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작전명: 집으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이엘, god 데니안, SBS 주시은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내 딸이 사라졌다
여긴 중미에 있는 '로아탄'이란 섬이야. '카리브해의 푸른 보석'이라 불리는 로아탄섬은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름다운 산호초 덕분에 휴양지로 인기가 아주 많아. 근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환상의 섬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만 했어. 무려 496일 동안. 어떤 사연일까 궁금하지?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게.
때는 2009년 8월 27일. 미국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이야. 중년의 한국 여성 한 분이 꽃을 들고 서 있어. 설레는 표정으로 입국장 앞을 기웃기웃, 누군가를 기다려. 바로 이 사람이야.
이름은 한지수. 중년 여성의 막내딸이야. 지금 지수는 엄마를 만나러 미국으로 오고 있어. 자그마치 2년 만의 만남이야.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비행기의 도착 표시등과 함께 입국장 문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길이 엇갈렸나 싶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어.
분명 지수가 탄 비행기는 공항에 도착한 상황이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수는 그날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어.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소식이 없어.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어.
지수의 소식은 한국에 있는 아빠와 지수의 언니 지희 씨에게도 전해졌어. 가족들은 발칵 뒤집혔어. 언니 지희 씨는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하자고 난리야. 그러다 가족들은 이집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어. 갑자기 웬 이집트? 사실 지수는 이집트에서 미국으로 오는 길이었거든.
지수 아빠는 이집트 대사관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지수의 탑승 기록을 부탁했어. 탑승 기록을 보면 행방을 알 수 있으니까. 근데, 이집트 대사관 직원이 난감해 해. 탑승 기록은 본인만 열람할 수 있어서, 범죄 사건에 연루됐다는 증거가 없는 한 아무리 가족이라도 확인이 안 된대. 가족들은 온몸의 피가 다 마르는 기분이야.
어느덧 실종 5일째. 모르는 번호로 언니 지희 씨에게 전화가 걸려 왔어. 전화를 건 사람은 외국인 여자야. 여자가 서툰 영어로 지수 언니가 맞냐고 묻더니, 갑자기 이런 말을 덧붙여.
"유어 시스터 이즈 인 프리즌. 프리즌!"
지수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거야. 여자의 설명은 이랬어. 자기는 이란 사람인데, 인터폴 유치장에서 만난 지수가 언니 지희 번호를 주면서 유치장을 나가게 되면 언니한테 꼭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을 했대. 인터폴과 유치장?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언니 지희 씨는 깜짝 놀라서 인터폴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어. 지수의 이름 'JI SOO HAN'으로 찾아봤더니, 세상에 이게 뭐야! 지수에게 적색수배령이 내려져 있어.
더 충격적인 건, 체포된 이유야. 'crimes against life and health' 직역하면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범죄'. 한마디로 지수가 누군가의 생명을 해쳤다는 거야. 즉, 살인혐의라는 거야.
지수가 죽였다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야.
이름은 마리스카 마스트. 스물세 살의 평범한 대학생이야. 국적은 네덜란드. 그러니까 이 사건은 한국인 여성이 네덜란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이집트에서 체포된 사건인 거야. 대체 지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부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질 거야.
▲ 지수의 꿈
시간을 1년 전으로 되돌려 2008년 서울이야. 올해 스물다섯이 된 지수는 외고와 명문대를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에 한 방에 합격했어. 부모님의 자랑거리이자 사랑스러운 막내딸이지.
그런 지수가 어느 날, 뜬금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겠대. 지수에게 스쿠버다이빙은 바다 속 아름다움을 보거나 짜릿한 스릴을 느끼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나? 인생의 행복은 뭘까?' 왜 그런 고민 들 때 있잖아. 지수 역시도 마음이 어지러운 시기가 있었는데, 스쿠버다이빙이 위안을 줄 거라 여긴거야.
"보통 대학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러면, 20대 후반 정도에 한 번 약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기가 오잖아요. 아마 지수는 그때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스킨스쿠버나 다이빙하는 것도 좋아하고 외국어를 굉장히 빨리 배우는 친구고, 새로운 사람이랑 되게 빨리 친해지고. 평소 성격으로 봤을 때 한 회사에 계속 다니는 것이 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곽윤영, 한지수의 친구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어. 탄탄대로를 달리던 딸이 갑자기 스쿠버다이빙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둔다? 부모님한테는 너무 아까운 일이지. 근데 지수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아빠는 "그래 해봐. 네가 행복한 길이라면 아빠도 응원하마"라며 딸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어. 이 멋짐이 폭발하는 지수의 아빠, 한원우 씨야.
