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4일 방송된 '학교의 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서동주, 가수 겸 배우 김정민, 그룹 크래비티 정모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상한 모의고사
때는 1993년 11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S고등학교. 한때 서울대를 100명씩 보낸 적도 있는 강남 8학군의 사립 명문 남고야. 엄마들한테는 아들을 보내고 싶은 입학 희망 1순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기피 대상 1순위야. 교칙도 엄하고 공부도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거든. 고3은 새벽 5시에 등교하기도 했대.
등교할 때 교문에서 선생님들이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어. 왜냐? 두발 단속 때문에. 배드민턴 라켓을 학생들 머리 위에 대고, 채 바깥으로 머리카락이 튀어나오면 학교 앞에 있는 이발소로 직행해야 해. 그래서 이 학교 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아도 그냥 딱 보면 '쟤 S고 학생이구나' 할 정도였대.
두발 단속에 걸려 이발소를 다녀오면 무조건 지각이야. 그럼 또 체벌이 기다리고 있지. 지금은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30년 전에는 학교에서 체벌은 흔했지. 당시 S고 2학년이었던 민근이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폭력이 너무 난무했기 때문에 폭력이란 것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안 맞으면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든 적도 있었어요. '오늘 괜찮은데? 불안한데? 오늘 기록 깨나? 안 맞고 집에 가나?' 하면서. 소위 말하는 SKY를 가는 걸로 하면 전국에서 수위권에 들어서 부모님들 조차도 '거기서 3년만 버티면 명문대 가니까 참아라' 이런 기류가 팽배했던 것 같습니다."
-주민근, 당시 S고 2학년
그날은, 11월 전국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어. 당시 고3 수능생들은 진짜 수능을 앞두고 있고, 고2 재학생들은 진짜 같은 모의고사를 보면서 자기 실력을 검증하는 중요한 날이야. 모범생인 민근이는 고2 마지막 모의 수능이니까 더 긴장됐어. 그런데 이날, 이 학교와 학생들의 운명을 뒤바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
민근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1교시 시험을 기다렸어. 선생님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줬어. 학생들은 문제지에 있는 문제를 풀어 답을 OMR 답지에 적었어. 민근이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초집중해서 문제를 풀었어. 그런데 시험이 끝난 후, 선생님이 답안지를 안 거둬가는 거야. 오히려 학생들에게 OMR 답지를 돌려주면서 '집에 가서 채점해 봐'라고 엉뚱한 말을 했어.
당시 모의고사 시스템은, 큰 출판사들이 시험을 주관하고 학교들은 그중 한 곳을 선택해서 시험을 치러. 그리고 답지를 거둬서 다시 출판사에 제출하면, 채점해서 성적표까지 제공해 주는 거야. 근데 답지를 안 거둬가면? 공식 성적표가 나올 수 없잖아. 당연히 등수도 확인할 수가 없지.
"전국 모의고사라는 건 시험을 봐서 전국에서 내가 몇 등이나 되고, 어느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 보는 것인데. 말도 안 된다고 저희는 생각했죠."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어.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고 2교시 시험. 아이들은 일단 열심히 시험문제를 풀었는데, 이번에도 답안지를 안 거둬가. 이상하지? 민근이는 시험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어. 그리고 더 이상한 걸 발견해. 분명 '11월 모의고사'를 치르고 있는데, 시험지에는 '7월'이라고 적혀 있어. 아이들은 이게 단순한 인쇄 실수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돼.
"일부 학생들은 모의고사 시험날이니까 '학습지에 나온 모의고사 문제로 공부를 해야지' 했어요. 그리고 점심때 그걸 딱 폈는데, 학습지에서 준 것과 우리가 본 모의고사가 똑같은 거예요. '설마 오후에 보는 것도 똑같을까?' 하고 다 봤는데 당연히 똑같았죠."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학습지 속 문제지와 모의고사 시험지가 똑같은 거야. 이날 본 모의고사가 이미 기출문제로 나온 몇 개월 전 시험지였던 거야.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라면 허무한 상황이지. 자기 실력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공부를 안 한 아이들도 난리가 났어. 학생들은 인당 1500원이라는 모의고사비를 냈거든. 답답한 마음에 민근이는 선생님들한테 물어봤어.
"'왜 OMR 시트를 안 거둬가시나요? 그러면 우리는 평가를 어떻게 받는 건가요?' 물으니 (선생님들은) '집에 가서 해! 몰라' 하셨어요."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그래서 민근이는 모의고사 주관사에 전화를 걸어서, 7월이라고 쓰인 시험지를 받았다며 그 이유를 물었어.
