강 형사, 큰 사건은 다 해결된 것 같고. 이제 뭐 남았을까?"라고 물었어. 곰곰이 생각하던 강 형사는 이렇게 말했어.
"강도도, 큰 사건도 안 나고, 살인 사건도 다 해결되고... '이제 불만 남은 거 아닌가?' 했어요."
-강상철,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사건분석팀 경사
강상철 형사가 예상한 건 불, 바로 '방화'였어. 이건 설명하기 힘든 형사의 촉 같은 거야. 전화를 끊고 나니, 강 형사의 촉은 불길한 예감으로 커져. 이러다가 진짜 방화 큰 거 하나 터지는 거 아냐? 싶었어. 그때부터 강상철 형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간 발생했던 방화사건의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때 한 천 명 정도 해서 자료를 모았던 것 같아요. 여러 차례 불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다음에 문화재, 일반 노상, 서울시내, 그다음에 전국에 좀 굵직했다든지, 방화 사건 관련해서 이제 연도별 최근 사진 있으면 최근 사진, 그렇게 파일로 해서 만들었죠."
-강상철,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사건분석팀 경사
통화가 있고 한참 후인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그날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어. 설 연휴에 강 형사는 경찰청에 있었어. 전날부터 당직 근무를 했거든. 아침이 돼서야 집에 가서 눈을 붙인 강 형사는 늦은 오후쯤 일어나 무심코 TV를 켰어. 그런데 그때, TV에 나오는 장면을 본 순간 놀라 뒤집어지고 말았어.
"뉴스 속보입니다. 오늘 저녁 8시 50분쯤 국보 1호인 숭례문에서 불이 나서 소방당국이 진화에 나섰습니다."
"현재 숭례문 일대에는 소방차 40여 대와 고가사다리 등을 이용해 화재 진압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지붕 위쪽으로 연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숭례문이 불이 나고 있었던 거야. 설 연휴 마지막 날, 충격적인 소식이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었어.
숭례문은 한양 도성으로 들어가는 4개의 문 중에 정문이자, 1398년에 지어진, 무려 610년이나 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야.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흥인지문이 소실됐을 때도, 서울 한복판에 폭격이 일어난 6.25전쟁 때도 숭례문은 살아남았거든. 오랜 시간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대한민국의 역사 그 자체야. 그런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그것도 민족 대명절인 설 연휴에, 모두의 눈 앞에서 불타고 있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16년 전 그날로 돌아가볼게.
▲ 화재 신고부터 출동까지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오후 7시경, 당시 서른 살이었던 이재승 씨는 전날까지 고향에 있다가 막 서울로 올라왔어.
"가족들하고 설 명절 보내고 나서 마지막 날 올라왔었고요. 오후에 올라와서 바로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을 했었습니다. 퇴근했던 시간이 제 기억으로 오후 8시 30분에서 한 40분 정도 됐던 거 기억해요."
-이재승, 목격자
연휴라 길에는 사람도 없고, 불도 다 꺼져 있었어. 평소 버스로 출퇴근하는 재승 씨는 그날도 항상 타던 버스에 올라탔어. 재승 씨는 매일 숭례문 앞을 지나는데, 특히나 차도 평소보다 없는 연휴 마지막 날 밤의 숭례문은 더욱 멋있었어. 그날도 습관처럼 숭례문을 쳐다보는데, 바로 그때. 순간 이상한 장면을 하나 목격했어.
"숭례문 앞 쪽에 신호등이 하나 있거든요. 그 신호등에 버스 신호가 걸려서 그때 음악을 들으면서 약간 창 밖을 쳐다봤을 때, 거기에 누군가가 숭례문 누각 쪽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제 기억으로는 모자를 쓰고 계셨고요. 모자 너머로 흰머리들이 되게 많이 보였고, 가방 백팩 같은 걸 하나 메고 계셨고, 그리고 알루미늄 철제 사다리 접히는 게 있는데, 약간 그런 걸 이용해서 올라가는 모습을 봤어요. 되게 짧은 시간이었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서 딱 있던 찰나에 올라가는 모습을 봤고 그러고 나서 버스가 바로 출발을 했거든요.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좀 의아하기는 했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지' 정도로 생각했던 거 같아요."
-이재승, 목격자
재승 씨가 탄 버스가 지나가고 한 5분쯤 지났을까. 한 택시기사가 심상치 않은 장면을 또 목격했어. 숭례문 앞에서 신호를 받고 차가 서있는데, 갑자기 숭례문에서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하는 거야. 택시기사는 그걸 보자마자 곧바로 119에 숭례문에 불이 났다고 신고했어.