지수는 스쿠버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러 가기로 했어. 잔뜩 신이 난 지수는 곧바로 세계 지도를 펼쳐 들었어. 언니 지희 씨도 동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지도를 살폈어. 그러다 한 곳이 눈에 들어와. 바로 로아탄섬. 사실 로아탄은 다이버들 사이에서 성지로 통하는 곳이야. 섬 주변이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서 물결이 잔잔하고 바다는 열대어가 육안으로 보일 만큼 투명해.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기엔 최적의 환경이지.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이 로아탄섬이 있는 나라가, 온두라스야. 세계적으로 치안이 안 좋기로 악명이 높아. 어느 정도인지, 온두라스에서 31년째 살고 계신 분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집 밖에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늘 살펴야 하고. 예배드리는 도중에도 총 들고 들어와서 털어가고. 저는 또 납치된 적도 있어요. 차에다 나를 싣고 막 가는데, '왜 그러냐' 그러니까 '너 차를 뺏기 위해서 그렇다'는 거죠. 내 차를. '그럼 차 가져가' 그랬더니 '알았어. 그럼 좀 더 가서 내려줄게' 그러더니 내려줘서 이제 풀려나기도 했고. 마약이 심하고 갱들이 경찰 수보다 더 많고 살인율도 항상 1, 2위를 다투고. 상당히 어려운 나라입니다."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현지 31년째 거주
심지어 갱들끼리 싸움이 붙으면 주민들에게 '전쟁세'를 걷었대. 만약에 전쟁세를 내지 않는다면, 탕! 가차없이 총을 쏴.
"전쟁세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이 갱들이 주민들한테 돈을 받아요. 택시, 버스, 가게 하는 사람. '우리는 전쟁 중이다' 이거지."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현지 31년째 거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원 로아탄이 하필이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온두라스 안에 있는 거야. 하지만 지수는 결정했어. 로아탄에 가기로. 지수가 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장점이 너무 많았어. 스쿠버다이빙에 최적인 자연환경, 저렴한 물가, 그리고 온두라스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 전세계에서 오는 여행객들로 항상 붐빈다는 것. 그렇게 지수는 로아탄으로 떠났어.
근데 로아탄섬까지 가는 여정이 만만치가 않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1시간 반을 이동해 미국 LA공항에 도착해. 공항에서 약 3시간가량 대기를 한 뒤,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5시간을 날아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에 도착. 여기서 다시 세 번째 비행기를 갈아타고 또 한 시간을 이동해야 마침내 온두라스 산페드로술라 공항에 도착하는 거야.
온두라스에 도착해서도, 로아탄섬에 가려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라세이바 항구로 가야돼. 근데 이 버스가 진짜 최악이야. 푹푹 찌는 더위에 에어컨도 없어. 심지어 운전기사가 마음대로 중간에 차를 막 세워. 그렇게 더위와 싸워가며 라세이바 항구에 도착하면, 선착장에서 멀미약과 멀미 봉투를 받게 돼. 카리브해의 파도가 엄청 나다는 거야. 이 출렁이는 배를 2시간 정도 타고 가야 비로소 꿈의 낙원, 로아탄섬에 도착하는 거야.
장작 3박 4일의 여정 끝에, 눈 앞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고된 여정이 너무 힘들었지만, 바다를 보는 순간 피로가 사르르 녹았어. 잔뜩 신이 난 지수는 곧장 다이빙샵으로 달려가 3개월짜리 다이버 마스터 코스를 신청했어. 로아탄에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어.
▲ 온두라스에서 생긴 일
지수의 로아탄 생활은 굉장히 만족스러웠어.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어. 그렇게 어느덧 꿈같은 3개월이 지났고, 마지막 관문인 강사 시험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어. 이때 지수에게 난감한 일이 하나 생겨. 룸메이트들이 다들 귀국을 하는 바람에 머물 곳이 없어진 거야. 그런데 그때, 호주에서 온 다이빙샵 강사 '댄'이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해왔어. 자기집에 방 하나가 남는데 숙박비를 반값에 해주겠대.
가보니까 집도 크고, 방도 생각보다 좋아. 그렇게 지수는 남은 열흘을 댄과 하우스 메이트로 지내기로 했어. 이땐 아무도 몰랐지. 이 선택이 지수의 인생에 어떤 시련을 가져올지.
그렇게 한 일주일쯤 지나고, 운명의 그날이 찾아와. 2008년 8월의 한 늦은 밤이야. 얼큰하게 취한 댄이 현관문에 들어서는데, 보니까 혼자가 아니야. 댄과 함께 온 사람은, 네덜란드 여성 마리스카야. 맞아. 지수가 살해했다는 그 여자야. 모든 일은 이날 시작됐어. 지금부터, 지수의 진술을 토대로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해 볼 거야.
마리스카는 댄의 수강생이었어. 지수와는 딱 한 번 인사만 나눈 사이였대. 그날 이 두 사람,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비틀비틀 거리는 게 딱 봐도 만취 상태야. 지수는 서둘러 둘을 댄의 방으로 들여보낸 뒤, 자기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어. 잠시 후, 한 새벽 3시쯤 됐을까. 지수가 화장실을 가려는데, 화장실 문이 잠겨있고 댄이 그 앞에 서있어. 그때, 화장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그리고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리스카가 앞으로 쿵! 그대로 고꾸라져. 깜짝 놀란 댄이 마리스카를 돌아 눕히는데, 의식이 없어 보여. 눈 위쪽으로 피도 나고 있어. 타일 바닥에 넘어지며 피부가 찢어진 거 같아.
댄과 지수는 할 수 있는 모든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어. 다행히, 마리스카는 깨어났어. 여전히 취기가 좀 있어 보이긴 하지만,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다행히 크게 다친 데도 없어 보여. 지수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잠을 청했어.
