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봉준호 감독이 배우 최우식을 영화 '옥자'와 '기생충'에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기묘한 측은지심 때문"이라 밝힌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평범한 모습을 갖고 있는데, 어딘가 짠하게 느껴져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이야기다.
최우식을 지켜봐 온 대중이라면, 봉 감독의 이야기에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선하고 어려 보이는 외모로 학생 역할을 많이 소화해 기본적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최우식은, 공교롭게도 죽거나, 맞거나, 여자에게 차이거나, 안쓰러운 배경을 지닌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해 왠지 모르게 짠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다. '윤스테이', '서진이네' 같은 나영석 PD의 예능에 출연해 살짝 어리숙한데 귀여운 실제 성격을 보여준 것도, 최우식만의 순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크게 한몫했다.
그런 최우식과 '연쇄살인마' 캐릭터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그런데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감'에서 그 조합이 현실화 됐다.
지난 9일 공개된 '살인자ㅇ난감'은 우연히 살인을 시작하게 된 평범한 대학생 '이탕'(최우식 분)과 그를 지독하게 쫓는 형사 '장난감'(손석구 분)의 이야기를 그리는 범죄 스릴러물이다. 지난 2010~2011년에 연재돼 큰 인기를 모았던 꼬마비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연쇄살인마'라는 단어만 두고 최우식과 연결 지으려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던 그림이, '평범한 대학생이 우연한 살인을 계기로 연쇄살인마로 변모해 간다'는 구체적인 설정을 덧씌우니, 최우식과도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평범한 대학생'을 누구보다 잘 소화할 최우식이란 걸 아니까. 또 그런 평범한 캐릭터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저지를 때의 충격과 극적 재미가, 최우식과 만나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기대가 생겼다.
기대만큼 최우식은 '살인자ㅇ난감'에서 우발적 살인 후 '악인 감별 능력'을 각성하는 연쇄살인마 이탕 역으로 자신의 장점 발휘와 새로운 매력 어필을 동시에 해냈다. 초반 평범한 대학생 이탕을 연기할 땐 최우식 특유의 어리숙하고 무기력한 캐릭터 연기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러다 살인을 저지르며 변모하는 이탕의 모습을 보여줄 때의 최우식은, 또 새롭다. 그동안 선역을 주로 맡아 온 최우식에게서 볼 수 없었던 광기 어린 눈빛, 잿빛 표정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 최우식이 생각한 살인마 이탕
'살인자ㅇ난감'은 공개 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단숨에 국내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고, 공개 첫 주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TV 부문 비영어 2위, 2주차에는 결국 정상에 올랐다. 훌륭한 성적표를 얻어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작품 공개 전 최우식은 많이 떨었다.
"떨렸죠. '그해 우리는' 이후 오랜만에 연기로 인사드리는 거라, 많이 떨렸어요. '그해 우리는'을 제 주변에서 너무 좋게 봐주셔서, 이번 작품 부담감이 더 컸던 거 같아요.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 더 그런 것도 있고요. 원작을 좋아하셨던 분들이 어떻게 반응해 주실까, 긴장 많이 했어요. 다른 작품들에서는 제가 잘할 수 있는 모습을 연기했다면, 이건 다른 사람들이 아는 이탕, 최우식이 생각하는 이탕을 보여줘야 하니 부담감이 컸어요. 그래도 작품 공개 후 주변에서 반응들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이젠 긴장을 좀 많이 낮추고 있어요."
무기력한 대학생 이탕은 어느 날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취객과 시비가 붙고, 취객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피하려다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지만, 자신이 죽인 남자가 12년간 지명수배된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탕의 평범하기 그지없던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 이후 이탕의 살인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가 죽이는 사람은 모두 악랄한 범죄자이고, 이탕을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는 살인 증거들은 매번 사라진다. 마치 하늘이 이탕에게 '악인 감별 능력'이란 것을 내려주고, 잡히지 않게 보호하는 것처럼. 이탕은 조력자 노빈(김요한 분)의 도움을 받으며 '배트맨과 로빈' 같은 다크히어로처럼 악인들을 직접 처단해 나간다.
최우식이 '살인자ㅇ난감'을 선택한 건, 이런 이탕 캐릭터의 심경 변화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탕의 심경 변화가 연기자로서 재밌을 거 같았어요. 그리고 원작을 재밌게 읽어서, '이걸 내가 하면 어떤 모습으로 할까' 궁금했어요."