"내가 본 자리가 여기예요. 여기 서있는 상태에서 이제 그걸, 여기서 보고서 내가 장면을 얘기를 해준 거거든. 이 자리에, 딱 이 자리에. 그때 바로 내가 보고서 신고를 했단 말이에요."
-박성일, 119 최초 신고자
숭례문의 관할 소방서는 서울 중부소방서였어. 출동 방송이 나오자마자 모든 대원들은 하던 일을 제치고 뛰쳐나갔어. 일단 차량에 탑승해 서둘러 출발하며 무전으로 화재 장소를 전달받았어.
"제가 33년을 소방관 생활을 했거든요. 제가 소방관 생활하면서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신고받은 시간이 정확히 20시 50분입니다. 제가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은 기억하고 있거든요. 화재 출동하면 바로 일어나서 앞으로 뛰어갑니다. 그리고 우리 중부소방서는 그 당시에 봉이 있어요. 차고지로 내려가는 봉이. 그 봉을 타고 밑으로 쫙 내려와서 차량에 탑승을 하거든요. 가면서 무전으로 정확한 '화재 사팔'이 어디냐고, 용어거든요. '장소가 어디냐?' 남대문이라는 걸 몰랐어요 저희는. 설마 남대문에서 화재가 났을까? 그런 생각 못 하고 남대문 시장이겠거니 생각했거든요. 무전이 나왔는데도 우린 믿지 못했다는 게 그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숭례문이 불날 수 있어? 이런 심정이었죠."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서둘러 지휘차에 탄 오용규 소방관이 본부에 무전을 해서 화재 장소를 물었어. 그런데 남대문이라는 거야. 대원들 전부 남대문 시장에서 불이 났을 거라 생각했어. 상상조차 못한 거지. 그런데 현장에 도착할 때쯤, 대원들 모두 놀라서 할 말을 잃었어. 남대문 시장이 아니라 진짜 숭례문에서 연기가 막 나고 있던 거야.
▲ 숭례문을 뒤덮은 연기
화재 신고가 최초로 접수된 시각은 오후 8시 50분. 그리고 3분 뒤인 8시 53분에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회현 119안전센터에서 먼저 도착해서 불길을 잡고 있었어. 그리고 4분 뒤인 8시 57분, 오용규 소방관과 중부소방서 대원들이 숭례문에 도착했어. 현장 파악을 위해 중부소방서 대원들이 각종 장비를 들고 숭례문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어.
"도착하자마자 제가 회현 119안전센터 직원들이 작업하는 2층으로 올라갔어요. 장화를 신거든요 화재 현장에서는. 장화가 뭐 절반 이상 찰 때까지 물이 흥건하더라고요."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많은 양의 방수로 이미 숭례문 내부는 물바다가 된 상태였어. 그런데 2층에 진입한 오용규 소방관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그 정도면 일반 건물은 상황이 종료가 됐어요. 그렇게 많은 물을 방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연기가 나오니까 이상하다 이상하다… "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먼저 도착한 회현 119안전센터 대원들은 2층 바닥과 천장의 불길을 진압했다고 했어. 근데 분명히 불을 다 껐는데, 연기가 계속 난다는 거야. 자세히 보니 이 연기, 천장에서 나는 거 같아. 천장 어딘가에 아직 불씨가 살아있다는 거겠지? 그럼 그 불씨를 찾아야지. 불이 크게 번지기 전에 빨리 불씨를 찾아 진압해야해.
그 사이 인근 여섯 곳의 안전센터 대원들이 현장에 1분 간격으로 속속 도착했어. 이거 보통 화재가 아니니까. 그때 대원들에게 특별 지시가 내려왔어.
"전 출동대 분무로 방수. 소대장들은 방수포 절대 사용 금지. 분무 방수."