"거기서 하시는 말씀이 '(시험지) 여분이 남았고 고등학생들의 학업을 돕는 차원에서 무료로 배포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학교에서 아이들을 속이고 가짜 시험을 치르게 한 거야. 당시 S고 2학년은 한 학급당 50명씩 총 20반이야. 모의고사비는 인당 1500원. 한 학년을 다 합치면 150만원 정도야. 돈을 빼돌릴 목적이라기엔 납득이 되지 않는 금액이지. 그래도 아이들은 돈 때문이라고 확신했어.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자주 있었거든.
주변 학교는 5천원, 만원씩 걷는 보충수업비를, 이 학교는 만 5천원에서 2만 5천원원까지 거의 2~3배를 거뒀어. 또 보충 수업 교재비도 원가보다 1, 2만원씩 비싸. 게다가, 야간 자율학습 전기세 명목으로, 매달 3천원씩 걷었어. 학생들한테 전기세를 걷는 학교야. 그게 끝이 아니야. 선배들 졸업선물 비용으로 2만원씩, 스승의 날 선물 산다고 또 만원씩. 툭하면 학생들한테 돈을 걷었대. 근데 정작, 졸업생들과 선생님들은 받은 게 없어. 그렇게 불만과 불신이 차곡차곡 쌓여오던 터에, 이 '가짜 모의고사' 사건이 일어난 거야.
"얼마나 돈을 걷고 싶었으면 모의고사비 얼마 하지도 않는 것까지 그렇게 했을까. 그리고 학생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러면서 이제 웅성웅성 평상시 학교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움직임이 일어났고, 급기야 그로부터 하루 이틀 뒤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 학교에 뿌려진 유인물
모의고사가 있고 며칠 후, 이른 새벽에 세 명의 아이들이 등교했어. 이 친구들은 오늘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했어. 정문을 통과한 아이들이 한 곳에 모였어. 셋 중 한 아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바로 이 전단지야.
"교장, 당신이 뭐가 대단하다고. 선생님들의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가?"
"공짜로 나눠줄 시험지를 1500원씩이나 받아먹고 시험 친 이유가 뭐냐?"
"당신 같은 인간도 교육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당신 조상과 후손들이 불쌍하다"
교장을 향한 학생들의 분노 섞인 메시지였어. 아이들은 학교의 모든 부조리 뒤에 교장선생님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이 많았거든.
"제가 봤던 것 중에 놀라웠던 건 선생님들 중에 차로 출근하시는 분이 있는데 약간 시동이 꺼지면서 차가 '붕~' 했는데 교장선생님이 창문을 내리라고 한 다음에, 운전하시는 선생님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을 봤던 것 같습니다."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출근 시간에 교장이 교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 저 같은 경우에는 인격적 모독을 많이 당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배가 나왔다. 머리카락이 없다' 심지어는 쇼핑백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 적도 있는데 '세컨드 집에서 오는 거 아니냐'. 그때마다 심한 인간적인 모욕을 느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기가 싫었어요."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을 욕하고 때리는 게 말이 돼? 아이들 사이에서는 교장에 대한 흉흉한 목격담이 퍼지고 있었어. 그 내용이 고스란히 세 학생들이 만든 유인물에 담긴 거야.
세 명의 아이들은 학교 여기저기에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어. 더 많은 아이들이 동조해 주길 바라면서. 등굣길에 유인물을 본 학생들이 삼삼오오 수군거리기 시작해. 바로 그때 "누구야! 어떤 놈들인지 찾기만 해 봐! 가만 안 둬!"라고 소리치며 유인물을 벅벅 찢는 사람이 있어. 바로, 교련 선생님이었어.
교련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기초군사훈련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야. 그가 이렇게까지 화난 모습은 아이들도 처음 봤어. 우선 일찍 등교한 학생들을 상대로 탐문이 시작됐어. 군용 점퍼를 입은 교련 선생님이 지휘봉을 눈앞에 갖다 대며 말해.
"누가 했는지 불어! 말하면 넌 빼줄게. 말 안 하면, 네가 범인이야!"
마치 형사가 취조하듯이 겁을 줬어. 겁에 질린 아이들의 입에서 진술들이 막 나와. 금세, 주동자가 있는 반에 선생님이 들이닥쳤어. 당시 그 반에 있던 성수는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대.
"고등학생이 돈이 없으니까 복사비를 걷은 거예요. '너 얼마 있어? 복사하게' 해서 저도 한 2천원 복사하라고 줬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오셔서 화가 많이 나셨고 걸린 애는 선생님이 아니까 일어나라고 했고 '복사비 대준 놈들도 다 일어나' 그랬던 거 같고. 일어난 애들을 때리셨던 것 같아요. 주동자를 가장 심하게 때리셨죠… 유기정학을 받았거든요. 저의 죄목은 사전에 알았는데도 선생님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게 저의 잘못이래요. 어린 마음에도 좀 어이는 없었지만, 그게 잘못이라니."