그렇게 잠이 들고, 새벽 6시. 이번엔 댄이 지수를 불러. 엄청 다급한 목소리야. 비몽사몽 문을 열고 나갔지. 그런데, 눈앞에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어. 댄의 침대 위에 마리스카가 누워 있는데, 숨소리가 컥! 컥!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야. 빨리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에 "HELP! HELP!"라 소리치며 1층으로 내려갔어. 근데 지금 새벽 6시야. 아무도 나와 보질 않아. 지수는 무작정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갔어. 마침, 저 건너편 주유소에 사람이 보여. 지수는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신고를 부탁했어. 근데, 좀 이상해. 아무리 기다려도 구급차가 안 와. 왜? 구급차가 없었던 거야.
"(2008년 당시에) 앰블런스 뿐만 아니라 경찰들도 아무리 강도가 와있어도 출동도 안 해요. 예를 들어서 지금 살인 사건이 났다? 경찰이 안 온다니까요. 신고했다고 빨리 오고 뭐 그런 게 없어요."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31년째 거주
그러는 사이 마리스카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가까스로 이웃집 남자의 트럭을 빌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마리스카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어. 여기까지가 지수가 말한 그날의 상황이야.
혼돈의 새벽이 지나가고, 경찰 조사가 이뤄졌어. 가장 먼저 누굴 조사해야 할까? 그래, 댄. 마리스카와 늦게까지 술을 마신 것도 댄이고, 사건이 일어난 곳도 댄의 집이야. 경찰은 먼저 댄을 용의자로 체포했어. 그리고 지수를 목격자 신분으로 조사했어.
경찰 조사 후 댄은 풀려났어. 별다른 타살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야. 용의자가 아닌 목격자였던 지수도 풀려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어. 그럼, 마리스카는 왜 죽은 걸까? '꼬꼬무'가 아주 어렵게 마리스카의 부검보고서를 입수했어.
사망 날짜 : 2008년 8월 22일
고인의 이름 : 마리스카 마스트
사망 원인 : 뇌 손상에 의한 급성 뇌부종
새벽에 마리스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타일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고 했잖아. 아마도 그때 뇌진탕이 온 걸로 보여. 게다가 부검과정에서 사망 원인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정황도 발견됐어.
'암페타민 양성'. 암페타민은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마약류에 속해. 그날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고 했잖아. 아마도 마리스카는 약물에도 취해 있었던 걸로 보여. 이런 상황에서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뇌 손상까지 입게 된 거야. 부검결과를 봐도, 이건 사고사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
그렇게 댄은 온두라스를 떠나 호주로 돌아갔고, 지수도 별문제 없이 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따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어.
▲ 한여름 밤의 악몽
사건 두 달 뒤, 이집트 다합이야. 거기서 한 동양인이 학생들을 상대로 스쿠버다이빙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 맞아. 지수였어. 로아탄에서 딴 강사 자격증으로 이집트 다합에서 강사 활동을 시작한 거야.
그렇게 8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지수는 2009년 8월 27일, 엄마가 있는 미국에 가기 위해 카이로 공항을 찾았어. 공항검색대를 지나 여권심사대 창구에서 여권을 보여주는데, 직원의 반응이 좀 이상해. 고개를 갸웃대며 지수의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잠시 기다리래.
'비자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였어. 웬 남자 두 명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지수의 양팔을 붙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 무슨 일이냐 물어도, 다들 대답을 안해. 그리곤 지수의 핸드폰과 소지품을 모두 뺏더니 그대로 그냥 문을 닫고 나가 버렸어.
그렇게 한 4시간쯤 지났을까. 철커덕 문이 열리더니 그 남자들이 다시 들어왔어. 그러더니 이번엔 지수를 버스에 태워. 버스가 도착한 곳은 인터폴이야.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거 같아. 조사관이 지수의 사진이 붙은 사건 파일을 꺼내더니, 마리스카 사망 사건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어. 지수는 '이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당황스러웠어. 1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심지어 타살 혐의 없이 마무리 된 사건이잖아. 지수는 침착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그리고 영사를 만나게 해달라 요청했어. 하지만 거절당했어. 너무나 당연한 그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어.
이뿐만이 아니라, 아랍어로 적힌 무슨 서류를 내밀더니 서명하래. 너무 공포스럽잖아. 서명을 안할 수가 없는 분위기인거야. 이후 지수는 인터폴 유치장에 감금됐어.
처음에 언니 지희 씨가 받았던 전화, 기억나? 이란 여자라는 사람이 지수를 어디서 만났다고 했지? 맞아. 바로 여기. 인터폴 안에 있는 유치장이였어. 보통 경찰서 유치장은 철장으로 되어 있잖아. 근데 인터폴 유치장은 좀 달라.