수압이 강한 방수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한 소방 호스를 사용하라는 거야. 당시 출동했던 윤재웅 소방관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그때 당시에는 저는 이제 화재 진압대원으로서 관창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거든요. 아시다시피 국보 1호다 보니까 그 관련된 기관들도 있을 거고, 그만큼 화재 진압하는데 좀 더 조심스럽다고 해야 되나? 될 수 있으면 원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화재 진압을 하고 싶었던 그런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윤재웅 소방교, 당시 충무로 안전119센터 진압 대원
진압 과정에서 나무 하나, 기와 하나만 망가져도 문화재 훼손이니. 대원들 모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거야. 내부에 있는 대원들은 호스를 들고 조심스럽게 천장을 향해 물을 뿌렸어. 얼마나 많은 물을 뿌렸는지, 숭례문 안은 홍수가 나듯 물이 쏟아졌어. 그렇게 대원들이 진화 작업에 돌입한지 약 30분이 흘렀어. 분무를 멈추고, 연기 상태를 보며 진압이 된 건지 확인하기로 했어. 그런데 이상해. 천장에서 연기가 계속 나고 있는 거야. 대원들이 의아해 하며 천장을 샅샅이 훑어 봤어.
2층 내부에서 바라본 천장의 모습이야. 천장을 가득 채운 나무들이 서까래. 연기는 이 서까래들 사이에서 뿜어나오고 있었어.
천장 위 서까래에서 연기가 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천장 안, 지붕 내부에 불씨가 숨어있다는 거지. 이렇게 숨어있는 불씨에서 연기만 나는 걸 '훈소 화재'라고 해. 온도가 낮거나 산소가 부족한 상황 때문에 화염 없이 연기만 내뿜으며 연소 되는 현상을 말해. 그런데 이런 훈소 화재가 산소와 닿는다면? 순식간에 불이 확 번질 수 있어. 그래서 소방관들은 훈소 상태일 때도 긴장할 수 밖에 없어.
통상적인 화재 진압 시에는, 천장을 부수고 그 안에 물을 넣으면 진압이 돼. 그런데 숭례문은 파괴할 수 없잖아. 다들 뭐 하나라도 망가질까봐 노심초사 하며 불을 끄고 있는데, 아예 천장을 파괴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 당황한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어.
"이거 천장 안으로 뿌려야 해요!"
"천장 파괴 가능 여부. 관계 기관에 연결해서 빨리 무선 주세요 빨리!"
숭례문과 관련된 기관은, 지금은 국가유산청으로 이름이 바뀐, 당시 문화재청이야. 그 시각, 소식을 들은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급히 현장에 오고 있었어. 문화재청은 대전에 있어. 이 관계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적어도 2시간은 걸리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 2시간 못 기다리지. 하지만 다행히 연휴 때문에 몇몇 직원들은 서울에 있었대. 당시 문화재청의 건축 문화재과에 근무하던 김성도 사무관도 서울에 있었어. 김성도 사무관은 상부의 전화를 받고 바로 숭례문으로 뛰어갔어.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현장을 가봐야 되기 때문에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죠. 그 앞에 이르니까 연기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좀 되게 당황스럽고, 도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할지? 하는 이제 그런 생각이 일단 저는 들었고요. 숭례문 같은 경우는 당시 문루에 전선 같은 게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전 같은 위험성이 없기 때문에 그 연기가 난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의아했었죠."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 숭례문을 지키기 위한 결정
곧바로 내부에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한 김성도 사무관은 상부에 보고했어. 그리고 9시 33분, '화재 비상 1호'가 발령돼. 원래는 10명 미만의 인명피해, 상황 해결에 최대 8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현장 지휘 대장의 권한으로 발령되는 거야. 그런데 이건 국보에 불이 난 거잖아. 그만큼 긴급하게 비상 1호가 발령된 거야. 그리고 9시 40분경, 문화재청 측으로부터 답변이 왔어. "문화재가 조금 훼손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꼭 진화만 해주세요"라고.
"저녁 9시 41분에 이제 건축문화재과장께서 전화를 거셔서, 문화재가 좀 이렇게 훼손되더라도 적극적으로 진화를 해달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이제 그 중부소방서 지휘 본부 차량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봤던 상황을 말씀을 드리고 그 일부를 뚫고 소화수를 그 안에다가 넣는 게 굉장히 필요하겠다는 의견을 드렸었고요."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소방대원들은 내부에서 천장 일부를 잘라내기로 결정했어. 누각 내부에서 천장까지 최대 약 8m. 아파트 약 3층 높이야. 대원들이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사다리를 타고 현장에 올라갔어. 2층 상황이 어땠지? 물로 흥건한 바닥과 뿌연 연기로 뒤덮여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지. 그래도 화재를 진압해야겠다는 집념으로 천장에 도달한 대원들. 있는 힘을 다해 도끼를 위로 올려치기 시작했어. 그런데 작업하던 대원들이 전부 당황했어. 오히려 도끼가 튕겨 나왔거든. 세월이 지나면서 숭례문이 굉장히 견고해진 거야.
