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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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집 밖에 나와보니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히로시마 원폭 투하, 주목받지 못한 한국인 피해자들

강선애 기자 작성 2023.12.08 11:57 수정 2023.12.08 16:17 조회 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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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7일 방송된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김다영 아나운서, 배우 정상훈, 댄서 허니제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픈 형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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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0년대, 부산이야. 어린 형률이는 친구들이 놀자고 집 밖에서 불렀지만 나갈 수가 없어. 또 감기에 걸렸거든. 학교 다닐 때 그런 친구 있잖아? 등교하는 날보다 조퇴나 결석하는 날이 더 많고,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대신 스탠드에 앉아있는 그런 친구. 형률이는 그런 아이였어.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찬음식은 물론 과일을 먹어도 탈이 나는 때가 많아. 기관지와 폐가 안좋은 건 맞는데, 무슨 병인지 정확히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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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률이는 커가면서 점점 말라 갔어. 친구들의 키가 170, 180cm까지 자랄 때, 형률이는 키 163cm에 체중이 37kg이었어. 1970년생인 형률이는 오남매 중 넷째야. 가족들에게 이런 형률이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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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 한번 하면 계속 기침을 하거든요. 그러면 가래를 받아내고, 하루 저녁에 내가 수건으로 등허리를 몇 번을 닦아줬어요. 아이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부모로서 너무 안타깝죠."
-김형률 아버지, 김봉대 씨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하기도 하고, 숨이 넘어갈 듯 호흡곤란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간 것만 수십번이야. 부모님은 이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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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률이를 낳았는데 하나 낳고 '이제 안 나오나 보네' 하니까 또 하나 (동생이) 나오잖아. 집에서 낳는 거 보면 간도 크지. (형률 동생이) 열이 40도가 되어도 안 내리는 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그렇게 (형률이) 동생이 죽고..."
-김형률 어머니, 이곡지 씨

사실 형률이는 쌍둥이였어. 쌍둥이 동생은 두 살도 채 안돼서 세상을 떠났어. 부모님은 형률이도 잃게 될 까봐 두려웠던 거야. 두 아이의 증상이 비슷했거든.

형률이가 25살이 되던 1995년, 부모님은 아들의 정확한 병명을 알게 돼. 병명은 '면역글로불린 결핍증'. 면역이 약하다 보니까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관지, 폐 쪽이 가장 먼저 탈이 나는 거였어. 문제는, 이게 치료법이 딱히 없고 합병증도 많이 생겨. 의사는 생존율이 높지 않다며, 아무리 오래 살아도 30세를 넘기기 쉽지 않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형률이의 나이는 25세야.

병명을 알게 된 형률이는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해. 어떻게 하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을지 의학도서나 논문을 다 뒤지고 다녔어.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문서 하나를 발견해. 형률이를 진료했던 의사가 발표한 논문이었어. 쭉 읽어 내려가는데 어떤 단어 하나가 눈에 탁 들어와.

"엄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거 진짜예요?"

어머니가 그 단어를 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해. 그러더니 "나 때문에 우리 애가 이렇게 아팠다"며 어머니가 통곡을 해. 자기 때문에 형률이가 아프다며 자책하는 어머니. 이게 무슨 말일까? 모자의 가혹한 운명이 시작된 건, 오래 전 어머니 앞으로 '어떤 물건'이 도착하면서부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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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에서 온 물건