이건 지수가 유치장 안에서 그린 그림이야. 크기는 네 평 정도. 벽은 시멘트로 모두 막혀 있어. 창문이 하나 있긴 한데 환기는 안 돼. 맞은편이 벽으로 막혀 있거든. 이 방에 적게는 열 명. 많을 땐 스무 명도 넘게 수감됐대. 날은 덥고, 화장실 냄새는 진동해. 완전 미치기 일보 직전이야. 지수는 이 방에 무려 3주를 갇혀 있어야 했어. 대체 지수가 뭘 잘못했길래 인터폴 유치장에 3주를 가둬놓은 걸까. 지금부터 지수가 체포된 그 이유를 알려줄게.
▲ 살인 누명
인터폴 유치장에 들어온 지 한 일주일쯤 됐나? 경찰이 지수를 불러. 잔뜩 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데, 세상에! 한국인이야. 드디어, 이집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영사가 나온 거야. 얼마나 반가웠겠어. 지수는 영사를 보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어. 내가 왜 체포된 거냐고. 그러자 영사가 상상도 못 한 얘길 해.
"온두라스 검찰이 마리스카 살인혐의로 지수 씨를 기소했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살인이라니? 지수가 댄과 공모해서 마리스카를 죽였다는 거야. 댄 역시도 적색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래. 처음에 사고사라 했잖아. 그런데 왜? 15년 전, 살인 혐의로 체포됐던 지수의 인터뷰 영상이 있어. 당시 정말 어렵게 촬영한 거래.
"(검찰 측은) '우리가 이미 증거가 있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네가 무죄라는 걸 증명할 수 있으면 풀어주겠다' '영장을 취소하겠다' 그렇게 이야기했대요. 그 증거가 뭔지, 제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어떻게 증거를 만들 수 있는지. 저는 제 머리카락이라도 어디에서 주워서 영화에서 보듯이 위증이라도 만들어내야 했나 했어요. 그랬더니 와서 보니까, 그 증거라는 게 부검보고서인 거예요."
-한지수, 당시 살인 혐의로 체포
부검 보고서가 증거래. 아까 우리도 봤던, 사망 원인이 '뇌 손상에 의한 뇌부종'이라 쓰여 있었던 그 부검 보고서. 근데 이걸 봐봐.
이건 마리스카의 2차 부검 보고서야. 그러니까 부검 보고서가 새로 작성된 거야. 새롭게 작성된 2차 부검 보고서를 가만히 보니까 다른 부분이 있어.
법의학 의견 : 왼쪽 팔뚝과 오른손 손바닥 부분의 반상출혈은 방어 과정에서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높다. 이 외상은 개인에 의해 발생될 수도 있지만 여러 명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후두 내부출혈 있음.
사망 원인 : 경부 압박 질식
-2차 부검보고서 中
사망원인이 뇌부종에서 경부압박질식사로 바뀌었어. 누군가 마리스카를 목졸라 죽였다는 거야. 손목에 방어흔이 발견되면서 범인이 한 명 이상일 가능성까지 제기된 거야.
어쨌든 이건 공식적인 보고서야. 지금 온두라스에서 지수와 댄은 살인사건의 용의자야. 온두라스 검찰은 이런 주장도 펼쳤어. '지수와 댄은 연인사이었다. 그러다 댄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 지수가 화가 났고, 세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다투던 끝에 댄과 지수가 홧김에 마리스카를 살해했다'고.
"살인이라뇨! 전 그냥 마리스카를 도운 것 뿐이에요! 그리고 저랑 댄이 연인 사이였다고요? 말도 안돼. 저 그냥 한국 가서 조사 받을게요."
그런데 이 얘길 들은 영사가 조용히 고개를 저어. 한국에 갈 수가 없대.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
"자국민은 원칙적으로 적색 수배가 내린다고 하더라도 요청 국가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수 씨는 이집트에서 체포가 됐거든요. 제3국에서 체포가 될 경우 보통 국제경찰들 간의 공조 원칙에 따라서 요청 국가로 인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당시에 체포 요청 국가가 온두라스였거든요. 그러니까 이집트 정부는 온두라스로 지수 씨를 인도하는 것이 아마 자기들 정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상욱 변호사, 한지수 사건 담당
제3국에서 체포가 된 이상, 한국이 아닌 온두라스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결국 지수는 이집트 유치장에 갇힌 지 3주 만에 온두라스행 비행기에 오르게 돼.
그런데 이상해. 온두라스로 간다던 비행기가 얼마 안 가 착륙을 하는 거야. 이집트에서 온두라스까지 14시간은 걸릴 텐데, 6시간도 안 돼서 내리라는 거야. 도착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어.
지수가 의아해하며 내리는데, 어떤 남자가 지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등골이 싸해져. 그리곤 지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또다시 의심의 눈빛으로 지수를 살펴봐. 그리고 댄은 지금 어딨는지, 연락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 이 남자는 누구였을까?