작업하던 대원들이 도끼로 안되니 체인톱을 올려달라고 소리쳤어. 큰 나무를 자를 때 쓰는 체인톱을 사용하기로 한 거야.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아. 원래 체인톱으로 나무를 자를 때도 굉장히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대. 자칫 실수하면 톱이 튀어 나가 위험하거든. 그런데 천장을 향해 체인톱을 들고 위로 톱질해야 하는 상황이야. 너무 위험한 거야. 실수로 체인톱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작업하는 당사자는 물론, 아래에서 진압 작업하는 대원들까지 위험해지는 거지. 조심스럽게 대원들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천장을 뚫으려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야. 내부에선 천장 절단이 불가능했어.
대원들이 누각 안에서 천장과 씨름하는 사이, 상황은 더 심각해져. 결국 오후 9시 55분, '화재 비상 2호'가 발령돼. 인근 소방서로부터 인력이 추가로 동원됐어. 순식간에 100 여 명의 소방대원들이 모여 지붕을 향해 계속 물을 뿌리기 시작했어. 천장은 안 뚫리고 연기는 계속 심해지니, 안팎으로 계속 물을 뿌리는 수밖에 없었던 거야. 수십톤의 물이 사용되고, 어느새 숭례문 앞은 한강이 됐어. 내부에선 천장을 뚫을 방법이 없어. 그럼 어떤 방법을 써야할까.
"중앙지휘본부가 별도로 차려진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면을 펼쳐서 이제 그 구조를 설명을 해드리고, 아니면 지붕 일부를 깨뜨려서 이제 소화수를 주입하는 그 방법이 가장 긴요하다 라는 말씀을 동일하게 드렸고요."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내부에서 천장을 뚫는 게 아니라, 지붕에 있는 기와를 부순 뒤 그 안에 소방수를 뿌리는 거야. 그런데 이건 내부 작업보다 더 어렵대. 기와 해체 작업을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 지붕의 경사가 최대 약 60도. 서있기 힘들 정도로 가파르지. 게다가 이때는 2월이고, 진화 작업으로 물을 수십 톤 방수했어. 지붕 위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거야. 그 위에서 작업하는 게 가능했을까.
"중간에 제가 지휘관들을 소집시켰어요 2층에. 구조대 지붕에 올라갈 수 있냐? 하니까 못 올라간대요. 100% 사고 난대요.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자칫하면 인명 피해로도 이어질 수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현장이 난리가 났어. 현판 부분에서 갑자기 막 연기가 나더니, 불길이 확 솟구치기 시작했어. 이걸 본 문화재청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어.
"저거 적심에 불이 붙은 거야! 빨리 지붕 깨야 해!"
숭례문 지붕 구조를 설명하자면, 먼저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고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서까래가 있고, 서까래 위를 덮는 판자가 개판, 그리고 개판 위에 있는 나무가 적심이야. 바로 이 적심에 불이 붙은 거야.
"적심의 역할은 말 그대로 무게를 가볍게 해주고 다음에 우수가 혹시 유입이 됐을 때, 그것을 흡수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해주는 나무 부재입니다. 내부에서 들어가서 제가 보았을 때 그을린 불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연기가 난다 그러면 불탈 수 있는 부재가 바로 위에 있는 적심재인 거죠."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기와 바로 밑에 '강회'라는 게 있어. 이 강회는 석회 성분이라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작은 틈도 없어. 그래서 아무리 안팎으로 아무리 물을 뿌려도, 적심까지 침투가 되지 않았던 거야.
결국 오후 10시 32분 '화재 비상 3호'가 발령됐어. 이제 어떻게든 밖에서 지붕을 깨야 해. 소방대원들이 굴절 사다리차를 이용해 지붕에 올라가 작업해보기로 했어.
굴절차가 진입하고, 바스켓에 탄 대원 두 명이 지붕에 다가가기 시작했어. 지붕 근처에 도착한 대원 한 명이 무언가를 보고, 오용규 진압 팀장에게 소리쳤어.
"팀장님! 저 현판이라도 먼저 철거해 볼까요?"
대원의 눈에 보인 건, 숭례문 한가운데 걸려있던 현판이었어.