문제의 물건은, 우선 출발지부터 아주 특이해. '티니안섬'이란 곳에서 왔어. 티니안은 태평양 한가운데, 괌과 사이판 사이 북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보다 조금 더 크대. 형률이 어머니 곡지 씨에게 배달된 이 물건은 이 조그마한 섬에서 출발했어. 이 물건의 배송을 맡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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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티비츠와 클로드 이덜리. 두 사람의 직업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탑티어급 비행기 조종사야. 폴이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완벽 주의자라면, 클로드는 완전 자유영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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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요즘 목숨을 건 훈련 중이야. 비행기로 1만km 상공에서 시속 560km으로 날다가, 갑자기 기체를 60도 가까이 꺾는 훈련을 하고 있고 있거든. 이게 보통 어려운 기술이 아니야. 비행 중에 갑자기 수평을 틀면 동체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져서, 한번 삐끗했다가는 공기저항 때문에 날개가 부러질 수도 있어.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야. 하지만 해내야 해. 그 물건을 배달하려면 반드시 이 기술이 필요하거든. 대체 이들이 뭘 배달하길래 이런 위험한 훈련까지 하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폴의 비행기에 그 물건이 실렸어. 배송일이 정해진 거야. 이 물건의 길이는 3m로 길쭉해. 무게는 약 4.3톤이나 돼. 배송 예정일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배송지는 일본 히로시마야. 이 물건의 정체, 감이 좀 오지? 그래 맞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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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이 핵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들의 이야기야. 그런데 영화나 역사책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바로,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우리 한국인들. 1945년에 히로시마엔 무려 8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어. 그리고 그중엔, 6살 짜리 한국인 소녀가 있었어. 그 소녀가 바로 우리가 아는 형률이 엄마, 이곡지 씨야.

아까 형률이가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논문에는 "모친이 6세 때 일본에서 원폭에 노출되었고, 일란성 쌍생아인 동생이 생후 6개월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 형률의 병을 보고하며 어머니의 피폭 사실을 언급한 거야.

면역글로불린 결핍증과 피폭의 인과관계는 의학적으로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어. 하지만, 형률이 병의 원인이 엄마가 원자폭탄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거지. 엄마 곡지 씨는 아들이 아픈 게 자기 때문인 거 같아 울음을 터뜨렸던 거야.

이제부터, 곡지 씨 같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왜 히로시마에 그들이 있었는지.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 히로시마의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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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곡지네 가족은 부모님과 언니, 여동생까지 다섯 식구야. 경상남도 합천에 살던 부모님은 곡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히로시마로 건너왔어. 곡지와 여동생은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거야. 곡지는 집 밖에서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어만 해야 했어. '마늘 냄새 나는 조선인', '똥 같은 조선인' 이런 소리를 걸핏하면 일본인들에게 들어야 했거든. 그럼 곡지네 가족은 왜 히로시마에 간 걸까.

"우리 어머니가 어린 딸 하나(언니) 데리고, 우리 아버지는 먼저 히로시마에 가서 자리 잡고. 한국에서 못 사니까 너무 없으니까. 그렇게 가서 자리 잡으려고 목욕탕 일을 했대."
-이곡지 씨

한국에서는 너무 먹고살기 힘들어서 건너갔다는 거야. 곡지네가 살던 합천은 산이 많고 농경지는 부족한 곳이었어. 1920년대부터 가뭄에 홍수에 자연재해가 계속 일어나며,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들어. 그런데도 일제는 쇠꼬챙이를 들고 다니며 온 집안을 뒤져서 아주 작은 곡식 알맹이까지 탈탈 털어갔어. 그러던 중 언제부턴가 "히로시마에 가면 애들 학교도 보내고, 하루 3끼를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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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히로시마에) 돈 벌러 갔어. 처음에 히로시마 거기 좋다고 자리 잡는 바람에 그리 많이 따라 들어갔지. 일본 가면 돈 많이 번다고… 동생들 사촌들 집안사람들 다 데리고 들어갔지."

-백을수(89), 당시 히로시마 거주, 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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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빼앗기고 더군다나 힘든 상황에서 먹고살기 위해 일본에서 밥 준다, 배고픔을 달래준다 하니까…"