-이성수, 당시 S고 2학년
성수는 이 정도 선에서 끝났지만, 주동자들은 그렇지 않았어. 진술서를 무려 30장이나 쓰게 했어. 교실에도 못 가게 하고 말 한 마디도 못하게 했대. 작은 방에 갇혀서 감시까지 받으며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쓰고 또 쓰는 거야. 어떤 아이는 그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빠지기도 했대.
유인물을 돌린 세 명, 그리고 그중 한 명의 짝이라는 이유로 끌려간 한 아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퇴학당했어. 모의고사가 있던 바로 그 11월에. 당시 억울하게 퇴학당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뿌린 것도 없고 저는 관련이 없어요. 저는 400원 꿔줬고요. 한 10명이 꿔줬는데, 제가 가장 조금 꿔준 거고요. 저희 학교는 때려도 그냥 회초리로 때리는 것도 아니고, 야구방망이로 완전히 이렇게 깔아놓고 때리기 때문에 그걸 맞기가 싫으니까. 제가 안 한 것도 인정하게 되고, 그 앞에서 벌벌 기는 거예요… 저희들한테 그러더라고요. '너희는 내 도장 없으면 검정고시도 못 본다' 말은 쉽지 검정고시도 못 보면, 제 인생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깔려버리는 거예요. 저에게는 엄청난 일을 저 혼자 감당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거의 미쳐버릴 지경까지 갔는데. 그 선생님들이 저에게 한 행동과 그 말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진짜…"
-이ㅇㅇ, 당시 S고 학생
학교는 아이들에게 말한 대로, 전학이나 검정고시에 필요한 어떠한 서류도 떼주지 않았어. 심지어 무릎을 꿇고 비는 학부모들에게 "문제 제기하려면 해라. 어쨌든 이 아이는 남들보다 최소 1년은 늦어질 거다. 다른 학교라도 다니고 싶으면, 2천만원 정도 내라. 그럼 전학 처리는 해주겠다"라며 돈을 조건으로 걸었어.
결국 네 아이는 눈물을 머금고 이 학교를 떠나야만 했어. 근데 이 사건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어. 취조하던 선생님들은 주동자들한테 "이거 너희들끼리 생각한 거 아니지? 시킨 선생님이 있지?"라며 배후의 선생님 이름을 대라고 했어. 교장이 찍어내고 싶은 선생님들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이들의 입에선 어떤 선생님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어. 근데 다음 학기부터 세 명의 선생님들이 수업에서 제외돼. 별 이유도 없이, 그냥 쉬래.
"미운털 박힌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안 줬어요. 그리고 어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끌려나갔어요."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교실에서도 교무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선생님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선생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어. 불이익을 당한 교사들 위주로, 총 8명 정도야. 선생님들의 마음은 하나야. '더 이상 불의에 의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것.
▲ 선생님들의 양심선언
근데 지금까지 학교의 문제를 알리려고 한 교사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지. 교육청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회, 청와대까지 찾아갔어. 하지만 매번, '검토해 보겠다', '기다려라' 는 말뿐이야. 좌절한 교사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떠났어.
"계속 고민을 했어요. 이걸 폭로해야 되는데,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 미리 막는단 말이에요."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그래서 선생님들을 다른 방법을 강구했어. 바로 언론을 통한 폭로야. 가짜 모의고사 사건이 있고 4개월 뒤, 1994년 3월 14일.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어. 선생님들은 교장의 잘못을 알리기 위해, 먼저 양심선언을 해서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했어.
"미안했죠. 교사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웠죠. 언젠가는 이걸 밝혀야겠다 일종의 사명감도 있었어요. 뜻이 맞는 교사들과 연합을 해서 양심적으로 행동하자 해서, 양심선언을 한 것이고. 그 전에는 부끄러운 게 많았습니다."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교단을 떠날 각오로 나선 선생님들. 그리고 다음날, 더 많은 S고 교사들이 카메라 앞에 섰어. 무려 35명이나. 전체 교사의 3분의 1이야.
"담임 선생님들한테 압력을 가해서 학부형들을 통한 찬조금 징수 같은 거요. 또 성적을 조작시키는 경우…"
"수상 받는 학생들이 9명 있었습니다. 그 9명 학생들에게 100만원씩 요구를 해서 교장선생님한테 갖다 줄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가르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오늘 아침 조회에서도 아이들한테 교사로서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있습니까."
선생님들의 울분은 TV로 생생히 전해졌어. 성적 조작에 강제 찬조금까지, 교사로서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지 느껴졌어.
"무서운 선생님들이 저렇게 울면서 카메라 앞에 계신다는 사실이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이성수, 당시 S고 학생
"본인이 성적조작을 했다는 것을 발표를 하면서 양심선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진위에 대해서 의심받지 않고 사회적 집중을 받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당시 선생님들이 큰 용기를 낸 거라고 봐야겠죠."