"그 현판 자체가 우리가 평상시에 저도 알기로, 양녕대군께서 친히 쓰신 친필 글이라고 하더라고요. 저것도 가능하면 철거해 봐라 해서, 두 대원이 올라가서 굴절차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대원들이 순간적으로, 현판이라도 먼저 구하자 싶었던 거지. 바스켓을 현판 쪽으로 옮겨서, 현판을 떼어 보기로 했어. 그런데 너무 무거운 거야. 이게 높이가 2m30cm, 무게가 약 106kg이야. 게다가 물까지 스며들어 더 무거워졌어. 대원 둘이서 이 현판만큼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먼저 한쪽 위아래에 박힌 갈고리를 뺐어. 그리고 반대쪽 갈고리를 뺀 순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현판이 결국 떨어지고 말았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전부 놀라서 얼어버렸어.
"그때 갑자기 현판이 제 앞으로 떨어지는 상태였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상당히 소리도 대단했고, 그 총알 같은 소리가 '핑'하고 났었습니다."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떨어진 현판, 무사했을까? 다행히 테두리 일부만 파손되고 형태를 보존한 채 복원할 수 있었어.
대원들은 곧바로 지붕 쪽으로 접근했어. 지붕에 발을 디뎠는데, 경사는 최대 60도, 지붕은 얼어있는 상태. 두 발로 서 있기 조차 힘든 상태야. 그래서 한 명이 바스켓 안에서 한 발만 내놓고, 뒤에서 다른 대원이 받쳐주면서 작업을 했어. 가지고 온 도끼로 기와를 내려치기 시작했어. 마치 단단한 바위를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대.
"도끼로 기왓장을 깨가면서 했는데 한번에 기와가 깨지지 않고 불꽃이 날 정도로 강했고, 또 작업 여건도 바스켓 위에서 공중에, 허공에 떠있는 상태에서 하다 보니까 저희가 온전하게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박성규, 당시 중부소방서 소방관, 현판-지붕제거 작업
가뜩이나 기와도 단단한데, 또 난관이 있어. 그 아래 석회 성분의 강회가 있다고 했잖아. 너무 딱딱해서 아무리 깨려고 해도 깨지지 않아. 결국 지붕도 사람의 힘으로는 깰 수가 없었던 거지. 그 옆으로는 불이 계속 커지고 있어.
▲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
숭례문 주변에 있는 300여 명의 소방대원들은 끊임없이 소방수를 뿌리고 있었어. 하지만 한번 번진 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결국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이 모든 장면은 TV로 생중계가 됐고, 국보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어.
삽시간에 퍼진 화마로, 어느새 2층 누각은 붕괴되기 직전이야. 결국 오후 11시 15분. 누각 내부에 있던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어. 내부에 있던 소방대원들 전부 밖으로 나와서 진압을 계속 이어갔어. 어떻게든 화마를 잡아보려 노력했지만, 마음과 다르게 불은 점점 더 거세졌어.
그때 현장에 놀란 눈으로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어. 대전에서 택시를 타고 오던 문화재청 고위 간부들이야. 문화재청 간부들과 소방본부는 협의 끝에 결국 오후 11시 38분. 중장비를 동원해 2층 누각을 파괴하기로 결정했어.
"일부분만 해체해도 그 부분은 계속 불이 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아까 소방본부하고 협의를 했는데, 일단 2층 누각 건물은 완전 해체하는 걸로 장비를 동원해 해체하는 걸로 그렇게 이야기됐습니다."
-김상국, 당시 문화재청 건축과장
1층이라도 살리고 남은 부재라도 건지기로 한 거야. 어떻게든 지켜보려 했지만, 이제 지킬 방법은, 파괴하는 방법 밖에 없는 거야. 서둘러 중장비가 오고 있는 그때, 주변의 사람들이 외마디 비명을 질러.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은 붕괴되기 시작했어. 지붕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숭례문은, 화재 발생 5시간 뒤인 새벽 1시 56분. 결국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붕괴됐어. 모두의 마음이 숭례문이 무너진 동시에, 같이 무너져 내렸어.
"정적만 흘렀던 것 같습니다. 말도 거의 안했던 것 같아요."
-윤재웅 소방교, 당시 충무로 안전119센터 진압 대원
"지붕이 붕괴되는 순간, 내 마음도 붕괴되는 그 상황과 똑같았어요."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사람이 죽었을 때? 이제 그런 정말 어이가 없고 너무 참담하고 참 슬프죠. 눈물이 핑 돌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니까요. 참… 그 아픔은 말도 못하는 거죠."