-정원술(80), 당시 히로시마 거주, 2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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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 중에, 아주 유명한 사람도 있어. 일본 야구계의 전설, 장훈 선수야. 통산 안타가 무려 3,085개야. 이대호 선수가 2,895개인 거와 비교해 보면, 어마어마한 기록이지. 1945년 당시 장훈은 곡지와 같은 6살 어린 소년이었어. 장훈 선수의 부모님도 먹고살려고 히로시마로 건너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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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군지 알아? 이름은 이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손자야. 일제는 우리 왕족들을 볼모로 일본에 끌고 갔어. 그가 일본군 장교로 강제 입대한 후에 전출 명령을 받은 곳이 바로 여기 히로시마였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강제동원으로 이곳에 온 사람들도 있었어. 당시 일본은 중국, 미국을 상대로 큰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 전쟁이 10년 가까이 진행되니, 군인도 필요하고 군수공장의 노동자들도 필요했어. 그래서 조선에서 강제동원 된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자의로 타의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로 건너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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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는 고물상 하고 우리 오빠는 히로시마에서 기차 정류장에 일하러 다니고. 우리 언니들은 공장 다니고 그렇게 살았지. 일본 사람, 애들이 놀리지. '조센징 쿠사이나'라고. 조선 사람 냄새나고 더럽다고."

-강춘자(91), 당시 히로시마 거주, 1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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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시키고 봉급도 안 주고, 강제노역이었죠. 반항할 겨를도 없고. 사람이 넉넉하고 알아야 반항심이 나오는데 내가 배고프고 모르니까 반항할 여력도 없지 않았나…"
-정원술(80), 당시 히로시마 거주, 2살

히로시마에서 조선인은 2등 국민이자 하층민일 뿐이야. 밥은 먹고 살았어. 일자리가 많긴 했거든. 물론 일본인이 기피하는 어렵고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이었어. 곡지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불을 때고 청소하는 잡부 일을 하셨어.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곡지 아버지의 소원은 딱 하나였어. 논 몇 마지기 살 돈만 모으면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머리 위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돼.

▲ 비극의 시작

이 비극의 시작은, 바로 이 편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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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사람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보낸 사람은 지금까지도 천재 과학자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야. 이 편지는 아인슈타인이 혼자 쓴 건 아니고, 다른 과학자들이 쓰고 제일 이름이 알려진 아인슈타인이 편지에 대표로 서명한 거야. 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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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독일이 체코 점령 후 체코 광산의 우라늄 판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 우라늄 원소를 새롭고 중대한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폭탄 개발을 뜻하고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될지도 모릅니다. 조만간 개발에 성공할 것이 확실합니다."

독일이 우라늄을 모으고 있고, 핵무기를 개발 중인 것 같으니 미국이 먼저 선수를 치자는 내용이야. 당시 독일에는 독재자 히틀러가 있었어. 유대인을 학살하고 이탈리아, 일본과 동맹을 맺고 주변국을 침략했지. 그래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연합군을 결성해서 싸운 게 제2차 세계대전이야. 이 전쟁으로 6년 동안 사상자만 5,500만 명이야.

이런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도 당장 신무기 개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했어. 이름하여 '맨해튼 프로젝트'. 그리고 프로젝트 책임자가 바로 오펜하이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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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했고, 현재 가치로 40조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됐어. 그리고 3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1945년 7월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해. 이게 바로 그 첫 번째 폭탄, '가젯'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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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젯은 플루토늄이란 방사능 물질이 사용됐는데, 폭탄 안에는 오렌지 크기만 하게 들어간대. 그런데 이게 폭발하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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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터진 자리에는 초대형 구덩이가 생겼는데, 깊이만 7.5m, 지름이 360m. 축구장 3개가 들어갈 크기야. 그리고 반경 1.5km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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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젯의 테스트가 끝나고, 실전용 핵폭탄이 두 개 만들어졌어. '리틀보이'와 '팻맨'. 이 두 개의 원자폭탄은 티니안 섬으로 운송됐어. 이제 곧 이 폭탄들은, 일본으로 갈 거야.

근데 이상하지 않아? 이 폭탄, 나치 독일 때문에 만든 거잖아? 근데 왜 폭탄들이 독일이 아닌 일본으로 가게 된 걸까? 그건 허망하게도, 히틀러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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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이 불리해지자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일은 항복을 선언해. 그런데 히틀러의 죽음만큼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 이 핵무기를 만든 이유는, 독일이 먼저 만들까봐 였잖아? 그런데 독일은 핵무기가 없었고, 애초에 만들 능력도 안 됐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들은 아주 초조했대. 원자폭탄을 써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까봐. 세계 최고의 무기를 개발했는데 실전에 못 써볼까봐. 그렇게 먼저 항복한 독일 대신 미국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일본이야. 독일과 이탈리아는 항복했는데 일본은 아직 버티고 있었거든.