특히 최우식이 신경 썼던 부분은, 이탕이 자신에게 '악인 감별 능력'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살인으로 처단해도 된다고 스스로 타협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 내는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이 첫 살인 이후 겪는 심경 변화와,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나를 많이 고민했어요. 원작에서는 이탕이 스스로 타협을 한 걸로 나오는데, 전 이탕이 타협을 하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걸 원했어요. 아무리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고 타협하기까지, 많이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만화에서 탄생한 이탕이란 캐릭터를 바닥에 발을 딛고 붙어 있는 역할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살인'이란 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쉽게 접하는 소재지만, 그걸 현장에서 피부로 맞닿는 사람은 얼마나 큰 흔들림을 겪을까, 이 친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난관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걸 또 너무 과장하지 않게 표현하려 했어요. 작품에서는 이탕을 '다크히어로'라고 표현하지만, 전 그런 표현을 부정해요. 이탕은 계속 타협을 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서, 그런 심경 변화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탕이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죽여 나가는 연쇄살인마가 된 후, 그의 외모도 변화를 맞는다. 이마를 덮던 머리카락을 위로 넘겨 전보다 얼굴을 더 드러냈는데, 눈썹이 유독 흐려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런 이탕의 세세한 외모 변화는 최우식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탕이 변화를 겪은 후 갑자기 머리를 올리고 눈썹을 지우죠. 제가 눈썹을 지우자고 한 건, 눈썹이 없으면 사람이 흐리멍덩해 보이잖아요. 어디서 들었는데, 사람을 인식을 할 때 코랑 눈썹이 중요하대요. 이탕의 그런 외모 변화는 살인마라서 외모를 더 강하게 보이려 한 게 아니라,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사람들이 자신을 더 못 알아차렸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한 거예요. 더 흐리멍덩해 보이는 게, 거기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어요."
▲ 기대만큼 좋았던, 손석구X이희준과의 연기
이탕의 첫 살인에 참고인 조사로 만난 강력계 형사 장난감은 본능적으로 이탕에게 수상함을 느끼고, 이후 기묘하게 연이어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과 이탕의 연관성을 추적한다. 그리고 이들 앞에 형사 출신의 또 다른 살인마 송촌(이희준 분)이 나타나면서, 사건은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원작의 기발하고 파격적인 스토리를 가져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살인자ㅇ난감'은 주조연을 망라한 배우들의 탁월한 캐릭터 플레이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최우식은 이탕과 함께 작품의 다른 축을 이루는 장난감 역 손석구, 송촌 역의 이희준과의 연기 호흡에 시작부터 기대가 컸다.
"그 형들이랑 연기를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석구 형은 제가 '나의 해방일지'도 재밌게 봤고, 예전에 형이 출연한 단편영화도 재밌게 봤거든요. 희준형도 마찬가지고요. 두 분 다 제가 사석에서 본 적이 없어서, 현장에서 보면 어떨까, 어떤 스타일로 작품에 임할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형들을 볼 땐 떨리기도 했어요. 현장에서는 마치 놀이터에 온 것처럼 형들과 재밌게 잘 지냈어요. 감독님과 형들이랑 모두 나이차가 별로 안 나서, 작품 분위기는 무거울 수 있지만 현장은 서로 막 개그욕심으로 웃기려 하고 그랬어요. 이탕, 장난감, 송촌 셋이 다 같이 만나는 지점이 두 번 밖에 없어서, 그게 좀 아쉬워요. 매번 만날 때마다 재밌었거든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총 8부작인 '살인자ㅇ난감'은 4부 말미 송촌이 처음 등장한 이후 분위기가 확 바뀐다. 그전까지 이탕이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지의 서사가 중심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이탕을 각각 쫓는 장난감, 송촌의 이야기가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최우식은 자신의 분량이 후반부에 줄어드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살인자ㅇ난감'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봤다.
"어떤 이들에게는 작품을 볼 때, 누가 주인공이고 아니고가 중요할 수도 있겠죠. 전 이 작품의 스토리텔러지, 주인공이란 롤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 모든 역할들, 단역 하나하나 조차도 각자의 포지션이 있는 거라 생각해요. 후반으로 가서 제 분량이 없다고 해도, 전 다 좋았어요. 모두가 이탕의 손을 잡고 너머의 이 세계에 들어왔다면, 그 후에는 장난감의 입장으로도 보고, 나중에 송촌의 입장으로도 보게 될 때, 그때 재밌는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 만족합니다."