-김성도 사무관, 당시 문화재청 건축 문화재과
▲ 610년의 역사가 무너졌다
소방대원들은 남은 1층 누각이라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사투를 벌였어. 그리고 새벽 2시 5분. 그제야 불은 완전히 진화됐어. 다행히 1층은 90% 정도 살릴 수 있었어. 2층 누각은 거의 잿더미가 되고 말았어. 610년동안 서울의 한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이 단 5시간 만에 타버린 거야.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이 숭례문을 특히 불로부터 막으려 애써왔대. 소방대원이 지켜낸 숭례문 현판. 가로로 글씨가 쓰여진 다른 현판과 다르게,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적혀있어. 숭례문의 가운데 '례'는 '예의 예(禮)'자인데, 예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오행으로 치면 '불 화(火)'를 뜻한대. 불을 뜻하는 글씨를, 불꽃이 타오르는 형태처럼 세로로 써서, 불기운이 강한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맞불을 놓는다는 뜻이래.
게다가 이런 것도 있어. 조선시대 화가 이기룡이 그린 숭례문 그림이야. 숭례문 앞에 그린 건 '남지'라는 연못이야. 숭례문에 불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가득 채운 연못을 만들어놨던 거야. 그만큼 화마로부터 지키려 했던 숭례문이, 불에 타서 재가 돼버린 거지.
대한민국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야. 밤새 TV로 현장을 지켜본 시민부터 온갖 종교인들까지 전부 숭례문 앞으로 모였어. 어떤 무당은 숭례문 주변에 팥알을 뿌리며 액운을 쫓아냈대. 그야말로 숭례문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어.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날 아침, 숭례문 안에 경찰과 소방관, 문화재 담당자들이 모였어. 화재 감식을 통해 불이 어떻게 났는지 확인하기로 한 거야.
먼저 담벼락 근처에서 철제 사다리가 발견됐어. 또 일회용 라이터가 발견됐어. 그리고 화학 성분이 검출됐는데, 바로 시너 성분이었어. 범인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시너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냈다는 거지. 그러니까 숭례문 화재는, '방화사건'이었던 거야.
그럼 불은 어떻게 붙은 걸까? 감식 결과, 불이 최초로 붙은 곳은, 2층 누각의 세번째 기둥 바닥 쪽이었어. 바닥에 뿌린 시너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불이 천장에 닿을 만큼 커진 걸로 보였어. 그때 화염이 기둥과 천장까지 옮겨 붙은 거야. 그리고 서까래 위 개판의 작은 틈 사이로 불씨가 들어갔던 거지. 그 불씨가 적심에 옮겨 붙은 거야. 그런데 그 안에는, 적심만 있는 게 아니었어.
나뭇조각들이 적심 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1961년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무를 깎고 남은 부재들을 이 지붕 안에 넣었던 거야. 처음엔 연기만 나는 훈소 상태였잖아. 적심에 불이 붙었을 땐, 지붕 내부에 공기가 적으니까 연소를 못하고 연기만 났던 건데, 그때 이 나뭇조각들이 숯의 역할을 한 거야. 내부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결국 어느 순간 공기가 유입되면서 불이 확 번진거지.
"조사하고 감식하다 보니까 숭례문 구조가 이렇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서까래나 개판 무게나 규격이 그렇게 큰 줄도 몰랐고, 이렇게 됐으니까 물이 침투가 안됐구나…"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 방화 사건의 범인
시너와 라이터를 가지고 누군가 불을 낸 방화 사건이야.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범인은 23시간만에 검거됐어. 소방대원들이 현장에서 연기를 진압하고 있을 때, 119소방센터에 다급한 전화 한통이 걸려 왔어. 이거 방화일 수 있다, 아까 전에 누군가 숭례문 누각에 올라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 재승 씨였어.
"그때 소방안전본부 119에 전화를 했던 것 같아요. 누전이 아닐 수도 있는 것 같다, 제가 좀 전에 이런 상황을 목격했고, 그렇다면 방화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셔라 이렇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재승, 목격자
뉴스속보를 보자마자 퇴근길에 봤던 그 장면이 딱 생각이 난 거야. 이 소식은 관할서인 남대문 경찰서에 전해졌어. 워낙 큰 사건이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형사들과 합동 수사를 하기로 했어. 곧바로 숭례문이 찍힌 CCTV를 확인했고, 누군가 숭례문 담벼락을 타고 도주하는 장면이 희미하게 찍혔어. 하지만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범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건 방화 추정 시간 뿐이야. 이 사람, 어떻게 찾아야 할까?