-조민근, 당시 S고 학생
강남 최고의 명문고에서 일어난 사학비리 사건이야. 게다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특별수사 지시를 내렸어. 그러자 그동안 외면했던 교육청, 국회, 검찰까지 갑자기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 조사가 시작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각종 혐의들이 튀어나와. 오죽하면 '사학부패 백화점'이라는 말까지 나왔어.
영화 '두사부일체'라고 알아? 악덕 교장과 비리 재단에 대항하는 학생과 교사들의 이야기야. 그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게 바로 이 S고 사건이야. 근데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기가 막혀. 수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들을 알려줄게.
▲ 교장의 VIP리스트
먼저 A교장이 있고, B교감은 교장의 충성스러운 2인자야. C이사는 일종의 협력관계야. 육군 대령 출신으로 안기부를 거쳐 83년부터 이 학교 재단의 상근이사를 맡게 돼. 학교나 교장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했던 걸로 보여. 마지막으로 이 학교의 D 재단 이사장. A교장의 아내야. 부부가 안팎으로 학교를 꽉 잡고 있던 거지. 그런데 이 부부는 한때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어.
"교장의 자제들에게 현직의 선생님 몇 분이 주요 과목이죠. 불법 과외를 시켰어요.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과외를, 불법과외, 특히 현직 교사가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금지됐거든요."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교장은 해당 과외 선생님들에게 월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씩 주면서, 학교 업무에서도 제외시켜 줬어. 결국 그 교사들은 형사처벌까지 받았어. 근데 교장은 이사회 징계만 받고 1년 후에 다시 교장으로 복직해. 교장의 아버지가 바로 이 학교 초대 교장이었거든. 아버지에게 그 자리를 물려받아서 20년째 집권 중이야. 그렇게 서서히 학교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든 거야.
교장에게 S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었어. 더 많은 황금알을 낳기 위해, 교장은 고민 끝에 장기적인 플랜을 세웠어. 그 첫 단추는, 매년 학부모 직업부터 파악하는 거야.
"유력층 인사들의 자제들이 많았어요. 일면 우리는 그걸 'VIP'라고 그래요. 실제 저도 'VIP리스트'를 만든 적도 있습니다. 신학기 때 아이들이 내 반에 배치가 되면, 제일 먼저 담임이 할 일이 'VIP리스트'를 만들어서 학교에 제출합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학부모를 호출합니다."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VIP명단에는 전직 장관, 전직 안기부장, 전직 법원장부터, 현역 국회의원, 법조인, 의사, 대학교수, 고위 공무원까지, 면면이 화려해. 양심선언 교사들은 이 VIP 확인작업이 모든 비리의 원천이었다고 해. 물론 그 VIP들 모두가 조작과 비리에 가담한 건 아니야. 하지만 몇몇은, 교장과 매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걸로 보여.
하루는 한 교사가 영어시험을 채점하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주임교사가 오더니, 슬쩍 쪽지를 주고 가.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박ㅇㅇ, 잘 봐주세요."
특정 학생의 성적조작을 당부하는 내용이야. 이 선생님은 마지못해 성적을 조금씩 올렸어. 만약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보복성 인사에 모욕적인 대우를 받을 게 뻔해. 이 학생의 성적은 영어, 물리, 세계사 등 총 8차례에 걸쳐 상향 조작됐어.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한 세관의 간부였대. 거기에 전 차관급 공무원의 아들도, 학교 실세였던 C이사의 아들도. 이렇게 조사 결과 드러난 성적 조작만, 무려 11명. 그중엔 2학년 때까지 반에서 50등이었는데, 3학년이 되니까 반에서 2등으로, 성적이 수직상승한 학생도 있었대. 그나마 성적자료 의무보관 기간이 1년이라, 밝혀진 게 이 정도야. 그 전의 성적조작은 확인이 불가능하고,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봤을지 알 수 없어.
그럼 성적 조작은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 당시엔 중학교들도 내신 시험에서 OMR 답안지를 사용했는데, S고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했어. S고의 내신시험 답안지는 이렇게 생겼어.
답안지가 이러니 채점을 하다가 얼마든지 오답을 지우고 정답으로 바꿀 수 있어. 이렇게 고친 답과 성적들. 그게 입시에 어떤 차이를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성적 1, 2점에 울고 웃었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이 사실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근데 학교생활 내내 학부모나 학생들을 괴롭혔던 건 또 따로 있었어.
"학생회장이었던 아이가 상당히 형편이 어려운데 그 아버지가 버스운전사인데 (S고에서는) 아버지가 버스운전사면 반장도 못되고 학생회장도 못됩니다… 졸업할 무렵에 학생회장 한 사람은 공로상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 수상자들은 매년 관례대로 100만원씩 내야 한다 그래서 주임 선생님한테 '주임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상당히 형편이 어려운데 그거 좀 빼주는 방법으로 하자'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안되니까 좀 밀어붙여라' 해서, 사정 말씀을 어머니한테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시고 저한테 건네주셨습니다."