"지수 씨가 온두라스로 송환됐을 때 첫번째로 본 사람이 네덜란드 명예 총영사라고 하는 클럭 씨였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굉장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모든 절차에 참관했었고요. 사실상 거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유럽연합의 주축 국가 중 하나고, 많은 중미 국가가 유럽연합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추측인데, 피해자의 국가인 네덜란드 정부에서 온두라스 정부에 뒤늦게 강력하게 항의를 해서 압력이 충분하게 온두라스 정부에 가해지지 않았나. 그 배후에는 총영사 클럭 씨의 입김이 확실하게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하상욱 변호사, 한지수 사건 담당
이제 지수가 왜 체포됐는지 알겠어? 알고보니 마리스카는 네덜란드에서 꽤 유명한 재력가 집안의 딸이었어. 마리스카 부모 입장에서 보면 외국에 간 딸이 하루아침에 떠난 거잖아. 얼마나 허망하고 원통해. 아마도 그들은 딸이 사고로 죽은 걸 인정하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 온두라스 측에 범인을 잡아달라고 압박을 가한 걸로 보여. 다행인 건, 지수가 네덜란드에 억류되진 않았다는 거야.
결국 2009년 9월 23일. 지수는 로아탄을 떠난 지 1년 만에 살인자 누명을 쓴 채 다시 로아탄 땅을 밟게 돼. 천국의 섬이었던 그 곳이 한순간에 지옥이 된 거야.
26살의 한국인 여성 한지수. 1년 전 온두라스 로하탄섬에서 일어난 한 네덜란드 여성의 죽음과 연루됐어. 처음엔 단순 사고사로 처리돼 풀려났지만, 부검서가 다시 써졌고, 살인 혐의로 체포돼서 온두라스로 다시 끌려왔어. 지금 그녀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 천국의 섬이 지옥으로
지수는 이제 온두라스 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해. 지수는 온두라스에 압송된 그날, 곧바로 1차 심리를 받았어. 피해자의 인적 사항과 피해 사실 등을 확인하는 절차야. 그런데 지수는 변호사 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했어.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선임해 준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오지 못 한 거야. 하필 이때 온두라스에 쿠데타가 벌어졌거든. 로아탄섬으로 오는 배도, 비행기도 올스톱. 결국 1차 심리 후 지수는 차가운 유치장에 구금됐어.
2차 심리. '예비 심리'라고 불리기도 해. 이 절차는 우리나라의 구속적부심 단계에 해당돼. 구속이 합당한지 판단하는 절차야. 범죄가 중대하지 않거나 검사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풀려나서 불구속 수사를 받게 돼. 하지만 구속이 받아들여진다면, 지수는 유치장이 아닌 교도소에 수감이 돼.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해.
유치장에서 구금된지 일주일째, 2차 심리가 열렸어. 감옥을 가느냐, 마느냐, 지수의 인생이 걸린 아주 중요한 순간이야. 검사 측은 증인들과 부검의를 데려와서 지수의 살인혐의를 강력하게 주장해. 한편 지수 측에서는, 부검보고서의 사인이 바뀐 이유에 대해 추궁했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지수가 그날을 회상하며 쓴 글이야.
"심리가 시작되자마자 검사는 다짜고짜 살인이라는 주장을 아무런 설명 없이 합니다. 객관적인 입장에 있어야 할 검사가 마치 마녀사냥 하듯이 무고한 사람을 몰고 가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하였습니다. 재판의 공정성 역시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저는 현재 온두라스의 라세이바 감옥에 수감 중이며 3차 심리 및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수의 일기 中
결국 구속된 거야. 증거도 충분하고, 외국인이라 도주의 위험이 있대. 본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지수는 꼼짝없이 감옥에 있어야 해. 지수는 2차 심리에서 당연히 풀려날 줄 알았대. 그런데 예상과 달리 구속이 확정된 거야.
그런데 말야. 이쯤에서 궁금한 사람 있지 않아? 그래, 댄. 검찰이 지수와 댄을 공범으로 지목했잖아. 그럼 댄도 구속이 됐을까? 아니. 댄은 체포조차 안됐어. 적색수배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대. 애꿎은 지수만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야.
지수의 구속 확정에 가장 절망한 사람은 가족이야. 지수의 아빠, 한원우 씨는 딸의 체포 소식을 듣고 온두라스로 급히 날아왔어. 생업이고 뭐고 다 접고. 막내딸이 온두라스의 교도소에 수감됐다니까.
그래도 한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어. 신원보증서를 받으면, 지수가 불구속 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도주의 위험 때문에 구속수사가 결정됐잖아? 근데, 만약에 한국 정부가 신원보증을 서 주면 불구속 수사가 가능해 질 수 있어. 정부에서 지수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겠다'라는 확인서를 써주고, 온두라스 내 지수의 거주지만 확인되면 불구속 수사가 가능하다는 거야.
아빠는 곧장 대사관으로 달려갔어. 우리 지수 절대 그런 애 아니라고, 재판은 받을테니 제발 감옥에서만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어. 하지만 아빠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어. 지수 아빠의 간절한 청원은 거절당했어.
"우리 대사관은 한지수 씨의 어려운 사정을 존중하여 외교통상부에도 이를 건의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정부가 개인에 대해 보증할 수 없다'는 일관된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신병확보에 대한 어떠한 서면 보증도 제공할 수 없음을 알려왔습니다."
-대사관 입장
선례가 남으면 범죄자들이 이걸 악용할 수 있어서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대. 냉정하게 말하면, 대사관의 입장에선 한지수란 사람이 정말 억울한지, 아니면 정말 살인범인지 아직 모르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다르지. 아빠는 오직, 지수를 감옥에서 빼와야겠다는 생각뿐이야.