일본도 일본이지만 미국 쪽 피해가 어마어마해. 사상자만 20만명이야. 그러니 미국 안에서 반일 감정이 부글부글했어. 결국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냈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지 않으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뿐이라고. 이게 바로 '포츠담 선언'이야. 일본의 대답은, '묵살'이었어. 항복은 어림도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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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이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었어. 그런데도, 천황폐하를 위해 일본 국민 1억명은 모두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거야. 근데 당시 일본 인구는 7천만명 뿐이야. 그럼 나머지는?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사람들이지. 만약 이 때라도 일본이 항복을 했더라면, 원폭 투하는 없었을지도 몰라.

▲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결국 미국은 핵폭탄 사용을 결정해. 투하 시기는 1945년 8월 6일로 정해졌어. 문제는 이 폭탄을 일본 어디에 투하할 지야. 도쿄나 교토 같은 유명한 도시도 있는데 왜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미국은 수개월 전부터 폭탄을 어디에 투하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그러다 논의 끝에 도쿄와 교토는 제외됐어. 도쿄는 집중적인 공습으로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어.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성능을 알아보려면 멀쩡한 도시에 투하해야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진 지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어. 그렇게 공습을 덜 받았던 지역 중에 평평한 지형이 5km 이상 되고, 되도록 인구가 많이 사는 곳을 찾았어. 교토가 제외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니 나름 지켜줬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진실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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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최종 후보는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로 압축됐어. 폭탄이 2개니 세 곳 중 하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어. 1945년 8월 6일, 그날 세 도시의 운명을 가른 건 '날씨'였어. 제대로 폭발하는지 위력을 확인하려면, 레이더가 아닌 육안으로 목표물을 봐야 하거든. 그렇게 기상관측을 위한 전투기 세 대가 각각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로 먼저 날아갔어. 그 중 히로시마 담당이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어. 그리고 한 시간 뒤, 인류 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를 실은 폭격기도 출발해. 조종은 폴 티비츠 대령이 맡았어.

기상관측기들이 한 시간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히로시마와 고쿠라 쪽 기상이 좋지 않아. 반면 나가사키 쪽은 날씨가 좋대. 그렇게 나가사키로 결정되나 했는데, 갑자기 히로시마의 구름이 걷히기 시작해. 그리고 클로드 소령의 눈에 히로시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클로드 소령은 폴 대령에게 '목표물 폭격을 제안함'이라 무전을 보냈어. 무전을 받은 폴 대령은 그렇게 히로시마로 향했어. 히로시마 원폭이란 역사적인 어마어마한 사건이, 불과 투하 한 시간 전에 장소가 결정됐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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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히로시마 항공뷰. 리틀보이의 목표물은 '아이오이 다리'야. T자형이라 상공에서도 눈에 잘 띄어. 이 다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곡지네 집이 있었어. 당시 곡지네 아침은, 평화로웠어. 아버지는 목욕탕으로 출근하고, 집에는 어머니와 세 자매만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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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리틀보이를 실은 비행기가 히로시마에 진입해. B-29라는 폭격기야. 기체에는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어. 폴 대령이 직접 붙인 건데, 어머니의 이름이었대. 이렇게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모기(母機)', 즉 '엄마 비행기'라 부른대.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 9,300m 높이에 있어.

오전 8시경. 출근 인파, 학교 가는 아이들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해. 오전 8시 15분. 이제 에놀라 게이는 목표물인 아이오이 다리까지 왔어. 이 시각 곡지는 집의 2층 방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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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15분 15초. 인류 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가 엄마 비행기에서 떨어져. 폴의 비행기는 리틀보이 투하 후, 연습한 대로 60도로 급선회해서 날아가. 폭탄이 터지기 전에 빠르게 여길 벗어나야 하니까.