-당시 S고 교사의 양심선언 中
어떤 학생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당했어. S고 졸업생 중 상당수는 평생 당시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알지? 그 영화를 만든 유하 감독도, S고 출신이야. 유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고교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어.
"옛날 일기장을 보니 '매일 학교 가는 게 죽는 것보다 싫다'고 쓰여 있다. '덩치 큰 놈이 소심하긴' 이 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을 했다가 아버지가 학교에 와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늘 학교 밖으로 걸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그걸 영화로 구현했다."
또 이 영화의 OST를 맡았던 가수 김진표도 이 S고 출신이야. 그는 랩 가사에 그때 이야기를 담았어.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세월은 흘러 모든 것들이 변해가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 한참을 뛰어가다 돌아볼 땐 어김없이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는 아픔 속의 기억들. 내게 상처가 된 당신의 거짓말.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던 지난날. 그럼에도 존경받기를 원하셨던 그 모습에 내가 배운 것은 보잘것도 없는 일할.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타인과 날 끊임없이 비교해 대는 법…"
-김진표 '학교에서 배운 것' 가사 中
▲ '사학 재벌'이 된 교장의 어마어마한 재산
A교장은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고통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 심지어 92년 9월엔 교육부가 일체의 찬조금 징수를 금지했는데, 씨알도 안 먹혀. S고의 찬조금 징수는 계속 됐어. 돈을 걷는 명분도, 돈을 걷는 방식도, 전부 담임선생님한테 알아서 하라고 한 거야.
"사실 명분이 없는 돈이에요. 이건 글자 그대로 '불법찬조금'입니다. 학기 초에 하는 일이 담임은 할당량을 채워서 학교에 내야 합니다. 교사로서 정말 부끄러운 짓이죠."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선생님들은 학급 임원 두세 명에게 부탁하거나, 성적순으로 1등부터 10등에게 부탁했어. 이렇게 거둬들인 찬조금은 매년 교장에게 전달됐어.
대체 얼마의 돈이 교장에게 갔을까? 88년도에는 한 학급당 300만원씩 걷었고, 학급 수는 총 60개야. 그럼 1억 8천만원 정도지. 다음 해에는 100만원을 올려 학급당 400만원씩 걷었어. 그럼 2억 4천만원. 92년부터는 학급당 500만원까지 올라가. 이렇게 6년간 거둬들인 찬조금만 무려 15억 원. 당시 강남 아파트를 서너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어. 중요한 건, 이게 고작 6년치야. 그중에서도 아주 일부일 뿐이라는 거.
교장은 이 찬조금을 어떻게 썼을까? S고는 한때 명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인 동시에, 강남에서 시설이 가장 후진 학교로 유명했어. 돈을 그렇게 걷어갔는데, 당시 주변 학교엔 기본적으로 있던 것들이 이 학교엔 없었어.
"시설 많이 안 좋았죠. TV도 없었던 것 같고. 그냥 책상하고 칠판하고 있는 거죠 뭐."
-이성수, 당시 S고 학생
"겨울에 난방은 석탄을 땠습니다. 아침이 되면 주번이 양철통 같은 걸 가지고 석탄을 타러 갑니다. 강남 한복판에서 석탄을 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죠."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게다가 S고는 동아리 활동도 축제도 없었어. 교장이 전부 못하게 했거든. 표면상의 이유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 였지만, 돈을 쓰지 않기 위해서지.
검찰 수사관들은 A교장의 집으로 향했어. 근데 도착하자마자, 커도 너무 큰 집의 크기에 깜짝 놀랐어. 대지가 247평, 지하 1층, 지상 2층의 초호화 주택이야. 30년 전 시세가 무려 30억. 온통 대리석 바닥에, 호화 가구들이 가득해.
그런데, 집이 이거 한 채가 아니야. 미국 뉴욕 인근 로드아일랜드주에 약 40만 달러짜리 별장이 있어. 대지가 무려 1200여 평에 수영장만 33평. 이 집은, 교장의 아내와 16세 아들,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등록돼 있어. S고 학부모들이 아들 찬조금 때문에 허리가 휠 때, 교장 아들은 미국에 자기 명의의 집이 생긴 거지.
교장의 부동산은 이게 다 가 아니었어. 빌딩도 하나 갖고 있었어. 학교 건너편에 14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었어. 94년 당시 시세가, 50억 정도야.
그리고 학교 소유부지 3천여 평에, 골프 연습장을 지었어. "학교 강당도 짓고 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사설 골프연습장을 지어서 수익사업을 좀 하겠다"는 게 골프연습장을 만든 이유였어.