"온두라스는 큰 그룹 두 갱이 있어요. 큰 'M18'이랑 'M13'이라고 하는 그 두 그룹이 있어요. 이들은 중미에 조직화 된 아주 큰 그룹이에요. 그래서 이들은 보는 대로 서로 죽여요. 상대방 감옥에다가 못 나오게 막고 불 질러서 다 태워죽이는 거죠. 그 안에서도 마약이 또 팔리고. 돈 있는 사람은 에어컨 있는 방에 침대 놓고 혼자 살기도 해요. 이해가 안 갈텐데 그 안에도 대표가 있어요. 총까지 들고 있어요. 같은 죄수인데."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31년째 거주
온두라스는 살인율이 세계 1, 2위를 다투는 나라야. 교도소 환경은 최악이야. 이 온두라스 교도소엔 세 가지가 없거든. 일단 죄수복이 없어. 입고 온 옷 그대로 빨아 입어야 해. 그리고 밥을 안 줘. 쌀이랑 밀가루만 조금 주고 알아서 해 먹으라는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칙'이 없어. 돈만 있으면 에어컨 나오는 독방도 쓰고 마약도 실컷 할 수 있대. 감옥 안에서 무슨 일을 저질러도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어. 이건 그냥 말이 교도소지, 흉악범들의 왕국인 거야.
이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스물여섯밖에 안된 막내딸 지수가 갇힌 거야. 지수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어?
▲ 감옥에서 살아남기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아버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어. 방송국인데, 지수의 사건을 취재하고 싶다는 거야. 근데 교도소는 촬영이 안되잖아. 하지만 취재팀은 촬영에 성공했어. 아까 감옥 안 지수의 인터뷰가 담겼던 영상. 그게 그때 찍었던 거야. 취재팀이 어렵게 카메라에 담은, 온두라스 여자교도소 내부를 보여줄게.
그랑하 교도소 관계자: 현재 수용된 인원이 남자 405명에 여자 14명입니다.
PD : 여자들은 어떤 죄로 들어오나요?
그랑하 교도소 관계자: 마약, 살인죄, 존속살인죄 등으로 들어옵니다.
물론 남자교도소에 비해 여자교도소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야. 하지만 여죄수들 역시 대부분 살인죄로 복역 중인 사람들이야. 이건 지수가 교도소에서 쓴 일기장이야.
"11월 9일 월요일 오후였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가보니 감시대의 유리창이 보기 싫게 깨져 있다. 연달아 남자 죄수 감옥 쪽에서 돌덩이, 그릇 등이 날라온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일라리아가 죽었다. 탕! 탕! 두 발의 총소리. 죄수 중 한 명이 쏜 거라고 했다. 이곳에서 조용히 형을 살던 한 여인은 그렇게 어느 날 느닷없이 죽었다."
-지수의 일기 中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지 상상이 돼? 하지만 지수가 진짜 두려운 건 따로 있어. 이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 지수는 3차 심리와 본 재판이 남아있어. 원칙적으로 3차 심리는 2차 심리 이후 60일 후, 본재판까지 보통 6개월 정도가 걸린대. 근데 잊지 마. 여긴 '원칙'이 통하지 않는 무법지대 온두라스야. 사법 정체가 굉장히 심각한 나라야. 6개월 걸린다는 재판? 2년이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대. 그렇게 열린 재판에서 만약 누명을 풀지 못하면? 지수가 받게 될 형량은 무려 30년이야. 여차하면 이 지옥의 교도소에서 30년을 살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지수에게 유일한 희망은, 나를 찾아오는 아빠였어. 사실 아빠가 온두라스로 떠날 때 다들 말렸대. 하지만 아빤 주저하지 않았어. 말도 안 통하는데 손짓 발짓 써가며 숙소를 구하고, 매일 40키로를 달려 지수의 면회를 다녔어. 교도소에 갈 땐 시원한 콜라와 화장품도 두둑이 챙겨갔대. 죄수들에게 점수를 따려는 거야. 지수 잘 봐달라고. 당시 아빠의 모습이야.
"지수가 지금 몸이 안 좋은 상태니까. 혹시라도 또 아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가고…"
-지수 아빠 한원우, 교도소 면회 당시 인터뷰
"아버지가 노력을 많이 했죠. 굉장히 억울해서 딸이 막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 가지고 얼마나 참.. 기가 막히겠어요. 그래서 막 안타까워하는 그런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31년째 거주
"사실 남의 일 같지 않았죠. 말이 통하지도 않고 음식도 맞지 않고,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도 오직 딸을 위해서 그 아버지의 사랑을 옆에서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상욱 변호사, 한지수 사건 담당
"면회 시간은 세 시까지인데. 지수가 그 세 시만 되면 '아빠 조금만 더 있다 가, 조금만 더 있다 가' 그렇게 얘기를 하죠.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만 제가 그 버스를 놓치면 제가 무슨 일을 당하면 지수를 찾아갈 사람이 없거든요.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입니다."