리틀보이는 자유낙하 중이야. 지상 550m에 도달했을 때 폭발하도록 설계돼 있어. 그때가 가장 파괴력이 높을 때래. 상공 9300m에서 550m까지 도달하는데, 42초가 걸려. 지상으로 리틀보이가 내려오고, 육안으로도 보일 거리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체를 보며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어. 그렇게 800m, 700m, 600m…. 그리고 마침내. 지구가 쪼개지는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눈이 멀 정도의 밝은 섬광이 온 세상을 덮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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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인가? 그때 원폭을 던졌어. 원폭을 시청에 던진 것 같은데, 거기서 거리가 좀 멀었는데 폭풍 바람에 우리 집이 이층 집인데 가라앉았어. 엄마 옆에 나도 3살 동생도 있었고. 9살 먹은 언니는 논다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그때 원폭을 던져서 폭풍 바람에… (언니가 건물 잔해를) 뒤지며 나오는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오까짱(엄마) 나 좀 꺼내줘' 그래도 못 꺼내줬대."

-이곡지,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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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이) 떨어질 땐… 팍 엎드렸지. 엎드리다 돌에 부딪혀서 전신이… 피는 나지, 아프지, 나는 어리지, 울면서 집에 왔지."

-박정순,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1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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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반짝했어요. 반짝 해서 놀랐어. 연기가 나면 구름만 치로 확 치솟아 올라서 옆도 못 봤죠."

-강춘자,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1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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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진 것처럼 깜깜해져 버리니까. 천지도 안 보이고 캄캄해지니까 아무것도 몰랐지. 무너진 집에 파묻혀 있다 나와보니까 밖에 있는 사람 다 죽었어요."
-백을수,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10살

▲ 지옥 같았던 히로시마의 그날

폭발이 터진 곳을, 폭발의 중심지 '폭심지'라 불러. 여기를 중심으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겠지. 폭발 전후, 히로시마의 모습이야.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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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사라진 모습이지. 폭심지 반경 4.4km 안의 건물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져버렸어.

이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섬광과 폭풍, 그리고 불과 파멸'이라 요약할 수 있어. 폭발 직후 엄청난 섬광이 있었다고 했잖아.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니까, 마치 엑스레이를 찍는 것처럼 손 뼈마디가 훤하게 보였대. 섬광 다음은, 초강력 열 폭풍.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엄청난 압력의 태풍이 쾅하고 퍼지기 시작해. 그 압력은, 1제곱미터당 7톤의 힘이 가해지는 셈 이래. 1.2km 밖에 서있던 사람도 공중으로 15m를 날아갔을 정도야. 그런데 만약, 폭심지 주변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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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그냥 그림자 같지? 폭심지 260m에 앉아있던 사람의 흔적이야. 검은 자국만 남기고, 그대로 타버린 거야. 폭탄이 터지는 찰나의 순간 중심부의 온도는 무려 섭씨 6천도에 달했어. 태양의 표면 온도랑 똑같아. 그러니 반경 500m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전멸했어. 폭심지에서 최소 2~3km 떨어진 곳에 있었거나, 콘크리트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나마 살아남았어. 1945년도에 콘크리트 건물이 얼마나 있었겠어. 일본은 또 목조 건물이 많은 곳인데.

나중에 야구선수가 된 훈이네는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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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쁜 우리 누나 얼굴이 다 불에 타고, 하루 정도, 하루 밖에 안 살았어요.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울면서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장훈,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6살. 전 야구선수