처음에는 상식적인 결론이 내려졌어. 담당기관에서 학교 땅의 용도변경 신청을 거절한 거야. 그런데 얼마 후에 이 안건이 다시 올라왔고, 이번엔 허가가 나. 게다가 더 황당한 건, 수업이 비는 선생님들을 골프장에 불러 공을 줍게 했대.
교장은 이런 방식으로 야금야금 재산을 축적했어. 94년 밝혀진 교장의 자산은 무려 200억대. '사학 재벌'이 된 거야. 그 사이 학교는 조금도 발전하지 않고 땅만 점점 줄어들었어.
이러다 보니 당연히 의혹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고, 실제로 감사를 나온 적도 있었대. 그 과정에서 내신 성적 조작, 불법 찬조금도 일부 적발됐어. 그런데, '경고'만 받고 끝났어. 징계는커녕, '우수학교' 판정이 내려지기도 했어. "학교장의 일사불란한 경영관으로 대외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고 생활기록부가 잘 기록되어 있다"면서.
관리감독 기관이 비리세력을 비호해 준 셈이야. 그 비리의 고리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어. 그런데 마침내, 학생들의 전단지와 용기 있는 선생님들의 양심선언으로, 그들의 만행이 온 세상에 알려진 거야.
▲ 잠시 찾아온 '학교의 봄'
검찰에 소환된 교장은 모든 범행을 부인했어. 자신은 교육에만 전념해 온 사람이라며, 찬조금이나 성적 조작을 지시한 적 없고, 자신에게 온 돈도 10원 한 장 없다고 주장했어. B교감도 혐의를 부인하긴 마찬가지였어.
"성적 조작요? 그런 거 없죠. 없습니다. 저는 돈 걷으란 소리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목숨을 겁니다."
-당시 B교감 인터뷰 中
하지만 곧, 검찰수사에서 많은 혐의들이 사실로 드러나. 학교와 관리기관의 검은 카르텔도 밝혀져. 15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서울시 부교육감 출신 고위 교육공무원도, 골프장 용도변경 승인을 도운 서울시의회 의원과 관할구청 공무원도, 전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어.
교장의 재판이 있던 날. 법원에 나타난 교장을 보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어. 언제부턴가 높은 분들의 법원 출두는 휠체어가 '국룰'이잖아? 근데 이 교장이 그걸 깼어. 휠체어가 아닌 '들것'에 실려 들어온 거야.
그렇게 몇 년간 이어진 재판 끝에 교장은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어. 결국 형을 살지 않은 거야. 횡령액도 17억 정도만 인정됐어. B교감과 C이사는, 둘 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나왔어.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이 느꼈을 고통과 피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처벌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죄가 밝혀졌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았다고 해.
학교는 관선 이사들이 파견되면서 빠르게 정상화 됐어. 유인물 사건으로 퇴학당한 네 학생들도 학교로 돌아왔대. 불법 찬조금도 없어지고, 성적처리도 어느 학교보다 투명해. 그리고 민근이는, S고 1기 학생회 부회장에 당선됐어.
"엄청난 변화가 생겼죠. 선거를 해서 학생회를 만들게 됐었고, 관선교장선생님이 오시고 그런 식으로 해서 학교를 정상화하는데 상당히 모두가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주민근, 당시 S고 학생
그렇게 교사들의 양심선언이 있고 6년 후인 2000년 1월이야.
이 아이의 이름은 조연무. 올해 S고 2학년이 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연무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부학생회장까지 맡았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얘기가 들려. '그 비리 이사장이 다시 학교에 올 수도 있다'는 소문이야.
"언뜻언뜻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대, 라는 건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죠. 전혀 몰랐죠."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94년 사건 당시 연무는 초등학생이었으니, S고의 사학비리 사건을 몰랐던 거야. 그런데 얼마 후, 이 소문은 현실이 돼. 학교 재단 이사로, A교장의 아내, 누나 등 측근들이 선임된 거야. 그리고 새 교장 자리에, 바로 그 B교감이 임명됐어. 성적조작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은 부패 교감, A교장의 충신이었던 그가 새 교장으로 온다는 거야. 비리를 저지르고 처벌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복귀할 수 있었던 걸까?
이들의 복귀 직전인 99년 8월, 사립학교법이 개정됐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2년이 지나면 재단 이사나 교직에 임명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거야. S고 비리의 주역들이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거지. 사립학교에 주체적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법이 개정된 건데, 그 법이 보장하는 자율성을 교묘하게 악용하게 된 거야.
▲ 다시 찾아온 위기
이 소식을 들은 S고 사람들. 먼저 투쟁에 나선 건 선생님들이었어. 양심선언하던 그 각오로 교육청으로 달려가 열흘간 항의 시위를 했어. 과거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졸업생들은 후배들을 지키기 위해 학교 앞 시위에 나섰어. 94년 당시 뉴스를 찾아보고 사태를 파악한 재학생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 연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위라는 걸 하게 돼.