-지수 아빠 한원우, 교도소 면회 당시 인터뷰
아빤 지수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대. 늘 밝게 웃으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 '잘 될거야. 걱정마. 아빠가 있잖아'라고. 하지만 정작 아빤 매 순간 초긴장 상태로 지내야 했어. '내가 잘못되면 지수를 구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 마음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 '지수를 구하라' 작전 개시
이런 아빠의 진심에 하늘도 감동한 걸까. 며칠 뒤,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해. 한국 취재팀이 촬영한 방송이 전파를 타면서 사람들이 지수의 사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야. 지수의 친구들과 언니 지희 씨도 기세를 몰아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해.
"사람들 관심이 이렇게 막 증폭되는 시점에서 어떤 구심점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관심이 그대로 흩어지면 안되니까. 구명 카페를 열게 됐죠. 전체 사건을 번역해서 올린 분도 있었고, 국제기관에 청원하시는 분도 있었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굉장히 많죠."
-곽윤영, 당시 구명 카페 개설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지수의 구금 상황을 장관 회의에서 언급하기도 했어.
"우리 국민이 어느날 갑자기 해외 공항에서 체포돼서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이같이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절규를 보내고 있는데. 이럴 때 정부의 존재가, 국가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외교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정동영 국회의원, 2009년 11월 16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며칠 뒤, 드디어 긴급대응팀이 꾸려졌어. 지수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어. 총 8명의 전문가가 한 자리에 모였어. 이 중에 하상욱 변호사도 있었어.
"당시 사회적으로 이 사건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소위 '한지수 작전'이 개시됐습니다. 판사 출신 변호사, 경찰 영사 출신 경감, 국과수의 전문 법의학자, 저까지 한 팀을 꾸려서, 저희들이 온두라스로 급히 파송됐습니다."
-하상욱 변호사, 한지수 사건 담당
마치 지수를 구하러 가는 어벤져스 같았어. 하상욱 변호사는 칠레, 스페인, 에콰도르, 무려 세 나라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중남미법 전문 국제 변호사야. 이렇게 최고의 전문가들로 이뤄진 대한민국 드림팀은 곧장 온두라스로 날아갔어.
자, 이제 재판에서 지수의 결백을 입증할 단서를 모아야 해. 근데 문제가 있어. 지수가 지금 감옥에 있잖아. 사건 당일 놓친 단서는 없는지 또 체포 과정에서 인권 침해는 없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면회로는 한계가 있어.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불구속 수사'야. 일단 지수를 감옥에서 빼와야 해.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개인의 신원보증은 어렵다는 입장이야. 그런데 그때, 누군가 지수의 신원보증을 자처하고 나섰어. 바로 박명하 목사님이야.
"젊은 20대 처녀가 온두라스 감옥 그 좁은 곳에 있는데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일단은 빨리 빼내야 된다… 당연한 거죠. 한인들이 안 도우면 누가 도와요. 다들 한마음으로 도와야 한다고 추천서에 청원서에 탄원서에 다 서명하고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해 줬죠."
-박명하 목사, 온두라스 31년째 거주
2009년 12월, 목사님의 도움과 드림팀의 노력으로, 지수에게 가석방 처분이 내려졌어. 불구속 상태에서 사법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된 거야. 교도소 수감 3개월 만의 일이었어. 지수와 아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야. 아직 무죄를 받기까진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아.
▲ 결정적 단서
드림팀은 본격적으로 지수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 시작해. 검찰이 주장한 마리스카의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 검찰은 목에서 발생한 내부 출혈이 경부압박질식사의 근거라고 주장했어. 그런데, 드림팀의 법의학자는 "목 내부에 출혈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목을 졸랐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어. 경부압박과 목 내부의 출혈은 상관관계가 약하다는 거야.
드림팀은 사건 당일 마리스카가 실려갔던 병원을 찾아갔어. 그리고 그날 당직 의사를 만나서, 사망한 마리스카의 목에 출혈을 봤냐고 물었어.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와.
"아, 그거요. 출혈이 있었을 겁니다. 제가 인튜베이션을 했거든요."
인튜베이션. '후두경'이라고 하는데, 기도 확보를 위해 입이나 코로 튜브를 삽입하는 기구야. 이 후두경을 목 안으로 넣다보면 출혈이 있을 수 있다는 거야. 검찰이 타살의 증거로 제시한 목 내부 출혈이 어쩌면 후두경으로 인한 상처일 수도 있다는 얘기야.
경부 압박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얼굴의 '울혈'이야. 얼굴에 피가 고여 있어야 경부 압박을 의심할 수 있어. 그런데 마리스카의 얼굴에서는 울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마리스카의 2차 부검 보고서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야. 사건 당일에 마리스카가 술을 마시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는데도, 부검 보고서에는 '알코올: 미검출'이라 쓰여 있어. 이건 뭐 보면 볼수록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고서인 거야.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지수가 이집트에서 온두라스로 이송된 날짜, 기억해? 2009년 9월 23일이야. 그런데 2차 부검 보고서가 작성된 날짜가 2009년 9월 23일이야. 이게 무슨 뜻이야? 지수가 온두라스로 이송된 그날, 2차 부검보고서가 작성된 거야. 증거가 있어서 체포한 게 아니라, 체포를 먼저 하고 나중에 증거를 만들어낸 거야.