앞서 대형 방화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예상했던 강상철 형사. 그날 밤 강 형사는 방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둘러 경찰청으로 향했어. 그리고 자신이 모아뒀던 방화범 자료 파일을 열었어. 그 안에서 문화재 방화 전과가 있는 동종 범죄 전과자들을 추려서, 사건을 담당하는 팀에 자료를 보냈어. 담당팀은 그 자료를 가지고 유력 용의자 3명을 특정했어.
용의자 A- 60대. 2006년 4월 창경궁 방화. 토지 보상 불만에 의한 계획적 범행.
용의자 B- 20대. 2006년 5월 수원 화성 서장대 방화. 신변비관에 따른 우발적 범행.
용의자 C- 30대. 2007년 3월 서울 강북구 도선사 방화. 정신 이상에 다른 범행.
이를 토대로 형사들이 특정한 유력 용의자는 A씨였어. 우선 A씨에게 그날 어디에서 뭘 했는지 행적을 들어야 해. 담당 형사인 서울청 윤기석 형사가 전화를 해봤어. 그런데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유력 용의자 A씨는 강화도에 사는 걸로 확인됐어.
"일반인과 다르게 많은 것들이 의심이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일단 전화기도 꺼져 있고. 이분에 대해서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저희 지휘부 상부에 보고를 하고, 이 사람의 신병을 신속히 확보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찾기 시작했죠."
-윤기석 경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
서둘러 윤기석 형사가 주소지로 갔는데, 집안에 없어. 그때부터 형사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어. 마을 여기저기를 탐문하는데, 한 주민이 좀 전에 마을회관에서 A씨를 본 거 같대. 윤 형사는 곧바로 마을회관으로 갔어.
"마을회관에 도착을 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분이 나왔어요. 마침 코트 입으시고 그 다음에 목도리를 착용하면서 나오셨어요. 그분을 처음 봤을 때 어떤 당당함이 보였어요."
-윤기석 경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
우선 윤 형사가 유력 용의자 A씨를 형사 기동차에 태웠어. 차에는 A씨와 윤기석 형사 둘 뿐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긴장감만 가득해.
"침묵이 흘렀죠. 상당한 시간 침묵이 흘렀어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그때 당시의 분위기는, '나는 다 알고 왔다. 그러니 너는 얘기해라' 그 사람은 '너는 뭘 알고 왔냐? 네가 알고 있는 걸 애기해라' 라는 분위기였어요."
-윤기석 경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
그렇게 침묵은 한시간째 이어지고 있었어. 그때, A씨가 갑자기 "집에 갑시다"라고 말해. 그 말을 들은 윤기석 형사는 이유도 묻지 않고, 즉시 A씨의 집으로 이동했어. 집에 도착한 A씨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웬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어. A씨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차에 탑승해. 얼마쯤 달렸을까. A씨가 적막을 깨고 형사한테 말해.
"내 잡으러 올 줄 알았어. 근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은 A씨는 범행을 전부 시인했어. 수사를 통해, 사건 8개월 전부터 두 차례나 숭례문을 답사한 사실도 드러났어.
▲ 방화 사건의 진실
사건 당일 오후 8시 40분경. A씨는 숭례문 서쪽에 있는 성벽 계단을 올라갔어. 사다리를 타고 2m 높이의 담벼락을 넘어서 1층 누각에 도착한 뒤, 누각 내부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그리고 시너 세 통과 라이터를 꺼냈어. 시너 한 병은 바닥에 뿌리고, 나머지 두 병은 그 옆에 세워놨어. 뿌린 시너에 라이터로 불을 지른 뒤, 바로 도주했다고 했어.
A씨는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건, 토지 보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어. A씨가 집에서 들고 나온 가방 안에는 이런 게 있었어.
"오죽하면 이런 짓을 하겠는가. 나는 정부에 억울함을 수차례 진정하였으나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있는 집 없어진 대지 4억, 시가 1억도 못 대는 공략을 걸고 강제로 철거하였다."
2006년 A씨가 살던 집터가 재개발 되면서, A씨의 집을 철거해야 했어. 그때 A씨가 철거 보상금으로 책정된 금액의 5배가 넘는 금액을 달라고 주장했던 거야. 결국 법적 절차에 따라 A씨는 책정된 금액만 보상받았고, A씨의 집은 철거됐어. 이에 불만을 품은 A씨가 소송까지 걸었는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은 거야.