"'아 저런 게 있었구나' 하는 걸 그때 학생들이 처음 알게 되고, 이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쪽으로 모였죠. 처음으로 집회를 그때 2월에 하게 된 거죠."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2천명이 넘는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여 "비리재단 웬 말이냐! 범죄자는 물러가라!"라고 힘껏 외쳤어. 결국 시교육감은 A교장 아내와 측근들의 임원 취임 승인을 철회하는 결정을 내려. 교사들과 학생들은 다행이라며 서로를 토닥였어.
그런데 한 달 후, A교장의 아내가 소송을 건 거야. 어떻게든 복귀를 하겠다는 거지. S고 사람들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재판 결과를 기다려. 그리고 3개월 만인 2000년 6월 29일, 행정법원의 결정이 내려졌어.
"재판부는 S고 재단의 전 이사장 등 민선이사 6명이 서울시 교육감을 상대로 낸 임원승인 취소처분 취소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피고가 이사취임에 법적 하자가 없는 원고들의 전력을 문제삼아 무조건 퇴진을 요구하며 불법적 실력행사를 한 교사들에게 굴복, 이사승인 처분을 취소한 것은 학내분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익을 크게 해하는 처분인 만큼 취소돼야 한다."
-행정법원 판결 결과 내용 中
재판부가 A교장 측의 손을 들어준 거야.
"이게 세상이 상식대로 흘러가지는 않는구나. 처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때는 퉁 쳐서 '사회, 법, 어른' 이렇게 사고하는데, 어른들이 진짜 야속하다.. 법이라는 게 진짜 불합리하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이 됐었죠. 다시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겠다는 게 판단이 섰죠."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S고는 또다시 발칵 뒤집혔어. 학부모들은 비리재단의 복귀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에 모여 "비리재단 몰아내고 S고를 살려내자!", "비리재단 비호하는 재판부는 사퇴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였어. 그리고 아무도 없는 교실 칠판엔, 이 두 글자만 크게 적혀 있었어.
"정.의."
2000년 7월 8일, 판결 후 9일이 지났어. 오늘도 아이들은 아침부터 운동장으로 하나 둘 모였고, 어느덧 전교생 2000여 명이 집결했어. 교내에선 학부모들이 모여 대책회의 중이야. 그런데 그때, 밖에서 선생님들이 "안돼 얘들아!"라고 소리치기 시작해.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야. 교문 밖에는 이미 수백명의 전경들이 깔려 있어. 흥분한 아이들이 전경들과 부딪히면 어떤 사고가 날지 몰라. 대체 아이들은 어디로 가려고 한 걸까?
"행정법원에서 그런 판결을 다시 뒤집어줬으니까, '더 강한 게 필요해', '오늘은 진짜 가자. 법원까지. 가자' 이런 식으로… 혈기들이 끓어올라서 학교 앞으로 이렇게 나갔는데, 학생으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진 거죠. 전경들은 길을 다 막고 있고 학생들은 그 안에 갇혔다고 해야 하나? 이게 좀 어마 무시하더라고요. 무섭기도 하고. 그때부터 전략을 바꿨죠. 일부는 그 옆으로 돌아가지고, 나머지는 교대역 쪽 방향으로 해서 돌아서 온 거죠."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아이들은 무작정 교문과 전경들을 뚫고 나갔어. 이렇게 아이들은 법원으로 향하는 서너 갈래 길로 무리를 지어 흩어졌어. 전경들은 일단 아이들을 무력으로 저지하기 시작했어. 방패로 밀치거나 곤봉을 휘두른 거야. 그 결과 곳곳에서 부상당한 아이들이 속출했어. 심지어 말리려고 끼어든 한 어머니는 머리를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대. 병원에 실려가서 스물두 바늘이나 꿰맸다는 거야. 교복 입은 학생들과 경찰이 그렇게까지 대치한 건, '4.19 이후 최초'라는 말도 나왔어.
S고에서 법원까지는 불과 1.5km 거리야. 걸어서 30분도 안 걸려. 하지만 전경들을 피해 흩어져서 돌아오느라 한참이 걸렸어. 그렇게 흩어졌던 아이들이, 하나 둘 법원 앞에 도착해. 30도를 훌쩍 넘는 더위에 땀이 비오듯 흘러. 학부모들은 그 더위에 아이들이 쓰러질까 물과 음료수를 사다 나르기 바빠. 그 사이 더 늘어난 경찰 병력은 금세 법원과 아이들을 에워쌌어.
아이들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들의 뜻을 전달했어. "경찰들이 과잉진압을 해도 우리는 평화적으로 집회를 끝냅시다", "정의는 살아있다. 부패재단 척결하라", "비리재단 비호하는 재판부는 사퇴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어.