"온두라스 검찰에서 이렇게 부검보고서를 바꿔야 지수 씨에 대한 구속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공범으로서의 가능성을 있다는 것을 법원에 강조하기 위해서 부검보고서를 급조한 것입니다."
-하상욱 변호사, 한지수 사건 담당
드림팀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어. 2차 부검 보고서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그럼 이제 마리스카를 부검한 부검의를 찾아가야지.
"제가 부검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어떤 대답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법의학국으로 가보세요."
-부검의
"1,2차 부검 보고서가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부검보고서가 바뀐 게 아니고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본 내용은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법의학국 관계자
사실 이 부검의는 산부인과 의사였어. 부검의 자격증도 없고, 부검을 해 본 경험도 없어. 마리스카가 첫 부검이래.
▲ 15년 후에 만난 지수
2010년 10월 16일. 드디어 지수의 본 재판이 열렸어. 이집트에서 체포된 지 무려 496일 만에 열린 재판이야. 드림팀은 자신 있었어. 지수가 무죄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니까. 하지만 여기는, 예측 불허의 나라 온두라스야. 거기다가 네덜란드의 큰 압박도 있어.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거야.
과연, 지수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꼬꼬무'가 사건 15년 만에, 지수 씨를 만났어. 과연 지수는 한국에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온두라스 감옥에 있을까? 이제는 마흔한 살이 된 지수를 지금 만나볼게.
"안녕하세요. 저는 온두라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온두라스에서 갇혀 있었던 한지수라고 합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고요. 한국에서 회사 다니면서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지수는 무죄 판결을 받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어. 거의 500일 만의 일이었어.
"온두라스 형사 소송법 제339조에 의거 본 재판부는 한지수 씨의 무죄를 선고합니다."
-주심 판사
아까 감옥에서 쓴 지수의 일기장 있었잖아. 거기에 이런 게 적혀 있었어.
-하고 싶은 사치스러운 일
① 네일받기 ② 워터파크 or 놀이공원 디즈니랜드 가기 ③ 번지점프 ④ 스쿠버다이빙… ⑩ 조깅 ⑪ 공부 ⑫ 연애
사치스러운 일이라 하기엔 너무 소박하지? 하지만 그때의 지수에겐 너무나 간절한 일이었어. 그럼 지수가 한국에 와서 이 중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뭐였을까? 사실, 거의 하지 못했어.
"사실 벅차고 기뻤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긴 한데 사실 그렇지 못했어요. 좀 불안하고 어떻게 보면 그 일을 겪으면서 제가 정신적으로 되게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한국에 돌아가는 것 자체는 기쁘지만, 그 기쁨을 충분히 즐길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나 때문에 가족이 너무 고생을 했다. 이런 죄책감이 컸던 것 같아요. 내가 잘못을 크게 했고, 그거를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고, 나는 빚을 졌다… 이 생각이 사실은 좀 강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습니다."
-한지수, 온두라스 교도소에서 3개월 수감
사실 지수의 언니 지희 씨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대. 그런 언니가 지수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던 거야. 나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언니, 나 때문에 생업을 관둔 아빠... 막상 돌아와보니까 나 때문에 가족의 일상이 너무 많이 무너져 있었대. 그 미안함, 죄책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지수는 다시 힘을 냈어. 모든 게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거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지수의 곁을 지켜주는 아빠.
"예전에는 좀 죄송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빚을 졌고, 죄송하고, 내가 갚아야 되고,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감사하고 내 옆에 있어서 고맙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같이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게 너무 좋고. 저는 그냥 그 감옥에서 시간 버티기, 그리고 내 죄책감이랑 싸우기. 이거 두 개 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아빠는 그 당시에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거죠. 저는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그 당시에는 힘든 줄도 몰랐어요. 위험한 지도 몰랐고. 그런데 아빠는 그거 자체가 되게 긴장이셨더라고요. 일부러 바지도 제일 허름한 거 입고 다니시고, 걸어다닐 때는 벽 쪽에 붙어 다니셨대요. 잘못되면 딸이 잘못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정말로 사실 너무너무 신경을 많이 쓰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사실 꺼내는 것조차 원치는 않으세요… 제가 뭐라고 이야기를 못하겠어요. 뭐랄까 저도 아빠가 그 당시에.... 아빠가 그 당시에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마음이었고 이런 걸 생각을 하면, 좀 그냥. 제 아빠여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너무 상상도 못할 것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당시에 아빠한테 갈 수 있다면 '아빠 덕분에 나 잘 나와 있어' 이렇게. '그러니까 괜찮아. 너무 염려하지 말고.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얘기했겠죠."
-한지수, 온두라스 교도소에서 3개월 수감
우리나라 헌법 제2조 제2항엔 이런 말이 적혀 있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라고. 오늘따라 이 '의무'라는 단어가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것 같아. 오늘 사건을 계기로 혹시나 해외 어딘가에서 간절히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노력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거든요. 그 관심이 정말로 생각보다 큰 힘을 가졌다는 걸, 이 모든 게 지나가고 나서야 안 것 같아요."
-한지수, 온두라스 교도소에서 3개월 수감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