이게 끝이 아니야. 열 폭풍, 화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어. 원자폭탄이 '악마의 무기'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거야. 폭격 1시간 후, 소나기처럼 제법 큰 비가 내려. 폭발에 화재에 타 죽을 것 같던 상황이니 덥고 목말랐던 사람들이 그 빗물을 막 받아먹었어. 그런데, 빗물이 끈적끈적하고 까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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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때문에 오는지도 몰랐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자연으로 내려오는 건데 '와 이리 검은 비가 내려오노'. 시커먼 비가, 검은 비가 그냥 내렸어. 화약냄새가 많이 났어."
-백을수,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10살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잔해와 재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차가운 공기층과 만나 비가 돼서 내린 거야. 이 검은 비 안에는 방사능 물질들이 응축돼 있었지. 방사능에 잘못 노출되면 세포가 파괴되고 염색체에 이상이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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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설사과 구토였어.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쏟아내. 하루 사이에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져. 원폭 직후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방사능에 피폭된 상태였어. 지금이야 방사능이 위험한 걸 알지만, 그때 사람들이 방사능이 뭔지 알았겠어? 임시진료소가 마련됐지만 감당이 안돼. 조선인들은 진료소에 갔다가 그냥 돌아와야 했어. 쓸 약도 없으니, 산에서 약초로 보이는 걸 캐서 먹이고 상처에 된장, 참기름을 발라주며 치료했어. 그걸로 살 수가 있었겠어? 폭발 이후 3일~ 1주일이 지나자, 또 많은 사망자들이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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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시체를 들것에 들어서 차에 실었는데 다음에는 그냥 끄집어냈어요 그냥. 갈퀴식으로 막 쓰레기 치우듯. 환자가 들어간 사람보다 죽어 나온 사람이 많더라. 그래서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 같은 데에 (시체) 처리를 다 못하니까 전부 태워버렸다는 거지."
-심진태, 히로시마 생존자, 당시 2살

히로시마 한국인 중 원폭 사망자는 약 3만 5천 명으로 추정돼. 당시 한국인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너무 끔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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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늦게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현관 입구에 누더기 같은 것을 두 팔에 안고 말없이 우뚝 서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누더기가 아니고 얼굴과 가슴의 피부가 불에 타서 벗겨져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몸 전체가 타버리고 팬티와 허리띠만이 남아있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행이구나' 하셨다. 그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동생을 데리고 조선에 나가야 한다'"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 증언 中

히로시마 폭격 한 달 뒤에 미국 정부가 현지에 들어가서 촬영한 영상이 있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의 결과가 어땠는지, 방사능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기 위해 촬영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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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수십 년 동안 꽁꽁 감춰져 있었어.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 폭로된 건 198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놀랍게도, '방사능 피해자는 없다'라는 거야. 하지만 파괴력은 어땠는지,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사망하는지, 은밀이 연구해 왔던 거야. 그 연구 책임자가 남긴 말이 있어.

"그들은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흔치 않은 사람들이다."
-로버트 홈즈, 미 원폭상해조사위원장

히로시마의 피해자들이 이렇게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작전을 준비했어. 일본이 아직 항복을 안 했고, '팻맨'이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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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히로시마 폭격 3일 후인 1945년 8월 9일. 군수도시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돼. 그제서야 일본 천황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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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 영, 중, 소 4개국에 대하여 공동선언(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나니…"
-히로히토 일본 제124대 천황

일본은 패망 순간까지 '항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어. 일본은 무릎을 꿇었지만, 식민지 국가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어떤 사과나 반성도 없었어. 그래도 일본의 패망 덕분에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그렇게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어.

▲ 귀향과 낙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생존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 해 조국으로 돌아왔어. 남편과 첫째 딸을 잃은 곡지의 어머님도 이때 귀국했는데, 어머니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고 감기를 달고 사셨대. 홀몸으로 곡지 자매를 먹여살리던 어머니는 귀국 10년 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어.

이곡지 씨도 젊은 시절 원인 모를 피부병에 시달리고, 허리에 종양이 생겨 제거하는 수술도 받았어. 하지만 본인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란 사실은 좀처럼 밝히지 않았대. 주변 사람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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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하기로는 저희 어머니한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저희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네가 손해 보고 말아라' '그냥 네가 참고 말아라'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던 거 같아요."
-김창곤, 김형률 둘째 형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살아 돌아온 분들은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았어. "저 사람 원자병에 걸렸대. 그거 전염되는 거 아냐?"라는 말과 손가락질이 따라왔어. 피해자란 걸 밝히면, 자식들 혼사나 취업에 문제가 생길까봐 함구하고 살아온 분들이 많아.