"그 사람들이 옛날에 어떤 짓을 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받아들여 주는 게 말이 됩니까?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게 굉장히 컸던 거죠. 구호를 위치고 연설을 하기도 하고. 불합리함을 좀 알리려는 집회가 진행됐죠."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학생회 대표들은 항의하는 의미로 삭발식까지 거행했어. 근데 아직 애들이잖아. 뭘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겠어. 한 친구는 삭발하다 기계 전원이 나가서 머리를 밀다 만 채로 시위를 했대.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다 같이 아는 두 곡, 교가와 애국가를 연이어 불러. 그리고는 음료수병 하나까지 싹 챙겨들고 조용히 자진 해산했어.
이날 학생들의 법원시위는, 6년 전 선생님들의 양심선언처럼,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어. 그리고 사학비리와 부패재단에 대한 논의가 연일 계속됐어. 그 사이 재판은 고등법원으로 넘어갔고, 선생님들과 학생들, 학부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갔어.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이제 학생회장이 된 연무는, 선배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그날 졸업생 대표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어.
"그토록 힘을 모아 처절하게 싸웠지만, 우리 후배들에게까지도 수많은 고민과 고통을 넘겨주게 됐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단 한가지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을 하시길 바랍니다. 후배들의 부름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 S고의 운명
그렇게 새학기 첫날이 됐어. 그런데 1학년 신입생들이 없어. S고에 배정된 600여명의 신입생 중에 83%가 자퇴를 신청한 거야. 그래서 학교에 남은 신입생은 고작 100여명 정도. 그 아이들의 첫 등굣길에, 선배들은 아낌없는 환영의 박수를 보냈어.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러자 학생들이 순식간에 길을 막아섰어. 새 교장이 된, 그 문제의 B교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장실로 출근하려는 거야. 연무를 필두로 아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B교감을 막아섰어. 그랬더니 이 B교감이 연무를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해.
"학생 이름이 뭐야? 이러다가 나 들어온 다음에, 안 좋게 될 수 있어."
기다리던 후배들은 안 오고, 제발 오지 말라고 한 어른은 버젓이 나타났어. 학생회장이었던 연무는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대. 사실 그때 2학년들도 4분의 1이 전학을 갔거든. 이러다 학교가 사라지는 건 아닐지, 위기감을 느꼈던 거야.
"계속 저희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이 될뿐더러 점점 안 좋은 일이 벌어지잖아요. 수업은 시작됐고 복도를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마음이 되게 아프더라고요. 그때 정말 좀 처음으로 집에서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연무는 포기하는 게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같은 마음이었어.
2001년 3월 22일. 드디어 6개월 넘게 기다린 서울고법의 판결이 내려져.
"공정하지 않은 절차로 이사에 선정된 원고들이 형사처벌을 받은 전 교감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학생, 교사들의 반목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원고들의 재단복귀로 재학생들이 수업거부를 하는 등 사태가 악화됐고 교육정상화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임원 취임의 승인을 취소한 것은 정당하다."
-판결문 中
A교장 일가가 패소한 거야. 부패재단의 복귀를 막고 학교를 지킬 수 있게 된 거지. 법원에 있던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펑펑 쏟았어.
"학생들의 움직임이 없었으면 과연 이런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을까. 제일 결정적인 건 학생들이에요. 학생들의 움직임."
-한상일, 당시 S고 교사
"그동안 법하고 어른들에 대해서 불신이 있었는데, 일단 오늘 하루는 그런 걸 조금 버리고, 어른들한테 조금 감사함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했었어요. 처음으로 이겼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소식이 학교에 쫙 전달이 되니까 월드컵 때 골 넣으면 다 같이 막 와~ 하는 것처럼, 전교생이 와~ 하면서 이렇게 막 박수 치고 수업이 중단되고 막 이랬던 기억이 있어요."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다음 해 11월 상고심에서도,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해. S고 사태는 94년 3월 14일 이후, 8년 8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돼.
그 후 S고는 7명의 관선 이사들과 함께 새롭게 출발했어. 모두 다 학부모, 동문회, 교사, 교육단체, 교육청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야. 사태가 수습되는 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어. 하지만 끝내 아픔을 딛고 환골탈태한 S고는 새로이 강남의 명문고로 자리매김해. 무엇보다, 선후배 사이가 굉장히 끈끈하대.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 학교 자체를 되게 사랑하게 됐죠, 굉장히 모든 학생들이. 저희는 계속해서 그냥 하나였던 것 같아요. 단순했어요. 학교를 지키고 싶은 마음…"
-조연무, 당시 S고 학생
올 한 해 학교에서 유난히 일이 많았잖아. 학교에서 눈물과 갈등보다, 서로를 향한 존중,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들만 남았으면 좋겠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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