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국내 최악의 열차 사고가 터진 그날의 이야기를 돌아봤다.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라는 부제로 국내 최악의 열차 사고가 발생한 그날 이야기를 조명했다.
1977년 11월 11일, 전북 이리의 유일한 공연장인 삼남 극장에는 수백 명의 관객들이 당대 최고의 가수 하춘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사이클의 여왕이라 불리며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키던 그가 무대에 오르기 전 개그맨 이주일이 무대에 올라 바람을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고 극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극장, 하지만 극장뿐만 아니라 이리 시내가 일순 처참하게 변했다. 길바닥은 유리창 파편으로 뒤덮였고 집과 건물은 무너져 그 안에서 서로를 찾고 구하려는 외침과 몸부림이 가득했다.
이 사고는 바로 국내 최악의 열차 사고인 이리역 폭발 사고. 1400여 명의 부상자와 59명의 사망자가 나온 이 사고로 이리역 반경 8km 이내까지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선로 옆 창인동 전체 가구 43%가 붕괴됐다.
이리는 일순간 폐허가 되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폭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이때 기자의 감으로 이리역 주변을 살피던 나훈 기자는 맨발에 새 신발을 신고 떨고 있던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화약 호송원이었던 신 씨를 발견한 기자는 그가 폭발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국내 유일의 화약 회사으 직원이었던 신 씨는 인천에서 광주까지 화약 배달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배달하던 화약 중 가장 많은 양은 다이너마이트.
나훈 기자는 그를 경찰에 넘겼고,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조사 끝에 신 씨가 화약 상자들 옆에서 켜뒀던 촛불이 폭발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열차 대기 중 저녁 겸 술을 마신 신 씨는 화약 열차 문을 열고 들어와 화물칸 가운데 침낭을 깔았다. 그 옆에는 각종 화약 연료 수십 상자가 쌓여있었다. 그런 가운데 신 씨는 쌀쌀한 날 씨에 머리맡에 촛불을 켜두고 잠이 들었던 것. 그리고 그가 깨어보니 이미 화약 상자에 불이 붙고 있었던 것이다.
7년째 호송원으로 지낸 신 씨가 화약 상자 옆에서 촛불을 켠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취사도구로 밥과 라면까지 만들어 먹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화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없었던 것이다.
화약 회사는 화약류 취급 면허가 없는 이에게 호송 업무를 맡겼는데 해당 회사에는 화약류 취급 면허증을 소지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이 사고로 호송원 신 씨는 물론 그에게 일을 맡긴 화약 회사 대표도 바로 구속됐다. 그리고 하루 동안 이리 역에 화약 열차를 방치한 배차 담당자도 구속됐다. 급행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루 동안 열차를 방치시켰던 것.
그런데 사고 규모에 비해 적어 보이는 사망자 수가 의아함을 자아냈다. 당시 신원 미상의 희생자들은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되었던 것. 특히 이리는 많은 타지 사람들이 머물다 가던 곳이었기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이리역 바로 옆 홍등가에서 일하던 여성들도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되며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참사 일으킨 신 씨에 대해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성물건파열치사상죄 징역 10년 선고했고 이는 확정됐다.
그리고 화약 회사 사장은 1심에선 징역 8개월, 항소심에서는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그는 이후 대국민 사과와 함께 이리역 주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90억 원을 내놓기로 했다.
이리 지역의 재난에 대한 수습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역대급 일사불란했던 당시 정부는 새 이리 건설 계획을 세워 이리를 완전히 다른 동네로 만들었다.
26만 명이 복구 작업에 동원되었고 전국에서는 각종 구호품과 성금이 모아졌다. 그렇게 모인 성금은 총 6억 6천만 원.
다시 사고를 함께 겪었던 하춘화는 이재민 돕기 공연을 해 수익금을 모두 이리시에 기부했다. 또한 최근 진행된 40기 추모 공연에도 참석했다. 그에게 이리는 같이 생사고락을 견뎌냈기에 잊을 수 없는 도시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리 사람들은 상처를 추스르고 일상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가족과 소중한 이들을 잃은 이들의 마음만은 회복할 수 없었다.
이리역 폭발 사고 후 1981년 경산에서는 또다시 대형 열차 사고가 터졌다. 사망자는 무려 55명에 25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에 이리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헌혈 캠페인을 진행하고 발 벗고 나서 경산 시민들의 회복을 위해 애썼다.
그렇게 극복을 돕는 손길이 반복되어 반복되는 참사를 버텨낸 것이다. 도움이 도움을 낳는 법.
이리시는 이후 익산시가 되었고 사고의 피해자들은 보상으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거나 보상금 등을 받게 되었다. 이에 혹자는 이리역 폭발 사고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니냐며 사고 덕분에 잘 살게 된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
그러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생존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했다. 적어도 누군가의 희생에서 비롯된 발전이라면 마냥 좋아할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살아남은 자에게는 이리역 폭발 사고는 상처로 남았다는 말을 남겨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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