▲ 의심과 걱정이 많은 성격, 그게 성장의 자양분
기묘한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선하고 짠한 이미지의 최우식이 살인마 캐릭터에 도전한 건 굉장한 '연기 변신'이다. 반면, 초반 평범한 대학생 이탕의 모습에서는 최우식이 '거인', '기생충' 등의 작품에서 보여온 캐릭터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역할을 고민할 때, '이건 전에 했던 거랑 비슷하니 이번엔 다르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보시는 분들이 제 연기를 보며 '저거 예전에 봤던 느낌인데?' 한다면, 그것도 저에 대한 숙제가 되겠죠. 전 연기할 때 캐릭터를 저한테 많이 맞추는 스타일이에요. 희준이 형이 송촌을 통해 갑자기 노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창작을 해야 하는 경험은 많이 못했어요. '거인' 이후에 주로 그런 스토리텔러나 성장통을 겪는 캐릭터를 비슷하게 해 왔는데, 제가 불편한 옷을 안 입으려 하는 것도 있고, 제가 잘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찾는 거 같기도 해요. 오히려 더 뭐를 안하고 담백하게 하려 했던 제 욕심 같아요. 앞으로 제가 더 걱정하고, 성장해야 할 부분이겠죠."
하지만 최우식의 과거 캐릭터들과 언뜻 비슷해 보였던 이탕이 연쇄살인마가 되며, 최우식의 연기에서도 새로운 모습들이 포착된다. 전형적인 연쇄살인마 캐릭터와는 결이 다른, 최우식만의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의 섬세한 표현력이 색다른 연기맛을 선사한다. 망치를 들고 달려들 때 순간 비추는 광기 어린 눈빛에서는 살인마 캐릭터의 잔혹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땐 킬러의 냉혹함도 느껴진다. 분명, 지금까지 봐 온 최우식과는 다른 모습이고,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연기다.
"이탕처럼 평소의 저와 다른 이미지를 연기하는데, 제가 만약 준비가 안 됐거나 스스로 부담스러워했다면, '안 어울린다'는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어요. 그럼 이 작품에 해가 됐을 텐데, 그런 모습들을 나쁘지 않게 봐주시니까 다행이라 생각해요. 이렇게 조금이나마 제 이미지가 변할 수 있구나 싶어요. 여태까지 연기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원해 쫓아가기보단, 제가 하면서 즐겁고, 감독님과 같이 풀어나가는 과정이 좋았던 작품들을 하려 했어요. 그래도 점점 더 저한테도 다른 얼굴들이 입혀지는 거 같아요. 이렇게 제가 하던 대로 하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변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우식은 겁이 많고 걱정과 고민도 많은 성격이라 밝혔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한다. 특히 연기를 대할 때 의심이 많다. 그렇게 자신의 연기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주변에 많이 물어보는 태도로 이어지곤 한다.
"자기 연기에 대해 100% 확신을 가지고 연기하는 배우가 과연 몇이 될까 싶긴 한데, 전 '내가 잘하고 있나' 많이 의심해요. 그래서 촬영할 때 감독님한테 많이 물어보는데, '살인자ㅇ난감'에서 유난히 더 그랬어요. 같이 하는 희준이 형, 석구 형한테도 많이 물었고요."
그런 걱정과 의심, 질문 속에서 최우식이 찾은 연기의 매력은 '현장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더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장에서 감독님과 배우들과의 호흡이 더 재밌고 즐거울 수 있을까, 그게 요즘 저의 초점이에요.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 뭔가를 억지로 하기도 싫고, '이 역할을 했으니 다른 역할을 해봐야지' 하는 욕심도 제게는 없어요. 이번에 희준이 형을 보며 많이 느꼈어요. 형은 캐릭터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A버전뿐만 아니라 B,C,D 버전까지 연구해요. 그리고 현장에 나와 정말 즐겁게 연기해요. 제가 여태까지 연기를 하면서, 그렇게 연구하며 즐거움을 가졌던 적이 있었나, 돌아봤어요. 데뷔하기 전에 연기학원에 있었을 때나 그랬지, 데뷔 후에는 그렇게 한 적이 없어요. 형을 보며 정말 배웠어요. 그런 과정들을 더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현장에서 석구형한테도, 요한이한테도 많이 배웠어요. 이런 과정들이 재밌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제가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현장에서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사진=넷플릭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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