하지만 이곡지 씨는 아들 형률이가 자기 병에 대해 고민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달라져. '형률이도, 나도, 피해자구나. 우리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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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2년 3월. 34살이 된 형률 씨는 큰 결심을 했어. 기자들 앞에서 "난 33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왔다. 나처럼 선천적 질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우는 원폭 2세들이 있다"라고 밝혔어. 형률의 고백은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 2세 중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어.

형률 씨는 허약한 몸을 이끌고, 서울, 합천, 부산, 일본까지 다니며 자신과 같은 원폭 피해자 2세, 3세들을 찾아다녔어. 그리고 알게 됐어. 원폭 피해자들 중에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낳은 사례가 많다는 것을. 하지만 문제가 있어. 이게 입증이 쉽지 않아.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거든. 어떤 사람은 멀쩡하기도 해. 하지만 형률 씨와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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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지나면서 어느 겨울 때보다 가장 힘들게 보냈었거든요. 한번 감기에 걸리면 15일 정도 누워있어야 하고. 저와 같은 상황에 있는 원폭 2세 환우 분들한테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고…"
-김형률, 원폭 2세

"열정이라 열정…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 콜록거리면서 잠을 안 자고 한다니까. 자거라, 뭐 먹고 해라.. 매일 말해 뭐 합니까. '네 몸이 있어야 하는 거지' 얘기해도…"

-이곡지, 히로시마 생존자, 김형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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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몸이 안 좋으니까, 너무 과로하지 마라. 그렇게 내가 얘기하면 (형률이는) 픽 웃고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끝내야 해요' 그거밖에 집념이 없어요."
-김봉대, 김형률 아버지

몇 년 동안 열심히 활동한 결과, 형률 씨처럼 피해자라고 용기 내 손을 든 사람이 수십 명이 넘었어. 하지만 그러는 사이 형률 씨의 건강은 점점 악화됐어. 호흡은 더 힘들어지고 몸무게도 30kg 초반까지 내려갔어.

2005년 5월 일본 도쿄에 다녀온 형률 씨는 밤새 기침을 하다 호흡 곤란이 왔어. 그 무렵 형률 씨의 폐는 20% 정도밖에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대.

"(구급대원도) 집에서 나가면서 '안된다' 하더라고. 이미 벌써 죽음에 도착했다… 내가 어떻게든 살려보자 싶어서 응급실 가서 형률이를 눕히니까 의사들도 '도저히 안 되겠다' 하대요."
-김봉대, 김형률 아버지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결국 형률 씨는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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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둘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 아버지는 형률 씨가 떠났던 그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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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당시에 형률이 엄마도 어디를 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형률의 마지막을) 다 처리해야 했는데, 이것도 내 복이다…생각하고..."

-김봉대, 故 김형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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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곡지 씨는 치매로 말씀을 잘 못하셔. 아들 형률 씨를 이젠 잊으신 걸까. 만약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면, 아픈 기억들이 먼저 지워졌으면 좋겠어. 6살 어린 나이에 죽음의 고비를 넘었던 그날의 기억, 쌍둥이 두 아들을 먼저 앞세웠던 슬픔. 그런 것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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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본에서 발행된 피폭자 건강수첩이라는 건데, 피폭자들을 무료로 건강검진 해주고 치료비도 일부 지원해 준다는 일종의 의료보험증, 허가서 같은 거야. 일본 피해자들은 1957년부터 이 수첩을 받고 지원을 받아왔대. 한국인 피해자들도 이 수첩을 받긴 받아. 근데 2008년부터 가능했어. 이 작은 수첩을 하나 받기까지 60년이 걸린 거야.

그럼 2008년도에 받은 이 수첩, 한국 정부가 힘을 써서 받은 걸까? 아니. 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본 정부에 개인적으로 소송을 걸어 따낸 거야. 그마저도, 형률 씨 같은 2, 3세는 안되고, 피폭 1세대들만 받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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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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