2006년에 A씨는 창경궁에도 불을 냈어. 창경궁에 불을 낸 혐의로 벌금 1,300만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어. 그런데 집행유예 기간에 숭례문에 또 방화를 한 거야. 왜 하필 숭례문이었을까.
"국민이 사랑하는 문화재가 없어졌으니까,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거 문화재는 재복원하면 되니까. 내 말 한마디만 들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
-숭례문 방화 사건 범인
"불이 난 거에 대해서 죄책감보다는 국민들에게 더 알리고 싶었던 심정이 더 컸어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했어요 저한테. 그 중에, 열차를 탈선시킬까? 그러면 더 국민들한테 알릴 수 있을까? 근데 이것은 많은 사람의 사상자가 날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상자가 나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게 뭘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국보 1호에 불을 지르자…"
-윤기석 경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드러나자 온 국민은 분노했어. 끝까지 억울함을 주장하던 A씨는 결국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았어.
"숭례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화재로 이처럼 귀중한 숭례문이 국민의 한 사람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타버림으로써 국민들의 충격과 큰 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와 국민의 위신 또한 깊이 손상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피고인의 범행은 매우 중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판결문 中
▲ 변함없는 한가지
5년 3개월 뒤인 2013년 5월. 숭례문이 우리 앞에 다시 섰어. 이 기간동안 투입된 인원만 약 35,000여 명. 예산은 약 277억 원이 들었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무까지 지원해줄 만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공사였어.
복원된 숭례문. 달라진 부분 중 하나는, 문화재 방재 시스템이란 게 있어.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해, 소화기 32대와 스프링클러, 화재감지기도 설치됐어. 소방대원들은 이 화재를 기점으로 관내 문화재 도면을 미리 확보해서 구조를 익혔어. 문화재청과 합동해서 문화재에 화재가 났을 때 대응하는 훈련도 수시로 진행했어.
사건 이후 많은 게 변했지만, 변함없는 게 하나 있어.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무거운 마음이야. 처음 수상한 장면을 목격했던 재승 씨는 그때 바로 신고하지 못했던 걸 지금도 후회한다고 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현장에서 그때 목격했을 때 바로 전화를 했었으면 어땠을까? 다음 정거장이 남대문시장인데, 거기에서 내려서 숭례문까지 뛰어가면 1분 정도거든요. 뛰어가서 막았으면 어땠을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그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는 기분, 뭔가 되게 잘못됐는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지, 막 이런 생각도 들고. 그 20분 동안의 어떤 오판 때문에, 17년동안 죄책감 느끼면서 살 줄은 몰랐죠."
-이재승, 목격자
그 누구도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누군가에겐 오늘까지 죄책감으로 남게 된 거야. 그럼, 5시간동안 화마와 싸웠지만 결국 무너지는 숭례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관계자들은 어떨까.
"결과가 안 좋으면 그에 따른 질타나 원망 그런 거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저희들도 반성을 해야겠죠."
-윤재웅 소방교, 당시 충무로 안전119센터 진압 대원
"그걸 살리지 못했다는 거는 용서받을 수 없는 현실 같아요. 당연히 기억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하고. 또 그거에 대한 책임감이나 도의적인 책임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용규 소방경, 당시 중부소방서 진압 팀장
당시 누군가는, 처음부터 파괴를 해서 빨리 불을 껐어야 한다고 말했대. 하지만 국보이자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싶었던 이들의 마음은, 모두 다 진심이었어. 이건 엄연히, 잘못을 저지른, 방화를 한 범인이 있는 사건이야. 정작 죄를 지은 범인으로부터 자책과 후회 같은, 반성하는 모습은 없었어.
"이미 지나간 시간인데 뭐 더 돌이킬 것 없이 후회한들 뭐 소용 있겠습니까?"
-숭례문 방화 사건 범인
분명한 건, 한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대한민국 수백년의 역사가 한순간에 무너진 동시에, 온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사건이야.
그럼 16년이 지난 지금, 우리 문화재는 안전할까? 그렇지 않아. 지난해 경복궁 담장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사건도 있었고, 최근에 세계유산인 성종대왕릉에 구멍을 낸 사건도 있었어. 여전히 문화재 훼손은 계속 일어나고 있어. 다들 충격을 받고 화를 내지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금세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랜 역사를 건강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있기 때문일 거야. 국민으로서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그 가치를 여기는 건, 마땅한 권리겠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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